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9. 이사-19-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다고 해도 인맥이 필요한 때가 있다.
변호사, 의사 같은 전문직은 말할 것도 없고 하다못해 가전제품매장에서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아는 이가 있으면 조금이라도 싸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생각이 미친 도훈은 불쑥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잖아. 기왕 업적도 아닌 여자들 따먹을 거면, 직업별로 하나씩 관계를 맺어두는 거지. 저번에 소연이 집 알아볼 때 공인 중 개사도 그렇고, 중고차 살 때 누구냐, 김미영 팀장인가도 그렇고 자슬아치 짓 제대로 했었는데 말이야.’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마인드가 너무 창남스럽지 않나요?]
'뭐라고?’
[솔직히 그렇잖습니까? 여자들이 몸 로비로 이득을 취하는 것과 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요.]
'음, 듣고보니···.’
창녀에게도 대놓고 창녀라고 하면 기분이 상하듯이, 도훈은 창남이라는 소리에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졌다. 하지만 뼈를 때리는 공격이었기 때문에 도훈도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내가 하는 짓이 딱 그런 짓이구나.’
[그걸 설마 이제 아셨다는 말씀입니까?]
'아니. 바람을 하도 피우다보니 이제 여자랑 자는 것에 너무 익숙해 진 것 같아. 자제하긴 해야겠군.’
[미션이나 업적이 걸려 하는 행위는 플레이어라는 면죄부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소한 혜택 때문에 함부로 여자를 만나는 것은 주인님의 존엄성을 너무 훼손시키는 것 같습니다.]
'맞아. 아무래도 그 방법은 좀 아닌것 같아.’
로시의 조언에 생각을 고친 도훈은 다른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당장은 포인트가 필요하단 말이지. 저번에도 바닥난 포인트 탓에 아끼던 아이템까지 팔았잖아.’
[설마 이제와서 후회하시는 겁니까?]
'아니. 이미 지난 일을 후회해 봐야 뭐하겠어. 내 말은 포인트가 부족한 상태에선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거지. 당장 오늘 번 3500포인트 가지고 누구코에 붙이겠냐고.’
[흐음···.결국엔 포인트 사냥을 나가야 한다는 소리군요.]
'그렇지. 창남처럼 굴지 않더라도, 어차피 누군가와는 섹스를 해야 하는 상황이잖아. 좋든 싫든 말이지.’
[이해합니다. 무공을 연습하려면 포인트가 지속적으로 들 테니까요.]
'이렇게 된 거 그냥 짧고 굵게 해치울까?’
[주인님은 길고 굵은 편인데요?]
'아니. 시간은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포인트는 왕창 벌수 있는 여자로 말이야.’
[그런 여자를 알아 볼 방법이 있습니까? 이지양의 경우는 우연히 매장에 들렀다가 얻어 걸린 느낌인데요.]
'물론 정보창에 전남친 숫자가 뜨지 않는 이상 알아볼 방법은 없지. 하지만, 밝히는 여자들이 자주 모이는 곳은 알고 있거든.’
[설마···. 다시 유흥쪽을.]
'빙고.’
[하아, 밤마다 클럽을 드나드실 생각이신가 보군요.]
'클럽은 오히려 안 돼.’
[네? 거기야 말로 여자들이 모여있는 곳 아닙니까?]
'내 말은, 클럽에 다니는 여자들은 너무나 어리단 말이야.’
[주인님은 어린 여자 좋아하잖습니까? 팔선녀 평균 연령이 20살인데요.]
'당연히 어린 여자가 좋지만, 이건 일이잖아. 좋아하지 않는 것도 해야 하는 게 프로지.’
[그럼 어디로요?]
'관급 나이트.’
[관급이요?]
'국빈관이니, 한국관이니 관자로 끝나는 나이트가 있어. 나이트도 암묵적으로 정해진 나이대가 있는데, 저렇게 관으로 끝나는 나이트가 가장 고연령대거든. 40대 이상도 있을 걸.’
[헐.]
'20대 여자들이 까져봐야 얼마나 까졌겠어. 이지처럼 섹스 중독에 빠진 여자들 말고는 대부분 끽해야 1000포인트 미만이라고.’
[흐음, 평균은 그렇겠죠.]
'물론 손가락 다 합쳐도 못 셀만큼 경험 많은 어린 여자도 있겠지만, 그런 여자들은 열에 아홉은 성매매 뛰는 애들일거고.’
[성매매는 카운트가 안되니까요.]
'그렇다면 적당히 연륜도 있으면서, 몸이 뜨거워 클럽을 찾아온 닳고 닳은 누님을 타겟으로 해야지.’
[그럼 이제부터 40대를···.]
'놉. 40대는 너무 갔고, 관급에도 30대 초반이 제법 있단 말이야. 30~35 정도로만 타겟팅을 해보려고. 그럼 최소 1000포인트이상일거고, 나이트에서 원나잇 경험이 많은 여자라면 5000포인 트 이상도 가능할지 모르지.’
[월척을 잡기 위해 사지로 뛰어드시는 군요.]
'프로는 상대를 가리지 않으니까.’
[그런데 주인님 계획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관급 나이트에 나이제한이 있다고 한다면 주인님은 20대 초반의 얼굴이라 입구컷 당할텐데요?]
'당연히 변장해야지. 남자들도 30대 초반 정도는 들여보내 주거든. 특히 정장에 넥타이 하고 꾸미면 샐러리맨으로 봐주지 않겠어?’
[역시 주인님은 다 계획이 있으시군요. 그럼 오늘 밤부터 시작입니까?]
'아니. 오늘은 이사 때문에 지쳐서 안 되겠어. 그리고 오랜만에 포인트도 얻은 김에 무공 연습 좀 해야지.’
[부족한 소모품을 구입하고 나니 현재 2000 포인트 남았습니다.]
'2000포인트면 몇 시간이나 수련할 수 있지?’
[100포인트에 한 시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현실의 시간은 1/100로 느려지니까 그곳에서의 20시간은 현실에서는 12분 남짓이지만요.]
'대단하군. 시간 초월이란.’
[하지만 한가지 명심하셔야 합니다. 시간 여행자는 단명한다는 사실을요.]
'뭐? 왜 그렇지? 설마 시공간의 왜곡이 몸에 무리를 주는 방식인가?’
[그게 아니라 남들에게 12분이 주인님에겐 20시간을 소모시키니까요. 주인님은 천상 크래프트 안에서 100배속으로 늙는다는 말입니다.]
'헐.’
의외의 사실에 도훈은 살짝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그럼 내 수명을 100배로 빨리 돌린다는 뜻이야?’
[천상 크래프트에서만 사신다면요.]
'하긴, 그럴 포인트도 없구나.’
[그렇죠.]
대강 짐정리를 끝낸 도훈은 2층의 운동 룸으로 이동했다.
집에서는 가장 넓은 공간이자, 동시에 앞으로 도훈에겐 시간과 공간의 방이 될 장소였다.
'간만에 입장이군.’
[가부좌를 트시고 준비하십시오.]
'가만. 근데 내가 가상세계로 들어가는 12분 동안 현실에서의 나는 어떻게 되지?’
[명상하는 모습일 겁니다. 미동도 하지 않는 상태로요.]
'만약 그때 습격이라도 받으면?’
[습격요? 누가요?]
'아니 PK단이라도 들이닥치면 앉은채로 사망하는 거 아니냐고.’
[그럴 가능성은 있겠네요. 0 .00001% 정도요. 걱정 마십시오.
주인님의 위치가 노출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까요.]
'어떻게 확신하지?’
[놈들이 주인님을 타겟으로 정했다면 벌써 움직였을테니까요.]
'하긴···. 암튼 수련하는 중에는 무방비라는 거네. 혹시라도 누가 와서 나를 건드리면 어떻게 하지?’
[그땐 제가 주인님께 경고를 보내겠습니다. 천상 크래프트를 통제하는 것도 저니까요.]
'오케이. 그러면 충분하지. 호법을 세우니까 든든하구만.’
도훈은 안심하며 가부좌를 틀었다.
무릎 위에 손을 얹고 눈을 감자 자연스럽게 하얀 빛이 일렁이며 새로운 세상이 나타났다.
* * *
"이번 달 월급이야."
"감사합니다!"
소연은 넙죽 허리를 숙이더니 대근으로부터 흰 봉투를 받았다.
소연이 봉투를 벌려 열어보니 빳빳한 5만원짜리 신권이 들어있었다.
"어머, 은행가서 새 돈으로 바꿔오신 거예요?"
"응. 저번에 헌 돈을 섞어 줬더니 미안하더라고. 같은 돈이라도기왕이면 새것이 낫지."
"역시 우리 사장님 최고!"
소연이 감격하며 대근을 와락 껴안았다.
물컹하는 촉감에 놀란 대근이 소연을 밀어냈다.
"워워, 오버하진 말고."
"고마워서 그러죠."
"혹시 모르니 확인해봐."
"네."
소연은 봉투에 담긴 새 돈을 꺼내 하나씩 정성스럽게 세었다.
모두 다 세고 보니 받기로한 월급보다 10만원이 더 들어 있었다.
"어라? 돈 잘못 넣으신 것 같은데요? 10만원 더 주셨어요."
"보너스라고 생각해. 소연이 너 오고 나서 장사가 잘 돼서 말이야."
"히잇. 고마워요 사장님."
"힘들게 벌었으니까 아껴써야 한다. 괜히 큰 돈 받았다고 기분 내지 말고."
"당연하죠."
소연이 월급으로 받은 지폐를 소중히 봉투에 다시 밀어 넣으며 생각했다.
'큰 돈이라···. 그래. 큰 돈이지.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이니까.’
사실 월급으로 받은 금액은 소연이 한창 오피를 뛰며 벌던 때에 비하면 푼돈에 불과했다. 막말로 이틀 빡세게 뛰면 쥘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땀 흘리며 노동해서 번 돈이라 그런지 기분은 훨씬 좋았다. 누구에게나 떳떳하게 자랑할 수 있는 돈이었으니까.
'사장님 말씀이 맞아. 같은 돈이라도 신권이 더 기분 좋은 것처럼, 기왕이면 내가 힘들게 번 돈이 더 낫지.’
기분이 좋아진 소연은 퇴근 준비를 하면서 간만에 도훈에게 연락했다.
'이게 다 오빠 덕분이니까 오빠한테 한 턱 쏴야지.’
하지만 하필 천상 크래프트에 접속해 있던 도훈은 소연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 한참 전화를 걸어도 응답이 없자 소연이 맥빠진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요새 맨날 연락이 안되네···.’
소연이 풀죽은 모습으로 전화를 끊자 멀뚱히 지켜보고 있던 창범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왜? 남친 전화 안받아?"
"남친 아니거든요?"
"아니면 아니지 왜 나한테 짜증이야?"
"뭐래? 저 기분 별로니까 시비걸지 말아줄래요?"
소연은 애꿎은 창범에게 버럭 짜증을 내더니 가게를 나갔다. 괜히 말 걸었다가 본전도 못 건진 창범이 머쓱한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월급 탄 기념으로 치맥이나 쏘라고 할랬더니···."
"야 인마. 넌 왜 우리 직원한테 시비야? 저리 안 꺼져?"
"뭐래요? 오늘 회의 때문에 일찍 왔다니까."
"회의?"
"참나, 오늘 정기 소집이라면서요!"
"아, 그랬어? 미안, 난 또 소연이 보려고 일찍 온 줄?"
"아, 아니거든요?"
대근과 창범이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새롭게 투입된 신입 회원인 김건이 둘에게 다가와 말 걸었다.
"미, 미, 미···."
"미호 왔다고?"
"네."
"가자 그럼."
김건의 더듬는 말투에 익숙해진 대근은 둘을 데리고 흡연실로 들어갔다. 이미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미호가 연기를 훅- 하고 대근에게 불었다.
"왔어요, 오빠?"
"뭐야? 왜 갑자기···. 세나?"
자주 인격이 바뀌는 미호는 과격하고 새끈한 세나로 변한 상태였다. 그녀는 미호보다 훨씬 도발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보는 남자마다 추파를 던지기 일쑤였다.
"창범이도 왔네, 히히. 올때 보니 너 짝사랑하는 알바생 퇴근하고 있던데?"
"그런 사이 아니거든?"
"뭐래. 병신같이 고백도 못하는 게."
"와씨! 진짜."
"저, 저 느, 능력 뚜잇."
"어이, 말더듬이. 너는 우리랑 있을 땐 편하게 하라니까."
"넵."
"어머 근데, 너 아다니? 왜 나보고 부끄러워해?"
"아, 아닙니다."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거야, 아다가 아니라는 거야?"
세나로 변신한 미호가 자꾸 김건을 놀리자 대근이 적절히 끊었다.
"농담은 고만하고, 회의 시작하자. 미안한데, 세나양. 난 비흡연자라 흡연은 삼가해 주면···."
"후-!"
세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담배연기를 대근에게 뿜었다. 연기를 그대로 맞은 대근이 콜록거리자 보다 못한 창범이 세나의 손에 있던 담배를 빼앗으려 들었다.
"아 쫌. 대장님 얘기하는데!"
하지만 세나가 교묘히 손목을 돌리자, 그의 손이 허무하게 허공을 더듬었다.
"금나수라고 혹시 알아?"
"뭐, 뭔데 그건?"
"호호, 미호가 무녀라고 술법만 쓰는 건 아니거든. 난 무공도 살짝 익혔지."
"나랑 장난해?"
열받은 창범이 연속해서 손을 뻗었으나, 도저히 세나의 손에 쥔 담배를 뺏을 수 없었다. 아무리 붙잡으려고 해도 그녀의 소매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네 실력으론 안된다니까?"
세나가 의기양양 웃는데 갑자기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담배가 허공으로 쑥 떠올랐다.
"엥?"
"죄송하지만, 잠시 끄겠습니다 선배님."
담배는 그대로 재떨이로 날아가더니 수직으로 처박혔다. 세나가 놀란 표정으로 김건을 향해 물었다.
"너 염동술사니?"
"네."
"어머, 어머. 별일이야. 신입이 창범이 보다 훨 낫네."
"뭐래 이 할망구가!"
창범이 따지자 세나가 순식간에 손을 뻗어 창범의 손목을 비틀었다.
"금나수가 공격 기술이란 건 모르나봐?"
"악."
"적당히 좀 해."
결국 대근이 표정을 딱딱히 굳히자 그제서야 세나도 물러섰다.
평소 인자하던 대근이 진심으로 화를 내면 누구보다 무섭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죄송해요, 오빠."
"오빠 아니고 대장."
"네, 대장."
"암튼, 오늘 안건은 별거 없어. 첩보에 따르면 우리 관할에는 더 이상 플레이어의 존재가 없는 걸로 나오거든."
"저번에 쫓던 그 플레이어는요?"
"뭐? 야동?"
"야동이 뭡니까?"
김건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세나가 풉- 웃으며 손바닥 위에 주먹을 탁탁 두들겼다.
"야동 몰라, 야동? 남녀가 탁탁!"
"아, 아니 그 뜻이 아니라···."
"우리가 예전부터 쫓던 놈 있었어. 야동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거든."
"잠시만요, 그러니까 플레이어가 야동을 찍었다고요?"
"그런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근데 왜 아직 못 잡았죠?"
"놈이 워낙에 신출귀몰해. 다른 플레이어랑 다르게 뭔가 대외적인 활동을 거의 안하고 있거든."
"아···. 혹시 저렙 플레이어 인가요?"
"아마도. 끽해야 중수급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
"중수급이면 금방 잡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