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5. 이사-25-
* * *
이사를 마친 도훈은 본격적인 로테이션에 들어갔다.
일주일 동안 8선녀와 집에서 혹은 학교에서 뜨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시간이 조금이라도 비는 날이면 성인 나이트를 들러 포인 트 벌이에 나섰다.
곧 귀국 한다던 사채업자 박회장은 일이 꼬인 것인지 한동안 외국에 체류 중이었기 때문에, 당장 도훈이 해결해야 할 업적은 없는 상태였다.
또 8선녀와 포인트 벌이에만 집중 하다 보니 학교 밖 여자들에 대해서는 연락이 뜸해져 최근 들어선 거의 못 만나는 상태였다.
그중엔 PC방에서 알바하는 조소연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연은 오늘도 긴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일이람?’
그녀는 연락 없는 핸드폰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손님의 호출 에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함께 일하는 건이 대신 가겠다고 나섰다.
"제, 제, 제가···."
"아니야. 내가 갈게. 너 어제도 밤 샜다며."
"괜찮···."
"됐어. 더 자고 오라니까 괜히 인수인계 한다고···. 어휴, 창범오빠는 필요할 때 왜 코빼기도 안 비추는 거야?"
소연은 애꿎은 창범을 흉보며 호출한 자리로 쪼르르 달려갔다.
자기도 10시간 근무의 막바지라 피곤했지만, 야간 알바인 건은 하루 16시간씩 근무를 서는 실정이었다.
인천으로 친척을 도우러 간 대근도 없는 마당에, 벌써 일주일째 창범은 두문불출이었다.
주문을 받고 온 소연은 또 다시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깨톡 창엔 그녀의 일방적인 메시지만 가득했다.
-소연 : 대체 무슨 일이에요?
-소연 : 카뱅으로 돈만 달랑 보냈던데, 정말로 그 자식들한테 환불받은 거 맞아요?
-소연 : 오늘도 대답 없으면 나 진짜 아저씨랑 안 놀아!
-소연 : 아저씨?
-소연 : 장난하지 말고 대답해요. 왜 전화도 안 받는데?
하지만 불러도 대답 없는 메아리였다. 일주일 전 메시지에도 아직 "!"가 남아 있는 걸로 보아, 창범은 전혀 그녀의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전화를 걸면 전화기도 꺼져있었다.
창범이 걱정된 소연이 이틀 전 대근에게 그의 소식을 물었으나, 대근은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뭐? 창범이? 아, 걱정마. 나랑 아까 통화했어. 뭐? 계속 전화기가 꺼져있더라고? 아까 통화할 때 보니까 요새 갑자기 공장에 일감이 밀려 들어왔나보더라. 몇 날 며칠 야근 뛰면서 잔업하고 있대. 어, 사장이 일할 땐 전화기 꺼놔야 한다면서···. 미안, 나지금 급해서 일단 끊어야겠다. 수고 좀 해줘.
사장과는 통화가 된다는 소식에 소연은 안도했으나, 그래도 찝찝한 건 마찬가지였다. 창범이 계속 그녀의 연락을 씹자 소연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나한테 보낸 돈이 혹시 자기 돈이었나?’
창범을 마지막 본 밤.
그는 유난히 표정이 심각했다. 당시 소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어쩌면 그때 일이 창범의 자존심을 건드리진 않았을 까하는 걱정이 들었다.
'맞어. 창범 오빠가 정말로 돈 돌려달라고 양아치들을 찾아갔을 수도 있잖아. 근데···. 일이 생각대로 안 풀린 거지. 시비가 붙었고, 창범 오빠가 심하게 맞았다면?’
얼굴을 맞아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가 지금까지 얼굴을 비추지 않는 게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했다. 그 와중에 돈을 돌려받았다고 자기한테 허세를 부렸으니, 그게 마음에 걸려 일부러 피하는 것이라고.
'흐음···. 분명히 그런 걸 거야. 싸움도 못하는 아저씨가 자존심만 드럽게 세 가지고는.’
소연은 혼자 고생하고 있는 건을 돕기 위해 창범 걱정은 그만하기로 했다. 당장 알바생 둘이서 피씨방을 돌리기도 역부족이었다.
"네, 가요!"
* * *
일주일 전.
창범은 무심한 표정으로 길바닥에 널부러진 양아치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벌써 두 놈은 칼을 맞아 절명하고, 광인으로 변한 양아치와 칼든 녀석의 사생결단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의 세뇌는 너무 강력했기에, 칼을 든 양아치는 상대의 숨통을 끊을 때까지 무자비한 공격을 계속할 기세였다.
하지만 이미 두 사람이나 해치우느라 심각한 부상을 당한 놈은 미치광이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했다. 끝내 모두 죽고 남은 미치광이가 눈이 반쯤 뒤집힌 채로 창범에게 다가왔다.
"죽어, 죽어, 죽어!"
미치광이의 마지막 타깃은 창범인 것 같았다.
하지만 창범은 조용히 발치에 있던 신발을 집어 녀석에게 건넬뿐이었다.
"이봐, 죽는 건 너지. 어차피 이 상태로 경찰에 잡혀가면 무기 징역 일텐데 말이야. 평생 감옥에서 썩을 생각은 아니지?"
"?"
창범의 말을 들은 미치광이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손에 든 칼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우울한 표정으로 운동화를 집어 들어 신발끈을 풀기 시작했다.
"그래. 어쩌면 죽는 게 사는 것 보다 나을지도 몰라. 나도 가끔 그런 생각하거든."
"······."
미치광이는 놀랍도록 침착한 표정으로 조금씩 신발 끈을 풀어 헤쳤다. 하얀 신발 끈에 그의 손에서 묻어 나온 피가 덕지덕지 묻었다. 신발 끈을 모두 풀어낸 미치광이는 고개를 들어 창범을 응시했다. 마치 허락을 구하는 듯한 동작에 창범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제 목에 신발 끈을 감은 미치광이가 스스로 목을 졸랐다. 손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남은 끈을 손등에 돌돌 감으며 온 힘으로.
"쿠에엑!"
"할 수 있어. 꼭 목을 매야만 교수형이 가능한 건 아니거든. 죽을 의지만 있다면 제 손으로 목을 졸라 죽는 것도 가능하단 말이지."
창범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놈은 신발 끈이 목의 피부를 파고들 때까지 계속 졸랐다. 이마엔 핏대가 서고 두 눈의 실핏줄이 터져나갔지만, 놈은 끝까지 조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감아쥔 손등마저 끈이 파고들었다.
"컥컥! ···꺽!"
끝내 놈이 쿵 하고 쓰러졌다. 선 채로 뒤로 넘어진 놈은 돌바닥에 후두부를 찧었는지 머리에서 줄줄 피를 흘렸다.
창범은 이마를 긁적이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렇게 되면 최종 사인은 교살이 아니라 뇌진탕이려나?"
성인 남자 넷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데도 창범은 조금도 위화감 없이 그들 사이에 서 있었다. 시체들 한가운데서도 전혀 어색해하지 않는 그였다.
그는 오직 죽은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할 뿐이었다.
"음···. 목격자가 없도록 통제를 하긴 했는데, 이제 이걸 어찌 한다."
그는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을 텔레파시로 조종해 무조건 골목을 지나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사건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시체들을 치우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이미 손목에 찬 스마트 밴드에선 간헐적인 울림이 오고 있는 상황.
이는 PK단을 드러내는 표식이기도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단원의 무분별한 능력 사용을 감시하기 위한 장치였다.
해당 장치에는 능력을 사용할 때 생기는 특별한 에너지파를 감지해, 본부로 알리는 기능이 있었다.
"음···. 시체 처리보다 징계부터 걱정해야 하려나?"
난처해진 창범은 대장에게 연락을 하려다 문득 대근이 인천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중요한 임무를 띠고 험지로 차출되어 가는 그에게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은 결코 현명하지 않을거라는 판단이었다.
'음, 대장에게 폐를 끼치는 건 곤란하지. 그 양반이 겉으론 툴툴거려도 속은 물러 터졌으니까.’
대근에게 말했다간 그는 당장 모든 걸 때려치우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무나 미안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지. 마뜩잖지만 미호에게 연락하는 수밖에.’
창범은 미호를 호출했다.
긴급 호출을 받은 미호가 20분 내에 현장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인데? 또 장난이면···. 장난이 아니네?"
사건 현장을 목격한 미호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창범을 쳐다보았다.
"너, 괜찮은 거야? 다친 거 아니지?"
"당연하지. 민간인들이야."
"미, 민간인? 미쳤어 너?"
자초지종을 들은 미호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창범을 나무랐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민간인을 이렇게 까지···."
"도저히 화를 참을 수 없더라고. 미안, 미호씨."
"넌 진짜···. 평소엔 그렇게 냉철한 애가···. 어휴. 이 일을 어쩌면 좋아."
"징계 받으면 돼. 각오한 일이야."
"창범아. 민간인 넷이 죽었어. 중징계를 피할 순 없을 거야. 자칫하면 파면 당할 수도 있다고."
미호가 자기 일처럼 열을 올렸지만, 도리어 창범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당하면 당하는 거지."
"파면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그래? 능력은 폐기되고, 단원으로서 더 활동할 수 없다는 뜻이야. 기억도 모두 소거된다고!"
"알아."
"아니 그런데 어쩜!"
미호가 답답한지 발을 동동 굴렀다. 오히려 창범은 이미 내려놓은 사람처럼 평온한 표정이었다.
"됐어. 어차피 이 생활 오래 못할 줄 알았어. 역시 사람은 적성에 맞는 일을 했어야했는데···. 그나저나 기억까지 모두 잃게 되면 미호씨랑도 영영 안녕이겠네. 대장도 그렇고···."
창범은 가장 먼저 소연을 떠올렸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런 말 하지마! 방법을 찾아봐야지!"
"이미 늦었어."
"늦었다니?"
"본부에서 계속 호출 오는 중이야. 앞으로 30분 안에 능력 사용사유를 소명 못 하면 감찰단에게 내 신상이 넘어갈 거야."
창범이 손목에 찬 밴드를 들이밀며 말했다.
이를 본 미호가 눈빛을 번뜩였다.
"개 목걸이."
"그래, 딱 맞는 표현이네. 개 목걸이. 우릴 사냥개로 만들어주는."
"아니. 난 없잖아."
미호 역시 팔목을 내밀었다.
창범의 팔에 있는 게 그녀에겐 없었다.
"응? 혹시 대장처럼 발찌로 차고 있는 거 아냐? 그 양반 성범죄자로 오해받을 거라고 했는데도 끝까지 발찌 타입으로 차더라. 손에 뭐 차고 있으면 불편하다면서."
"아냐. 난 처음부터 안 받았어."
"안 받았다고? 정말?"
"어. 너도 알잖아. 내가 어떤 존재인지."
미호는 인 외의 존재인 구미호였다.
그것도 400년 이상의 수명을 자랑하는.
"알지. 구미호라는 건."
"나는 정확히 말하면 용병이나 마찬가지야. 애초에 PK단 소속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맺은 계약관계라는 거지. 너희들처럼 충성서약을 한 게 아니거든."
"아···. 그래서···."
"난 힘을 어떻게 써도 제약을 안 받는다는 뜻이야. 물론 인명을 살상하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때문에 미호는 생명유지를 위해 정기를 흡수하되 절대 사람을 해치지 않는 다는 단서를 달고 있었다.
"자, 잠깐만 설마···."
"내가 죽인 걸로 해. 이 녀석들."
"뭐라고?"
"놈들이 내가 평범한 여잔 줄 알고 으슥한 곳에 데려가 성폭행하려고 했다고."
"그, 그런 변명이 먹히겠어? 미호 네가 고작 민간이 넷에게 성폭행을 당한다는 게."
"칼로 협박했다고 하지 뭐. 가뜩이나 짜증나는데, 하필 초아가 튀어 나왔다고."
"초아라면···."
"광년. 내가 거둔 영혼 중에서 가장 악독한 계집애야. 실제로 사람을 많이 죽이기도 했었고."
"그, 그래도··· 네가 대신 징계를 받는 거잖아."
"잊었어? 정당 방위는 정상참작 된다는 거. 어때? 그럴싸하지 않아?"
창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를 위해 네가 희생할 필욘 없어. 내가 벌인 일은 내가 책임져."
"아니. 누구도 책임질 필욘 없어. 이 건은 정당방위로 벌어진 불가피한 사고이고, 너는 뒷일을 수습하기 위해 현장에 도착한 셈이니까."
"하지만 누가봐도 이건···. 이건 네 솜씨가 아니잖아."
"증거는 없애버리면 돼."
"어, 없애다니?"
미호가 갑자기 품에서 부적을 꺼냈다.
그녀가 수인을 맺자 갑자기 부적이 네 사람의 시체로 날아가더니 몸에 철썩 달라붙었다.
"지옥불, 업화!"
화르륵!
수인을 맺고 주문을 외우자 순식간에 시체 네구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지옥의 고열은 삽시간에 시체들을 재로 만들었다.
"으, 으앗! 뭐, 뭐하는 건데?"
"태웠어. 내 스타일로."
"아, 아니 그럼···."
"창범. 너는 증인으로 불려 갈 거야.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대원이니까. 진실을 실토케 하려고 정신조작을 가할지도 모르고.."
"정신조작이라면···."
"맞아. 넌 정신조작에 면역이지. 단원들은 네가 얼마나 강력한 최면술사인지 모르고 있어. 나랑 너만 입다물면 이 일의 실체는 절대로 드러나지 않아."
창범은 혼란스러웠다. 미호를 부른 이유는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서였지, 그녀에게 자신의 일을 덮어달라는 의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미호의 말은 결과적으로는 PK단의 규율에 반기를 들자는 소리와 똑같았다.
"이건 아닌 거 같아. 생각없이 벌인 일이 아니야. 난 책임질 생각이었어."
"아니. 책임질 필요 없어. 쓰레기 좀 치웠다고, 환경미화원을 처벌하는 법이 어딨어? 이런 사소한 일로 파면당할 필욘 없어. 감찰만 무사히 넘기면 아무일 없을 거야."
"······."
"할 수 있지?"
"왜, 왜 그렇게 나를···."
"우린 한 팀이잖아."
미호가 창범의 손을 꼭 붙잡았다.
창범은 여전히 갈등했으나 그녀의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쓰레기 좀 치웠다고, 환경미화원을 처벌하는 법이 어딨어?
창범은 끝내 결심을 굳혔다. 기억을 소거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대근도, 미호도, 그리고 신참인 김건도. 무엇보다 소연과의 추억도 모두 지워진다는 뜻이었으니까.
"···본부에 연락할게."
창범이 감찰단의 집요한 추궁에서 벗어나 본부에서 풀려난 것은 일주일만의 일이었다. 미호는 과잉 대응을 사유로 경징계가 내려졌으나, 정식 대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구두 경고에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