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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308화 (1,275/2,000)

1291. 이사-21-

묵직한 손맛이 느껴진다.

제대로 들어갔다.

나의 유도 실력은 경호원 한지연에게서 온 것이지만, 환골탈태와 내공 증진 이후 말도 안 되게 강력해졌다. 청출어람 청어람이라던가? 이미 오리지널의 능력을 뛰어넘었고, 지금은 국대 선수급 기량을 갖추고 있다. 상대가 아무리 닌자술에 능한 암살자라 하더라도 이건 못 막는다.

"으아앗!"

완벽한 엎어치기에 이어 그대로 상대의 몸 위에 올라탔다. 두 손을 교차시켜 상대의 옷깃을 붙잡아 상체를 내리누른다. 이른바 역십자조르기라 불리는 강력한 초크 기술이다.

복면 아래 번쩍이는 푸른 눈이 경악으로 물든다.

여자라고 봐주는 거 없다, 이 양키년!

감히 정수리에 단검을 박아?

"주인님! 조심 하십시요!"

"걱정 마. 아무리 가상 캐릭터라도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그냥 기절만 시킬 거야."

호흡이 차단된 상대가 강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남성과 여성이라는 체급 차이, 거기다 80kg에 육박하는 나의 무게가 짓누르는 힘엔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 푸른 눈빛은 점점 생기를 잃어가며 혼탁해진다.

"아니 왜 통나무를 자꾸 조르고 계시냔 말입니다!"

"무슨 통나무? 제대로 들어갔는··· 어?"

그때였다.

내가 사람 몸통만한 길쭉한 통나무를 깔아뭉개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이, 인술?!’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온 힘을 다해 몸을 앞으로 굴려 자리를 벗어났다.

파바박!!!

간발 차로 내가 올라탄 통나무 위로 수리검 5개가 일렬로 박혔다. 고개를 들자 백의의 복면인이 공중에서 암기를 날린 후 착지하고 있었다.

"미친! 언제 당한 거지?"

언제 바꿔치기가 된 것일까?

분명 엎어치기를 할 때 느낀 손맛은 진짜였는데.

"조심하십시오. 상대는 환술 및 암기술에 능한 어쌔신입니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주인님의 등짝에 암기가 박혔을 겁니다."

로시의 부연 설명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상대는 내 예상보다 훨씬 신출귀몰하고 강했다.

암습에 실패한 상대가 이번엔 단검을 집어넣더니 등 뒤에서 길쭉한 장검을 꺼내 들었다. 검신이 살짝 휘어진 모습이 이슬람 계통의 무기인 시미터를 연상시켰다.

"뭐야? 나는 무기도 없는데, 상대는 장검을 든다고?"

"주인님이 익힌 무공이 백보신권이니까요."

"젠장, 칼 든 상대랑 대체 어떻게 싸우라는 건데?"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든 복면인이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암습이 실패하자 대놓고 정면 대결을 펼칠 심산인 모양이다.

"우아앗! 저런 미친년!"

"주인님의 보법을 믿으십시오. 거리만 유지하면 상대의 공격을 무위로 돌릴 수 있습니다!"

로시가 끊임없이 조언했다. 가상 세계이다 보니 정말로 죽진 않겠지만, 날카로운 검신을 보는 순간 나는 발이 무거워졌다. 전생에 칼빵을 맞은 이후로 나는 쇠붙이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칼날이 몸에 박히는 섬뜩함을 다신 느끼고 싶지 않았다.

쉬익-!

복면인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빠르게 칼을 휘둘렀다. 그 손속이 매우 악랄하고 집요해 그저 뒤로 물러나는 수밖에 달리 박격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아씨, 언제까지 도망만 다니라는 거야? 나도 무기를 달라고!"

"애석하지만 백보 신권에는 무기술이···."

점점 거리 유지가 힘들어졌다.

무영보를 익힌 발이 본능적으로 활로를 찾아 움직였지만, 암살자의 공격은 시간이 갈수록 빨라지면서 당장이라도 내 목을 딸 것처럼 보였다. 지독한 쾌검술이었다.

'이런 씨팔, 뭐라도 집어 던질게···.’

그때 뭔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나는 언제 어디서나 꺼낼 수 있는 무한한 보물창고를 늘 들고 다니고 있었다.

'그렇지? 그게 있구나?’

끝없이 물러서다니 보니 어느새 등 뒤가 벽에 맞닿았다.

백의의 암살자가 싸늘한 눈빛으로 검을 치켜세웠다.

도망칠 곳이 없어진 나는 그대로 바닥에 무릎 꿇었다.

"아직 장가도 안 갔는데 한 번만 봐줘!"

"주, 주인님! 설마 추하게 목숨을 구걸하시는 겁니까?"

"나를 반으로 쪼갤 기센데 빌기라도 해야지!"

나는 머리를 바짝 조아리며 사정했다.

하지만 대화가 통하지 않는 NPC는 뚜벅뚜벅 검을 세워 마지막 일격을 준비할 뿐이었다. 반격의 의지를 잃은 나를 앞두고 처형식을 치르는 느낌이었다.

'기회다. 움직임이 느려졌어!’

"내가 무릎 꿇은 건···"

공중에 뻗은 손이 허공으로 쓱 사라졌다.

다시 뽑혀 나왔을 땐, 손아귀에 100원짜리 동전이 잔뜩 쥐어져 있었다.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라고!"

나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동시에 손아귀에 쥔 동전 무더기를 그대로 복면인에게 흩뿌렸다.

파바박!

동전은 때론 강력한 암기가 된다. 전문적으로 투척술을 연마한 사람은 근거리에서 합판도 꿰뚫을 정도의 위력을 보일 수 있다.

하물며 내공이 실려 날아간 동전은 그 자체로 강력한 합금 파편이나 마찬가지였다.

복면인은 느닷없이 날아든 동전에 두들겨 맞고 쓰러졌다.

"으아니! 주인님! 어떻게 그런 기발한!"

복면인의 하얀 닌자복에서 군데군데 붉은 꽃이 피어올랐다.

동전이 박혀 파고든 자리에서 나는 핏물이었다. 산탄총에 피격당한 것처럼 사방이 붉게 물든 복면인을 내려다보며 내가 말했다.

"젠장. 피까지 튀는 건 너무 리얼한 거 아니냐."

"으으!"

쓰러지면서 칼을 놓친 복면인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무기가 없는 닌자는, 절대 내 상대가 될 수 없다.

"고통을 줄여주마. 물론 그전에."

나는 복면의 머리 부분을 잡아당겼다.

눈매가 너무 예뻐서 얼굴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복면이 벗겨진 순간 몸체가 재가 되어 바스러지는 게 아닌가? 엔드 게 임의 타노스가 손가락을 튕기면 저런 모습일까?

"어, 얼래? 뭐야? 어디 갔어?"

"임무를 다한 NPC를 소거하였습니다."

"야! 기껏 얼굴 좀 보려고 했더니!"

"주인님, 수련 중에는 수련에만 집중하십시오."

"아니 그래도 열심히 싸운 상대의 얼굴 정도는 알고 가야지."

끝내 얼굴을 확인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러자 로시가 이번엔 다른 제안을 했다.

"얼굴이 정말 궁금하시면 이번엔 복면없는 상대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오, 진짜?"

"심지어 노출이 심한 복장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러면 땡큐지."

쿵-

말이 끝나기 무섭게 머리를 빡빡민 땡 중 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이마엔 6개의 붉은 계인을 박은 소림사 승려처럼 보였다.

"뭐야? 소림사야?"

"아닙니다. 잘 보시면 지구인과는 다른 크리링 족이라고 합니다."

로시 말대로 상대는 사람처럼 생겼으나 코가 없었다.

코가 없는 인간이라니. 아참, 인간족이 아니라고 했나?

"크리링 족은 어려서부터 온갖 무술을 습득하는 전투종족입니다. 주인님의 격투술 연마에 좋은 연습상대가 될 겁니다."

또다시 전투가 시작됐다.

쉴 틈도 없이 어어진 전투는 그렇게 10시간여 동안 반복되었다.

* * *

[이제 현실로 복귀합니다.]

번쩍-

운동룸 한 가운데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도훈은 눈을 뜨자마자 벌러덩 뒤로 쓰러졌다.

"흐억-! 개 빡세네 진짜."

마지막 전투 때 대적한 상대는 아무리 때려도 충격을 흡수해 버리는 괴물이었다. 칠성권으로 무자비하게 팼는데도 나중에 손목이 잘못 된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벌러덩 드러누운 도훈은 한참동안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정신세계에서 벌어진 수련이지만, 놀랍게도 현실계에서의 기력도 굉장히 소모되어 있었다.

빡센 운동을 3-4시간 쉬지 않고 한 것처럼 온 몸이 천근만근무거웠고, 몸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후아-. 날마다 이렇게 연습하면 금방 고수되겠어."

[주인님은 아직 중수 최고단계도 이르지 못했습니다만.]

'그 말이 아니라 무림 고수 말이야.’

[백보신권을 완전히 익히고 나면 정말로 그렇게 될 겁니다.]

'흐흐. 이 정도면 PK단하고 싸워도 충분하겠지?’

[이전보다 비교할 수 없을만큼 강해진 것은 맞지만 여전히 방심하시면 안됩니다. 놈들은 단독으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늘 무리를 지어 다니거든요.]

도훈은 갑자기 궁금증이 들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는 거지? 1 대 다수로 싸우는 쪽이 당연히 불리할 수밖에 없잖아. 플레이어도 놈들처럼 뭉치면 그만 아닌가?’

[음, 이건 좀 복잡한 문제인데 호랑이와 사자를 생각해보시면 비유가 되실까요?]

'호랑이와 사자?’

[플레이어는 쉽게 말해 호랑입니다. 강력한 능력을 지녔지만, 단독으로 사냥을하죠. 반면 사자는 같은 고양이과 맹수지만 무리로 사냥을 하고요. PK단이 바로 그런 습성을 지녔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대충은 알겠는데,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서.’

[강한 호랑이는 사자를 충분히 제압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겠지?’

바닥에 널부러졌던 도훈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10시간 동안의 수련이 그를 지치게 만들었지만, 현실의 시간은 실제로는 6분 남짓 지났을 뿐이었다.

"정말 6분밖에 안 지났네. 어? 언제 부재중 전화가?"

현실의 시간을 확인하던 도훈은 명상에 잠긴 사이 부재중 전화가 남겨진 것을 확인했다.

번호를 보니 PC방에서 알바를 하는 '조소연’이었다.

도훈은 전화를 걸까하다가 문득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전화는 언제 온 거야?’

[주인님이 천상크래프트에 접속하고 1분쯤 지나서였을 겁니다.

수련에 방해될까봐 깨우진 않았습니다.]

'잘했어. 긴급한 전화였다면 다시 걸겠지?’

도훈은 수련을 마친 이후라 너무 피곤했기에 오늘 밤 여자를 더 만나고 싶지 않았다. 성욕이 완전히 바닥을 칠 정도로 고된 수련이었다.

[그래도 한 번 연락해 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지난 번에도 바람 맞히셨는데.]

'그땐 대흉이 떠서 그런거고. 내일 쉬는 날이니까 한 번 연락해 보면 되겠지.’

[알겠습니다.]

도훈은 땀 흘린 몸을 찬물로 식힌 뒤 이사한 집 2층 테라스 위에 올랐다. 단독주택으로 옮긴 뒤 가장 좋은 것은 집에서 편하게 담배를 필 수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운동룸이 있는 2층은 1층보다 실내가 좁고, 바깥으로 테라스와 비슷한 공간이 꾸며진 옥탑방과 같은 구조였다.

전주인이 남겨 두고간 나무 벤치에 앉아 담배를 꼬나물자 하루의 피로가 말끔히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거참. 이렇게 큰 집에 혼자 살게 될 줄이야.’

늘 좁은 원룸에서만 지내다 막상 커다란 2층 주택으로 옮기게 되자 도훈은 뿌듯함을 느꼈다. 이보다 더 비싼 고급 아파트에 살때도 있었지만, 이번 생에선 더 어린 나이에 장만한 거라 그런지 감개가 무량했다.

'다시 태어나길 정말 잘했단 말이지.’

[새로 이사 온 집에 만족하십니까?]

'당연하지. 원래 살림은 늘려가는 맛이 있는 거거든. 나중에 시간 지나면 익숙해지겠지만, 당장은 좁은 원룸에서 단독 주택으로 들어왔다는 것만으로 너무 좋아.’

[주인님이 만족하시니 다행입니다.]

'플레이어가 안 됐으면 이런 호사는 못 누렸겠지?’

[주인님 정도면 큰 호사도 아닙니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말도 안되는 부를 누리니까요.]

도훈은 일전에 스티브잡스도 플레이어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내가 몇가지 잡다란 스킬 가지고도 금방 재산을 뿔릴 수 있었는데, 작정하고 돈을 벌면 얼마나 부자가 될지 상상할 수 없구만. 혹시 그래서 PK단이 싫어하는 건가?’

[네?]

'세상을 속이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보통 사람에게는 없는 초능력으로 인생 편하게 사니까. 배알 꼴리는가 해서.’

[글쎄요.]

'암튼, 이제 PK 단이든 뭐든 하나도 무섭지 않아. 이전에는 도망갈 패만 잔뜩 들고 있었는데, 이제는 반격할 패도 손에 쥔 셈이니까.’

[그래도 늘 조심하셔야 합니다. 방심은 금물이니까요.]

'당연하지.’

도훈은 담배를 마저 태운 뒤 집안으로 들어왔다.

새로 산 가구와 깨끗한 집이 그를 반겼다.

* * *

"씨, 또 씹네 이 오빠."

집으로 돌아간 소연은 연락없는 핸드폰을 화풀이 하듯 침대에 집어 던졌다.

"저번에도 약속 펑크내더니 진짜···."

소연은 자존심을 접고 한 번 더 도훈에게 연락하려고 했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부재중 전화가 남았을텐데도 답장을 보내지 않는 건 뭔가 바쁜 일이 있을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였다.

'아니야. 내가 집착하면 오히려 싫어할 거야. 못난 모습 보이고 싶진 않아.’

소연은 이내 마음을 접었다.

혹시나 도훈에게 연락이 오면 데이트를 하려고 옷도 새로 갈아입었는데, 다시 벗으려고 생각하니 갑자기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흠, 그래도 저녁은 먹긴 먹어야 하는데···.’

소연이 뭘 시켜먹을지 고민하는데, 불쑥 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도, 도훈오빠인가?’

반가운 마음에 소연이 집어던진 핸드폰을 확인하는데 발신자가 도훈이 아니었다. 소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뭐예요, 창범 오빠."

-어, 미안. 다른 게 아니라 너 아까 17번 손님 라면 선불 받았어?

"17번 손님요? 글쎄 기억이 안나는데."

-건이가 정산이 안 맞는다고···. 아, 이 새끼 설마 먹튀했나?

미안하다 퇴근했는데, 쉬어라.

"잠깐만요."

-엉?

"근데 왜 오빠가 대신 일봐주고 있어요? 사장님은요?"

-아아, 너네 사장 오늘 인천 갔어.

"인천은 갑자기 왜요?"

-몰라. 친척이 거기서 PC방 오픈 한다나 봐. 자기가 세팅 도와주고 개업 때 까지 같이 준비 한다면서 한동안 못 올수도 있대. 갑자기 나한테 떠넘긴 거 있지?

"오빠도 일 나가야 하지 않아요?"

-너랑 건이가 있으니까 나보고 저녁 타임에 정산만 봐달라고 하더라고. 암튼 미안하다. 쉬고 있는데. 이만 끊을 게.

창범과 통화를 하던 소연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는지 그에게 물었다.

"···오빠. 혹시 저녁 먹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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