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3. 이사-23-
"와, 진짠가 보네? 혹시 그건가?"
"뭐, 뭐?"
"40살까지 못해본 남자."
"야. 나 아직 서른도 안 됐어!"
"헐! 20대였어요?"
"아, 아니 만으로 스물 아홉."
"그럼 서른 넘은 거잖아?"
"아, 암튼."
"법사네 법사!"
"법사라니?"
"오빠 마법사 맞죠?"
소연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물었다. 술 때문에 살짝 졸린 듯 눈이 풀린 모습조차 놀랍도록 귀여웠다. 하지만 창범은 방금 그 질문에 술이 확 깰 정도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알았지?’
PK단 멤버인 그는 최면술사였다. 좀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정신 조작 쪽이긴 하지만 큰 카테고리 범위 안에선 메지션 계열에 들어갔다.
'정체를 들키면 안 되는데….’
창범이 어처구니없는 고민을 하고 있는데 소연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푸하하하, 진짠가 봐. 완전 쩐다 이 오빠. 언제부터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거예요?"
"무, 무슨 소리야?"
PK단은 민간인을 상대로 능력을 쓰지 못한다. 이는 플레이어와 엄격히 차별되는 제약이다. 함부로 능력을 쓰는 것은 이 세계의 멸망을 앞당기는 '엔트로피 증가’ 행위로 간주되어 적발 시 징계처분이 내려진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소속이나 신분을 들킬 우려가 있거나, 정당방위의 경우는 제외하고 있다. 창범은 소연을 입막음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남자가 스물다섯까지 동정이면 마법사가 된다면서요. 대충 그럼 5년 전부터인가?"
소연이 술김에 농을 던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창범이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이다. 헛소리였구나.’
"장난 치지 마. 나 마법사 아냐."
"진짜? 진짜로 해봤어요? 첫 경험이 언젠데요?"
소연은 오늘따라 과하게 치근덕거렸다.
도훈에 대한 실망감과 서운함에서 비롯된 반발심 때문이었다.
또한 그간 쌓여있던 성욕을 술기운을 빌어 분출하고 있었다. 술에 취한 사람은 때론 실수도 할 수 있는 법이니까.
"어린 게 못 하는 말이 없어. 그런 걸 왜 물어?"
창범은 들이대는 소연을 계속 밀어냈지만, 소연은 막무가내였다.
"헤에-. 나는 알려줄 수 있는데."
"뭐, 뭐? 너 취했어?"
"안 취했는데?"
"이상한 소리 하는 거 보니까 완전히 취했네. 그만 마시고 집에 들어가자."
그러자 소연이 불쑥 창범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무 가까워 하마터면 입술이 맞닿을 뻔했다. 창범의 입가로 소연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히히, 나도 마법 쓸 수 있는데."
"뭐, 뭐?"
"한 달에 한 번 뿐이지만."
"야!!!"
장난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던 창범이 소연의 이마를 밀어냈다.
"떨어져 좀!"
"우씨, 오빠 진짜 고자예요?"
"뭐래!"
창범은 씩씩거렸지만, 그 순간 심장박동이 피크를 찍었다. 아직도 소연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여자는 요물이라더니, 나이도 어린 것이 발랑 까져가지고는.’
창범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소연에게 말했다.
"앞으로 너랑 술 절대 안 마실 거야."
"흥, 나도 됐거든요?"
소연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화장실요! 왜? 여자 화장실까지 따라오시게? 흥!"
소연이 메롱 입술을 내밀더니 화장실로 향했다. 그러나 다리가 풀렸는지 비틀거리다 걷다가 테이블에 앉아있던 남자의 발을 실수로 밟고 말았다. 발이 갑자기 튀어 나왔기에 어쩔 수 없었다.
"앗, 죄송합니다."
"아씨! 뭐야 진짜."
덩치 큰 사내가 버럭 짜증을 냈다. 그러다 소연의 얼굴을 확인 하더니 안면을 바꾸어 희롱하기 시작했다.
"어쩔 거야 이거?"
사내가 신은 하얀 운동화엔 소연의 발자국이 살짝 남아 있었다.
옆에 앉은 불량한 친구들이 사내를 거들었다.
"와, 그거 나이끼 한정판 아니냐?"
"100만원 넘는 건데 신자마자 테러당했네."
행색을 보아하니 동네 걸달로 보이는 양아치 무리였다. 그들은 소연의 예쁘장한 얼굴을 보고는 마음이 동했는지 시비를 걸어왔다.
하지만 소연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일찍부터 험하게(?) 자랐던 그녀는 어지간한 양아치 정도에는 기가 죽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미안하면 세탁비라도 주던가?"
"그래. 한 20만원이면 되겠네."
"야. 30은 줘야지. 아님 뭐 데이트라도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고."
사내들은 연신 낄낄거리며 소연을 희롱했다.
"뭡니까?"
그때 창범이 소연에게 다가왔다. 창범은 키가 180에 이르긴 했지만, 상대적으로 깡말라 체격이 왜소해 보였다. 양아치 무리는 숫자도 4명인데다 하나같이 돼지처럼 덩치가 좋은 편이었다. 그들에게 창범은 한 주먹 거리도 안되어 보였다.
"이쪽이 당신 여자친구야? 그럼 당신이 대신 물어내면 되겠네?
이것 보라고. 나이끼 신상 한정판 신발에 테러를 했다니까?"
사내가 건들거리며 발을 내밀었다.
소연은 놈들이 시비를 건다는 걸 알고 창범에게 말했다.
"무시해요, 오빠. 제가 사과했는데 계속 시비걸고 있어요."
"뭐? 시비?"
"야. 사과 할거면 진심을 보여야지. 어디서 입으로 때우려고?"
그러더니 놈이 소연을 새끈한 몸매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휘파 람을 불었다.
"…하긴, 입으로 때워도 되겠네."
"그러게. 입도 괜찮지."
양아치 한놈이 오라를 하는 것처럼 입을 'o’모양으로 벌린 체고개를 앞뒤로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양아치가 배를 잡고 낄낄거렸다. 창범은 순간적으로 살기가 솟구쳤다.
'이 돼지 새끼들을 확 그냥!’
그러나 옆에 소연이 있었기 때문에 당장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가게에 다른 손님들도 있었고, 일이 커지면 곤란해지는 쪽은 오히려 그였다.
"그쯤 하시죠. 얼마 변상해드리면 됩니까?"
"야야. 남자친구분이 대신 변상해 주신덴다."
"30만원은 줘야지."
"오빠. 그냥 무시하라니까요?"
창범이 고분고분 놈들의 말을 따르자 소연은 어이가 없어 중간에 끼어들었다.
"어허, 아가씨는 빠지고."
"그러게. 어른들 얘기하시는데."
"근데 여친이 맞긴 한 거야? 나이 차 완전 나 보이는데 원조 교제 같은 거 아니고?"
계속되는 조롱과 시비에 창범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말아쥔 주먹에 손톱이 박힐 정도였다.
"뭐? 이게 어따 대고 막말이야!"
욱하는 성정이 있던 소연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특히 원조교제 운운하는 것은, 과거 그녀 잊고 싶던 기억을 들추는 발언이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손이 나가고 말았다.
소연이 휘두른 손이 덩치의 뺨을 갈기기 전.
창범이 그녀의 손목을 공중에서 붙잡았다.
"하지 마."
"놔, 놔요! 내가 이런 소리 듣고 참아야 겠어요?"
"…그래도 하지 마. 먼저 때리면 폭행이야."
"푸하하하하!"
너무나 진지한 창범의 말투에 양아치 무리가 폭소했다. 창범을 조롱하며 말투를 흉내 내는 놈도 있었다.
"먼저 때리면 폭행이양!"
"푸하하하! 무서워서 살겠냐."
"이것들 쌍으로 웃기네. 아저씨, 우리가 좆으로 보여?"
"좋게 말로 하려고 했더니 안 되겠네 진짜!"
덩치 한 놈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범보다 키가 10cm는 더 커보이는 굉장한 거구였다. 하지만 창범은 놈의 덩치를 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는 양아치 무리를 보고 정중하게 말했다.
"남의 가게에서 괜히 소란 피우지 말고 그맙합시다. 내가 운동화값 보상해 줄 테니. 얼마라고요?"
"30만원. 아니지. 그냥 이거 아저씨가 사면 되겠네. 내가 특별히 150에 줄게."
"와, 싸다 싸."
"리미티드에 150이면 거져지."
"당근마켓 실시간이야 뭐야? 대박이네."
소연은 창범이 사내들에게 쫄아서 그런지 알고 몹시 실망했다.
만약 덩치가 좋고 인상이 더러운 도훈이었다면 반대로 놈들이 꼼짝 못 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보통 사람인 창범에게 그런 모습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오빠가 왜 돈을 줘요. 됐어요. 차라리 내가 줄게요."
마침 월급 받은 게 있었던 소연은 욱하는 마음에 가방에서 흰봉투를 꺼냈다. 한 달간 하루 8시간씩 꼬박 일하고 받은 피씨방알바비였다. 돈 봉투를 본 양아치 한 놈이 소연의 손에서 휙 봉투를 낚아챘다.
"오, 두툼한데?"
"야. 진짜로 돈이야?"
봉투를 벌려보니 5만원권 신권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봉투에는 150보다 더 많은 현금이 들어있었지만, 소연은 자존심도 상하고 구차하게 얘기하고 싶지 않아 창범의 손을 잡고 말했다.
"오빠, 가요. 돈 줬으니까."
소연이 창범을 억지로 데려나가는데 갑자기 뭔가가 날아와 창범의 등짝을 때렸다. 창범이 고개를 돌려보니 벗겨진 신발 두 짝이었다.
"아저씨. 거래 끝냈으니 가져가야지. 잘 신으라고. 발 냄새 좀 나겠지만 말이야. 푸하하하!"
"……."
창범은 입술에 피가 날 정도로 이를 꽉 깨물었다. 그러나 초인적인 자제력으로 신발을 두 손에 집어 들고는 소연과 함께 가게 밖으로 나왔다.
"돈은 왜 줬어?"
"몰라요. 짜증나니까. 저런 새끼들 엮어봐야 좋을 일 없잖아요."
사실 소연은 창범이 걱정돼서 한 행동이었다.
창범의 표정을 보니 당장이라도 놈들과 싸울 기세였는데, 팔에 문신 가득한 덩치 큰 양아치 네 명과 싸웠다간, 좋지 못한 꼴을 보게 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부러 시비를 거는 놈들을 태도를 보니, 결국엔 쌍방으로 엮어 나중에 고소한다 어쩐다하며 합의금으로 두둑이 챙겨낼 의도가 읽혔다.
비록 열심히 일하고 받은 돈이라 아깝긴 했지만, 소연의 입장에서 사실 현금 100~200 정도는 그리 큰 돈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러운 꼴 보기 싫어서 돈 주고 끝낸 것이었다.
"……."
"에이씨, 기분 다 잡쳤네. 오빠랑 술 마시고 기분 좋았는데. 오빠 2차 갈래요?"
"……."
"이제 돈 없으니까 우리 집에서 한 잔 어때요?"
소연은 자존심이 상했을 창범을 위로하기 위해 계속 말을 걸었으나 창범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때 도로변에 서 있던 두 사람에게 택시가 다가왔다.
소연은 창범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택시를 잡고 말했다.
"오빠, 우리 집으로 가자니까요? 내가 라면 끓여 줄게요. 응?
기분 풀고."
"……."
소연이 계속 사정했지만, 창범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딱딱히 굳은 표정으로 소연을 먼저 택시에 태우더니 말했다.
"미안. 오늘 기분이 별로다. 먼저 집에 들어가."
"오빠! 진짜 이럴 거예요?"
"…미안."
"아이씨, 진짜! 후회 말아요?"
"먼저 들어가."
소연도 소연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창범의 기분은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이대로는 어차피 서로 감정만 상할 것 같아 소연도 더 보채지 않기로 했다.
"몰라요, 진짜. 나 먼저 가요 그럼."
소연이 택시를 타고 먼저 떠난 뒤에도 창범은 한참 제 자리에서 있었다. 누가 보면 술에 취해 선 채로 잠든 것처럼 눈을 감은 창범이었다.
'…대장, 아무래도 나는 이쪽 일에 적성이 안 맞는 거 같아.’
뭔가를 결심한 창범이 눈을 부릅뜨더니 아까 그 치킨 가게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마침 가게를 나오던 양아치 무리는 손에 현금뭉치를 들고 서로 나누는 중이었다. 창범은 일부러 티내지 않고 놈들의 뒤를 조용히 밟았다.
"오 씨발, 150보다 더 많은 것 같은데?"
"오늘 완전 횡재했네. 너 그거 인터넷으로 산 짭이지?"
"야. 정확히 4등분해라. 우리 아니었으면 덤터기 씌워서 팔았겠냐."
"야! 그래도 신발값은 더 챙겨야지."
"그거 10만원도 안되는 거 잖어!"
놈들의 대화를 뒤에서 듣고 있던 창범은 으슥한 곳에 다다르자 뒤에서 불쑥 말을 걸었다.
"어이 거기."
창범의 등장에 뒤를 돌아보던 양아치 한 놈이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 씨발 깜놀 했잖아! 아저씨 아직도 집에 안 갔어?"
"얼른 상심한 여자친구 위로해 줘야지."
"설마 어디 가서 칼 들고 온 건 아니지?"
"우리도 그럼 꺼내야되나?"
양아치 네 놈은 돌림노래를 하듯 창범을 희롱했다. 상황이 바뀐것은 가게 밖이라는 것과, 소연이 없다는 것 말고는 없었다. 여전히 놈들은 4명이었고, 이제 창범은 혼자였다. 심지어 가게를 나와 으슥한 골목길로 접어 들었기에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증인도 없는 이상 놈들은 더 본심을 숨기지 않았다.
"뒤에서 너희들 얘기 다 들었어. 신발 인터넷으로 산 짝퉁이라고?"
"푸하하하! 다 들으셨어? 이미 거래 끝났는데 어쩌라고?"
"그러면 살 때 따지셨어야지."
양아치들은 아예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이미 현금으로 물건을 받았고, 신발까지 건네준 이상 꿀릴게 없다고 본 것이다.
"아, 요새 당근에 그런 거 있다더니 딱 그런 놈이네."
"뭐?"
"일부러 진품 사가서 가품이라고 우기면서 환불받는 애들. 아저씨 그 새 내가 판 신발 바꿔치기 한거야?"
"이야, 솜씨 좋네. 아주 커플 사기단이야."
"우리가 또 그런 건 못 참지."
양아치 넷은 창범을 위협하듯 둘러쌌다.
여전히 창범은 무방비 상태였다. 한 놈이 창범을 위협하며 말했다.
"거 나이를 똥꾸멍으로 잡쉈어? 좋은 말 할 때 그냥 가쇼."
"그래. 우리 소년원 출신이야. 괜히 험한 꼴 보지 말라고. 빵에 다시 들어가는 거 하나도 겁 안 나니까."
"그러지 말고 깽값으로 아저씨 여자친구 한 번 빌려주는 게 어때? 내가 한 대 맞아 드릴게. 응? 쳐봐. 쳐보라니까?"
"오, 그거 좋은 생각이다. 한 바퀴만 돌리고 드리면 되잖아."
"나 일번."
"난 이번."
"씨발, 눈치 게임도 아니고 가위바위보로 정해."
"그럼 난 삼번."
"이 개새끼들! 또 내가 설거지냐?"
"마지막 설거지는 저 아저씨가 하는 거지. 푸하하!"
"아저씨 쫌 험하게 돌려도 괜찮지? 우리가 원래 중고품은 막 쓰자는 주의라서."
어둠 속에서 놈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놈들의 음담패설을 듣는 창범의 이마에 핏줄이 곤두서 있다는 사실을.
'…미안해 대장. 이건 도저히 못 참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