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4. 여대 잠입-14-
* * *
"진짜 한남들은 대체 왜 그런다니?"
돼지가 씩씩거렸다. 사람보고 돼지라고 하면 못된 말이지만, 그보다 적절한 표현은 찾을 수가 없었다. 쿰척거리며 숨을 쉴 때마다 불쾌한 입 냄새가 새어 나왔다. 아직 더위가 남은 9월이라 겨드랑이에서 흐른 땀이 티셔츠를 적시고 있었다. 얼굴 피부 곳곳에는 화농성 여드름 자국이 가득했다. 그 와중에 눈은 가로로 길게 찢어져 굉장히 사납고 앙칼진 인상을 들게 했다.
"왜왜? 무슨 일 있어?"
"아니, 엊그제 SNS 댓글로 한남충 새끼가 시비를 거는 거야."
"뭐라고?"
"여자들도 이제 군대 가야 한다면서."
"미쳤네."
"개소리 오지더라니까? 솔까말 요새 군대가 군대니? 진따사나이 보니까 캠프 간 것처럼 아주 놀고들 있더만."
"맞아맞아. 여자들은 출산까지 하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군대가서 사람 죽이는 기술이나 배워 오면서, 사람을 낳는 여자들을 떠받들지는 못 할망정. 안 그래 지수야?"
"으응."
지수는 오늘따라 친구들과의 대화가 짜증이 났다. 허구헌날 남을 흉보고 있으니, 부정적인 기운에 정신이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쟤들은 하루 종일 남자 흉만 보고 있지? 그리고··
·. 솔직히 정민이 쟤는 출산이랑은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
정민은 돼지의 이름이었다.
여자가 봐도 아니다 싶을 정도로 흉측한 외모를 가진데다, 걸핏하면 길거리에서 남자들과 시비가 붙을 정도로 사나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지수는 자기가 남자라도 정민이 같은 여자를 좋아하진 않을 것 같았다. 당연히 결혼도 힘들 것이고, 애를 낳는 건 무리였다.
"뭐야? 대답이 왜 그래? 기분 안 좋은 일있어?"
"···아니야.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래."
"정말?"
돼지가 눈 앞의 족발을 보고 군침을 흘렸다.
점심때 굳이 족발을 먹자고 해서 겨우겨우 식당을 찾아 왔는데, 대낮부터 족발 다리를 뜯고 있는 친구를 보고 있자니, 정말로 속이 느글거리는 지수였다.
"그럼 나 이거 다 먹어도 돼?"
"응. 내 것까지 먹어."
"아싸!"
돼지가 다시 전투적으로 달려들었다.
맨손으로 뼈에 붙은 살을 발라내는 모습이 흉물스러울 정도였다.
'어휴, 쪽팔려. 놀 친구가 없어서 같이 다니긴 했는데, 이 럴 바엔 차라리 혼자 다니는 게 속 편하겠어.'
지수는 잠시 화장실을 간다며 자리를 일어섰다.
나머지 친구들은 지수가 가는데도 아랑곳 않고 열심히 족발을 뜯었다.
화장실에 도착한 지수는 칸막이를 닫고 걸터앉았다.
'진짜 귀에서 피나는 줄 알았네. 하루 종일 남자들만 씹어 대니.'
어제까지만해도 별다른 문제 의식없이 남혐에 동참한 지수였지만, 도훈을 만나고 나서부턴 친구들의 행동이 이상해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 모든 남자가 다 나쁜 사람은 아닐 거 아니야? 왜 일부의 사례를 가지고 죄다 나쁜 사람으로 모는 건데?'
혼자서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친구들의 말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군대 문제만 해도 그래. 군대랑 출산이랑 어떻게 같아?
군대는 강제로 징병돼서 가는 거고, 출산은 선택이잖아.'
친구들의 주장은 하나같이 엉터리였다. 아니, 자신이 속한 철학과 동아리의 선배들이 해준 얘기도 조금만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극단적인 사상 뿐이었다.
'뭐랬더라? 아버지가 주시는 용돈은 받지만, 그 모순까지 견디는 게 페미니즘이라고? 진짜 어이가 없으려니까.'
남자를 잘 모를 때 지수는, 모든 남자는 머리에 뿔이 난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잘생기고 훈훈한 도훈을 만나고 나서는 남자들도 얼마든지 매력적인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
남자가 예쁜 여자를 보고 좋아하는 것처럼, 여자도 잘생긴 남자를 보면 끌리는 건 아주 당연한 이치였다. 지수는 도훈을 만난 후 남자에 대한 선입견이 해소되었고, 그 결과 평소친구들의 불만에서 모순을 찾아낸 것이었다.
'그래. 이제 알겠어. 정민이는 그냥 남자들한테 사랑을 받지 못해서 그게 화가 난 것뿐이잖아. 근데 솔직히 여자인 내가 봐도 정떨어지는데, 남자들이 좋아할 리가 있겠냐고. 먹는 것만 좋아하고, 살은 뺄 생각도 안하고. 살을 안 빼니까 땀도 많이나서 맨날 땀냄새나 풍기고···. 그 와중에 조금만 기분 나빠도 남자들한테 욕설이나 내뱉고. 으으.'
생각하면 할수록 지수의 생각은 또렷해졌다.
'근데 내가 왜 저런 애들하고 어울려야하지?'
지수는 점점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명문대에 입학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삼수끝에 지원한 배화여대. 하지만 그마저도 문과 계열에서 가장 점수가 낮은 '철학과'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여성주의 운동을 공부하게 되고, 그런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오만과 편견에 찌들다 보니 눈과 귀가 멀고 말았다.
지수는 점점 자신이 친구들과는 다르다는 점을 자각했다.
'그래. 나는 다르잖아. 내가 뭐가 부족해서 남혐이나 하는 애들하고 어울려야 해? 박김지수가 대체 뭔데? 스무살 넘을 때까지 나는 박지수였는데.'
지수는 부모성 함께쓰기에 동참한 과거의 자신까지 혐오스러웠다.
'내가 정말 정신이 나갔었나봐. 태어나서 엄마를 본 적도 없는데 무슨 박김지수람? 날 기른 사람은 아버지잖아.'
지수는 뭔가 결심을 굳힌 듯 화장실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리로 돌아가니 친구들은 지수가 돌아온 줄도 모르고 여전히 전투적으로 족발을 뜯고 있었다.
잔뜩 기름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빨고 있는 정민을 보자, 지수는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런 지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민이 물었다.
"지수야. 우리 매운 족발 소짜 하나만 더 시켜도 돼?"
"······."
"역시 소는 좀 그렇지? 우리 지수 클라스가 있는데. 대짜로 하나 시킬게."
늘 그렇듯 친구는 돈 많은 지수가 음식을 추가로 사줄거라고 생각했다. 지수는 말없이 지갑을 열더니 5만원짜리 두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걸로 원하는 대로 실컷 먹어."
"역시 지수야!"
"지수는 정말 플렉스 하다니까?"
지수의 표정과 말투가 싸늘하게 변했지만, 친구들은 여전히 그녀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이게 이제까지 같이 어울려준 보답으로 주는 마지막 식사니까.'
"난 먼저 가볼게."
"벌써 가게?"
"기다렸다 같이 가지."
"아냐. 너희들 많이 먹어."
"응, 지수야."
"점심 고마워 오늘도!"
돌아선 지수는 확실히 깨달았다.
자신이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받아줄 사람이 필요했다면, 친구들 또한 돈을 원 없이 쓰는 물주가 필요했을 뿐이라고.
'···너희들하곤 영영 끝이야 이제.'
지수는 친구들을 남겨놓고 길거리로 나왔다. 작별 인사조차 아까울 만큼 가치 없는 친구들이었다. 지수는 아예 전과할 생각까지 했다.
'철학과도 그만둬야겠어. 어차피 점수 맞춰 간 전공에 무슨 미련이 있을라고.'
하루 아침에 깨달음을 얻은 지수는 대학로 근처를 걸으며 남자들의 시선을 느꼈다. 이제까지는 음습한 한남들이 더러운 성욕을 발산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을 바꾸고 보니 남자들이 부끄러워하면서도 힐끔힐끔 자신을 쳐다보는 게 아닌가?
그것은 더러운 성욕이라기보단 일종의 흠모와 관심에 가까웠고, 이를 깨닫자 지수는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이 얼마나 인기가 많은 사람인지 비로소 실감하게 된 것이었다.
"저···."
그때 남자 한 명이 지수에게 다가왔다. 키도 훤칠하고 나름 스타일도 좋아보이는 훈남이었다.
"네?"
"제 스타일이라 그러는데, 혹시 괜찮으시면 번호 좀 주실 수 있을까요?"
지수는 당황해 말을 잇지 못했다.
'설마 나 헌팅 당하는 거야?'
오늘 도훈을 만난다는 생각에 깜찍한 여대생 컨셉으로 나오긴 했지만, 갑작스러운 대시에 지수도 당황하고 말았다.
"저 아무한테나 번호 따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정말로 첫 눈에 반해서요."
"···죄, 죄송해요. 저 남자친구가 있는데."
"아! 그러시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남자는 머쓱해하며 꾸벅 인사를 하더니 물러섰다.
지수는 갑자기 자신감이 샘솟고 어깨가 으쓱해졌다.
'세상에! 진짜로 헌팅이었잖아?'
공교롭게도 늘 친구들과 함께 다니던 길을 혼자 걷자마자 헌팅을 받게 된 지수는 이제껏 친구들이 자신의 매력을 반감시키는 존재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게다가 맨날 한남이니 흉자니 흉보던 남자의 대시가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날 듯이 기뻤다.
'뭐야? 기분 좋잖아? 히히!'
혼자 학교로 돌아간 지수는 간만에 받은 헌팅에 너무나 행복했다. 모르는 남자에게 호감을 받아도 이 정도인데, 자신이 마음에 드는 남자가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래, 이런 기분이었어! 이게 진짜 여자라고!'
지수는 어서 빨리 수업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도훈을 만나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심장이 터져버릴 것처럼 두근 거렸다.
* * *
"슬슬 움직여야겠지?"
오전에 천상 크래프트 수련을 끝마치고 늘어지게 휴식을 취한 도훈은 오후가 되서야 움직였다.
샤워를 하고 거울 앞에 선 도훈은 평소와 달리 외모에 공을 들였다.
[오늘은 부제로 변장 안 하십니까?]
'지수가 나를 신부라고 여기면 오히려 마음에 벽이 생길 거야. 오늘은 평상복 차림으로 가야겠어.'
[하지만 지수양은 이미 주인님이 신학도라는 걸 알고 있는 데도요?]
'어쨌든 정식 서품을 받은 신부는 아니잖아. 신학도 중에서 상당수가 신부 서품을 못 받고 중도에 포기하는 줄 알아?'
[그런가요?]
'그만큼 사제의 길이 혹독한 거거든. 신에 대한 사랑보다, 속세의 여인을 사랑하게 된 신학도의 탈선. 로맨틱 하지 않아?'
[역시 주인님은 거기까지 생각하셨군요.]
'일단 지수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으니, 얼굴로 조져 버려야지.'
[그 다음에는요?]
'입으로 조지고.'
[그 다음에는요?]
'알면서 왜 물어?' 도훈은 피식 웃더니 간만에 외모에 공을 들였다.
환골탈태 이후 아기 피부로 다시 태어난 그는, 잡티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한 완벽한 피부미남으로 거듭나 있었다.
"음, 얼굴은 이만하면 됐고. 의상은 뭘로 한다."
도훈은 옷장을 뒤지다 생각보다 자신의 옷이 몇 벌 없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옷걸이가 워낙 좋으니 옷은 겉치레에 불과했다. 단순히 청바지에 티만 걸쳤을 뿐인데도, 모델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역시 패션의 완성은 몸매랄까?"
[얼굴이 아니고요?]
'얼굴은 기본이고. 옷걸이가 받쳐줘야지.'
단장을 마친 그는 차를 타고 배화여대로 향했다. 대학은 여러 목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딱히 도훈을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수가 수업 받는 건물 근처에 차를 댄 도훈은 핸드폰을 들고 지수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나저나 주인님 이번 미션의 목적을 망각하신 건 아니죠?]
'망각이라니?'
[박회장에 대한 복수를 위해 지수양을 공략하는 거잖습니까?]
'당연히 잊지 않고 있지.'
[흐음, 근데 주인님을 보면 박회장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지수 양을 공략하는 것 자체에 집중하시는 것 같아서요.]
'꼭 그렇진 않아.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키운 딸을 나같은 바람둥이가 홀라당 따먹으면 박회장이 얼마나 열받겠어.
특히 사채를 핑계로 멀쩡한 아가씨 인생 망가뜨린 놈이, 자기 딸이 불한당 같은 놈에게 처녀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알면 미쳐 날뛰겠지. 즉, 지수를 공략하는 자체가 박회장에 대한 가장 악랄한 복수란 말씀이야.'
[그렇군요.]
'일단 지수부터 완벽하게 공략하는 게 중요해. 그러고 나면 박회장은 알아서 끌려나오게 될 테니까.' 그때 기다리던 도훈에게 메시지가 왔다.
-지수 : 신부님, 저 수업 끝났어요.
-도훈 : 저 아직 신부 아닙니다.
-지수 : 아···.
-도훈 : 마침 저도 말씀하신 건물에 도착해 있어요.
-지수 : 네, 금방 나갈게요.
도훈은 차에서 내릴까 하다 캠퍼스에 바글거리는 여대생들의 시선을 우려해 차에서 기다렸다. 건물 입구를 주시하니, 곧 지수가 정문을 나와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지수 : 어디세요? 저 나왔는데.
-도훈 : 차에 있습니다.
-지수 : 차요?
빵빵-
도훈이 가볍게 경적을 울렸다.
도훈의 차를 발견한 지수가 총총걸음으로 뛰어왔다. 진한 선팅에 내부가 보이지 않던 지수가 고개를 내밀어 운전석을 확인 했다.
"이 차가 맞나?"
그때 창문이 열리며 도훈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자매님."
"엇! 시, 신부님 복장이!"
지수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도 말끔한 차림의 대학생이 운전석에 앉아 있던 것이었다.
'와···. 사제복을 입을 때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사복으로 갈아 입으니까 영 딴사람 같네?'
지수는 달라진 도훈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길가다 잘생긴 연예인을 봤을 때 움찔 놀라는 것과 비슷했다.
"오늘은 미사가 없어서 아직 옷을 안 갈아입었거든요. 어색한가요?"
"아, 아뇨···. 그건 아닌데···."
"일단 차에 타세요. 과방이 있는 건물까지 걸어가기엔 조금 멀어 보이던데."
"네."
지수가 긴장한 모습으로 도훈의 차에 올랐다.
늘 비싼 차만 타고 다니던 지수였지만, 도훈의 차에 오르자 괜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어, 어뜨케···. 너무 잘생겨서 얼굴을 못 쳐다보겠어.'
지수가 바짝 얼어 붙은 채 전방만 주시하자 도훈이 슬쩍 팔을 뻗어왔다.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