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323화 (1,290/2,000)

1306. 여대 잠입-6-

"야, 다 들리겠어."

"통화하느라 못 들을걸? 그리고 들으면 또 어때서?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그러니까 왜 대낮에 모자에 마스크까지 쓰고 다니는 건데?"

도훈은 10M 이상 떨어져 있었기에 세 사람의 대화를 듣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현재 그의 청각은 10M미터 밖에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캐치 할 정도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사람 앞에서 대놓고 뒷담화를 까는 모습에 도훈이 허탈하게 웃었다.

'쯧, 마스크 좀 썼기로서니 다짜고짜 의심부터 하다니.'

[모자까지 더해져 그런 게 아닐까요? 아무래도 범죄자들이 그런 식으로 얼굴을 감추곤 하니까요.]

'혹시 또 알아? 몇 년 뒤 갑자기 호흡기 바이러스 같은 게 전 세계에 퍼져서, 외출할 때마다 마스크 쓰고 다니는 게 일상이 될지?

'[설마, 그럴리가요.]

도훈은 공연한 의심을 받기 싫었기 때문에 통화하는 척 지수 일행을 지나쳤다. 지나가는 중에도 꼴페미 이인방은 뒤통수가 따가 울 정도로 열심히 씹어댔다.

"어휴, 덩치 좀 봐. 택배 나르면서 근육만 키웠나봐? 진짜로 무식해 보인다."

"우리 학교는 왜 저런 사람들을 출입시켜 주는 거야? 갑자기 범죄자로 돌변하면 어쩌려고."

도훈이 목소리를 구분해 보니 주로 주근깨와 돼지가 떠드는 중이었다. 그에 비해 지수는 반대의견을 내고 있었다.

"그냥 학교에 택배 배달하러 온 기사님 아냐? 또 환절기니까 감기 걸려서 마스크 쓸 수도 있는 거지."

"그게 사실이건 아니건 어쩄든 한남들은 죄다 잠재적 범죄자들이라고 봐야 해."

"인정. 저러다 여자 혼자 사는 원룸 가면 바로 강간 생각부터 할걸? 지수 넌 남자를 그렇게 모르니?"

"음, 그건 좀···."

도훈이 가만히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나름 합리적으로 생각하려는 지수에게 다른 친구들이 거의 세뇌하다시피 남혐을 조장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두 사람이 문제로군.'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지수양에게 남성에 대한 이유 없는 적대감과 혐오 감정을 주입하고 있군요.]

'허구한 날 남자들 욕하는 소리만 듣는데, 남자가 좋게 보일 리가 있나.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고정관념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데.'

도훈은 지수로부터 두 사람을 반드시 떼어 놓아야겠다고 판단했다. 공략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지만, 장차 지수의 앞날을 위해선 결코 곁에 두어선 안 될 나쁜 친구들이었다.

아니 친구라고 말하기도 뭐한, 그저 부잣집 딸 주변에서 아부나 떨어가며 콩고물이나 얻어먹으려는 이리나 승냥이였다.

'물론 지수도 잘한 건 없지. 유유상종이라고, 원래 끼리끼리 어울리는 법이니까. 지수가 애초에 주변에 쉽게 휘둘리는 타입이라는 게 문제야.'

대충 상황을 분석한 도훈은 세 사람이 헤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지수야, 덕분에 오늘 점심 잘 먹었어. 나는 이만 수업들으러 갈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니? 나도 이제 수업 가야겠다."

"그래, 내일 세미나에서 보자."

오후부턴 서로 다른 수업이 있는지 세 사람이 뿔뿔이 흩어졌다.

1학년이다 보니 교양 수업 장소가 각기 다른 모양이었다. 도훈은 눈에 안 띄게 먼 거리에서 지수의 뒤를 밟았다.

'드디어 혼자만 남았군.'

[어떻게 접근하실 생각입니까?]

'역용술이 풀리지 않았으니 아직 맨 얼굴을 드러내기 힘들어.

게다가 평범한 얼굴로 들이대 봐야, 호감을 쌓기는 어려울 거고.

일단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좋겠어. 그때쯤 제 얼굴로 돌아오겠지.'

[그리고는요?]

'최대한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 중이야. 일단 지수가 남자를 경계하니 경계심을 낮출 수 있도록 위장해야지.'

[위장요? 설마 여장이라도?]

'엉?'

[아무리 축골공으로 체형을 변화시키더라도 성별까지 바꾸는 건 불가능합니다. 애초에 주인님 체형 때문에 그만한 견적이 나오지도 않을 거고요.]

'남자를 싫어한다고 굳이 여자로 트랜스 할 필요까지 있을까?

여자에게 경계심이 낮은 남자들도 얼마든지 있는데.'

[네? 어떤 남자요?]

'가령···.'

* * *

"안녕하세요, 자매님."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지수 앞에 카톨릭 사제 복장을 한 사람이 다가왔다. 검은색 끌러지 셔츠에 목에는 하얀 로만 칼라를 한 잘생긴 청년이었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훈훈한 외모가 절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엇, 안녕하세요 신부님."

갑자기 말을 거는 신부에게 당황한 지수가 얼결에 인사했다. 잘생긴 젊은 사제는 곧바로 정정했다.

"아직 사제는 아니고 부제입니다."

"아, 네."

배화여대는 카톨릭 선교사가 세운 학교를 모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수로 종교와 관련된 교양 수업을 들어야 했다.

따라서 지수는 젊은 부제가 여대를 돌아다니는 것에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았다. 다만 나이 지긋한 신부들에 비해 무척 어려 보이는 외모가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다.

'수업 오신 강사님 연배는 아닌 것 같고···. 되게 잘생겼네?'

젊은 부제로 변한 도훈이 정중히 물었다.

"제가 교구에서 막 파견 나와서 성당을 찾고 있는데 길을 몰라 서요. 혹시 길 좀 여쭐 수 있을까요, 자매님?"

"아, 그··· 수업하는 곳의 옆에 있던데 잠시만요."

지수는 길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배화여대는 언덕의 중턱을 깎아 세워진 학교였기 때문에 도로 가 능선을 따라 나 있어 처음 오는 사람들이 자주 헤매는 곳이었다.

"음, 그러니까 인문대 건물 지나서 바로 그 옆인데···."

"인문대가 어딘가요?"

"음, 말로 설명하기 복잡한데 제가 어차피 그쪽으로 나가는 길이니 안내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자매님. 정말 친절하시군요."

부제로 변한 도훈이 갑자기 이마와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성호는 오버 아닙니까?]

'오버였냐?'

[네, 무척요.]

'그나저나 배화여대가 카톨릭 계열이라 다행이야. 불교 대학이었으면 머리를 빡빡 밀어야 했을 텐데.'

[근데 어째서 사제로 위장할 생각을 하신 겁니까?]

'남자지만 여자들에게 전혀 위협이 안 되는 남자잖아. 특히 독신주의자인 신부들이라면 더더욱. 아무리 지수가 남자를 경계해도 신부까지 의심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

[좋은 위장술이군요. 하지만 오히려 이렇게 되면 남자로서 호감을 갖긴 더 어렵지 않을까요? 신부는 결혼을 못 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아직 정식 서품을 받은 신부가 아닌 수습 부제라고 한 거야. 아직 신부가 되기 전이니 방황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

[방황요?]

"혹시 자매님은 세례명이 있으신가요?"

"네? 아, 저는 무교라서."

"그러시군요."

"근데 일주일에 한 번씩 종교 수업을 듣긴 해요. 혹시 부제님도 저희 학교에 수업하시러 오신 건가요?"

"아닙니다. 저는 아직 신학대 다니는 학생인데, 여기 계신 신부 님께서 부르셔서 잠시 들렀습니다."

"그러시구나."

도훈의 예상대로 지수는 도훈에게 전혀 경계를 안 하고 있었다.

오히려 검은 사제복과 도훈의 잘생긴 외모에 조금은 흥미를 느낀 듯했다. 복장이 주는 특유의 안정감이 낯선 도훈에 대한 경각심을 떨어뜨렸다.

"신학대 학생이면 혹시 몇 학년이세요?"

"이제 3학년입니다."

"아···. 저랑 혹시 동갑이실 수도."

"자매님도 그럼 3학년이신가요?"

"아뇨. 전 삼수를 해가지고···."

"그러시군요."

"헤헤, 제가 똥멍청이라···."

"예?"

도훈은 거침없는 지수의 말투에 당황했다. 지수 역시 도훈의 표정을 보더니, 스스로 말실수를 했다고 여겼는지 사과했다.

"앗, 죄송해요. 제가 좀 생각없이 말하는 편이라서요."

"괜찮습니다, 자매님."

지수가 사제복을 입은 도훈과 함께 길을 걷는데 캠퍼스를 돌아다니는 다른 여대생들이 자꾸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검은 사제복이 유독 튀기도 하거니와, 도훈의 훤칠한 키와 수려한 외모에 절로 눈이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부러움에 찬 다른 여학생들의 모습을 본 지수는 자기도 모르게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사제님이 잘생겨서 그런지 다들 한 번씩 쳐다보네? 확실히 신부님 되긴 좀 아까운 외모긴 하지'지수는 여태 남자를 사귀어 본 경험이 없었지만, 도훈이 또래남자 중에서도 굉장한 미남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잘생긴 사람과 대화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으므로, 지수는 살짝 심장이 두근거렸다.

'휴, 뭐지? 자꾸 얼굴에 눈이 가네?'

한번 보고 두 번 봐도 자꾸만 보고 싶은게 미인이라더니, 지수는 도훈의 외모에 자기도 모르게 계속 시선을 주었다. 이를 눈치 챈 도훈이 지수에게 물었다.

"혹시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뇨. 그냥 신기해서요."

"네?"

"신부님하고 이렇게 가까이 얘기해 본 적이 없거든요. 수업할 때는 맨날 뒷자리에서만 봐가지고요."

"전 아직 신부가 아니고 부제입니다."

"어쨌든요."

"미사에 가보신 적도 없으세요?"

"음···. 뭔지는 알아요. 수업 시간에 배우긴 했어요."

"아직 종교가 없다면 성당에 다녀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자매님에게선 맑은 영혼의 기운이 느껴지거든요."

"제가요? 정말요? 신부님이 그런 것도 느껴요?"

도훈은 점점 흥미를 보이는 지수에게 은근슬쩍 수작에 들어갔다.

"음···. 실은 제가 일반적인 사제가 아니라서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도훈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하는 것처럼 지수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은은한 향기가 느껴지는 도훈의 체취에 지수가 살짝 긴장했다.

"···실은 저는 구마 사제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구마사제요?"

"그러니까 엑소시즘 같은···."

"헉!"

지수가 깜짝 놀라더니 도훈에게 다시 물었다.

"저, 정말요? 혹시 영화에 나오는 그런?"

"비슷합니다. 대신 어디 가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세상에! 신기하다. 그럼 퇴마 같은 것도 직접 하시는 거예요?"

"저는 일개 부제에 불과합니다. 사제님을 보조를 할 뿐이죠. 아직 수행이 부족하거든요."

"와···. 퇴마사가 있다는 건 진짜로 몰랐어요. 아니지, 퇴마 신부님이라고 해야 하나?"

[갑자기 느닷없이 구마사제요? 어찌 그런 허황된 뻥을 치십니까?]

'아까 본인이 빡대가리 인증했잖아. 지수는 타고난 천성이 주변에 쉽게 휘둘리는 타입이란 말이지. 어찌보면 순수한 영혼이랄까? 페미 옆에 붙어 있으면 페미가 돼버리고, 학생 운동하는 선배를 먼저 만났다면 운동권 학생이 되었을 걸.'

[그럼···.]

'이런 성향은 옆에서 조금만 부추기면 종교 같은 것에 금방 빠져들기 십상이거든. 여기다 오컬트적인 요소까지 살짝 가미해주면 금방 맹신할 거야.'

[그치만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시려고요?]

'있어 봐. 그녀의 트라우마를 살짝 건드릴 테니.'

"로마 교황청에도 구마 사제는 존재합니다. 다만 사람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죠."

"그렇구나. 영화에서 한 번 본 것 같아요. 그럼 정말 악령도 퇴치하고 막 그러시는 건가요?"

"음, 저는 의식에 대해서는 아직 모릅니다. 배우는 중이거든요.

다만 어려서부터 그런 쪽으로 기운이 발달해 이런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너무 신기해요 사제님. 엇, 다 온 것 같아요. 저기 보이는 저 건물이에요."

대화를 나누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한 도훈은 지수에게 감사를 표했다.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매님."

"별말씀을요."

도훈이 인사를 하고 헤어지기 전 불쑥 지수에게 말했다.

"저, 초면에 정말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네?"

"아, 아닙니다."

"왜 그러세요?"

말을 하다가 마는 도훈의 애매모호한 태도에 지수가 부쩍 호기심이 일었다.

"아닙니다. 제가 실언한 것 같습니다."

"괜찮아요. 저한테 방금 무슨 말씀을 하시려던 거 아니셨나요?"

"자매님 주변에서 수상한 기운이 느껴져서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게···. 제가 정식 사제는 아니라서 명확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자매님 주변에 불순한 무엇인가가 맴도는 것 같아서요."

도훈의 난데없는 소리에 순진한 지수는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방금 처음 본 사람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순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사이비가 아닌가 하는 의심부터 드는 게 정상.

도훈은 이쯤에서 그녀에게 신뢰를 줄 만한 멘트를 날려야했다.

"하지만 너무 걱정마십시오. 어머님의 영혼이 자매님을 지켜주시고 계시니까요."

"네?!"

지수는 그 말에 까무러치게 놀랐다.

지수에게 어머니라는 단어는 늘 가슴 속에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남아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낳다가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제 어미를 죽이고 나온 아이라는 사실은 평생 그녀를 괴롭히는 트라우마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지수가 놀란 것은 스스로를 구마 사제라고 밝힌 젊은 부제가 어머니의 영혼을 언급했다는 것이었다. 마치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지수의 격한 반응에 도훈이 갑자기 성호를 긋더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또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요. 그럼 이만."

"자, 잠시만요."

"예?"

"어떻게 알았어요?"

"어떤···."

"우리 엄마 돌아가신 거요. 방금 어머니의 영혼 어쩌고 하지 않으셨어요? 어떻게 아셨냐고요."

"아, 이런···. 신부님이 함부로 능력을 쓰지 말랬는데···."

도훈은 일부러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보기도 하거든요. 대개 구마 사제의 길을 걷는 이들은 그러한 신성을 타고납니다."

"아···. 그럼 저한테 정말로 수상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거예요? 저한테 혹시 악령 같은 것이라도 붙은 건가요?"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언급으로 도훈의 능력에 확신을 갖게 된 지수는 도훈이 했던 얘기에 덜컥 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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