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0. 이사-20-
"문제는 흔적이 거의 없다는 거야. 놈을 찾아 야동을 촬영했던 일본까지···."
"일본요?"
"암튼 그런 게 있어. 거기다 달마다 연차 내서 전국을 다 뒤졌거든."
창범이 한참 신입에게 설명하고 있는데, 갑자기 세나가 농담을 던졌다.
"야. 미호가 그러는데, 일본에서 둘이 있을 때 창범이 네가 덮치려고 했다며?"
"뭐, 뭐래! 사람을 갑자기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 나 그 할망구전혀 관심 없거든?"
"흥, 아님말지 웬 짜증?"
"잠시만요. 근데 왜 플레이어가 야동을 찍었죠?"
"나도 그게 의문이긴 해. 그전에는 성인방송에 게스트로도 출연했거든."
"야동···. 성인방송. 혹시 변태일까요?"
"응?"
"그게 아니고서야 플레이어가 왜 그런 이상한 행동을···."
"그거야 우린 모르지."
"맞네. 변태일 가능성도 있겠다. 창범이처럼 최면술사 같은 놈이면 여자들 최면 걸어서 실컷 따먹고 다닐 테니."
"나를 왜 갑자기 끼워넣어? 내가 언제 그랬다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우리 창범이는 쓰지도 못할 걸 30년 가까이 달고 다니는데. 아, 소변은 볼 수 있구나."
간만에 모인 단원들이 정신없이 떠들어댔다. 대근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좌중을 향해 소리쳤다.
"오케이, 거기까지. 그놈 얘기는 그만하자고. 어디 처박혀 있는지도 모를 피라미 자식 하나 찾느라고 너무 시간만 낭비했어. 것보다는 인천에 새로 나타났다는 플레이어 때문에 지원 요청이 들어왔는데."
"지원이요?"
"어. 고수 급이라는 거 같더라고. 벌써 놈에게 당한 단원도 한 명 있다나 봐."
"저런."
"하여간 이 갈아먹을 새끼들."
창범이 이를 부득 갈았다.
"그래서 한동안 인천 쪽으로 지원을 가줘야 할 것 같아."
"누가 가요?"
"제가 가겠습니다."
신입인 김건이 번쩍 손을 들었지만, 대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맙지만 마음만 받지. 탱커가 필요하대서 당분간 내가 직접 파견을 갈까 해."
"대장이 직접요?"
"한 달만 도와달라더라고. 뭐, 아까 말했던 대로 우리 지부는 요새 평온하니까."
"그럼 여긴 누가 맡아요? 갑자기 일이 터질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창범이 네가 임시 지부장 맡고 있어. 건이도 새로 왔으니 이제 인원에 여유도 있잖아."
"알겠어요."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건이 한마디 했다.
"잠시만요. 이건 좀 다른 얘긴데 아까 쫓다가 놓쳤다는 플레이어 말이예요. 혹시 성적인 능력을 가진 플레이어가 아닐까요?"
"어?"
의외의 발언에 다들 건의 입술에 주목했다. 창범은 뭔 소리냐는 듯 피식 웃었다.
"야. 신입.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그리고 대장이 말했잖아. 그 새낀 그만 포기하자고."
"아냐. 계속해. 성적인 능력을 가졌다는 게 무슨 뜻이지?"
건이 대근에게 설명했다.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 얼핏 본 적 있는 것 같아서요. 색마 플레이어라고."
"색마?"
"왜 그렇게 생각하지?"
대근이 흥미가 돋은 듯 계속 채근했다.
"아까 말씀을 종합해 보니까, 이제까지 놈의 흔적이 발견된 장소가 성방bj라던가, 야동 촬영장이지 않습니까?"
"그냥 놈이 변태라서 그런 게 아닐까?"
"하지만 정말 변태라면 굳이 얼굴을 드러내고 활동을 했을까 싶어서요. 저희에게 잡힐지도 모르는데. 오히려 변태라면 더욱 음지로 숨어들었겠죠."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세나가 끼어들었다.
"설마 색공을 익혔다는 소리야?"
"엥? 색공은 또 뭔데?"
"말했잖아. 나 예전에 무공 배웠다고. 무공의 바탕이 되는 게 내공인데, 그 내공을 증진하는 방법 중에 음양의 조화를 통해 비약적으로 상승시키는 심법의 종류가 바로 색공이거든."
"그러니까, 그 변태 플레이어가···."
"변태는 아닐 겁니다."
"아무튼 그 색마 플레이어가 색공을 기반으로하는 플레이어일가능성이 높다는 소리야 지금?"
"그런 이유가 아니면 굳이 신분 노출의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요."
"아, 업적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놈들의 사명이라는."
"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대근이 내용을 종합했다.
"역시 똑똑한 신입이 하나 들어오니까 뭔가 실마리가 잡히는 구만. 그럼 어떻게 할까? 내가 인천에 다녀 오는 동안 조사 다시 시작해?"
"대장. 저 연차 다 써서 이제 더이상 출장은 무리라고요."
"아니. 이건 창범이 네가 할 게 아니라 오히려 내가 나서야겠는데?"
세나가 말했다.
"미호 네가?"
"미호 아니고 세나라고. 암튼, 신입이 말에 따르면 놈이 색공을 통해 내공을 늘리는 플레이어라는 말이잖아. 그렇다면 놈이 출몰할만한 장소에 잠복해 있는 게 가장 빠르지 않을까?"
"그런 장소가 어딨어? 놈이 어디서 나타날지 알고?"
"놈이 처음 성인방송에 출연했을 때 분명 서울에 있었잖아. 일본에 갔던 건 촬영 때문이었으니 다시 귀국했을 테고."
"음···."
"그렇다면 분명 서울 어딘가에서 여자들을 노리고 있을 거란 말이지. 그리고 놈이 먹잇감으로 노릴만한 장소는···."
"클럽?"
"맞아. 바로 미호가 이따금 남자 정기 빨러 가는 곳이지."
"세상에. 그럼 코앞에 두고 놓쳤을 수도 있겠네."
"물론 이제까지 탐지기에 걸린 적은 한번도 없었어."
"그건 놈이 수준이 낮아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간이 흘렀으니 꽤 레벨업을 했을테지."
대근이 회의를 마치며 결정했다.
"좋아. 그럼 내가 인천에 파견가 있는 동안 미호, 아니 세나씨든 두나씨든 상관없으니까 놈이 나타날 만한 장소부터 탐문을 해보는 것으로 하지. 창범이 네가 내 역할 대신해서 미호 지원해주고."
"대장님, 저는 무엇을 할까요?"
건의 물음에 대근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너는 소연이랑 같이 가게 열심히 봐야지. 컴퓨터 고장 나면 기사 부르고."
"네, 네? 아니 저는···."
"농담이야. 너는 미호랑 같이 움직여. 미호 혼자선 감당하기 힘들 수 도 있으니까."
"거참, 못 잡는다니까 그래요. 잠복해서 잡을 놈이었으면 진작 잡았겠지."
창범은 대근의 결정이 마음에 안 드는지 계속 툴툴거렸다. 하지만 당장 해야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엔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대근이 창범에게 신신당부했다.
"까불지 말고. 지부나 잘 관리하고 있어. 너도 몇 년 뒤면 지부 하나 맡아야 할 테니까 미리 경험한다고 생각하고."
"됐어요. 몸이나 조심하쇼."
"이 새끼가 말을 좋게 해줘도!"
대근과 창범은 또 옥신각신을 시작했다.
* * *
새하얀 공간.
끝없이 펼쳐진 무한한 공간에 오로지 나 혼자였다.
마치 검은 우주를 배경만 흰색으로 바꾼다면 딱 이런 느낌일 것이다.
우주에 오로지 나 혼자밖에 없는 기분.
실로 어마어마한 고립감이다.
"너무 휑한데. 배경 좀 만들어봐."
"네, 주인님."
가상 공간에서는 귓속말로 얘기할 필요가 없었다.
마치 천장에 스피커가 달린 것처럼 로시의 목소리가 전체에 울려퍼졌다.
곧 하얀 백색의 공간으로 무대가 순식간에 솟아오르더니 지난 번과 같은 연무장이 만들어졌다. 여전히 커다랗긴 하지만, 주변으로 성벽이 둘러쳐지니 이제야 좀 안심이 되었다.
"아, 그리고 옷도 좀."
"옷이요?"
"아무리 그래도 추리닝 차림은 좀 아니지 않냐? 명색이 무공수련장인데."
"원하는 의상을 말씀해 주시면 바로 바꿔 드리겠습니다."
"음···. 그냥 도복 비슷하게 생기면 돼. 아, 기왕이면 검은색으로."
"네, 검은색 도복으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평소에 입고있던 추리닝에서 검은색 도복으로 바뀌었다. 유도복 비슷하게 생겼는데 색깔만 칠흑같은 검은색에 허리엔 붉은 띠가 둘러있었다.
"오, 까리한데."
"마음에 드십니까?"
"응. 앞으론 여기서 연습할 땐 이 복장으로 해주라고."
"알겠습니다. 그럼 대련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시작 전에 지금까지 익힌 무공이 정확히 어떻게 되지?"
"현재, 완성된 무공은 다음과 같습니다."
갑자기 눈앞에 홀로그램처럼 스크린이 떠올랐다.
"우앗! 뭐, 뭐야?"
"네?"
"아니 왜 갑자기 디스플레이가 떠올라? 이것도 천상계 기술인가?"
"아하. 원래 홀로그램 장비가 있으면 상태창도 이처럼 시야에 띄울 수 있습니다."
"뭐라고? 그럼 왜 이제까지 좆만한 스마트워치 화면으로 본 건데?"
"그거야 장비를 구매하지 않으셨으니까요."
"비싼 거야?"
"네."
"그럼 됐어."
나는 익힌 무공에 대한 정보를 꼼꼼히 살폈다.
게임에서 스킬트리를 보는 것처럼 '백보신권’이라는 거대한 카테고리안에 지금껏 익힌 무공들이 달성률과 함께 표시되어 있었다.
<칠성권>-무엇이든 7번의 주먹질 내로 격파한다. 첫번째 주먹에 비해 마지막 주먹은 7배로 강력해진다. 별도의 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달성률 : ●●●●●●●●●●
<무영보>-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보법. 사용하는 격술에 맞추어 움직임을 보조한다. 움직임에 대한 반응속도와, 순간 폭발력, 지구력 모든 것을 상승시킨다.
달성률 : ●●●●●●●●●●
<축골공>-근골을 자유자재로 변형할 수 있는 방어술의 일종.
물리적 타격에 대한 내구도를 상승시킨다. 단단한 신체를 유연하게 만들어 충격을 최대한으로 흡수한다.
달성률 : ●●●●
"이러니까 무슨 게임 스킬 같은데?"
"어떻게 이해하셔도 상관없습니다. 현재까지 격술과 보법, 그리고 방어술을 각각 익히셨고, 최근에 익히고 계신 축골공은 4성이고 나머지는 모두 10성을 달성하셨습니다."
"격술은 칠성권 뿐이야?"
"아닙니다. 다음번에 배우실 무공이 바로 원거리 공격술입니다."
"오, 원거리?"
"백보신권에 가장 어울리는 공격술이라고 할 수 있죠. 백보 거리에 있는 상대에게 타격을 줄 수 있으니까요."
"신기하구만. 그럼 위 3가지를 위주로 연습해 보는 건가?"
"넵. 주인님의 무공 수위에 맞춰 대적자를 생성하겠습니다."
"이거, 기대되는데."
하늘에서 뭔가 빛이 번쩍하더니 전신에 하얀 의복을 입은 복면인이 소리 없이 떨어졌다. 검은색의 도복을 입은 나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색상이었는데, 흔히 닌자복이라 불리는 의상을 하얗게 염색한 것 같았다.
"엇, 뭐야 이건. 암살자인가?"
"네. 암습을 특기로 하는 어쌔신 계열입니다."
"근데 왜 옷이 흰색이야? 보통 새까만 색으로 입지 않아?"
"설산을 배경으로 활동하는 암살자 무리이기 때문입니다."
"아, 실존하는 캐릭터야?"
"이 쪽 세상은 아니지만요."
흰 복면을 유심히 보니 유일하게 드러난 두 눈이 무척 예뻤다.
진한 쌍커풀에 에메랄드 빛 푸른 눈이 흡사 외국인을 보는 것 같았다.
"오잉? 혹시 색목인인가?"
"색목인이요? 네. 지구로 치면 슬라브 계통의 여성과 흡사합니다. 설산의 어쌔신 무리는 대대로 여자들에게만 계승되거든요. 지구로 치면 아마조네스처럼, 남아 살해의 전통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체구가 여성처럼 호리호리했다. 특히 가슴과 둔부 쪽은 뭉특 튀어나와 있어, 전신을 꽁꽁 싸맸는데도 볼륨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오···. 왠지 미인일 것 같은데."
"네?"
"아니, 복면을 벗기면···."
"주, 주인님 수련장까지 와서 그런 망측한 생각을···."
"농담이야 하하!"
하지만 이미 복면의 눈빛은 싸늘하게 변한 상태였다. 아무 움직임이 없지만, 눈에선 레이저를 쏘는 것처럼 살기가 느껴졌다.
"어라? 쟤 한국말도 알아듣냐?"
"NPC와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근데 왜 째려보는 것 같지?"
"기분탓이겠죠. 그럼, 수련 시작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복면인이 타다닷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말도 안 되는 민첩성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휘둘렀으나, 복면인이 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
"주인님, 머리!"
로시의 경고에 놀라 고개를 수그리는데 서늘한 느낌과 함께 싹뚝 잘린 머리칼이 휘날렸다. 놀라서 몸을 앞으로 굴러 뒤를 돌아보니 단검을 빼든 복면인이 공중제비를 돌며 착지하고 있었다.
"뭐, 뭐야? 무기를 써도 되는 거였어?"
"PK단도 무기를 소지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에 맞춰 연습해야죠?"
"와씨, 뚝배기 깨질 뻔했네."
알고보니 내가 주먹을 휘두르는 사이 순식간에 공중으로 솟구쳐 오른 복면인이 거꾸로 물구나무를 선 상태로 단검을 빼들어 내 정수리를 노렸던 것이었다. 로시의 경고가 아니었다면 일합에 끝날 만한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미친! 예쁘다고 살살 봐주려고 했구만."
열이 받은 나는 몸속에서 내공을 끌어 올렸다.
몸 안에 갈무리 되어있던 내공이 전신을 휘감으며 온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기의 발산으로 머리칼이 공중으로 솟구칠 정도였다.
"드디어 진심으로 하시는 군요."
"죽여도 되냐?"
"NPC에게 죽음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죄책감 따윈 안 느껴도 된다는 뜻이군."
푸른 기운이 맺힌 주먹을 쥐고 복면인에게 달려들었다. 칠성권과 무영보가 결합된 나의 반응속도는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뒈져!"
붕- 붕- 붕!
빠르게 연타로 주먹을 휘둘렀지만, 복면인의 움직임 역시 말도 안되게 민첩했다. 가벼운 스텝으로 뒷걸음질 치던 복면인은 그대로 검을 출수하며 가슴을 찌르고 들어왔다.
"흥! 어딜 감히."
나는 복면인의 손목을 붙잡으며 그대로 일격을 흘려보낸 뒤, 동시에 복면인의 옷깃을 붙잡았다.
"내가 유도에도 일가견이 있는 건 몰랐지?"
나는 그대로 복면인을 엎어치기로 메다 꽂았다.
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