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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338화 (1,305/2,000)

1321. 여대 잠입-21-

평소 표정 변화를 거의 보이지 않던 김씨도 이때만큼은 찐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난데없이 무슨 중동이람? 80년대 사우디 노동자도 아니고….'

"거, 거기는 무척 더운 나라 아닙니까? 생활하기 불편하실 텐데요."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남들 다하는 언어를 배우는 게 무슨 소용 있겠어요? 영어를 배운대도 어려서부터 유학 간 애들 따라가지도 못 할 테고, 중국어는 조선족들이 있으니 쓸모없고. 일본어는 한물 갔고…."

"아니면 프랑스어는 어떠신가요? 아니면 스페인어라든지."

김씨는 중동은 도저히 함께 갈 자신이 없었기에 그나마 비영어권 국가 중 선진국인 프랑스나 스페인으로 유도했다. 하지만 지수는 막무가내였다.

"아니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아랍권이 가장 좋은 거 같아요. 배우기 힘드니까, 국내에 할 줄 아는 사람도 얼마 없잖아요. 배우놓기만 하면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지수의 고집에 김씨는 불현 듯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누가 아가씨에게 바람을 넣은 것인가?'

지수는 어려서부터 주변에 쉽게 휘둘리는 타입이었다.

하얀 도화지처럼 자기 색이 없는 사람으로, 빨간색으로 물들이면 빨간색이 되고 파란 물감을 칠하면 파란색으로 순식간에 변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대학에 와서 갑작스레 극성 페미가 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귀가 얇은 편이라 옆에서 조금만 부추겨도 누구보다 빠져들었다.

'옆에 있던 누군가가 외국어 이야기로 바람을 넣은 게 분명해. 그게 아니면 아가씨가 느닷없이 중동어를 공부하겠다고 하겠어?'

"일단 아버님께 상의를 드려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안 그래도 오늘 말하려고요."

지수가 다시금 의지를 표명하자 김씨는 속으로 생각했다.

'딸을 금쪽같이 아끼는 박회장이 다른 나라도 아니고 중동으로의 유학을 허락할 리 없을텐데.'

"혹시라도 반대하시면… 어쩌시려고요?"

"저도 무작정 가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일단 한국에서 기초부터 배워보고 가능성이 있다 싶으면 도전하려고요."

다소 현실적으로 바뀐 지수의 말에 김씨가 크게 안도했다.

'다행이군. 안된 말이지만, 지수 아가씨는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은 아니니까.'

10년 가까이 근거리에서 지수를 관찰한 김씨는 확신했다.

지수가 눈에 띄는 출중한 미모와, 내면에 고운 심성을 갖춘 반면 공부 머리는 조금도 타고 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재수 당시 가정교사로 붙여준 선생들은 대부분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1타 강사급이었다. 수능 10등급도 1년이면 1등급으로 만들어준다는 전설적인 컨설턴트까지 붙였는데도, 지수는 재수도 아니고 삼수 끝에 끝내 배화여대 철학과에 턱걸이했을 정도.

'지금에야 헛바람 들어서 아랍어 공부를 하겠다고 고집피우지만, 결국 한 두달도 못 가 포기해 버리고 말거야. 남들이다 안 배우는 언어라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니까.'

김씨는 중동으로 함께 따라갈 일이 없을 거라고 안도했다.

그날 밤, 박회장과 저녁 식사를 하던 지수는 아버지에게 유학 이야기를 꺼냈다. 놀란 박회장은 확답을 회피한 채 김씨를 따로 불러 물었다.

"우리 딸아이가 느닷없이 아랍어를 배우고 싶다는 데 무슨 일인지 혹시 아는 바가 있나?"

"저도 오늘 들었습니다. 하교하는 길에 갑자기 차에서 말씀하시더라고요."

"흐음…. 나이 먹고 갑자기 유학 간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것도 하필 중동이라니. 거참."

박회장은 아랫사람을 다룰 땐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었으나, 유일한 혈육인 지수에게는 꼼짝도 못하는 전형적인 딸바보 아빠였다. 지수의 고집을 쉽게 꺾을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박회장도 몹시 난처한 상황이었다.

"저, 회장님. 제 추측이지만…."

김씨는 지수의 주변에서 누군가 바람을 넣은 것 같다고 전했다. 지수가 주변에 쉽게 휘둘리는 타입이라는 알고 있는 박회장 이에 동의했다.

"내 생각에도 그렇네. 힘들게 대학교 붙어서 페미니즘이니 뭐니 한다고 했을 때 가만 내버려 뒀더니 금세 이름부터 바꾸는 걸 보고 어찌나 황당했던지…."

박회장도 말은 안 했지만, 하나밖에 없는 딸이 꼴페미가 되는 모습이 굉장히 못마땅했다. 말투부터 행동,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까지 갑작스레 달라지는 바람에 한동안 마음고생을 했던 것. 그러나 억지로 뜯어말렸다가 괜히 일만 반감만 살까 봐 방관하던 상황이었다.

"회장님,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릅니다."

"잘된 일이라고? 딸애가 중동으로 유학가고 싶다는 데 그게 어찌 잘된 일이야?"

"제 말은, 아가씨께서 이쪽에 관심을 두면서 학과에 속해 있는 이상한 단체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줄어들 거라는 뜻입니다."

페미 전사가 된 딸을 걱정하던 박회장이었기에 그 말을 동조했다.

"하지만 이것도 또 다른 문제가 아닌가? 윗돌 괴어 아랫돌에 채워 넣는 것도 아니고."

"음, 제 생각인데 아가씨께서는 끝내 중동 유학을 중도 포기하지 않을까요?"

"무슨 소린가?"

김씨는 자신의 생각을 박회장에게 밝혔다.

처음엔 열정적으로 달려들겠지만, 결국엔 지수도 스스로의 한계를 깨닫고 포기할 거란 내용이었다.

박회장은 김씨의 행간에 담긴, 지수의 아둔함에 대한 지적을 눈치챘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애지중지하는 자기 딸래미지만, 머리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충 한 두 달 정도만 과외를 붙여줘 보시죠. 배우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면 아가씨도 다시 생각을 바꾸시지 않을까요?"

"음, 자네 말도 일리가 있겠군."

박회장은 용무를 마쳤는지 김씨에게 물러나라고 손짓했다.

"알겠네. 이만 나가보게."

"네, 알겠습니다."

김씨를 물린 박회장은 거실로 나가 TV를 보고 있던 지수에게 다가갔다. 지수는 확답을 피한 아버지에게 잔뜩 화난 모습이었다. 박회장이 소파 옆에 앉는데도 몸을 휙 돌리며 삐친 시늉을 했다.

"흥!"

"지수야."

"뭐요? 유학 안 보내주시겠다면서요?"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됐어요. 그냥 한국에서 평생 썩을게요. 그게 아빠가 원하는 일이잖아요."

지수는 어린애처럼 고집을 피우며 박회장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어려서부터 그녀를 과잉보호를 해오던 박회장이었지만, 지수가 고집을 피울 땐 도저히 어찌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찌 보면 버릇없이 키운 박회장의 잘못이지만, 그걸 알면서도 박회장은 지수에게 꼼짝을 못했다.

'어쩔 수 없지. 그냥 져주는 척 해야지.'

"아니다. 나도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네 말도 일리가 있더구나. 그래서 하는 말인데 무작정 유학을 가는 것보다 언어부터 배워보는 건 어떻겠니?"

"정말요?"

지수가 반색하며 반기자 박회장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유학도 준비가 필요한 법이니까. 그런데 어디서 과외 선생을 구할지…."

"저, 아는 사람 있어요."

"있다고?"

"실은 제가 친구한테 들은 거거든요."

지수는 미리 짜놓은 각본대로 도훈의 이력을 소개했다.

"친구 삼촌인데, 오래전부터 중동에서 석유관련 수입사에서 일하셨던 분이래요."

"삼촌?"

박회장은 삼촌이라는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지수가 이를 눈치채고 덧붙였다.

"40대 넘는 아저씨래요."

"아아…."

'그래도 남자 과외 선생을 붙여주는 건….' 박회장은 다 큰 딸이 남자 선생과 단둘이 공부를 하는 상황을 극도로 경계했다.

"왜요? 그럼 아빠가 직접 구해주실래요?"

"으음, 쉽게 찾긴 힘들 것 같긴 한데…."

"그러니까요."

"일단 한 번 만나 봐야겠구나. 이번 주 중 시간을 내보도록 하자."

"직접 보신다고요?"

지수는 아버지가 직접 도훈과 대면한다는 말에 약간은 당황했다. 이제껏 가정교사를 여럿 들였지만, 직접 면접을 보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작해야 가끔 집에서 오다가다 마주친 정도였다.

"왜? 우리 딸 가르치는 선생님인데 내가 한번은 직접 봐야지."

"그, 그래요. 친구한테 물어볼게요."

지수는 방으로 가서 도훈에게 상황을 전했다.

대충 허락을 받긴 했는데, 아버지가 직접 보고 결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지수 : 이제 어떻게 하죠? 목소리 들으면 바로 티 날 텐데.

-도훈 : 아냐. 수고했어. 이제부턴 내가 직접 해결해 볼게.

-지수 : 정말 우리 아빠랑 만나시겠다고요? 참고로 우리 아빠 허술한 사람 아니에요. 조금만 수상하면 바로 오빠 뒷조사를 하려고 할지도 몰라요.

-도훈 : 뒷조사라니?

-지수 : 암튼 그런게 있어요. 괜히 하겠다고 했을까요? 너무 불안한데….

-도훈 :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야. 이제부턴 나한테 맡겨.

지수가 불안해하는 것과 달리 도훈은 여유 만만이었다.

* * *

[40대 전직 오일 딜러라고요?]

'그렇다는데?'

[허참, 외모야 특수 분장인가 뭔가로 속일 수 있다지만 말투나 행동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박회장이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닐텐데요.]

'음성이야 변조하면 되고, 말투는 더 걱정할 게 없지. 내가 원래 40대라는 거 잊었어?'

[처음엔 아재티가 많이 났는데 지금은 영락없는 20대 양아친데요.]

'뭐야?'

[농담입니다. 암튼, 긴장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박회장을 직접 대면해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지.'

[외양은 그럴싸하게 꾸며낸다 쳐도, 정말로 박회장이 뒷조사라도 하면 어쩌실 생각입니까? 신원조회 하면 이력이 다 드러날 텐데요.]

'그건 걱정마. 가짜 여권도 만드는 세상에, 가짜 이력서 하나 못 만들라고. 그런 일에 또 전문가가 있으니까.' 도훈은 말이 나온 김에 곧바로 최번개에게 전화해 상황을 전달했다. 해당하는 조건에 만족하는 사람으로 사칭할 가짜이력서를 조작해 달라는 요구였다.

-행님, 도용이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닌데 사진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요샌 센타까면 얼굴까지 다 나오는데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일단 찾아만 줘. 40대, 중동 오일 딜러 출신, 현재는 서울에 거주하는."

-알겠습니다. 바로 견적 따보겠습니다.

최번개가 사칭할 인물의 프로필을 구해오는 데 3일이란 시일이 소요되었다. 그간 도훈은 밀린 학교 공부를 열심히 따라가며, 지수와는 깨톡 문자로만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행님. 말씀하신 서류 퀵으로 붙였습니다.

"수고했다. 기사한테 수고비 보낼게."

-괜찮습니다 행님. 행님 도와드리는데 무슨 수고비까지.

"그럼 안 보낼게."

-아, 아니 행님.

"줄 때 받어 새꺄. 난 공짜로 사람 안쓰니까."

-염치불구하고 번번히 감사합니다 행님.

도훈은 퀵으로 도착한 인물의 프로필을 유심히 살폈다.

원했던 조건에 딱 들어맞는 인물이었으나, 여권과 주민등 록증에 찍힌 사진이 너무나 도훈과 동떨어진 외양이었다.

"씨발, 대머리잖아?"

[왜 욕을 하고 그러십니까?]

'아니, 이건 해도 너무 한데. 정말 40대 맞어? 50대라고 해도 믿겠네.'

[필터링 조건에 맞는 인물이 몇 없었나 보죠. 이제와 보니 좀 아닌 것 같으십니까?]

'아… 역용술을 쓰면 얼굴은 비슷하게야 만들 수 있는데…

. 그럼 매번 대머리 상태로 지수를 과외시켜야 한다는 소리잖아?'

[으음, 그건 좀 심하군요.]

'내가 얼굴 개 빻은 호빠 선수로도 분장을 해봤지만 대머리는 또 처음이네.'

[하지만 박회장을 속이기엔 최적의 페이스가 아닐까요?]

'뭐?'

[박회장이 남자 과외선생을 안 쓰는 게, 혹시 모를 불안감때문이라면서요.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을 혹시나 꼬시지 않을까 하는.]

'그렇지.'

[하지만 외양이 50대로 보이는 대머리 중년이라면 오히려 안심하지 않겠냐는 말입니다. 스무살 대학생이 연정을 품기엔 불가능한 인물이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 어쨌든 처음 속일 때만 분장 빡세게 하고 다음부터는 대머리 가발만 써도 될 테니.'

다음날 과외 면접 약속을 잡은 도훈은 방과 후 바로 지수의 집으로 향했다. 역용술과 축골공 등으로 분장을 마친 도훈의 얼굴은 영락없는 중년의 배 나온 아저씨 모습이었다.

게다가 목소리까지 변조했기 때문에 누구도 도훈의 본래 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는 마중나온 지수였기 마찬가지 였기 때문에, 그녀는 도훈의 충격적인 비주얼에 정말로 다른 사람이 온 줄 알았다.

"누, 누구세요?"

"나야. 도훈이."

"마, 말도 안 돼…."

"특수 분장이야. 안심해."

"목소리는 또 왜 그래요?"

"성대모사 그럴싸하지?"

"와…. 정말 다른 사람 같은데요."

지수가 계속 의심하자 도훈은 몰래 눈치를 보다 그녀의 손목을 쥐고 대물을 더듬게 했다.

"이래도 난 줄 모르겠어?"

"아, 앗!"

묵직한 물건은 틀림없는 도훈의 그것이었다.

지수는 굳이 민망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확인시키는 도훈의 행동에 얼굴을 빨게졌다. 외양이야 어쨌든 분장만 바꾸면 결국 도훈이란 건 변함이 없었다.

"암튼 곧 아버지가 부르실 거예요, 잘 할 수 있겠어요?"

"맡겨둬."

잠시 후 거실에서 지수와 앉아있던 도훈을 박회장이 불렀다.

"회장님께서 서재로 들어오시랍니다."

"네, 네."

도훈은 간만에 긴장하며 박회장 서재의 문을 노크했다.

똑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문 열려 있습니다."

40대 중년으로 변한 도훈이 이력서가 담긴 서류 봉투를 들고 박회장의 서재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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