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5. 여대 잠입-5-
'저 사람이 경호원인가 보군.'
검은색 세단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평범한 복색의 중년 남성이었는데, 외모는 지극히 평범해 보였다. 지나가다 흔히 볼 수 있는 40대 남성이었다.
"아가씨, 학교까지 모셔다드릴까요?"
하지만 도훈은 중년 남성의 평범한 차림보다는 그가 풍기는 특유의 기도에 놀라는 중이었다.
'…대단한데?'
[네? 지극히 특징 없는 일개 운전수처럼 보이는데요?]
'아니야. 내공을 익히고 나서부터 이상한 게 보이기 시작하거든.'
[이상한 거라뇨?]
'무술을 배운 사람들이 풍기는 특유의 기운같은? 저 사람은 일견 평범해 보여도 실제론 굉장한 실력자야.'
무림인(?)으로 변한 도훈에겐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뭔가가 보였다. 놀랍도록 발달 된 시각과 관찰력으로 상대가 감추고 있는 예리한 기운을 느낀 것이다.
'본래 짖는 개가 약한 법이야. 온몸에 문신을 두르고, 이마에 나 양아치요 하고 써 붙이고 다니는 놈들치고 진짜 강한 놈은 못 봤거든. 오히려 고수들은 살기를 감추게 되니까 겉으로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지. 하지만 내 눈을 속일 순 없어.'
[오, 그게 최근에 익힌 무공, 사륜안 덕분이군요.]
'그런 것 같아.'
도훈은 백보신권의 다양한 기술들을 하나씩 습득하는 중이었다. 그중 '사륜안'이란 상대를 꿰뚫어 보는 직관력을 의미했는데, 중년의 운전기사를 보는 순간 도훈의 사륜안이 발동했던 것.
'저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낯빛 하나 안 바꾸고 사람 하나쯤 아무렇지 않게 묻어 버릴 수 있는 놈이야. 박회장이 자기 외동딸 근접 경호원으로 괴물을 붙여 놨구만.'
"김씨 아저씨! 제가 학교에선 이러실 필요 없다고 하셨잖아요!"
지수가 버럭 짜증을 내자 김씨라 불린 운전 기시는 머쓱해하며 뒷통수를 긁적였다.
"여긴 학교 밖인데요."
"후문이 코 앞인데 무슨 밖이요? 아, 창피하게 진짜. 나중에 학교 마치고 연락할게요."
지수는 버르장머리 없이 김씨의 승차 요구를 거절하더니 친구들을 데리고 쌩하고 가버렸다. 도훈 역시 조심히 뒤따랐는데 김씨가 도훈을 보더니 흠칫 표정을 바꿨다.
"어이, 거기 젊은 친구."
조용히 지나가려던 도훈은 갑자기 김씨가 부르는 통에 속으로 놀랐다.
'나를 알아봤다고?'
"네? 저요?"
"어. 혹시 불 좀 빌릴 수 있겠나? 내가 깜빡하고 담배만 가져왔지 뭐야."
"아···."
도훈이 라이터가 없다며 거절하려고 했지만, 김씨가 곧바로 덧붙였다.
"담배 피우는 거 맞지? 옷에서 담배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예상대로 예리한 놈이군.' 도훈이 주춤하며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여기요."
"···그래. 고마워, 학생."
김씨가 도훈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러나 도훈은 이미 스스로의 기운을 숨길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와 있었다. 김씨는 직감으로 도훈이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걸 알아보았지만, 그의 눈썰미로는 도훈의 정체를 파악하긴 쉽지 않았다.
'···아닌가? 분명 뭔가 위화감이 들었는데.'
"라이터 돌려 주세요."
"참, 깜빡했구만."
도훈은 라이터를 받아 들고는 그대로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김씨는 도훈이 골목으로 사라지기 전까지 그의 뒷모습을 계속 주시했다. 도훈은 뒷통수가 따가워 견딜수가 없었다.
[어떻게 알아본 걸까요?]
'순간 방심해 버렸어.'
[방심하다뇨? 현재 주인님의 외모는 눈에 잘 띄지도 않을 텐데요.]
'외모가 다가 아니지. 평소 걸음걸이 같은 것만 봐도 수련이 된 사람들은 티가 난단 말이야. 김씨라는 사람의 안목이 상당한 수준인 것 같아. 본능적으로 내가 위험한 사람이란 걸 감지한 거지. 그래서 혹시나 싶어서 불 좀 빌려달라고 불러서 자세히 관찰한 거고. 들키진 않았을 거야. 의심을 했을지라도.'
[대단하군요. 민간인 주제에 주인님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니.]
'정확히는 플레이어 이도훈을 알아본 게 아니라, 무도인 이도훈을 눈치챈 거겠지. 저 사람도 뭔가 무술 같은 걸 배운 게 틀림없어. 암튼, 신경쓰이는 놈이군.'
[어쨌든 안 들켰으니 천만 다행입니다.]
'알아챌 리가 있나? 내가 지보다는 훨씬 고순데. 우주가 큰 걸 깨닫는다고, 인간이 먼지만도 못한 존재라는 건 변함 없거든.'
[우주 비유는 좀….]
하지만 도훈은 지금 얼굴은 다시는 못 쓴다는 걸 깨달았다.
'경비원 얼굴도 이제 끝이군. 지수의 경호원에게 노출되었으니 이 얼굴가지곤 가까이 가지도 못하겠어.'
[그래도 원래 주인님 얼굴은 아니잖습니까? 체형도 평소 주인님보다 작게 줄였고요.]
'다시 원상 복구 시켜야겠다.'
[원래 얼굴로 돌아오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을 텐데요? 잊으셨습니까? 역용술은 서서히 풀립니다.]
'일단 얼굴만 모자랑 마스크로 가리면 돼. 시간 지나면 원래 얼굴로 돌아가겠지.'
도훈은 근처 약국에서 마스크를 구입한 뒤 모자와 함께 얼굴을 최대한 가렸다. 동시에 축골공을 이용해 체형을 본래대로 되돌렸다.
'그나저나 저 경호원은 학교 안에서는 감시를 안 한다는 거지?'
'그게 그렇게 되나요?'
[아까 지수가 말하는 거 들었잖아. 학교 밖에서만 경호를 담당하고 있다고. 아마도 운전 기사가 있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괜히 감시받는 거 같으니까 학교에서는 그냥 내버려 두기로 한 모양이야. 어차피 여대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기지도 않을 테니.]
'그렇군요. 그렇다면 공략 장소는 어떻게든 학교 안에서 끝내야 한다는 소리네요.'
[맞아. 이제 어떻게 접근하는 지가 문제로군.]
도훈은 가게 화장실에 들러 다시 복장을 갈아입었다.
변장 도구 세트를 아공간에 넣어 두고 다니니, 옷장을 통째로 들고 다니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번엔 또 뭘로 변장하시려고요?]
'택배기사.'
[택배요?]
'여대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기는 택배기사가 최고지. 어디에나 갈 수 있고, 누구도 딱히 신경 쓰지 않으니까.'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택배 회사용 조끼와 모자를 눌러써 영락없는 택배기사로 변신한 도훈은 다시 여대 안으로 향했다. 아까 식사 중 대화를 통해 세사람의 이동 장소를 엿들었기 때문에 금방 뒤쫓을 수 있었다.
'가만있자, 근데 김씨라는 경호원은 어떻게 지수의 위치를 알아낸 거지?'
[네?]
'셋이 식당으로 이동할 때 지수가 누구에게 연락하는 기미는 안보였잖아.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낸 적도 없었고.'
[그렇네요? 아니면 학교에서부터 따라붙었을까요?]
'저렇게 눈에 띄는 차를 타고서? 그것도 내가 눈치도 못 채게?
아니야. 분명 뭔가 다른 게 있어.'
[혹시 위치 추적기?]
'오히려 그게 더 신빙성이 있겠군. 지수의 소지품 어딘가 김씨가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장비가 달려 있다는 게.'
[정말 까다롭군요. 지수양 자체도 꼬시기가 어려운데, 하필 귀찮은 경호원까지 따라 붙은 상황이라니.]
'공략은 어려워야 재밌지. 두고 봐. 어떻게든 꼬셔볼테니까.'
[주인님만 믿고 있습니다.]
지수와 친구들은 야외 벤치에 오순도순 모여있었다.
한 손엔 다들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었는데, 디저트 겸해서 입가 심을 하는 중이었다 그 중 뚱뚱한 친구는 혼자서 콘을 두 개씩 쌓아 먹고 있었는데, 도훈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저 몸매 유지하려면 쉽지 않겠지.'
[주인님 오늘따라 유난히 공격적이시군요. 지수분 친구가 주인님께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말이죠.]
'잘못했지.'
[뭘요?]
'눈갱 당했잖아.'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쟤는 솔직히 심각해. 얼굴 못 생긴 건 타고난 거니까 뭐라고 할 순 없지만, 뚱뚱한 거는 다 자기 관리니까.'
[유전적으로 살이 잘 찌는 체질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본인의 100% 잘못은 아니죠.]
'그래도 관리를 했으면 저 지경까진 절대 안 되지. 아이스크림처먹는 꼴 좀 보라고. 그냥 오늘만 사는 애잖아.'
[주인님은 유독 살찐 여자를 혐오하시는군요. 설마 빅걸의 기억 때문에···.]
'말도 꺼내지 마. 생각만 해도 토나올 것 같으니까.'
도훈은 정말로 구토감이 드는 지 우욱- 하고 토하는 시늉을 했다. 그 와중에도 그의 예리한 청각으로 세 사람의 대화가 들리고 있었다.
"지수야. 너 아까 너네 기사 아저씨한테 너무 심한 거 아냐?"
"뭐?"
"아니 그래도···. 나이가 삼촌뻘인데."
친구의 말에 지수가 반박했다.
"야. 너 그 아저씨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래."
"모르다니?"
"왜? 무슨 일 있어?"
"설마 변태?"
"아니 그건 아닌데···. 암튼, 나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 운전해주시던 분인데 가끔 보면 너무 심할 정도로 간섭하셔서."
"와, 초등학교 때부터 기사가 있었어?"
"지수 얘네집 진짜 찐부자라니까?"
"맞어 맞어. 지수말로 제대로 플렉스지."
지수는 괜한 얘기를 했다는 듯 한숨을 푹 쉬더니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번 주 세미나 다들 참석할거지?"
"김김영숙 선배의 음습한 한남 자아에 대한 반성과 사회적 고찰 논문 발표회 말야?"
"정말 그 선배님 글은 읽을 때마다 소름 돋는다니까?"
"진짜, 어떻게 그렇게 예리하게 한남의 심리를 꿰뚫는지···."
"맞아맞아. 김김영숙선배님 글 보면 진짜 젖어버릴 것 같아."
"어우, 이 변녀야!"
몰래 엿듣고 있던 도훈은 속으로 혀를 찼다.
'와, 미친년들. 저게 대체 무슨 개짓거리야?'
[왜 저러는 걸까요? 남자들이 철천지원수도 아니고.]
'하여간 못생긴 것들이 탈코 한다고 날뛰니까 더 역겨워 죽겠단 말이지? 왜 지 번식탈락에 대한 화풀이를 애먼 남자들한테 책임전가시키는 데?'
[그냥 무시하시죠. 사람마다 다 생각은 다를 수 있으니까요.]
'생각이 다르면 그냥 지 혼자 쳐 생각하면 될 거 아냐? 괜히 멀쩡한 애들까지 물들이니까 문제라는 거지.'
도훈은 먼 거리서 지수를 면밀하게 살폈다.
아무리 봐도 페미가 되기엔 너무나 아까운 외모였다.
보통 집안에서 평범하게 자랐으면 수많은 남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으며 정상적으로 성장했을텐데, 지나친 과보호와 간섭으로 꼴페미라는 악질 바이러스에 물들고 있었다.
처음 도훈은 복수의 신 업적의 일환으로 박회장의 여식인 지수에게 접근했지만, 지금은 안좋은 사상에 물든 그녀를 구제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들었다.
'구해내야겠어. 악의 구렁텅이에서.'
[쓸데없는 정의감 갖지 마시죠. 주인님은 임무만 완수하면 그만 아닙니까?]
'님도 보고 뽕도 따면 좋지 뭘? 남자의 진한 맛을 알고 나면 불순한 사상에서 스스로 깨어날 수 있을 거야. 그나저나 견적 한번 따봐야겠다.'
도훈은 정보창의 발동 범위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통화를 하며 천천히 지수 일행 쪽으로 접근했다.
"네, 어디시라고요? 잠시만요.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통화 내용만 보면 영락없는 택배 기사였다.
'로시, 지금 박김지수 정보창.'
[넵.]
스마트 워치에 정보창의 설명이 뜨자 도훈이 빠르게 스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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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박(김)지수(처녀)
나이 : 23 #꼴페미#명품녀#남혐
호감도 : ?/100
개방성 : F
성감대 : 개발되지 않음.
*애무 포인트 : 정보 없음.
성욕지수 : 보통.
공략팁
*위 대상은 아직 당신의 존재를 모릅니다.
*위 대상을 공략하면 '복수의 신'미션 중 한가지를 완수하게 됩니다.
-그녀는 사채업계의 대부로 불리는 박회장의 유일한 혈육입니다.
-태어날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 밑에서 평생 자라왔습니다.
-오냐오냐 모두 받아주는 관대한 아버지 덕에 버릇 없고, 제 멋대로 인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여리고 주변에 휘둘리는 스타일입니다.
-자신의 출생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트라우마 때문에 늘 죄책감과 외로움에 시달리며 살아왔습니다.
-대학에 진학 후 급진적 여성주의 사상에 경도되면서, 정신적 상처를 극복하고 종교처럼 맹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학청시절 또래 남자들과 교류한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남자에 대해 전혀 모르며, 대학 이후 배운 페미니즘과 남성혐오에 기인한 그릇된 생각으로 남성을 굉장히 악하고 저열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은 여자보다 월등하며, 자신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노리거나 혹은 자신을 성적으로 착취한다고 여기는 그릇된 가치관에 함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녀는 극도로 남성을 기피하며, 그나마 주변에 남자라곤 아버지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주변을 머문 김씨 아저씨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따금 잘생긴 남성을 보면 설레기도 하는 등, 미남에게 유독 관대한 편입니다.
-여태껏 못해본 연애를 목말라고 하고 있으며, 언제간 페미니 즘에서 말하는 완벽한 이상형의 남자와 교제하는 날이 오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추천행동 : 최대한 신중히 접근하세요. 그녀는 남자를 무척 경계하고 있습니다. 호감을 쌓기 위해선 상당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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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창을 확인한 도훈은 혀를 내둘렀다.
'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난적인데?'
도훈이 고개를 저으며 난처함을 표하는데, 문득 눈이 마주친 돼지가 도훈을 보더니 뭐라고 중얼거렸다.
딴에는 안 들릴 줄 알고 말한것이지만 귀가 밝아진 도훈에게는 가까이서 말한 것처럼 들려왔다.
"야, 저 택배충 좀 수상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