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314화 (1,281/2,000)

1297. 이사-27-

'계획? 대책은 박회장 쪽에서 세워야지.’

[네?]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은 가지고 있거든. 나한테 처맞기 전까지는.’

[주인님. 농담하실 때가 아닙니다. 박회장은 이제껏 주인님이 상대했던 양아치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거물이라고요.]

'놈이 거물이면 나는 대물이야.’

[아니, 주인님!]

'근데 솔직히 그렇잖아. 지금 박회장 따위가 내 상대가 될 거라고 생각 하는 거야?’

[그게 무슨 뜻입니까?]

'김양 관련해서 복수의 신 미션 받을 때만 해도 나는 무공이 전무한 상태였어. 말 그대로 일반인 치곤 싸움 좀 한다 수준이었지.’

[그래서요?]

'지금은 단신으로 박회장 조직을 와해시켜버릴 수도 있다는 소리야. 너도 알잖아. 지금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도훈은 자신감이 넘쳤다.

근래 들어 백보신권은 8할까지 올라온 상태. 또 로테이션으로 인해 내공도 꾸준히 성장했다. 근 일주일간의 포인트 벌이와 가상훈련장 수련으로 육체적인 면에선 정점을 찍고 있었다. 과한 그의 자신감을 우려하듯 로시가 조언했다.

[주인님. 힘으로 해결하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주인님이 힘을 드러낼수록 PK단의 추적은 거세질 테니까요.]

'PK단이고 뭐고 그냥 쓸어버리면 되는 거 아니야? 내가 질 것 같진 않은데? 자신이 없다고. 질 자신이.’

[그건 주인님이 아직 PK단을 상대해 본 적이 없어서 그렇죠.]

'뭐라고?’

[PK단은 단순한 조직이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을 만큼 오래된 비밀결사입니다. PK단의 조직원들은 플레이어로 치면 대부분 중수 이상이기도 하고요.]

'음···.’

[놈들은 최소 고수 플레이어를 맞상대할 전력을 기준으로 점조직을 구성합니다. 중수인 주인님이 혼자 대적할 수준이 아니란 뜻입니다.]

'놈들이 그 정도로 강해?’ 도훈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같은 중수라도 무공을 배우기 전과 무공을 배운 후의 도훈은 전혀 다른 사람이나 마찬가지. 어마어마한 격차를 매일 실감하고 있는데 로시는 계속 우려를 표했다.

[단순히 물리력만 강하다고 상대할 순 없으니까요.]

'뭐, 마법? 피하면 그만 아니야? 누가 맞아 준대?’

[정신 공격은요? 그것도 피할 자신 있으십니까?]

'정신 공격이라니?’

[주인님의 스킬 중에 있는 정신 공격을 상대방도 쓸 수 있습니다. 이제껏 주인님은 공격하는 입장이었지만, 반대로 당하는 포지 션이 되면 무방비 상태잖습니까?]

'음···. 그건 또 그렇네.’ 도훈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단순히 20대의 육체를 가진 젊은이였다면 넘치는 혈기에 객기를 부렸겠지만, 정신만은 40대인 그는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는 냉정함도 겸비하고 있었다.

'오케이. 내가 너무 경거망동했던 것 같군. 최근 들어 수련의 성과가 나오니까 약간 건방져진 것 같기도.’

[굉장히 건방져지셨습니다.]

'알았다고. 반성하잖아.’

도훈이 다시 진중한 태도로 로시에게 물었다.

'근데 복수의 신 미션 보상이 뭐였었지?’

박회장에 대한 응징은 과거 미쓰리라는 다방 레지에게서 받은 복수의 신 미션 때문이었다. 사채업자 박회장에게 걸려 집안이 쫄딱 망한 그녀는, 사창가로 팔려나간 스스로의 운명을 한탄하며 도훈에게 복수를 부탁했다.

[스킬 강화 특전입니다. 원하는 스킬 3개를 무조건 3레벨씩 올려주는.]

'아아, 맞다.’ 처음 박회장의 실체를 알았을 때 망설이던 그는, 복수의 신이 마련한 특전을 보고 마음을 굳혔었다. 무슨 스킬이건 최소 3레벨의 업그레이드를 보장하는 실패하지 않는 스킬 강화 특전. 포인트로 환산해도 어마어마한 보상이었다.

[참고로 미션 내용은 의뢰인의 복수를 완성하고, 상대의 가장 소중한 여자를 빼앗는 것이었고요.]

'여자라고? 그런 것도 있었나?’

[설마 까먹으신 겁니까?]

'아···. 뭐야, 그럼 무작정 가서 두들겨 팬다고 끝이 아니네?’

[당연한 말씀을. 신들의 미션이 어디 쉬웠던 적이 있었나요.]

'음···. 이거 골치 아프게 됐는데.’ 미션의 성공을 위해선 두 가지를 모두 달성해야 한다.

하나는 박회장에 대한 복수.

또 하나는 상대의 소중한 여자를 빼앗는 것.

복수의 방법에 대해선 금전적 타격을 입히거나, 실제로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겠지만, 여자를 빼앗는 부분은 도훈으로서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박회장이 귀국한다니 그의 동태부터 살피는 게 어떻겠습니까? 적을 알아야 대처할 방법도 세울 수 있으니까요.]

'그래야겠어. 금방 해치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미션 내용이 복잡하구만.’ 생각을 정리한 도훈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박회장의 귀국만 기다렸다.

그 사이에도 도훈은 계속 강해지고 있었다.

* * *

토요일 인천공항.

야구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도훈은 팻말을 들고 입국장에 서 있었다. 팻말엔 A4용지로 인쇄한 ?WELCOME, ROSSI-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

[굳이 왜 로시라는 이름을···.]

'딱히 생각나는 이름이 없더라고.’

[엇, 저기 혹시 박회장 아닙니까?]

입국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흰 양복을 빼 입은 늙은이가 선글라스를 쓰고 걸어 나왔다. 워낙에 눈에 띄는 차림이기도 했지만, 그의 주변으로 험상궂어 보이는 보디가드들이 에워싸고 있어 금세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미친. 꼴에 무슨 대기업 회장 코스프레람?’

[어지간한 기업 회장보다 개인 재산은 많을지 모르죠. 어쨌든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사채업계의 대부니까요.]

'여자 장사로 돈 번 새끼가 무슨 대부? 확 그냥 입에 돈다발을 처박아 버릴라.’

도훈이 박회장을 노려보고 있는데, 갑자기 정장을 입은 무리가 박회장을 보고 우르르 몰려왔다.

"회장님, 귀국 축하드립니다!"

일단에 선 무리가 폴더 인사를 하며 박회장을 반겼다. 도훈은 그 모습에 콧방귀를 꼈다.

'어디 범죄자 새끼가 뻔뻔하게···. 어? 근데 저건 누구야?’

"아빠! 내 가방 사 왔어?"

검은 정장을 입은 덩어리들 사이에서 깜찍하게 생긴 아가씨 한 명이 툭 튀어나와 박회장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박회장은 그녀를 보자마자 반색하며 선글라스를 벗었다.

"아이고, 우리 딸 마중 나왔구나!"

"아니, 내 가방 사왔냐고, 샤넬백!"

"당연히 사 왔지."

"꺄아! 울 아빠 최고!!"

화려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박회장에게 와락 안겼다.

도훈은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로시에게 물었다.

'박회장에게 딸이 있었어?’

[그런 모양이군요.]

'딸이라기엔 너무 어린 거 같은데?’

[늦둥이라도 본 것일까요?]

'호오, 잠깐. 이것 봐라?’

도훈은 공항 밖에 주차된 차를 타고 사라지는 박회장과 그녀의 딸에게 시선을 옮겼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딸은, 추레하게 늙은 박회장과는 달리 멀리서 보아도 굉장한 미인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미션 내용이 뭐라고 했지?’

[의뢰인의 복수를 완성하고, 상대의 가장 소중한 여자를 빼앗는···. 설마 주인님?]

'박회장의 딸도 쓰레기같은 박회장에겐 소중하겠지?’

[으, 음. 딱히 내용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최번개에게 견적 좀 따라고 해야겠군.’ 도훈은 곧바로 흥신소 최번개에게 연락했다. 최번개는 1시간 내로 도훈에게 정보를 전달했다. 최번개가 알려준 박회장의 가족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행님, 알아봤는데 의외로 순정파더군요.

"순정파? 멀쩡한 여자들을 창녀로 팔아넘기는 놈이 무슨 얼어 죽을 순정파?"

-그게 아니라 22년 전 부인과 사별했는데 지금껏 재혼도 안 하고 외동딸하고 단둘이서만 산다고 합니다.

"외동딸이라고?"

-네. 당시 마흔 살이던 박회장이 어렵사리 늦둥이를 보았는데, 출산이 잘못되면서 그 후유증으로 부인과는 사별했다고.

"음···."

-그 이후 다른 여자와 재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의외로 여자 관계는 깔끔한 편이랄까요?

"지랄하고 있네. 그 외동딸에 대한 신상은?"

-평범한 대학생입니다.

"평범해?"

-네. 조직의 일과는 크게 관련 없는 것 같고···. 철없는 부잣집딸로 자란 것 같습니다. 물론 기사겸 경호원 한 명이 붙어 있고요.

"문자로 딸이 다닌다는 대학이랑 소속 학과 남겨놔."

-넵. 근데 무슨··· 아, 아닙니다. 주제 넘었습니다.

통화를 마친 도훈이 공항 대기석에 앉아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상처한 마누라와의 유일한 혈육인데다, 늦둥이로 딸을 낳았으니 아주 금지옥엽이겠구만.’

[그렇겠죠.]

'주변에 따로 정을 준 여자가 없다면 딸이라는 여자애가 유일하게 미션 대상일 수도 있겠어.’

[하지만 가능하시겠습니까? 경호원까지 붙어있다면···.]

'경호원이 수업하는 강의실까지 따라 들어오진 않을 거 아냐?’

그때 최번개에서 문자가 도착했다.

박회장의 외동 딸이 다니는 대학과 학과 정보였다.

'오케이. 박회장에 대한 미션은 딸부터 접수하는 걸로.’

[미션의 첫 번째 조건은요?]

'원래는 최실장 통해서 장부 조작으로 재정에 손실을 입힐 생각이었는데,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할 것 같아. 박회장 딸을 접수하면 더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것 같거든.’

[간만에 주인님의 능력을 발휘하시는 건가요?]

'당연하지. 난 섹서지, 격투가는 아니니까.’

도훈은 웃으며 공항을 나섰다.

저녁에는 나연두 두 명을 상대해야 했기에 벅찬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 * *

"오빠. 집은 언제 보여 줄 거예요?"

"맞아요. 이사했다면서요?"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데 나연과 연두가 쌍으로 졸라댔다. 일부러 외곽에 근사한 레스토랑까지 나왔는데 도로 집으로 돌아가자는 소리에 난감할 따름이었다.

"집은 왜 또?"

"구경하고 싶으니까 그렇죠!"

"맞아요. 남자 혼자 사는 집은 어떤가 보고싶어서요."

"별거 없어."

"치."

"혹시 우리 말고 딴 여자랑 동거하는 거 아니죠?"

연두가 게슴츠레 눈을 뜨며 물었다. 최근 염색을 까만색으로 다시 한 그녀는 단발머리가 무척 잘 어울렸다.

"뭔 소리야. 내가 여자가 어딨다고?"

"모르죠 또."

"맞아. 한 번에 둘을 상대하는 데, 토요일 말고 나머지 날에는 누굴 만나고 다니는지 어떻게 알아요?"

계속되는 투정에 슬슬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동시에 덤빌 때면 서로 먼저 해달라고 조르는 통에 다른 사람과의 섹스보다 배는 힘든 녀석들이었다.

"너희들 진짜 이럴래? 일부러 멀리까지 비싼 음식점 데려왔더니만."

"앗."

"죄송해요."

"그리고 나연이 너. 저번에 학교에서 갑자기 팔짱 끼면 어떻게 해? 남들이 보면 어쩌려고."

"학교에서 오빠 보니까 너무 반가워서···."

"너무 티 내면 곤란해. 알잖아. 내가 너희 둘 이렇게 같이 만나는 거 학교에 소문나면 어떻게 될지."

"절대로 소문 안내요."

"당연하죠. 오빠 곤란할 일은 안 만들게요."

나연과 연두가 곧바로 저자세로 나왔다.

단순한 선후배 섹파도 아니고, 여자 둘에 쓰리썸 섹파는 굉장히 위험한 관계였다. 만에 하나 학과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간 셋다 학교를 그만둬야할 정도의 타격이 될 것이다.

"오래가고 싶으면 서로 조심해야 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네 오빠."

"명심할게요."

"그나저나 요새 학과는 어때? 별다른 소식 없어?"

나는 두 사람에게 학과의 동태를 살피는 임무를 맡겼다. 자질구레한 일까지 모두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명색이 회장인데 학과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파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음, 딱히요?"

"이번 달은 행사도 없어서 잠잠한 것 같아요."

"맞다. 영철 오빠 있잖아."

"영철이는 왜?"

"그 오빠 여친 생긴 것 같더라고요."

"누구?"

누군지 알고 있지만 굳이 물었다. 나연두의 정보력이 어느정도인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음, 일단 우리학교는 아니에요."

"우리학교 학생이 아니라고?"

"네. 들어보니까 어디 여대 다니는 학생이라던데?"

"어떻게 만났대?"

"그것까진 모르겠어요."

"보나마나 길에서 헌팅했겠죠. 그 오빠 엄청 바람둥이라던데."

"그래?"

나연두는 영철이 어떻게 채원을 만나게 됐는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정보력이 딱히 뛰어난 편은 아닌 것 같다. 아니면 영철이가 의외로 입이 무거운 타입일지도.

"암튼 그 오빠 여자친구 사귀고는 밖으로만 나돌잖아요."

"맨날 여친만나러 학교 앞으로 찾아간다나 어쩐다나?"

"별로 중요한 소식은 아니네. 군대 막 전역하고 사귄 여자친구면 얼마나 보고 싶겠어?"

"흐흐. 남자들은 군대 있을 때 다 짐승이라면서요?"

"오빠도 그랬어요?"

"난 뭐···. 지금도 짐승인데?"

"앗!"

"멋져요!"

식사를 마치고 나연두를 차에 태워 이동했다.

도심 외곽에 위치한 러브호텔이었다. 혼숙은 불가라는 말에 방을 연달아 두 개 잡았는데, 나연이 비용을 걱정했다.

"아···. 오빠 저희 때문에 돈 너무 많이 쓰시는 거 같아요. 저녁도 사주시고, 방도 두 개나 잡고."

"맞아요. 다음에는 그냥 저희 집에서 봐요."

물론 돈을 아끼려면 그게 맞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돈을 아낄필요도 없는 데다, 학교 근처에서 둘과 어울렸다가 이목을 끄는게 더 두려웠다.

"괜찮아. 나 요새 돈 많으니까."

"정말요?"

"용돈 늘었어요?"

"아니. 코인했어."

"와!"

"역시 오빠는 못하는 게 없구나."

"얼른 올라가자. 근데 오늘은 누구부터 할 거야? 정했어?"

나연과 연두가 서로를 마주보더니 씩 웃었다.

"오늘은 처음부터 같이요."

"저번 주에 옆 방에서 혼자 기다리는데 너무 힘들더라고요."

키를 두 개 받았지만, 역시 하나는 필요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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