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311화 (1,278/2,000)

1294. 이사-24-

* * *

어느 날 문득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들렸다.

<뭘 쳐다본담, 재수 없게?>

<꼰대 담탱이 새끼. 학생이 지각 좀 할 수 있지.>

<아···. 오늘 면접 꼭 붙어야 하는데···.>

지독하게 무더웠던 어느 여름, 지하철 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 신촌에 가는 길이었다. 처음엔 듣고 있던 라디오에서 잡음 흘러 들어 온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귀에서 이어폰을 뺐는데도 이상한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목소리의 숫자가 늘어나고, 더 커졌다.

"뭐, 뭐야? 이 소린?"

당황한 나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다 옆에 있던 여학생을 팔꿈치로 건드리고 말았다. 하필 가슴 부근이라 뭉클한 촉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성추행으로 오해할만한 상황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미안한 마음에 고개 숙여 사과했지만, 여학생은 대꾸도 않고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설 뿐이었다.

<…씨발, 변태 새끼. 일부러 그런 거 아니겠지?>

그 목소리가 뇌리에 꽂힌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 머릿속에 들리는 소리의 정체가 바로 근처에 있던 사람들의 생각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놀랍고 혼란스러웠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능력은 기쁨보다는 두려움이었고, 당시 평범한 대학생이던 나에게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명이 들리는 정신병이나 귀신이 들렸다는 걱정마저 들었다.

친구와의 약속을 취소하고 도망치듯 다음 역에서 내렸다.

마침 출구 쪽 방향에 남산이 있었고, 나는 머릿속을 파고드는 목소리를 피해 도망치듯 산을 올랐다. 그렇게 사람이 없는 곳을 향해 땀을 뻘뻘 흘리고 올라간 남산 타워 위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많이 놀랬나 보군. 하긴 능력 개화를 시작할 땐 대부분 혼란스러워 하더라."

사내는 엄청난 미남이었다. 영화배우가 아닐까하는 착각이 들정도였는데,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도 그런 얼굴의 배우를 본 적은 없었다.

"누, 누구세요?"

"워워. 긴장 말라고. 난 네편이니까. 잠깐 내 소개를 하지. 나는 PK단의 스카우터 진이라고 해. 성녀님의 계시가 이번에도 맞았군."

처음 본 잘생긴 사내가 느닷없는 얘기를 시작했다. 플레이어니, PK단이니, 초능력이니 하는 당시엔 도저히 알 수 없는 내용 뿐이었다.

나는 그를 피해 도망치듯 산을 내려 왔고, 다행히도 그는 나를 뒤쫓지 않았다. 다만 아주 먼 거리에서 나에게 이렇게 전할 뿐이었다.

<개화가 시작된 능력은 점점 강해질 거야. 앞으로 일어나는 일에 너무 놀라지 말라고. 참, 나를 다시 만나고 싶으면 언제든 연락해. 내 번호는···.>

잡음처럼 들리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와 달리, 사내의 목소리는 머릿속으로 또렷하게 들려왔다. 마치 눈앞에서 말하는 것 같지만, 그와 나의 거리는 100M가 넘게 떨어진 뒤였다.

후에 나는 그것이 텔레파시의 일종인 전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진의 말처럼 나의 능력은 하루가 갈수록 계속 발전했다. 무턱대고 남의 생각을 읽던 것에서 벗어나, 생각을 읽는 능력을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계속 연구를 하다보니 몇 가지 숨겨진 능력도 더 발견했다. 그중 가장 놀라웠던 것은 내가 타인을 멋대로 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손을 대면 그 사람의 과거는 물론이고, 무의식 속에 숨겨놓았던 모든 비밀을 낱낱이 파해 칠수도 있었다. 나는 점점 나의 능력에 심취했고, 나중에는 내가 영화 속에 나오는 히어로가 아닐까 하는 망상에 빠졌다.

그쯤 이르자, 능력이 생긴 첫날 나에게 접근했던 '진’이라는 미남자가 떠올랐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읽고 심지어 조종도 할 수 있어. 그런데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오직 나 혼자 뿐일까? 진이라는 사람도 분명 나와 같은 능력자였던 것 같은데.’

나는 질문의 답을 찾고 싶었다.

또 갑자기 생긴 능력이라면, 언제든 갑자기 없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이 능력의 대가가 무엇인지 알길이 없었다. 능력을 쓰면 쓸수록 수명이 줄어든다던가, 아니면 능력에 중독되어 악마로 변하는 저주가 걸려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결국 나는 그때 진이 알려준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처음 능력을 개화하고 반년이 지난 뒤였다.

"···여보세요?"

-어때, 생각이 좀 바뀌셨나? 지금 만날까?

"지, 지금요?"

통화를 하던 중 진이 우리 집 원룸 방문을 태연히 열고 들어오던 순간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등장이었다.

"대, 대체 어떻게?"

"세상에 능력자가 너만 있는 건 아니지. 명심해. 넌 이제 겨우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딛었을 뿐이니까."

진이 차분히 설득을 시작했다.

그의 말을 요약하자면 다음의 내용이었다.

능력자 중엔 좋은 능력자와 나쁜 능력자가 있다.

좋은 능력자는 필요할 때만 능력을 쓰고 절제하며, 나쁜 능력자는 자신의 이익에 따라 언제든 능력을 휘두른다고 했다.

또 좋은 능력자는 세상을 구하는 일을 하며, 나쁜 능력자는 세상을 파괴한다고 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를 마친 그가 내게 제안했다.

"너는 어떤 능력자가 되고 싶어?"

같잖은 정의감에 진의 꾀임에 속아 PK단에 입단한지 3년이 지났을 때.

일이 손에 익고, 플레이어 사냥도 몇 번 하다보니 나는 점점 P K단 활동에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어째서 좋은 능력자라고 불리는 우리는 가난하고 고통받고, 이 기적인 나쁜 능력자들은 떵떵거리며 하고 싶은 데로 산다는 말인가? 말은 안 했지만, 다른 단원들도 비슷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놀라울 만큼 대단한 능력을 지닌 것치곤, 현실의 삶은 늘 고달팠으니까. 고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점점 회의감에 빠졌다.

뭔가 방향을 잘못 정한 것은 아닐까, 나의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이었을까 하는 후회였다.

'지금이라도 다 관두고 평범하게 살까? 하지만 단원을 그만두려면 능력을 모두 폐기해야 한다는데···.’

가입은 자유지만, 탈퇴엔 희생이 따랐다.

마치 조폭과 같은 운영방식이었다.

다만 손가락이 아니라, 빼앗기는 게 능력이라는 게 다를 뿐.

처음부터 꼬임에 빠져들지 않았다면, 이런 말도 안되는 노예계 약엔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능력이 너무나도 매력적이었기에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어째서 나에게 이런 능력이 주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있다 뺐기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조직의 규율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만다. 민간인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는 원칙을 어기고, 분쟁에 휘말린 것이었다.

나로선 능력을 남용해 세상의 무질서도를 높인다는 플레이어보다, 당장 어깨 한번 부딪혔다고 노약자를 죽일 듯 폭행하는 양아치가 더 나쁜 놈으로 보였다.

나쁜놈을 응징한다는 정의감으로 PK단에 소속된 만큼, 눈앞의 불의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결국 민간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영구 손상을 가한 죄로, 나는 중징계를 받았다.

무려 6개월간의 독방 생활.

능력의 발휘가 통제된 특수 감옥 안에서 반년간을 홀로 보내는 형벌이었다.

그나마도 독방형으로 감해진 것은, 그간 나의 공적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자칫 폐기처분 될 수도 있던 나를, 많은 동료들이 변호해 주었다.

누구나 한 번쯤 실수를 할 수 있는 거라며, 아직 어린 단원에게 강한 징계를 내리는 것보다 반성하고 다시 만회할 기회를 주는 것이 낫다면서.

나는 독방 안에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대관절 플레이어가 일으킨다는 무질서도의 증가는,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인가?

정말로 그들 때문에 우리 지구의 멸망이 가속화 되는가?

그것은 누가 증명했고, 또 누가 검증하는가?

어쩌면 PK단이나 플레이어나 우리보다 위에 있는 존재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하지는 않는가? 하는 것들이었다.

나는 끝내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기나긴 독방 생활을 끝내고 나온 후에는 모범적인 단원으로 거듭났다.

마침내 PK단의 존재 의의를 깨닫게 되었냐고?

아니다.

그들은 정신교육이라는 명목으로 독방 기간 동안 끊임 없는 세뇌를 가했다. 다만, 그들이 실수한 것은 내 정신력이 그들의 생각보다 튼튼했기 때문이었고, 내가 가진 특별한 능력상 결코 정신조작에 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이들의 의도는 명확했고, 그것을 거부했다간 나의 신상에 결코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또한 한 번 겪은 형벌을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능력이 봉인된 상태의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어쩌면 PK단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중된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닐까?

나는 지금도 답을 못 찾고 있다.

* * *

"하- 씨발, 요새 아저씨들은 하여간 겁대가리가 없단 말이지?"

"아저씨. 영화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유? 객기부리다 맞아 죽는 수가 있다고."

"야. 말로 해선 안 되겠다. 센타 까자."

4명의 양아치 무리가 창범에게 달려들기 직전이었다.

창범이 네 청년을 무섭게 쏘아보며 소리쳤다.

"그대로 정지."

"응?"

"뭐래냐?"

"엉? 야, 나 발이 안 움직이는데!"

"앗, 나도!"

"미, 미친 새끼 우리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창범에게 달려들던 4명은 갑자기 마네킹이 된 것처럼 딱딱히 굳어 버렸다. 창범은 타인의 뇌를 조작할 수도 있었는데, 소뇌의 운동신경을 마비시키면 사지 멀쩡한 사람마저 마취가 된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 수 있었다.

창범은 석상처럼 굳은 놈들의 이마를 한명씩 차례로 짚었다. 싸이코카네시스라 불리는 그의 또다른 능력이었다.

"내 죄책감을 덜기 위해 네놈들의 악행을 잠시 들여다 봐야겠다."

"······!"

"···!!!"

사지가 마비되었던 놈들은 이제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그저 창범이 차례로 이마를 짚고 가는 것을 눈을 부릅뜨고 지켜 볼 뿐이었다.

"…예상대로 쓰레기 새끼네. 미성년자 성매매 알선? 그것도 고등학교 때?"

"?!"

"어쭈. 이건 또 뭐야? 차량털이, 특수 절도, 폭행, 협박. 아주 잡범 중의 잡범이구만?"

창범은 양아치들의 심연을 들여다보며 그들이 평생 동안 행한 악행의 흔적을 낱낱이 읊었다.

소년원 출신이라는 말이 뻥이 아니었던 듯, 실제 두 놈은 같은 소년원 출신의 동기였고, 나머지 놈들 역시 미성년자 때 범죄를 저질렀으나 보호관찰 처분을 받았다.

"강간에 강간미수, 폭행, 협박, 절도···. 너희들 아주 살인만 빼고 다 해봤구나?"

창범의 눈빛이 짜게 식었다.

그의 정신공격은 생각만으로 한 사람을 자살로 이르게 만들만큼 강력했기에 민간인을 상대로는 절대 쓰지 않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 이미 PK단의 규율 따윈 사라져 있었다. 그는 시방 고삐 풀린 망아지였고, 절제력을 잃은 한 마리 야수였다.

심지어 상대는 갱생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오늘 일만 보아도 언제든 나쁜 짓을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는 예비 범죄자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을 막지 않으면, 결국엔 다른 선량한 이들이 피해를 받을 것이다.

창범은 싹수를 잘라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쁜놈들을 처단하는 것이, PK단의 사명이었으므로.

"너희들의 화려한 범죄 이력에 살인도 하나쯤 추가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너네 같은 새끼들은, 별 달고 나오는 걸 자랑으로 여긴다면서?"

"무, 무, 무!!!"

창범의 마법에 놀란 양아치 하나가 쥐어짜듯 목소리를 냈다.

그에게 짝퉁 신발을 판매장 장본인이었다. 창범의 마비 능력은 무한대로 걸리는 게 아니었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풀리게 되었는데, 입부터 마비가 풀린 것이었다.

답답했는지 창범이 그가 말 할 수 있도록 입을 허락했다.

"무슨 짓이야! 얼른 풀어줘!"

"아까 기세는 어디 가고…. 왜? 이제 와서 겁나나?"

"개소리 마! 내가 너 따위···."

창범이 쓰윽하고 그의 눈을 응시했다. 검은 그의 동공이 내부에서 소용돌이쳤다. 세상에 악마가 있다면, 바로 그런 눈빛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독한 공포.

심연에서 스멀스멀 피어난 본능적인 두려움이 순식간에 양아치의 내면을 잠식했다. 인간의 감정을 마음대로 조정하는 최면술사의 위력은 엄청났다. 순식간에 항거할 수 없는 공포에 질린 양아치가 입에 개거품을 물었다. 패닉에 빠진 놈이 끔찍한 비명을 질러댔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사내는 공포에 질려 미쳐버렸다.

아마도 다시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없으리라.

창범은 이번엔 다른 사내들을 향해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너희들은 평소 은원관계가 복잡하더군. 몸 싸움을 한 적도 몇 번 있고 말이지. 하긴, 범죄자 새끼들에게 의리가 어딨어? 그치?"

겁을 집어 먹은 양아치들 앞에서 창범이 계속 말했다.

"술도 먹었겠다 홧김에 실수로 사람을 찌를 수도 있는 거잖아.

마침 장난감으로 칼을 들고 다니는 놈도 있고."

"으!으!으!"

"사, 사 살려!"

창범이 손가락을 튕기며 동시에 마비를 풀었다.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그의 정신 조작은 면역이 없는 사람에겐 최악의 무기였다.

순식간에 분노에 휩싸인 양아치들은 서로 죽일 듯 싸움을 시작했다.

창범은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양아치에게서 소연의 월급봉투를 빼앗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아마도 그들은 창범을 다시 만났다는 사실도 기억 못할 것이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