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6. 이사-26-
* * *
"난 이만 퇴근할게. 그럼 수고해."
"고, 고, 생, 뜨힛!"
"고생했다고? 너만 하겠니. 오늘도 밤새워야 할 텐데."
PC방을 나서는 소연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김건은 쉽게 말해 머슴과였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족족 다 하고, 대관절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일꾼으로 부리기엔 좋겠지만, 남자친구라면 답답해 죽을 것이다.
'어휴, 쟤도 참 고지식해가지고는.’
소연을 오늘도 2시간이나 늦게 퇴근했으나, 내일도 한 시간 일찍 나와 건을 조금 쉬게 해줄 생각이었다.
'어쩌겠어. 나라도 챙겨줘야. 저러다 병날 것 같은데.’
물론 소연이 모르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김건은 소연이 퇴근 후 혼자 남게 되면 본인의 초능력을 이용해 잡일을 처리한다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그는 손님이 떠난 자리의 키보드 털기나, 음료수 캔 치우기 등은 손 하나 까딱 않고 염력으로 해치우곤 했다. PC방을 이용하는 대부분 손님들은 게임에 집중하면 알바에게 신경 쓰지 않았으므로, 김건은 대놓고 염력을 사용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물론 PK단 소속으로 능력을 함부로 사용했다간 처벌을 받을 수도 있지만, 사소한 일에 쓰이는 염력 정도는 감지장치에 걸리지도 않았다.
또 그는 특유의 틱증상 때문에 필요시 능력을 사용하도록 허락받은 상태였음으로, 눈치 보지 않고 능력을 발휘하는 편이었다.
대체로 감지장치에 의해 보고되는 경우는 상당한 수준의 능력을 여러 차례 사용했을 경우만 해당되었다.
알바를 끝낸 소연이 퇴근하는데 문밖에 서 있던 사내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 시간 좀 있어?"
소연은 스토커인 줄 알고 흠칫 놀라 쳐다보다가 이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 아저씨!"
창범을 마주한 소연이 우다다 달려들어 그를 확 껴안았다. 창범은 갑작스러운 포옹에 당황해하며 그녀를 밀쳐냈다.
"왜, 왜 이래? 남사스럽게."
"뭐예요 진짜! 연락도 없이! 걱정했잖아요!"
소연이 황급히 그의 얼굴을 살폈다. 조금 수척해지긴 했지만, 상처가 나거나 멍든 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어? 안 다쳤네?"
"뭐?"
"양아치 새끼들한테 두들겨 맞은 거 아니었어요?"
"뭔 소리야? 일주일 내내 새벽까지 특근 뛰다가 뒤지는 줄 알았구만. 오늘 겨우 끝났어."
"특근요?"
"어. 갑자기 주문이 밀려 들어와서. 너네 사장한테는 얘기했는데? 통화 안했어?"
"그렇다고 연락 한번 없어요? 진짜 너무해."
"아, 그게···."
창범이 주머니를 뒤적인 뒤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의 액정은 돌에 찍힌 것처럼 박살 나 있었다.
"일하다 떨어뜨렸는데 화면이 깨져버린 거 있지?"
"근데 사장님하곤 어떻게 통화했어요?"
"이게 신기한 게 전화는 또 되더라?"
"나도 전화했었다고요!"
"그랬어? 몰랐어. 부재중 전화는 안 보여서. 너네 사장이랑도 우연히 통화 된 거야. 나중엔 짜증나서 내내 꺼뒀거든."
"그럼 퇴근해서 고치러 가면 되잖아요?"
"퇴근은 무슨. 공장에서 숙식 해결했다니까. 공장장이 주문량마감될 때까지 어디 나가지도 못하게 해 가지고."
"아···."
소연은 그제야 일주일간 두문불출했던 창범의 행동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었다.
"그럼 진짜로 운동화 환불받은 거였어요? 난 아저씨 돈으로 준 줄 알았는데?"
"뭔 소리야? 내 돈을 왜 줘? 먹고 죽을 돈도 없다."
"그럼요?"
"그때 너 먼저 택시 태워 보내고, 아무리 생각해도 열받더라고.
그래서 놈들을 다시 찾아갔지."
"혼자서요? 아저씨 싸움 못 하잖아요? 두들겨 맞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나이 먹고 싸울 일이 뭐 있어? 가서 딱 말했거든. 너희들 이런 식으로 물건 강매한 거 경찰에 다 신고할 거라고. 지금 전화할 테니까 딱 기다리라고."
"정말요? 그래서 돈을 돌려줬다고요?"
"어. 알고 보니까, 일행 중에 집행유예를 받은 놈이 하나 있었나 봐."
"아!"
"괜히 경찰 와서 일 커지면 자기만 불리해질게 뻔하니까 순순히 돈을 돌려 주더라고."
"난 또···. 아저씨가 돈 받으러 갔다가 맞은 줄 알았잖아요. 그래서 쪽팔려서 저한테 연락 안 하는 줄 알고."
"참나···. 내가 왜 맞아? 근데 너 내 연락 기다렸냐?"
창범이 웃으며 물었다.
소연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 아니거든요?"
"에이, 맞는 거 같은데? 왜?"
"장난해요? 내가 아저씨 연락을 왜 기다리는데? 참나."
소연은 창피한 지 창범을 뿌리치고 먼저 가버렸다.
"비켜요. 피곤하니까 집에 들어갈래요."
"그래. 고생했다. 난 간만에 건이 좀 도와줘야겠다."
"흥!"
소연은 자신을 붙잡지 않는 창범에게 괜히 짜증을 내며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속으로 스스로의 행동을 되뇌었다.
'내가 왜 그랬지? 오랜만에 봤다고 굳이 껴안을 필욘 없었는데 ···.’
소연은 스스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연락이 안 되던 내내 그를 걱정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티 내고 반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절대 내 스타일은 아닌데···. 도훈 오빠가 무섭긴 해도 훨씬 잘생겼고.’
그녀는 창범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도훈을 떠올렸다.
지난주에 보기로 했지만, 일이 꼬이면서 아직도 못 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소연은 자신이 일주일간 도훈을 떠올린 횟수보다 창범을 떠올린 횟수가 훨씬 많다는 걸 자각했다.
'···설마 내가?’
그녀는 부정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도 안 돼. 무슨 그런 꼬질꼬질한 아저씨를.’
소연은 애써 부정했지만, 점점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 * *
간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 도훈은 2층 운동 룸에 올라가 가부좌를 틀었다. 그동안 모은 포인트를 이용해 천상 크래프트에 접속할 계획이었다.
[주인님. 근데 최근 들어 너무 8선녀 위주로만 만나시는 거 아닙니까?]
'어쩔 수 없잖아. 로테이션을 하는 이유가 내공을 증진하기 위해선데.’
[그렇긴 해도 학교 바깥의 인맥도 챙기셔야 하는 거 아닐까요?
아무리 주인님이 마성의 소유자라고 해도 계속 무시했다간 호감도 관리가 어려울 텐데요.]
'그런가?’
[그리고 섹스를 통해 내공을 쌓는 일은 꼭 8선녀가 아니더라도 상관은 없죠. 8선녀를 로테이션 시킨 것은 지속적인 공급원을 갖추기 위함이었으니까요.]
'맞는 말이야. 말 나온 김에 간만에 어장 관리 좀 해볼까?’
[넵. 디스플레이에 어장관리 어플 띄워놓았습니다.]
도훈은 어장에서 관리하고 있는 여자들을 천천히 살폈다.
이제는 손발을 다 합쳐도 못 셀 만큼 많은 숫자가, 그의 화려한 여성 편력을 증명하고 있었다.
'너무 많은데. 보기 쉽게 할 순 없나?’
[그럼 최근 호감도가 많이 감소한 인원들 위주로 정렬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내림차순으로.’
다시 정렬하자 하락된 호감도가 큰 순으로 명단이 재편되었다.
도훈은 최상위에 떠오른 이름을 보고 흠칫 놀랐다.
'조소연? 얘가 왜···?’
소연의 호감도는 다른 사람에 비해 확연히 떨어져 있었다. 도훈이 가진 마성의 지배자 패시브 덕분에, 오랫동안 만나지 않아도 호감도는 잘 유지되는 것에 비추면 의외의 변화였다.
[혹시 지난번 약속을 연속 펑크내서 그런 거 아닐까요?]
'무슨 연속이야? 저번 주 한 번이었잖아.’
[아니죠. 그전에도 조짐이 사납다면서 안 만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봐야 두 번이네.’
[또 일요일엔 연락하기로 해놓고 깜빡하셨고요.]
'아니 그건 소연이가 연락을 줄 줄 알았는데 연락이 없어서···.
어? 이상하긴 한데?’ 도훈은 뭔가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당시 천상크래프트에 접속해 있던 도훈은 연락을 놓친 뒤 다음 날 다시 연락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다음날 소연에게선 별다른 연락이 없었고, 도훈도 먼저 연락이 오지 않는 소연에게 딱히 연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약속이 몇 번 틀어졌다고 호감도가 이렇게까지 하락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건 말이 안 되는데?’
[혹시 소연양에게 다른 남자가···.]
'내 어장에 누군가 침입했다면 경고가 울렸을 거 아니야? 하지만 한 번도 경고는 울리지 않았다고.’
[어장 관리 어플의 경고는 섹슈얼한 이슈로 인해 주인님의 어장이 침범당할 때만 발생합니다. 즉, 섹슈얼한 의도가 없다면 단순히 다른 남자가 접근한다고 경고가 울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가?’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남자랑 일상적인 대화를 하거나 같이 있는 것만으로 경고가 울려댄다면 알림은 하루 종일 수백 번도 더 울렸을 테니까.
[제가 말하려고 했던 바는 소연양에게 다른 남자가 접근했지만, 그 남자가 섹슈얼한 의도가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섰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풉-. 뭐? 순수하게? OP 뛰었던 애한테?’
[음, 주인님은 여자에 대한 편견이 지나친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인님처럼 섹스에 미치진 않았으니까요.]
'아니 그래도···.’
[게다가 그런 소연양을 OP에서 구제해준 사람도 주인님 아니셨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바뀔 수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도요.]
'···듣고 보니 그렇네. 방금 말은 취소.’
[아무튼 이건 제 추측이었습니다. 아무런 변수가 없다면 주인님 말대로 호감도가 급락한 것에 대해 설명하기 어려우니까요.]
'소연이한테 다른 남자라···.’ 도훈은 가부좌를 튼 자세로 머리를 긁적였다. 소연은 김 변호사를 물 먹이기 위해 잠시 파트너십을 맺었던 여자였다. 그러다 오피 생활을 탈피하게 해주려고 집도 구해줬었고.
그랬던 그녀가 이제는 다른 남자와의 썸씽 때문에 호감도가 떨어진다 생각하니 괜한 억하심정이 들었다. 밑바닥에서 구제해 준 것은 자신인데, 결국엔 남 좋은일만 시킨 것 아닌가.
'음. 한 번 연락해 볼까?’
[만나면 다시 호감도는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아직까지 어장안에 있다는 건, 언제든 관계 개선이 가능하다는 반증이니까요.]
도훈은 폰을 꺼내 소연에게 연락하려다 이내 관뒀다.
[왜 그러십니까?]
'생각해봤는데 소연이가 만약 정말로 좋은 남자를 만나고 있다면 그냥 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네? 상대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요?]
'소연이 외모를 보고도 응큼한 생각을 안했다는 것만으로 나쁜 놈이 아닌 건 확실하겠지.’
[아···.]
'소연이를 OP관두게 했던건, 정상적인 삶을 살아보라는 마음에서였잖아. 이제 다른 대학생들처럼 알바도 하고, 열심히 사는데 내가 괜히 끼어드는 게 맞는 가 싶어서.’
[주인님이 어장을 포기하다니··· 별일이 다 있군요.]
'포기하는 건 아니고. 만약 쓰레기 같은 놈이었다면, 당연히 가만 있진 않지. 당장 찾아가서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렸을 걸. 근데, 그건 아니란 거잖아.’
[음···. 그럼 또 방생입니까? 저번에 영철군에게 채원양을 넘기신 것처럼요.]
'방생은 아니지. 채원이는 애정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불쌍한 영철이한테 넘긴 거고, 소연이는···. 암튼 소연이랑은 케이스가 달라.’
[주인님도 관리할 여자가 많아지니 슬슬 손절을 하시는 군요.]
'손절하는 거 아니라니까. 그냥 소연이가 만약 나보다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면 그대로 보내주는 게 맞을 것 같다는 뜻이야. 나 같은 바람둥이보다는 멀쩡한 사람과 정상적인 연애를 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어? 8선녀처럼 주기적으로 챙겨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긴 하죠.]
'대신···.’
[?]
'누군지 몰라도 소연이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눈깔의 먹물을 쏙 뽑아버릴 거니까.’
[하하, 만에 하나 주인님보다 강한 상대면 어쩌시려고요?]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어. PK단이 아니라면.’
[하긴 그렇겠네요.]
폰을 도로 넣은 도훈은 자세를 바로 하고 명상에 잠겼다.
'훈련 시작하자.’
[넵.]
* * *
"네. 일은 잘 마무리되셨습니까? ···네."
통화를 마친 최실장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마카오에 체류해 있던 회장이 조만간 귀국한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연락을 받자마자 곧바로 도훈에게 문자를 남겼다.
-이번 주 토요일, 인천공항. 3시 편.
문자를 보낸 최실장은 혼자 사무실에 앉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씨발···. 내가 조직을 배신한 걸 박회장이 알게 되면 뼈도 못추릴 텐데."
긴장감에 담배를 문 그는 불은 붙이지도 못하고 연신 부싯돌만 튕기는 중이었다.
"아니야. 그때 보여준 싸움 실력이라면 어쩌면 이번엔 진짜 박회장이 당할지도 몰라. 어차피 이젠 돌이킬 수 없어. 그 미친놈이 성공하길 바래야지."
최실장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라이터 불을 응시했다.
* * *
테라스에서 라이터에 불을 켜던 도훈이 짜증을 냈다.
"아, 가스 떨어졌네?"
그는 라이터를 아무곳에나 집어 던지더니 허공에 손을 집어 넣어 지포라이터를 꺼냈다.
[아니, 고작 담뱃불 붙이는데 아이템을 쓰시다니요!]
'없는데 어떻게 해 그럼? 편의점 사러가기도 귀찮구만.’ 도훈은 로시의 만류에도 아랑곳않고 지포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다시 허공으로 손을 쓱 집어 넣자, 그의 손에 라이터는 아공간으로 사라졌다.
"후-. 역시 수련 마치고 피우는 담배가 최고라니까?"
[주인님은 아공간 활용을 참 잘하시는 것 같습니다. 더불어 아이템도요.]
'지금 비꼬는 거 아니지?’
[설마요.]
'알았어. 다음에 라이터 한 박스 사서 창고에 채워 넣을게. 급해서 그런 거야.’
[그나저나 수련하는 동안 최실장에게 연락이 왔던데요. 어쩌실 겁니까?]
'이번 주 토요일? 봐야지. 나연이랑 연두에겐 미안하지만. 어쨌든 후딱 해치워 버리려고.’
[계획은 다 세우신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