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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339화 (1,306/2,000)

1322. 여대 잠입-22-

박회장의 서재는 응접실처럼 길죽한 소파가 좌우로 놓여 있었다. 박회장은 'ㄷ'자형으로 배치된 소파의 중앙에 앉아 있었고, 도훈이 들어가자 옆자리를 권했다.

"이쪽에 앉으시죠."

대머리 중년의 모습으로 분장한 도훈을 착석시킨 박회장은 꼼꼼한 시선으로 도훈의 위아래를 훑었다.

'음…. 저 얼굴이 겨우 40대라고? 세월의 풍파를 얼굴로 맞았나?'

말끔한 양복 차림의 박회장에 비해 도훈의 행색은 추레하기 짝이 없었다. 키는 제법 커 보였지만, 기골이 장대하다기보다 관리가 안 된 살찐 중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머리는 환하게 벗겨지고 배는 툭 튀어나왔는데, 50대가 훌쩍 넘은 박회장과 동년배로 보일 지경이었다.

"듣기로는 우리 지수 친구의 삼촌이라고…."

"네, 맞습니다."

"으음."

반면 도훈도 매의 눈길로 박회장을 스캔하고 있었다.

일전에 공항에서 먼발치에서 잠깐 마주치긴 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느낌이 또 달랐다.

'스크루지처럼 깍쟁이 영감탱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멀끔하잖아?'

도훈이 박회장에 대해 알고 있는 바는 국내 사채업계에서 알아주는 큰손이라는 정보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직접 대면 해보니, 젠틀한 사업가의 느낌이 났다.

'사람 겉모습만 보고는 모른다더니, 저렇게 멀쩡한 얼굴일줄이야.'

도훈은 지수의 미모가 돌아가신 어머니에게서 온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어쩌면 아버지의 유전이 더 많은 영향을 주었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와꾸를 보니 젊어서 여자 꽤나 울렸겠네.'

"말씀하신대로 이력서를 가져왔습니다만…."

도훈이 준비한 위조 서류를 내밀었다. 최번개가 구해준 다른 사람의 신상과, 조작된 이력이 담긴 문서였다. 박회장은 봉투를 열어 내용을 대충 훑어보더니 이름이 적힌 부분을 보고 말했다.

"전대협씨?"

"네, 전대협입니다."

"음. 제가 한참 위니 말은 편히 하겠습니다."

"그러시죠."

[근데 전대협이 뭡니까? 전국 대학생 협회, 뭐 그런 뜻인가요?]

'아니. 전국 대머리 협회겠지.'

[아, 아니.]

'몰라. 도용한 사람 이름이 하필 전대협인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중동 석유회사 오래 근무하셨다고?"

이력 또한 완벽한 다른 사람의 것이었기에 깔끔했다. 사실 상 도훈이 위조한 것은 신분이 아니라 그의 얼굴이었기 때문. 여권상 사진과 똑같이 얼굴을 바꿔놓았기 때문에, 서류상으론 결코 조작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또 여권에는 키나 몸무게 등의 체형정보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박회장이 신분조회를 한다고 해도 확인할 방법 역시 없었다.

"네, 통역으로 일했습니다."

"그럼 중동어 하나는 빠삭하시겠군."

"앗쌀람 알라이꿈!"

"하하, 그렇게 말해봐야 나는 뭔 뜻인지 모르니."

박회장이 겸연쩍어 하자 도훈도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털털하게 행동하는 도훈의 모습에 박회장이 안도했다.

'지수가 딱히 남자로 여길만한 걱정은 안해도 되겠군. 그냥 중동어를 할 줄 아는 동네 아저씨라면.'

하지만 박회장은 신중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계속 도훈에게 질문을 던졌다.

"학생들을 가르쳐 본 경험을 얼마나 되지?"

"네, 3년 전에 한국에 와서부터 입시학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입시학원?"

"제 2외국어로 선택하는 학생들이 간혹 있거든요."

"몇 명 되지도 않을 것 같은데?"

"네, 그래서 이렇게 개인과외도 하고 있습니다."

"흐음. 솔직히 말하면 난 우리 딸을 중동까지 유학 보낼 생각은 없소."

"네?"

"딸이 바람이 들어 배워보고 싶겠다고 해서 구색을 맞추는 거란 소리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소?"

"아…, 그, 그럼 과외는…."

도훈은 과외를 따내지 못하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돈 한 푼이 아쉬운 사람처럼 행색을 해야 박회장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외를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우리 딸의 헛바람을 빼주는 조건이라고 보면 되겠군. 과외비는 천만원."

"처, 천만원 씩이나요? 혹시 연봉으로…."

"연봉은 무슨? 쓸데없이 시간 낭비할 생각 없다니까."

"그, 그럼 어떻게…."

"이렇게 합시다. 한 달안에 우리 딸이 중동어를 포기하면 내 깔끔하게 천만원을 다 드리지."

"헉!"

"대신. 두 달째엔 오백이 깎이는 걸로."

"오, 오백."

"석 달이 넘어가면 그 절반인 이백 오십."

"아…."

"최대한 빨리 포기하게 만들수록 대협씨 벌이가 올라간다는 소리요."

"이, 이런 과외 조건은 처음이라…."

"물론 편법을 쓰라는 게 아니고, 확실하게 중동 유학이라는 꿈을 포기시키는 조건으로."

[와, 박회장은 정말 뼛속까지 장사꾼이군요.]

'그러게. 이게 말로만 듣던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인가?'

도훈은 새삼 박회장의 능력을 확인했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지 않는 것도 있지만, 상대를 압박하기 위한 방법 역시 굉장한 고단수였다.

"이쯤 말하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아, 네, 네!"

도훈은 의도적으로 체온을 끌어 올려 얼굴에 땀이 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정수리에 땀을 닦았다. 바짝 긴장한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경계 심을 낮추기 위한 행동이었다.

"방이 좀 덥나? 에어콘을 틀라고 할까?"

"아, 아닙니다. 좀 놀래서요."

"별것을 가지고 놀래는 군. 아무튼 얘기는 이쯤되면 끝난 것 같으니 오늘부터 바로 시작하지."

"넵."

도훈은 벌떡 일어나 허리를 90도로 접어 배꼽 인사를 올렸다. 옆으로 정리한 머리가 앞으로 쏠리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도훈이 물러난 뒤 박회장은 피식 웃었다.

"참나. 덩치는 산만한 사람이 담이 저렇게 작아서야."

박회장이 손가락을 튕기자 서재와 연결된 조그만 문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검은색 양복을 입은 여자였는데, 다소 차가워 보이는 얼굴에 비하면 굉장한 미인이었다.

"이 서류 한 번 검토해봐."

"알겠습니다."

여자가 군소리 없이 서류 봉투를 받아들여 챙겼다.

"이름이나 이력 같은 거 숨기는 게 없는지. 특히 성범죄 관련해서 전과가 없는지."

"그럴만한 위인으로는 안 보이던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확실한 게 좋거든."

"네."

비서는 서류를 챙겨들더니 다시 조그만 문으로 사라졌다.

혼자 서재에 남은 박회장은 헛웃음이 나는지 혼자 피식 웃었다.

"중동어라고? 참나…."

* * *

"어떻게 됐어요?"

"일단 허락은 받았어."

다시 제 목소리로 돌아온 도훈은 지수의 방에 들어온 상태였다.

"꺄아! 다행이다. 걸릴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요."

지수가 몹시 기뻐했다.

"이렇게 분장을 빡세게 했는데 어떻게 알아보겠어?"

"근데 진짜 어떻게 한 거예요? 정말 다른 사람 같아요."

도훈이 배에서 솜뭉치를 꺼내며 말했다.

"뱃살은 이걸로 대신 채웠고, 얼굴은 특수 분장을 한 상태니까 만지면 안 돼."

"머리는요?"

도훈이 머리에 쓰고 있던 가발을 훌러덩 벗어 던졌다.

"당연히 가발이지."

"정말 감쪽같았어요."

[당연하죠. 무려 천상계 변장 아이템이니까.]

도훈의 대머리 가발은 지구상의 물건이 아니었다. 실제로 정수리에 땀을 흘리면 가발 밖으로 송골송골 맺힐 정도였으니, 엄청난 기술력이 가미된 첨단의 소재였다.

"휴,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그럼 오빠, 이제 우리 맨날 볼 수 있는 거예요?"

지수가 도훈을 뒤에서 껴안았다.

사심이 가득 담긴 백허그에 도훈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떼어냈다.

"워-. 첫날부터 이러면 위험하다고. 일부러 문까지 열어 놨는데."

지수의 방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한 방편이었지만, 그 때문에 두 사람의 행동도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힝, 이러면 힘들게 위장 과외하는 의미도 없잖아요."

"우선은 조심하자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경계심이 떨어질 테니."

"알았어요. 난 오빠랑 같이 있는 것만도 좋아요."

지수가 도훈에게 찰싹 달라붙으며 애교를 부렸다.

'서재 뒤에 누군가 있는 것 같던데.'

[뒤에요?]

'어. 입구 말고 뒤로 조그만 문이 하나 연결되어 있었잖아.

'[박회장의 침실인 줄 알았는데요.]

'침실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기척을 느꼈거든. 근데 기운이 좀 독특하더라고.'

[어떤 의미에서 말이죠?]

'가령 김씨만 해도 상당한 기도가 느껴졌거든. 오랫동안 수련 한 사람들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밖으로 기운이 넘치기 마련이니까.'

[그런데요?]

'서재 안쪽 방에 있는 사람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더라고.

그냥 민간이 같았달까? 게다가 여자였고.'

[여자라면…. 혹시 박회장의 비밀 애인같은 거 아닐까요?]

'글쎄. 그런 느낌보다는 경호원이 더 근접할 것 같은데.' 도훈은 박회장의 신변을 지키고 있다는 보디가드들을 떠올렸다.

'맞다. 저번에 박회장에게 보디가드 넷이 있다고 했잖아.'

[복싱 챔피언 출신이라던 최철우 선수요?]

'그 사람은 당연히 아니고. 마찬가지로 2미터가 넘는다는 거구도 아닐 테고. 칼잡이 니혼진도 역시 아니고.'

[그렇다면 미군 사격술 교관 출신이라던 여군이군요.]

'맞네. 총기를 잘 다루는 사람이면 피지컬은 중요한게 아니니까.'

[최번개의 리포트에 따르면 24시간 근접 경호를 한다고 하던데, 아마도 돌아가면서 붙어있는 것 같군요.]

도훈이 박회장의 저택까지 들어온 이유기도 했다.

'쉽게 말해 경호원이 없는 경우가 없다는 뜻이군. 그 여군이 낮 경호를 하는 것 같고.'

[조심성이 많은 자로군요. 주인님 뒷조사도 시작했을 것 같은데요?]

'상관없어. 어차피 실존 인물의 이력을 그대로 써먹었으니까. 아무리 조사해 봐야, 내가 전대협의 도플갱어라는 건 알아채지 못할 거야.'

* * *

30분 뒤 유리는 박회장에게 전대협에 대한 뒷조사 보고를 올렸다.

"클리어합니다. 별도의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그렇군. 근데 자네는 아직도 군인 같은 말투를 쓰는 구만."

"10년을 직업 군인으로 살았으니까요."

유리는 여전히 딱딱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녀가 입은 정장은 옆구리 쪽이 살짝 튀어나와 있었는데, 맬빵처럼 보이는 홀스터에 장착한 권총 때문이었다.

"전역한 지 2년이 넘었는데 말투가 바뀔때 되지 않았어?"

"한번 군인은 영원한 군인입니다, 회장님."

"거참."

다소 차가운 게 흠이긴 했지만, 박회장은 유리가 마음에 들었다. 유리는 그의 경호원 중에서 유일한 엘리트 출신. 미육군 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를 나와 대위로 전역하기까지 뛰어난 권총 사격 실력을 바탕으로 사격술 교관을 역임했다.

자신을 성추행하려던 상관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고 전 역한 뒤, 오갈 데 없는 그녀를 거둔 것이 박회장으로선 크나 큰 행운이었다.

'…쩝, 얼굴은 참 반반한데 말이야.'

물론 박회장은 유리를 여자로 여긴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전역 후에도 유리는 늘 군인같은 말투를 썼고, 단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암투병 중인 어머니의 입원비가 아니었다면, 이런 어두운 일에는 발도 들이지 않을 사람이었다.

"어머님은 좀 차도가 있나?"

"늘 비슷합니다."

"너무 걱정 말라고. 요샌 의학기술이 발달해서 암도 완치 될 수 있다고 하니까."

어머니 얘기가 나오자 무표정하던 유리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어려서 미국으로 건너가 갖은 고생을 하며 그녀를 훌륭한 육군 장교로 임관시킨 어머니를 생각하자 눈시울이 붉어졌기 때문이었다.

"…말씀, 감사합니다."

"저녁에 회사일로 상의할 게 있으니, 최변호사랑 약속 잡아주게."

"네. 늘 보던 그곳으로 오라고 할까요?"

"그래야지. 집에선 회사 업무를 보지 않는 주의니까. 최변이랑 스케줄만 잡고 퇴근해. 저녁부터 철우가 수행할 거야."

"알겠습니다."

박회장의 보디가드들은 대외적으론 단 한명이었다.

바로 심야 시간 그의 주변을 지키는 떡대의 거구.

그 외에 다른 경호원들은 각기 다른 업무를 겸하고 있었는 데, 유리는 주로 비서일을 수행했고 철우는 밖으로 나갈 때 운전기사를 맡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일본인 보디가드인 고스케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움직이는 해결사 임무를 수행했다.

세명이서 24시간 교대하기 때문에 사실상 박회장의 주변에는 늘 한 명 이상의 경호원이 상주하고 있었는데, 이는 박회장의 조심스러우면서도 꼼꼼한 성격 때문이었다.

거액의 연봉을 지급하면서까지 다수의 보디가드를 동원해 신변을 지키는 것은, 과거 반대편 조직에서 보낸 칼잡이에게 죽을 뻔한 일을 겪고 나서였다.

죽음의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박회장은, 그 뒤로 재산도 좋지만 죽고 나면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경호에 아낌없는 돈을 투자했다.

심지어 딸인 지수에게 붙어있는 운전기사 김씨만 해도, 다른 조직에 가면 훨씬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사람 일은 절대 모르는 거니까. 어떤 놈이든 나를 노리면, 골로 갈 각오를 해야 할 거라고.'

박회장은 외출을 위해 옷을 챙겼고, 업무를 마친 유리는 잠시 물을 먹기 위해 주방에 들렀다 화장실을 다녀오던 도훈과 마주쳤다.

"엇, 안녕하십니까."

대머리 중년으로 변한 도훈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유리는 다짜고짜 인사부터 박는 도훈이 불편한지 사양하면 말했다.

"편하게 하세요. 저도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에요."

"아…. 제가 오늘 여기 처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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