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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325화 (1,292/2,000)

1308. 여대 잠입-8-

* * *

한여름의 무더위는 한풀 꺾이긴 했지만, 9월은 여전히 후 덥지근한 날씨였다. 차에 앉아 있던 사내는 결국 더위를 못이기고 차 밖으로 걸어 나왔다. 검정색 고급 세단이 햇볕을 받아 유난히 반짝거렸다. 주말 새 왁스를 먹여 광을 낸 보람이 있었다.

중년 사내는 김씨라고 불렸다. 박회장 딸의 운전기사이자 보디가드를 맡고 있는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압구정동을 주름잡았던 신흥 조직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그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랄 것이다.

한 때 제법 잘나가던 조폭이었던 김건배가 바로 김씨였으니까.

날이 더웠는지 김씨가 입고 있던 상의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평범한 얼굴과 대조적으로 굉장한 문신이 드러났다. 손목에서 어깨를 거쳐 등까지 이어진 문신은, 일본의 귀신 '오니'를 형상화한 무시무시한 형상이었다.

평소 혐오감을 드러낼까봐 무더운 날씨에도 긴팔을 고수하는 김씨였지만, 지금의 무더위는 참을 수 없었다.

"거참, 평소보다 오래 걸리네."

한때 잘나가던 조폭 김씨는 조직에 의해 폐기되었다. 권력 다툼 과정에서 소위 '빨래질'을 당해 빵에 들어갔다. 조직과는 인연을 끊었지만, 출소 후에도 새로운 삶을 살기가 쉽지 않았다.

배운 게 주먹질이고, 가장 잘하는 게 사람을 패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정통파 주먹패였던 그가, 시정잡배나 할 법한 일에 뛰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빵에서 연이 닿아, 알고 지내던 최철우에게 연락이 왔다. 최철우는 2000년대 동아시아 미들급 복싱 챔피언에 오른 인물이었는데, 불같은 성정 때문에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결국 술집에서 크게 시비가 붙어 폭행죄로 구속 되었는데, 당시 17 vs 1 의 싸움은 지금도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였다.

전직 복싱선수 출신이라는 점과 두들겨 맞은 이들 대부분 전치 7주 이상의 중상 및 장애 판정을 받기도 하여 결국 징역을 살고 말았다.

한때 같은 감방 동기로 친해진 김씨에게 철우가 제안했다.

-너 요새 놀고 있지? 할 일 없으면 나랑 같이 일이나 할래?

-뭔 일인데? 나 이제 맘 잡았다. 사람 패는 일은 안하려고.

-사람 패는 게 아니고, 사람 지키는 일이야. 어때?

철우의 제안으로 박회장의 밑에서 일하게 된 김씨는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박회장 딸 지수를 호위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김씨는 철우의 주먹이 자기보다 낫다는 건 인정했지만, 박회장을 직접 경호하는 일도 아니고 기껏 회장 딸의 운전기사 노릇이나 하게 되었다는 데 불만을 가졌다.

그러나 막상 나머지 보디가드들을 만나고 보니, 하나같이 최철우 이상 가는 괴물들이었고 잘나가던 전직 조폭 타이틀은 명함도 못 내미는 수준이었다.

김씨는 지금의 위치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자기 사람에게는 돈을 아끼지 않고 뿌리는 박회장의 씀씀이에 마음을 돌리고 수년 넘게 지수의 수발을 드는 일을 이어오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는 시간 딱딱 맞춰 끝나니까 좋았는데, 대학생 되니까 영 시간을 못 지키네."

김씨가 처음 지수의 운전기사 노릇을 하게 된 것은 지수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이었다. 그때 당시에도 귀엽고 깜찍했던 지수는, 결혼을 하지 않은-혹은 못한- 김씨에게는 조카처럼 느껴졌다.

특히 능구렁이같은 박회장과 달리 순진하고, 애교가 많았던 지수를 김씨는 무척 아꼈다. 물론 겉으론 전혀 티를 내지 않는 성격이라 무뚝뚝했지만.

"그래도 여대로 진학해서 다행이야. 고등학교 때 껄떡거리던 양아치들 생각하면···."

어려서부터 미모가 남달랐던 지수는 사춘기 때 역변하지 않고 더욱 미모에 물이 올랐다. 특히 고등학생 때는, 사복을 입혀 놓으면 20대 처녀로 보일정도로 성숙한 느낌을 풍겼다.

물론 어려서부터 지수를 조카처럼 봐 온 김씨에게는 흐뭇하기만 했으나, 문제는 지수를 우연히 본 남고생 몇몇이 지수에게 반해 껄떡거렸다는 점이었다.

이를 알게 된 김씨는 간만에 몸을 풀었다.

자칭 학교 짱이라는 일진 패거리를 상대로 김씨는 호흡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문자 그대로 '조져'버렸던 것.

그런 식으로 지수 몰래 처리한 양아치들만 해도 열 손가락으로 다 못 셀 정도였다. 아마 지수는 몰랐겠지만, 그녀에게 이르지도 못하고 김씨에게 걸려 무산된 고백이 수십건도 넘을 것이다.

"어렸을 때는 참 예의도 바르고 예뻤는데 말이야."

담배를 태우며 오랜만에 추억에 빠져든 김씨는 최근 들어 자신을 쌀쌀맞게 대하는 지수에게 서운한 감정이 밀려왔다.

마치 사춘기가 온 딸자식이 아빠를 징그러워 하는 것과 같은 데서 오는 섭섭함이었다.

"그 페미인가 뭔가를 하면서부터 유독 심해졌다니까?"

삼수 끝에 겨우 배화여대 철학과에 진학한 지수는 대학을 다니면서부터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운전을 할 때 뜻하지 않게 통화를 엿들을 때면 '한남'이니 '허버허버'니 하는 알수 없는 단어들을 자주 썼다. 의미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를 조롱하고 멸시하는 뉘앙스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김씨는 변해가는 지수가 안타까웠지만, 일개 운전수에 불과한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주제 넓은 오지랖이었고, 괜한 참견으로 박회장의 눈 밖에 날지도 몰랐다. 상처하고 하나 남은 딸을 애지중지 아끼는 박회장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10년 가까이 잡아 온 운전대를 놓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김씨는 사춘기가 유난히 조용했던 지수가 뒤늦게 늦바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최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히지 않았다. 다만 조카처럼 예뻐해오고 아껴온 지수가 하루 빨리 정신을 차리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흐음. 근데 왜 이렇게 늦지? 보통은 언제 온다고 전화는 해주는데."

담배를 모두 피운 김씨는 평소와 다른 지수의 태도에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촉이라고 해도 좋고, 감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평생을 칼날 위에서 살아온 야수만이 가질 수 있는 예리함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괜히 찝찝한데. 일단 가봐야겠다."

그는 폼에 늘 넣고 다니는 GPS 위성 추적기로 지수의 위치를 파악했다. 여전히 학교 안.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순 없지만, 대략 200M 안까지는 범위가 나오는 고도의 장비였다.

"인문대 근처인가? 나중에 한 소리 듣더라도 일단 데리러 가야겠다."

김씨는 차를 출발시켰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뭐지? 이런 느낌 처음인데.'

김씨는 평소와 달리 먼저 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동물같은 감이 어긋나길 바라며.

* * *

"그러니까 그 의식은···."

도훈이 지수를 꼬드기려는 순간.

갑자기 우우웅- 하는 진동음이 분위기를 깨뜨렸다.

'뭐지?'

[전화가 온 것 같은데요?]

'에이씨, 하필.'

도훈은 다 된 밥에 재를 빠뜨린 기분이었지만, 조급해하면 안될 것 같았다.

"전화 온 것 같은데요?"

"네? 아···. 잠시만요."

갑작스레 울린 진동음에 겨우 잡았던 무드가 모두 깨지고 말았다. 지수도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발신인을 확인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응? 아저씨가 왜···."

"급한 전환가요?"

"아, 아뇨. 그건 아닌데···. 먼저 연락 하시는 일은 잘 없거든요. 받아봐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러세요."

"음, 잠시만요."

지수가 전화기를 들고 고해성사실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도훈이 쾅 하고 바닥을 내리쳤다.

'에이씨! 다 넘어왔는데.'

[그 운전기사입니까? 경호원이라던?]

'그런가 봐. 하여간 느낌이 쌔 하더니 산통을 깨뜨리네.'

밖에서 지수의 통화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요? 아···. 그게 조모임이···. 네? 인문대 앞이라고요?"

지수가 화들짝 놀라더니 도훈을 보면서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학교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야할 김씨가 학교 안 까지 차를 몰고 들어온 것이었다.

무엇보다 지수는 조모임 때문에 늦는다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굉장히 난처한 상황이었다.

"어, 네. 거의 끝났는데···. 아뇨. 제가 나갈게요."

통화를 마친 지수가 난처한 표정으로 도훈에게 말했다.

"저···. 신부님 죄송한데···."

"왜 그러시죠?"

"혹시 다음에 다시 얘기할 수 있을까요? 저희··· 그러니까 저희 삼촌이 절 학교까지 데리러 오셨나봐요."

"아, 그러시군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면··· 연락처라도."

"네. 전화기 줘보세요."

도훈은 지수의 전화기에 폰 번호를 남겼다.

하지만 문득 진짜 폰 번호를 남겼다간 괜히 나중에 꼬투리를 잡힐 것 같았다.

'그때 소연이랑 연락했던 폰 아직 차에 있겠지?'

[최번개가 구해다 준 대포폰 말씀인가요? 네. 대쉬보드에 넣어 두셨습니다.]

'지수한테 위치추적기까지 달아놓은 걸 보면, 전화기도 수시로 점검하고 있을지도 몰라. 일단 그때 썼던 폰 번호 알려 줘야겠다.'

도훈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비상용 폰 번호를 남겼다.

"음, 편하실 때 저한테 연락 주시면 됩니다."

"혹시 또 저희학교에 오시나요?"

"네. 이번주는 계속 들를 것 같아요."

"아, 다행이다. 저는 학교가 편하거든요."

"그럼 내일 수업 끝나고 연락주세요. 아마 그때도 성당에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해요 신부님."

"별말씀을요. 오늘 제가 말씀드린 건 어디가서 절대 발설하면 안됩니다."

"네? 그게 무슨···."

"부정탈 수 있거든요."

"아! 넵."

"원래 고해성사의 방에서 있던 일은 스스로 마음속으로만 안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신부님. 저, 제가 조금 난처한 상황이라 먼저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삼촌이 밖에서 기다리고 계셔서요."

"네. 그러십시오. 여긴 제가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그럼 내일 뵐게요!"

지수는 꾸벅 인사를 하더니 헐레벌떡 성당 밖으로 뛰쳐 나갔다. 조모임을 했다고 거짓말 쳤던 것이 걸릴까봐 서두르는 모양새였다.

도훈은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 씨, 자빠뜨리기 직전이었는데."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급하게 먹으려다 체하는 수가 있습니다.]

'하긴 그것도 그렇네. 사실 처녀를 홀랑 따먹는 게 그리 쉬운일은 아니겠지. 어떻게 하는 지도 모를텐데.'

도훈이 아쉬운 마음을 접고 고해성사실을 청소하고 있는 데, 모자를 깊게 눌러쓴 여학생 한명이 문을 두들겼다.

똑똑-

"지금 고해성사 받아주시나요?"

"네?"

도훈은 낯선 여성의 방문에 당황했지만 자신이 사제복을 입고 있다는 걸 깨닫고 이내 태도를 바꿨다.

"아, 네. 원래 고해성사 시간은 아닌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흑, 제가 좀···. 마음이 힘들어서···. 혹시 지금 가능하시면···."

도훈은 난데없는 요청에 어찌할 바를 고심했다.

지수를 속인 것은 공략을 위한 거짓말이었지만, 이번에는 진짜로 고해성사를 위해 찾아온 신도인 것이다. 양심의 가책상 도훈은 차마 그런 일까지 할 수 없었다.

"자매님, 죄송하지만 나중에 가능한 시간에···."

"흑흑, 제발요···. 너무 마음이 힘들어서···."

띠링-!

'이것은!'

[주인님! 미션입니다!]

'아이씨, 하필 이 타이밍에.'

미션 알림음을 들은 도훈이 곧바로 태도를 바꿨다.

"···그렇게 힘드시다니 제가 마음이 너무 안타깝군요. 들어오시죠. 저는 건넌방으로 가겠습니다."

도훈이 성호를 긋더니 그대로 고해성사실을 나가 옆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동시에 미션을 확인했다.

'뭔데 갑자기?'

[낯선 장소. 낯선 여자. 당연히 미션이 뜰만 하지 않겠습니까?]

'하긴 여대까지 왔는데 잠잠한게 수상쩍긴 했다. 지수도 불발난 김에 꿩 대신 닭이라도···.'

도훈은 모자를 눌러 쓴 여대생을 떠올렸다. 최대한 가리긴 했지만, 척 보아도 상당한 미인이었다. 얼굴도 얼굴이지만, 꽉 끼는 청바지 사이로 드러난 몸매가 굉장히 좋았다.

도훈이 스마트 워치에 떠오른 미션을 확인했다.

-너의 죄를 사하노라.

*군대 간 남자친구를 두고 바람 피운 여성을 당신의 좆대로 '징벌'하십시오.

*성공 보상으로 3,0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제한 조건으로 미션 장소가 고해성사실로 제한됩니다.

*정신조작류 스킬과 아이템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남은 기간 : 2시간.

'아니, 좆대로 징벌은 또 뭔데?'

[문자 그대로 아닐까요?]

'으음, 역시 대물남에 어울리는 미션이랄까? 일단 3,000포인트 짜리를 그냥 보낼 순 없지.'

"준비 되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자매님."

다시 시작된 회개의 시간.

암막 커튼 너머로 방금 전 보았던 여대생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흑흑, 죄책감에 견딜수가 없어요."

"자매님.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고 삽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는 법입니다."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잘 참고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알려주셔야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신부님. 여기서 한 얘기가 혹시나 흘러나가진 않겠죠?"

"당연합니다. 자매님의 죄는 오직 저와 하느님, 그리고 자매님만 아실 것입니다."

"흑흑, 감사합니다. 어디가서라도 털어 놓지 않으면 못 견딜 만큼 괴로워서요."

"무슨 일이 있으신건가요?"

"제가···. 실은···."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이곳은 오로지 회개하는 곳입니다."

"제가 사실 바람을 폈어요."

"허어."

"남자친구가 사실 군대에 갔거든요."

"그렇군요."

"1년간은 잘 참았는데, 요즘따라 너무 힘들더라고요. 휴가도 잘 못 나오고, 지난 주에 만나기로 했는데 갑자기 통제가 걸려 짤렸다고 그러고. 남자친구가 실은 최전방으로 갔거든요, GOD라던가?"

"GOP말이군요."

"아, 맞아요."

여자가 횡설수설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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