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309화 (1,276/2,000)

1292. 이사-22-

* * *

대근은 PC방 구석으로 향했다. 창고처럼 보이는 그곳엔 [관계 자외 출입금지]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 주로 폐기된 컴퓨터 부품이나 패널 나간 모니터 등을 보관하는 곳으로, 평소엔 늘 문이 잠겨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불을 켜자, 프레임을 짜둔 선반 위에 폐물품들이 빼곡하게 적재되어 있었다. 케케묵은 먼지와 키보드와 마우스에 딸린 전선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콜록콜록-. 이것도 언제 한 번 날 잡아서 정리해야 되는데···

."

폐물품을 따로 보관해 둔 건 가끔 수리가 필요할 때 부품용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오랜 기간 피씨방을 운영해온 덕에, 대근은 사소한 부품교체 정도는 직접 할 수 있었다.

먼지가 잔뜩 쌓인 상자 몇 개를 한쪽에 치우자 이윽고 벽면에 비밀 금고가 드러났다. 사실 금고라기엔 너무 초라해 언뜻 보면 두꺼비집처럼 보이는 일종의 금속박스였다.

대근이 금속박스에 손바닥을 가져대자 지문 센서가 작동하며 그의 손을 스캔했다. 허름해 보이는 금속박스엔 최첨단의 인식 장치가 내장되어있었다.

사용자를 확인한 금속박스가 덜컹하며 열렸다. 놀랍게도 그곳은 텅 빈 무의 공간이었다. 비좁은 공간 속에 조그만 블랙홀이 소용돌이치는 모습이 기괴한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걸 어디다 뒀더라?"

대근이 중얼거리며 손을 밀어 넣었다. 그의 손이 마술처럼 안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마치 뒤로 무한한 공간이 있어 그를 집어삼키는 모양새였다.

한참 박스 안을 뒤적이던 대근이, 손에 걸리는 것을 붙잡아 끄집어냈다. 그의 손에 징이 박힌 가죽장갑 한 켤레가 딸려 나왔다.

손가락 마디가 잘려있는 반잡강 형태였다.

"찾았다!"

대근이 징 박힌 장갑을 보며 흐뭇해하는데 벌컥 창고 문이 열렸다.

"대장, 볶음밥 재료를 못 찾···."

"인마! 문은 왜 열고 지랄이야!"

대근이 깜짝 놀라 창범을 나무랐다. 창범은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보더니 흠칫 놀라며 재빨리 창고 문을 닫았다.

"아니, 성물(聖物)을 꺼내면서 문도 안 잠그고 뭐해요?"

"여길 누가 들어온다고?"

장갑을 챙긴 대근은 금속박스를 닫고 먼지 묻은 상자를 쌓아 벽면을 가렸다. 창범이 그 모습을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쫌. 이제 소연이도 있는데 위치 좀 바꾸라니까. 왜 이런 곳에 PK단의 성물을 보관하는 겁니까?"

"인마. 아공간 박스 위치 한 번 설정하면 조정하기 힘든 거 몰라? 그리고 가장 허름해 보이는 곳이 가장 눈에 안 띄는 법이라고."

대근은 성물이라 불린 장갑을 조심스럽게 손에 장착했다. 검은색의 가죽 장갑은 불량한 바이크 족이나 쓸법해 보였다.

"근데 뭣하러 성물까지 챙겨가요? 인천에 나타났다는 플레이 어가 그렇게 강한가?"

대근이 주먹을 쥐어 보이며 답했다.

"벌써 한 명 당했다잖아. 나도 방심할 순 없지."

"아무리 그래도 오우거 파워 건틀릿이라니···. 누굴 작살 내려고."

대근이 꺼낸 장비는 PK단이 보유한 성물로, 격투가 타입의 전사에겐 전설급 아이템으로 불렸다. 속칭 OPG, 본래의 펀치력에 3배의 물리력을 끌어내는 장비로, 그 밖에도 다양한 방어마법이 걸려있었다.

"맞다. 나 바로 출발하니까 지금 이 순간부터 네가 임시지부장 맡아."

"걱정 마쇼. 미호랑 건이도 있는데 별일이야 있으려고."

"사실 니가 제일 걱정이야."

"내가 왜요?"

"너 한 번 빡 돌면 앞뒤 분간 못 하잖아. 징계 무서운 줄도 모르고."

"참나, 그거야 소싯적 일이고. 대장은 뭐 흑역사 없수?"

"됐고. 암튼 뭔 일 생기면 나한테 재깍 보고하기나 해. 혼자서 결정하지 말고."

"알았수다. 하여간 노인네 겁만 늘어서는."

"이 새끼! 내가 어딜 봐서 노인이야? 이제 마흔 넘었는데."

"40대가 노인이지 그럼, 청년이요?"

"오냐, 네놈이 간만엔 파워 건틀릿 맛 좀 보고 싶은가 보구나.

노익장 한 번 과시해주랴?"

장갑을 낀 대근의 주먹에서 하얀빛이 일렁였다. 그러자 순식간의 그의 전신에 하얀 테두리가 생겨났다. 마치 등 뒤에서 강한 조명을 쏘는 것 같았다. 성인들이 기적을 행할 때 보인다는 아우라와 흡사했다.

"오, 그거 쉴드죠?"

"간지 좀 나냐?"

"간지가 뭐야 간지가? 좋은 우리말 놔두고. 이 양반 일본 애니를 너무 봤다니까?"

"야. 이거 총알도 튕겨내."

방금 전까지 화를 내던 대근은 갑자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성물의 위력을 과시했다. 유치하게 아이템 자랑이나 해대는 대근의 나이는 올해 마흔 둘이었다.

"총 맞을 일이 퍽이나 있겠수. 여기가 무슨 미국도 아니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여튼 방탄조끼보다 훨 낫다고."

대근이 다시 힘을 거두자 은은하게 몸 전체를 두르고 있던 하얀 빛이 사라졌다. 대근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흠칫 놀라 서둘렀다.

"아이고, 너랑 노닥거릴 시간 없다. 나랑 같이 지원 가는 북서 지부 대원이 이쪽으로 픽업해 오기로 했거든."

"대장 말고 더 있어요?"

"어. 서울 쪽 지부에서만 모두 세명 차출됐어."

"아니 무슨 고수 한 놈 잡는데···."

"말이 고수지 랭커에 근접한 놈이라더라."

"래, 랭커요?"

창범이 화들짝 놀랐다.

랭커 플레이어는 대한민국 전체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그 수가 적었다.

통상 PK단 지부 하나의 전력이면 고수 플레이어와도 대등하게 겨룰 수 있다고 한다. 만약 상대가 중수나 하수라면 PK단원 한 명으로도 가능한 수준.

하지만 반대로 랭커에 다다른 플레이어는 지부 몇 개가 덤벼도 상대가 되질 못했다. 몇 년 전 제주지부의 일도 상대의 등급을 잘 못 측정하는 바람에 생긴 비극이었다. 그만큼 랭커라는 이름이 주는 압박감은 엄청났다.

"어우씨, 살벌하네. 난 왜 대장이 성물까지 꺼내는가 했지."

"어쨌든 아직 랭커는 아니라니까 해볼 만은 할 거야. 원래 쪽수에는 장사 없는 법이거든."

긴장한 듯한 대근의 표정을 보고 창범이 툭 던지듯 말했다.

"몸이나 조심하쇼. 괜히 앞에서 몸빵하겠다고 설치지 말고."

"혹시 나 죽으면 네가···."

"아씨 쫌. 재수 없는 소리 말고!"

"염병, 뻑하면 큰 소리야? 귀청 떨어지게. 암튼 나 간다. 음식 재료는 냉장고 안쪽에 있으니까 잘 찾아봐."

성물을 챙긴 대근은 백팩을 매고는 후다닥 가게를 나섰다. 창범은 파견을 나간 대근을 대신해 PC방 매출을 마감했다. 미호는 어느샌가 사라졌고, 야간 알바인 건은 자리를 치우며 손님들 주문받기도 바빴다.

카운터에 앉아 정산을 보던 창범은 금액이 맞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음, 소연이 있을 때 빈 것 같은데···?"

마치 전화를 걸기 위한 명분을 찾는 것처럼 혼잣말을 되뇌이던 창범이 마침내 소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예요, 창범 오빠.

"어, 미안. 다른 게 아니라 너 아까 17번 손님 라면 선불 받았어?"

소연은 평소처럼 까칠했다. 하지만 통화를 하는 창범은 자기도 모르게 입이 귓가에 걸려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툴툴거려도 상관없었다. 소연을 떠올리면 창범은 괜히 기분이 좋았다. 창범은 자신의 취향이 사실 피학적인 타입인가 의심스러웠다.

"···암튼, 미안하다. 쉬고 있는데. 이만 끊을게."

아쉬운 마음으로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갑자기 수화기 너머로 소연이 말했다.

"···오빠, 혹시 저녁 먹었어요?"

"어? 뭐라고?"

"아니 귓구멍 막혔어요? 저녁 먹었냐니까!"

다른 여자들이 그런 식으로 대꾸했으면 창범은 당장 버럭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소연에게는 화도 나지 않는 창범이었다.

"아직."

"뭐하는 데요? 뭐하는데 이 시간까지 저녁도 안 먹고 있어요?"

"몰라. 너네 사장이 월급도 안 주고 부려먹는데 어쩌냐 그럼."

"오빠도 차라리 공장 그만두고 우리 PC방에서 알바나 하지 그래요? 맨날 일 도와주면서 저녁도 못 얻어 먹고."

"하하. 그랬다간 너네 사장 당장 뒷목 잡고 쓰러질 걸. 너랑 건이 한 달 알바비 주고 나면, 나보다 더 못 벌 텐데."

"정말요? 우리 가게 그 정도예요?"

창범은 소연에게 괜히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둘러댔다.

"당연히 농담이지. 장사하는 사람이 월급쟁이보다 못 벌면 그냥 폐업해야지."

"아씨, 놀랬잖아요. 오늘 특별 보너스까지 주셨었는데···."

"그 짠돌이가? 와씨, 남녀 차별하네 이 양반?"

"암튼, 저녁 안 먹었으면 잠깐 나와요."

"아냐, 괜찮아. 좀 있다 컵라면 먹으면 돼."

"나오라고요. 내가 월급 탄 기념으로 쏠 테니까."

창범은 소연의 말뜻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가, 불쑥 그것이 단둘이 저녁을 먹자는 소리임을 깨달았다.

"지, 진짜?"

"싫음 말고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너도 아직 저녁 안 먹었어?"

"나 지금 엄청 배고프니까 10분 안에 나올 수 있죠? 늦으면 안사줄거예요?"

"그, 그래. 정산만 마치고 바로 나갈게."

전화를 끊은 창범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서, 설마 이건 데이트?’

창범은 갑작스러운 소연과의 약속에 급하게 정산을 마무리했다. 야간 알바인 건에게 혼자 가게를 맡기는 것이 미안하긴 했지만, 사실 그가 오지 않은 날에도 야간은 주로 건 혼자 보곤 했기 때문에 크게 무리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 대근이 부탁한 것도 정산까지였으니까.

"미안하다. 대장도 없는데 같이 도와줘야 하는데···."

"괘, 괘, 괜찮 뚜룩!"

"그래. 열심히 하고."

가게를 나와 소연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나간 창범은 두근 거리는 심장을 도저히 진정시킬 수 없었다. 가게에 놀러 가서 볼때와는 전혀 달랐다. 소연과 가게 밖에서 단둘이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근데 무슨 바람이 불었지? 애가 먼저 만나자고 하고.’

"일찍 왔네요?"

뒤늦게 약속 장소로 소연이 나왔다. 한껏 꾸미고 나온 소연을 보자 창범은 자기도 모르게 바짝 긴장하고 말았다.

"어, 어 아니 나도 방금 전에 왔어."

'와···. 쟤가 저렇게 예뻤나?’ 알바 할 때도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모습에 비하면 그건 거의 안 꾸민 수준이었다. 제대로 화장하고 옷까지 차려입자 소연은 진짜 말도 안 되게 예뻤다. 한때 잘나가는 OP에이스였던 그녀는 얼핏 봐선 연예인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말해요. 오늘은 내가 확실하게 쏠 테니까."

"난 그냥 아무거나 잘 먹어. 그리고 괜히 알바비 받았다고 무리하지 말고 싼 거 먹자."

"음, 오다가 생각났는데 오늘 같은 날 밥만 먹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아. 술이나 한 잔 할래요?"

"수, 술? 너랑?"

"왜요? 나는 술 마시면 안 되나? 나 대학생이라고요."

소연이 풉- 하고 웃더니 멀뚱히 서 있는 창범에게 팔짱을 꼈다.

"따라와요. 나 오늘 치맥하고 싶으니까."

"그, 그래."

유난히 친근하게 구는 소연의 태도에 창범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원래 남자에게 스킨십이 자연스러운 타입인지, 아니면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아···. 속마음 한 번 열어보면 좋겠는데.’

창범은 얼마든지 상대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심지어 그의 능력은 내면에 꽁꽁 감추어진 트라우마나 욕망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었다.

'아니야. 그건 단원으로서의 규율에도 어긋나고 예의도 아니지.

능력은 이런데 쓰면 안되는 거니까.’

소연과 함께 치맥을 나누던 창범은 여전히 어리벙벙한 표정이었다. 가게 있던 손님들이 힐끔 거릴만큼 두 사람의 격차는 상당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작업복 차림이 아니더라도 창범은 20대 후반에 추레한 아저씨 모습이었고 반면 소연은 물이 한창 오른 20대 초반의 파릇파릇한 아가씨였다.

"…이 새끼가 구석에서 몰래 야동을 보고 있는 거 있죠? 와, 진짜 별 미친놈이 다 있더라니까요?"

소연은 치맥을 먹으면 주로 혼자 떠들었다.

창범은 그녀가 이렇게 말이 많은 타입인지 처음 알았다.

'심심했었나 보네.’

창범은 소연이 약속이 펑크나 대타로 자신을 구한것임을 직감했다. 차려입은 모양새로 보아 어쩌면 다른 남자를 만나려다 일이 어긋난 것 같기도 했다.

"맞아, 원래 또라이들 많잖아."

창범은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듣는데도 맞장구를 쳐주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대타면 또 어때? 내 처지에 이런 예쁜애랑 치맥하는 게 어디라고.’

창범은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소연과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치킨 뼈가 점점 쌓이고 생맥 500이 하나 둘 늘어나자 소연의 얼굴이 점점 빨게졌다. 본래 술이 센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턱대고 마시다 보니 평소보다 훨씬 빨리 취한 것이었다.

취기가 오른 소연의 스킨십이 점점 심해졌다.

본래 그녀는 다른 여자보다 성욕이 강한 편이었는데, 몇 달째 도훈을 못 만나다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남자와 하고 싶다는 욕망이 강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창범은 그녀가 가까이 올때마다 질색하며 물러났다. 그는 취한 여자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마음도 없을뿐더러, 아직 특별한 사이도 아닌데 선을 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창범이 자꾸 빼자 소연이 눈을 흘기며 물었다.

"오빠, 설마 아다예요?"

"뭐, 뭐?"

"딱 보니까 그런데? 뭘 그렇게 쑥쓰러워해요?"

소연이 아예 자리를 옮기더니 창범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코너에 몰린 창범은 더 물러서지도 못하고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