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5.. 이사-15-
'그러고 보니···. 그런대로 괜찮은데?’
[네? 설마 지금 가전 제품매장 직원을 유혹하시려는 겁니까?]
'왜? 그럼 안되나?’
[미션도 업적도 아닌 여성인데요?]
'뭐 이젠 상관있어? 포인트만 벌면 그만이지. 중고거래의 달인이잖아.’
[아니, 무슨···.]
'내가 오죽 급하면 그렇겠어. 현금이 아무리 많아봐야 무슨 소용이야. 포인트 잔고가 바닥인데.’
[크흠. 알아서 하십시오. 주인님이 하고 싶은대로 하시는 거죠.]
도훈은 빠르게 여직원의 몸매를 스캔했다. 놀랍도록 개선된 동체시력은, 상대가 알아채지도 못하는 사이 견적을 내놓았다.
'가슴은 B컵에 겉보기완 달리 살집이 있는 몸이네. 나이는 스물 예닐곱 정도인가?’
[그게 보입니까?]
'딱 보면 모를까?’
여직원이 입은 베스트엔 조그만 명찰이 달려있었다.
'김이지. 이름이 독특하네, Easy면 쉽다는 뜻인가?’
[아니 그게 어떻게 그렇게 해석됩니까?]
"혹시 한번에 구입하면 할인 혜택이 있나요? 좀 많이 살것 같은데."
이지가 화색을 띄며 대답했다.
"그럼요! 500만원 이상 구매시엔 현금 캐시백도 되고요, 혹시 1000만원 이상 구매시 저희 회사 플래티넘 회원카드발급 받으시면 12개월 무이자 혜택도 함께 드리고 있어요.
잠시 저기 앉아서 상담 받아보실래요?"
이지가 매장 가운데 상담용 탁자를 가리켰다.
도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앉았다.
"필요한 제품이 정확히 어떤 종류예요? 냉장고랑 에어컨이랑···."
"전부 다요."
"네?"
"신혼 살림에 들어가는 물품 전부 다 알려주세요. 기왕 사는 거 한번에 다 사버리게요."
"저, 정말요?"
도훈의 호언장담에 이지가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안 그래도 이번 달 실적 부족으로 스트레스가 심했는데, 별 기대도 않던 젊은 대학생이 복덩이처럼 굴러들어 온 것이었다.
"그럼 일단 제가 카탈로그 하나 가져올게요. 아, 혹시 음료 드시고 싶은 거 있으신가요?"
"커피 되나요?"
"물론이죠."
이지가 생긋 웃으며 후다닥 어딘가로 뛰어갔다.
이내 한 손에 아이스커피를 들고 온 그녀가 도훈 앞에서 카탈로그를 펼치며 열심히 설명했다.
"왜, 깔맞춤이라고 하죠? 요샌 가전도 같은 브랜드로 일치시키는 게 유행이에요. IOT로 묶으면 모바일로 일괄 적으로 컨트롤 할 수도 있고요."
"모바일이요?"
"음, 그러니까 이런 건데요."
이지가 갑자기 자신의 스마트 폰을 꺼내더니 메인 화면의 어플 하나를 실행시켰다.
"이게 저희 집에 직접 설치한 IOT 제품들이에요. 보시면 에어컨이랑 냉장고, 공기청정기 보이시죠?"
조그만 핸드폰 화면을 통해 설명해야 했기에 이지가 도훈의 옆에 바짝 붙었다. 팔끼리 서로 밀착할 만큼 가까운 거리였기에 도훈은 이지의 몸에서 나는 진한 향수 냄새를 느꼈다.
'흐음, 냄새 좋은데? 근데 이거 너무 바짝 붙는 거 아닌가?’
[약간은 의도가 보이네요.]
"같은 IOT 생태계에 묶인 제품들은 이렇게 원격으로도 조정이 가능해요. 예를 들어서 여름날 퇴근하기 전에 미리 에어컨을 틀어 놓는 다거나, 미세먼지가 심한 날 공기 청정기로 실내 정화를 시켜놓는 다거나···."
도훈은 설명을 듣는 척하면서 이지의 가슴골을 훔쳐보았다.
블라우스 윗단추를 풀어 놓아서 인지 옆에서 슬쩍 내려다보니 음영진 곳으로 깊은 골짜기가 보였다. 설명을 위해 팔을 안쪽으로 접는 바람에 가슴살이 부대껴 올라온 것이었다.
'호오, B컵인데 살집이 좀 있다보니 상당히 볼륨이 있네.
’[그렇게 대놓고 보면 싫어하지 않을까요?]
'아니.’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일부러 단추 하나 풀었거든.’
[일부러요?]
'아까 내가 슬쩍 스캔할 때만 해도 분명 단추가 끝까지 채워져 있었단 말이야. 그런데 카탈로그 가져온다고 다시 왔을 땐 단추가 벌어져 있었고.’
[그럼 설마···.]
'맞아. 일부러 섹스어필해서 구매를 유도하려는 속셈인 거야. 일종의 미인계랄까?’
[독특하군요.]
'뭐, 여자가 쓸 수 있는 손쉬운 영업 방식이니까.’ 이지도 도훈의 노골적인 시선을 느꼈는지 흠칫 놀라는 척 살짝 몸을 떨어뜨렸다.
"어머, 제가 너무 가까이 붙었나봐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근데 아직 학생 같아 보이는데···. 정말 이걸 한 꺼번에다 사시려고요?"
"네."
"카드 한도는 확인해 보셨나요? 의외로 월사용액 한도가 걸리는 경우가 많아서 부모님께 미리 확인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저 카드 아닌데요?"
"네?"
"현금으로 구매하려고요."
"아, 이, 이걸 다요?"
"네. 원래 전 현금으로만 물건 사요. 현금 영수증은 끊어주는 거죠?"
"그, 그쵸."
도훈의 재력과시에 놀란 이지가 커다란 눈을 껌뻑거렸다.
어리고 잘생긴데다, 몸까지 좋은 도훈이 현금 부자라는 점에서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뭐, 뭐지 이 남자? 설마 무슨 재벌 3세 같은 거 아냐?’
이지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매장에서 가장 비싼 TV도 추천했다.
"혹시 TV같은 건 안 필요하세요? 요샌 무척 얇게 잘 나오거든요. OLED 패널이라 색감도 우수하고요. 저기 디피되어 있는데 실물로 한 번 보실래요?"
"아뇨. 사진으로 봐도 예뻐 보이네요. 근데 주말에도 설치 해주시는 거죠?"
"물론이죠. 오늘 구매하시면 내일 오전 중으로 전부 설치 가능하세요. 벽걸이 방식으로 선택하시면 맞춰서 작업도 해드리고요."
도훈은 500만원이 넘는 가격표를 보고도 눈하나 깜빡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그럼 TV도 같이 할게요. 안 그래도 거실이 휑해서 하나 놓을까 했는데."
'세, 세상에. 이렇게 비싼 TV를 서슴없이···.’ 이지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혼수로 1000~2000만원을 한 번에 해가는 손님들이 간혹 있긴 했지만, 대부분 여러 전자제품매장을 싹 둘러보고 이것저것 할인 조건 등을 꼼꼼히 따지는 빠꼼이들이었다.
아무래도 금액이 워낙 크다 보니 최대한 신중히 구매하려는 건 당연한 반응. 하지만 고작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총각이 매장에 온 지 10분도 안 돼 벌써 1000만원이 넘는 제품들을 고민도 않고 골라대는 것이었다.
'정말 재벌 3세 같은 거 아냐? 얼굴도 곱상한 게 훈훈해 보이는데···.’
이지가 침을 꼴깍 삼키며 도훈에게 슬쩍 개인적인 질문을 했다.
"근데···. 제가 이런 말씀 드리긴 좀 그런데, 이렇게 비싼 제품을 바로 사셔도 괜찮으세요? 그러니까 제 말은···
좀 더 둘러보시고 비교하시는 것도···."
"상관없어요. 가진게 돈 밖에 없는데요."
"네, 네?"
도훈이 씩 웃더니 이지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가까이 와보라는 사인이었는데, 나이가 어린 도훈이 연상으로 보이는 이지를 상대로 하기엔 다소 건방진 동작이었다.
하지만 손님은 왕이라는 생각에 이지가 아무생각 없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도훈이 이지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다른 사람에겐 소문내지 마시고···. 저 실은 코인 대박났거든요."
"코, 코인!"
"네. 이해 하셨죠?"
코인이라는 말에 이지는 단숨에 납득이 됐다. 최근 급격히 상승한 비트코인으로 나이가 어린 데도 큰 돈을 거머쥔사례가 수없이 기사에 나왔던 것이다.
'어쩐지, 돈을 물 쓰듯 펑펑 쓰더라니···. 와, 근데 진짜 운도 좋은 사람이구나. 얼굴도 잘생겼는데 코인으로 어린 나이에 부자까지 되다니. 이런 남자한테 시집가면 얼마나 좋을까?’
이지는 코인 부자라는 도훈의 말에 갑자기 그가 더 잘생겨 보이기 시작했다. 최근 유행하는 영&리치에 딱 들어맞는 사내였다.
이지가 대놓고 호감을 보이기 시작하자 도훈도 이에 맞춰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돈 많은 남자를 좋아하는 스타일이네. 이거 꼬시기 쉽겠는데?’
[어쩌시려고요?]
'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돈이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라고.’
[설마 돈으로 매수를 하겠다는 겁니까? 이건 플레이어 규정상 허용되지 않는데요.]
'매수는 무슨 매수? 재력을 과시하는 것도 어필 중에 하나니까.’
"정말 대단하세요. 근데 그거 현금처럼 쓸 수 있는 거였어요? 제가 코인은 잘 몰라서."
"아, 거래소에서 달러로 바꾼 뒤에 국내 은행에서 인출하면 돼요. 사실 제가 수익실현한다고 일부를 현금화 시켜 놨거든요."
도훈은 굳이 핸드폰 은행어플을 켜더니 잔고를 확인시켜주었다. 주식으로 번 돈이 입금된 통장에는 무려 4억이 넘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와··· 이, 이게 다 얼마예요?"
'0’이 무수히 찍힌 잔고의 숫자는 한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였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현금잔고를 본적이 없던 이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훈은 얼른 어플을 닫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수익 중 일부만 현금화 시킨 거예요. 대충 10% 정도?"
"10, 10프로···. 대체 얼마나 버신 거예요?"
"훗- 그냥 운이 좋았어요."
이지는 까마득한 숫자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처음엔 잘해야 노트북 정도나 알아보러 온 얼치기 대학생 정도로 여겼다. 대학생들이 주로 찾는 품목이 노트북이다 보니, 별기대감 없이 그녀가 붙은 것인데 알고보니 큰손에 알부자 라니···.
이지는 불쑥 도훈이 처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제 여자만 있으면 될 것 같아서요.
'세, 세상에. 뻥이 아니라 진짜였어. 진짜 영&리치가 내 눈앞에···. 그 와중에 왜 저렇게 잘생겼담?’
"흠흠···."
갑자기 도훈을 유혹하고 싶은 생각이 든 이지가 옆머리를 귀뒤로 넘기며 예쁜 척을 했다.
"저 실례가 안되면 제가 코인에 대해 궁금해서 그런데 나중에 개인적으로 여쭤봐도 될까요?"
"코인이요?"
"네. 저도 한 번 투자 같은 걸 배워보고 싶어서요."
도훈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나중에 시간 되면요."
"저, 정말요?"
"알려주는 거야 해드릴 수 있죠. 대신에 투자에 대한 결과는 전적으로 개인 책임이라는 것만 아시면요."
"어휴, 당연하죠."
"그나저나 몇 가지만 더 추천해 주세요. 처음으로 집에서 독립하는 거라 살림이 하나도 없거든요."
"그러시면 제가 혼수 세트 패키지로 한 번 보여드릴게요."
신이 난 이지는 열심히 가전 제품들을 추천했다.
그 바람에 도훈은 인공지능 청소기며, 빨래 건조기, 식기 세척기, 음이온 정수기 등···. 온갖 물건들을 최고급으로 모두 고를 수 있었다.
20여가지가 넘는 품목을 놓고 계산기를 두드린 이지는 총액을 도훈에게 알렸다.
"음···. 삼천만원 좀 넘는데 괜찮으시죠?"
"네, 상관없어요."
통 큰 도훈의 대답에 이지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오늘 한 방으로 순식간에 월간 매출 1위 달성이었다.
"여기 서류에 받으실 주소랑 연락처, 성함 적어주시고요···."
이지는 이름과 연락처 부분을 눈여겨 보더니 도훈에게 슬쩍 물었다.
"이도훈씨···?"
"네."
"정말 나중에 제가 따로 연락드려도 괜찮으신 거죠?"
"물론이죠. 아, 오늘 저녁에 시간 될 것 같은데."
"오늘 저녁요?"
"네. 퇴근하시고 잠깐 뵐까요?"
"저, 저야 좋죠! 제가 덕분에 매출 실적 올렸으니까 식사 한 번 대접할게요!"
이지가 반색하며 건넨 제안에 도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식사는 좀···."
"그, 그런가요? 제가 초면에 좀 오버했죠? 너무 고마워서···. 그럼 차라도···."
"아뇨. 그냥 술이나 한잔해요. 차보단 술이 좋죠. 시원하게 맥주 한 잔 어때요?"
"좋아요."
이지가 잔뜩 기대감에 부풀었다. 잘만하면 영&리치의 멋진 연하남을 꼬실 수있는 기회였다. 잘 안 되더라도 코인에 대한 정보를 얻기만 해도 본전은 남는 장사였다.
"저 오늘 6시 퇴근하거든요. 제가 도훈씨 번호로 연락드릴게요."
"네. 기다릴게요."
물건 구매를 마친 도훈은 기분 좋게 매장을 떠났다.
[이야, 이젠 뭐 아이템이나 스킬도 필요 없는 수준이군요.]
'이 정돈 식은 죽 먹기지. 잘 생기면 인생 쉬워. 돈까지 많으면 더 쉽고.’
[정말이지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전생에나 여자 앞에서 빌빌댔지, 환생 후엔 첨부터 잘나갔다고. 물론 그땐 허우대만 멀쩡했지만.’
[그럼 지금은요?]
'지금은 뭐···. 맘만 먹으면 어떤 여자든 넘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었달까?’
[대단 하십니다. 정말.]
'그나저나 가전 제품은 끝났고, 나머지도 좀 보러가야 겠다.’ 도훈은 차를 타고 가구매장을 들렀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고급 킹사이즈 침대와, 지난 번 부서뜨린 책상, 그리고 원목으로 만든 식탁 등 값비싼 제품들을 거리낌없이 사들였다.
"그럼, 내일까지 설치 부탁드려요 사장님."
"물론입니다! 시간 맞춰서 찾아뵙겠습니다, 손님!"
머리가 벗겨진 가구매장 사장은 어린 도훈에게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깍듯이 배웅인사를 했다.
'돈이 좋긴 좋구나.’
[근데 이렇게 막 쓰셔도 됩니까? 잔금 치를 돈은 남겨 두시는 거죠?]
'어. 대충 500정도 여유 있어. 내가 가지고 있는 현금도 더 있으니까.’
[그럼 이제 쇼핑은 끝나신 겁니까?]
'아직 피트니스 룸에 넣을 운동기구 확보를 못했는데.’
[2층 거실 말이죠?]
'응. 근데 지금 내 수준에 일반적인 무게를 치는 게 과연 운동이 될까 싶네.’
[제 생각에도 의미가 없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차피 주인님의 힘의 원천은 근력이 아니라 내공이니까요.]
'그럼 적당히 구색만 맞춰놔야 겠다. 어차피 후배들 불러서 거기서 운동도 같이 하기로 했으니까.’
도훈은 마지막으로 운동기구점에 들러 적당한 기구들을 주문했다. 자신이 직접 쓸 것이 아니다 보니 대충 구색만 맞추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긴 시간 쇼핑을 끝내고 나오는데 아까 전자제품매장에서 만났던 김이지가 전화를 걸어왔다.
-저, 퇴근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