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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301화 (1,268/2,000)

1284.. 이사-14-

* * *

수면제를 먹고 잠들었던 도훈은 새벽녘에 눈을 떴다.

"음냐···."

그때 자신의 옆에서 자고 있는 영철의 모습이 보였다. 벽면에 한 발을 올리고 늘어진 놈의 모습을 보자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불쑥 화가 치밀었다.

'저 새끼가 감히 채원이를···.’

[깨어나셨습니까?]

'내가 얼마나 잤지?’

[5시간 정도입니다. 지금은 새벽 여섯시 좀 안됐고요.]

'근데 영철이 저 새낀 왜 내 옆에서 자고 있어?’

[주인님이 잠드신 뒤에 들어왔습니다. 채원양과 같은 방에서 자면 의심받을까 봐 이 방으로 넘어 온 것 같습니다.]

'흥, 둘이 하는 소리 다 들었는데 의심은 지랄.’

[왜 영철군에게 화를 내십니까? 업적 때문에 주인님이 직접 맺어주시고서요?]

'그건 그거고, 기분 더러운 건 어쩔 수 없잖아.’

잠에서 막 깬 도훈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평소엔 자고 일어나면 내공이 몸 전체를 감싸며 기운이 펄펄끓었는데, 지금은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컨디션이 이상하군. 내 몸이 왜 이러지?’

[아직 남아있는 약 기운 때문입니다.]

'약 기운이라니?’

[주인님이 드신 수면제는 코끼리도 재우는 초강력 성분이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내공이 몸속에 들어온 수면제를 해로운 성분으로 판단하고 밀어냈습니다. 그 덕에 원래 효능의 절반 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했고, 현재 주인님은 강제각성상태입니다.]

'내공이 그런 일도 하나?’

[절정에 달한 고수는 만독불침의 육체를 지니게 됩니다.

주인님이 술이 강해진 이유도 이와 비슷한 원리고요.]

'그렇군. 약 발을 잘 못 받는 몸이라니···. 쳇, 수면제 괜히 먹었네. 포인트 아깝게.’

[참고로 아이템을 사느라 잔고는 다시 제로입니다.]

'뭣? 왜 그렇게 비싸?’

[아뇨, 그게 아니라 포인트가 들어온 이유가 EVERY BO DY 구멍동서 업적 보상 때문이잖습니까?]

'보상 내용이 정확히 뭐였더라?’

[관계한 여자가 과거에 만났던 남자 숫자만큼 x100 포인트를 지급받는 겁니다. 업적이 달성되면서, 첫 번째로 채 원양과 관련된 포인트가 지급되었습니다. 하지만 채원양의 성경험 횟수가 많지 않아 겨우 수면제 한 알 살 정도밖에 안 됐고요]

'그게 얼만데?’

[모두 300포인트입니다.]

'3명이라···.’

도훈은 다시 씁쓸함을 느꼈다. 고작 300포인트를 벌기 위해 채원을 영철에게 도매금으로 넘긴 기분이었다. 갑자기 퍼질러 자고 있는 영철이 얄미워 앞 발로 허벅지를 뻥걷어찼다.

"개새끼!"

"억!"

자다가 허벅지를 차인 영철은 고통스러운지 다리를 감싸쥐고 나뒹굴었다.

[아니 자는 사람을 왜 발로 차십니까? 내공이 실린 발차기에 잘못 맞았다간 다리뼈가 부러질 겁니다.]

'걱정 마, 힘 빼고 찼으니.’

"끄으으···."

영철이 고통에 겨워 눈을 뜨자 도훈이 태연하게 말했다.

"미안해. 일어나려다 다리를 밟았나봐. 괜찮아?"

"도, 도훈이 형?"

"계속 자. 난 먼저 가볼 데가 있어서 일찍 나가볼게."

"가신다고요?"

"어."

"그럼 저는요?"

"그냥 자고 있어. 너니까 믿고 가는 거야. 그럼 나중에 보자."

"아, 아니 형···."

영철이 당황하며 도훈을 불렀지만, 도훈은 그대로 방을 나서더니 원룸 밖으로 나가버렸다. 영철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리가 아파 도저히 따라가지 못했다.

집밖으로 나온 도훈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영철이 이 새끼. 채원이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로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려 버릴라."

[주인님도 참으로 이상하십니다. 갖긴 아쉽고 남 주긴 아까운 뭐 그런 건가요?]

'몰라. 이제 내 손을 떠났으니 둘이 지지고 볶든 말든.’

도훈은 씁쓸한 기분을 떨치기 위해 담배를 꼬나물고 새벽 거리를 걸었다. 동트기 직전인지 사방이 짙은 남색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어.’

[네, 말씀하십시오.]

'이번에 받은 업적 보상 말이야.’

[중고거래의 달인요?]

'어. 그거 적용은 어떻게 되는 거야? 가령 내가 한 번 만났던 여자들도 포인트가 지급되나?’

[아닙니다. 소급적용은 되지 않습니다. 채원양의 경우 업적 대상자였기 때문에 특별 포인트가 지급된 것이고, 앞서 한번이라도 주인님과 관계가 있던 여자는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흐음.’

[대신 뉴페이스는 모두 해당됩니다. 미션이나 업적 대상이 아니더라도요.]

'호오, 그렇단 말이지?’

도훈이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눈빛을 번뜩였다. [중고거래의 달인] 옵션이 가진 사기적인 효능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방법으로든 새로운 여자를 꼬셔서 따먹으면 그 여자가 나 이전에 만났던 남자들의 숫자만큼 곱하기 100을 해서 포인트가 지급된다는 거지?’

[네, 정확합니다. 단, 성매매를 대가로 만난 경우는 제외하고요. 물론 범죄로 인한 피해도 카운트가 되지 않습니다.

]

'그건 상관없어. 암튼 이제 포인트 벌기는 식은 죽 먹기구나.’

[왜요?]

'어딜 가나 잘 대주는 여자들은 있단 말이지. 아니, 꼭 그런 여자가 아니더라도 나이가 많을수록 남자 경험은 당연히 많을 수밖에 없잖아. 이제 그런 애들을 한 명씩 자빠뜨릴 때마다 중고거래의 달인 옵션으로 몇백에서 몇천 포인 트씩 버는 셈이고.’

[그렇겠죠?]

'한마디로 이제 포인트 걱정은 할 필요 없단 소리야.’

[설마 상관도 없는 여자들을 건드리는 난봉꾼이 되시겠다는 선언인가요?]

'아니 난봉꾼 까지는 아닌데, 적어도 포인트를 벌고 싶을 때 좀만 노력하면 일당 벌이 정돈 가능해 졌다는 소리니까.

’[주인님의 마인드는 정말···.]

'이걸로 됐어. 영철이랑 구멍동서 된 건 씁쓸하지만, 이정도 보상이라면 감내할 수 있을 것 같아.’ 도훈은 금세 우울했던 기분을 떨쳐버렸다. 그 사이 약 기운도 빠지는지 점점 머리가 맑아지고 있었다.

'점점 두통이 가시는 기분이군.’

[땀을 한바탕 흘리고 나면 더 빨리 약기운을 몰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럼 집까지 뛰어가 볼까?’

마침 새벽녘이라 도로 위를 다니는 차들 말고는 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도훈은 간만에 자세를 잡고 전력 질주를 시작했다.

그렇게 미친 듯이 달리자 어느새 본인의 원룸 건물 앞에 당도했다. 사람들 눈치 안 보고 뛰느라 간만에 땀을 잔뜩 흘렸다.

"후아-. 금방이네. 집까지."

[방금 하프 마라톤 세계 신기록 세우셨습니다.]

'그랬어? 몰라. 땀 쫙 빼고 나니까 확실히 머리가 더 상쾌해진 것 같아.’

도훈은 집으로 들어가기 전 다시 담배를 꼬나물었다.

그러면서 반년 넘게 살았던 원룸을 지그시 올려보았다.

환생 이후 첫 번째 거처였던 만큼 많은 추억이 담겨 있는 곳이었다.

'여기서 별일이 다 있었는데 말이지. 주말이면 이제 안녕이겠군.’

[젤 처음 집으로 부르셨던 사람이 교대생 하린이었죠?]

'어. 그럴걸. 집에 불러다 후루룩 따먹었는데 말이야.’

[지금은 공무원이 된 하서윤 양도 옆집에 살았고요.]

'맞아. 서윤이한테는 이사 간 집 주소 알려줘야겠지?’

도훈은 추억이 서린 원룸을 한참 쳐다 보다 문득 이사 업체를 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잔금 준비는 다 끝냈으니 오늘은 이사 업체에 예약이나 해야겠어.’

[업체요?]

'요샌 포장이사 맡기면 알아서 새집으로 다 세팅해 주거든.’

[오호.]

'그래도 넓은 집을 다 채울 순 없으니 새로운 가구도 들여야 겠고.’

[완전히 새로 다 사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새 술은 새 부대에, 새 집은 새 가구로.’

도훈은 문득 사야할 물건이 굉장히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룸에 비치되어 있던 세탁기나 냉장고를 비롯해, 개인 운동룸을 채울 헬스기구도 모두 주문해야 했다.

'내일이 이산데 너무 준비를 안 한 것 같은데. 오늘 오후엔 간만에 쇼핑 좀 해야겠다.’

[오늘도 바쁘시겠군요.]

'일단 집에 들어가 씻고, 수업도 끝내고.’

* * *

오전 수업을 마친 도훈이 식당으로 향하는데 영철이 쪼르르 달려왔다.

"회장님!"

도훈은 영철을 보자 잊고 있던 채원이 떠올라 순간 욱 했지만, 겨우 마음을 다스렸다. 로시의 말대로 영철은 아무 잘못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 영철아."

"아침에 왜 일찍 가셨어요?"

"근손실."

"네?"

"아니, 나 새벽에 헬스장 다니거든. 하루라도 운동 안하면 근손실 난단 말이야."

"아···."

도훈의 엉뚱한 대답을 들은 영철은 벙찐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도훈이형이 몸이 괜히 좋은게 아니었구나. 근손실 때문에 먼저 나간거였다니···.’

"넌 집에 잘 들어갔어?"

"네. 아침에 채원이한테 인사하고 바로 집으로 갔어요.

채원이도 학교 가느라 정신이 없더라고요."

영철은 도훈이 떠난 이후 별일이 없었다는 걸 강조하는 듯 했다. 하지만 이미 두 사람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도훈은 그 변명이 고깝게 느껴졌다.

'새끼, 채원이가 진짜 내 사촌동생인 줄 알고 눈치 엄청 보는구만. 채원이도 별 얘기 안 한 거 같고.’

"뭐? 그럼 둘 사이에 아무일도 없었단 말이야?"

"네, 네?"

도훈은 일부러 과장되게 영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어이구, 이 등신아. 넌 기회를 줘도 그걸 못 받아먹냐."

"바, 받아 먹다뇨? 뭘요?"

"내가 왜 새벽 일찍 그 집을 나갔겠냐고. 단둘이 기회 좀 만들어 보라고 일부러 피해준 건데, 그걸 눈치 못 채고."

"아···. 그, 그런 거였어요?"

영철은 도훈의 말에 어젯밤 일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얘길 꺼냈다.

"근데 채원이랑은 어제 처음 만났잖아요. 게다가 채원이는 도훈이형이랑 사촌이고···."

도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제 사촌 아니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젠 분명 사촌이라고···.

채원이도 그렇게 말했고요."

"얘기가 좀 복잡한데···. 사촌 이었었지."

"네?"

도훈이 없는 말을 지어냈다.

"채원이는 우리 고모 딸이야. 근데 고모가 나중에 고모부랑 이혼하셨거든."

"아···. 그, 그럼."

"채원이는 고모가 아닌 고모부 밑으로 들어갔어. 그래서 법적으론 이제 남남이나 마찬가지지. 전 고모부가 다른 분이랑 재혼하셨거든."

"뭔가 엄청 복잡하네요."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지금은 남남인 관계지. 그래도 사촌이었으니까."

"이해했어요."

"여튼, 혹시라도 채원이한테 마음 있으면 잘해줘라. 채 원이 울렸다간 확 그냥."

"네, 넵!"

영철은 뭔가를 말할 것처럼 우물쭈물 하더니, 이내 도훈에게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혀, 형 그럼 전 다음 수업 때문에 이만 가볼게요."

"그래."

[사촌이지만 사촌이 아니라니···. 정말이지 주인님의 잔머리는 알아줘야 겠군요. 근데 이 사실을 채원양에게 말해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서로 말을 맞춰놓지 않으면 나중에 영철군이 알아챌텐데요.]

'채원이? 그 거짓말쟁이가? 그건 신경 안 써도 돼. 영철이가 대충 운만 띄워도 살 붙여서 알아서 꾸며댈걸.’

[근데 영철군도 이상하군요. 사촌이 아니라는 걸 밝혔으니 사실대로 말해도 될 것 같은데, 아무일 없는 것처럼 감추다니.]

'영철이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 수 있지. 내가 먼저 잠든 사이에 둘이 물고빨고 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밝힐 수 있겠어? 나중에 둘이 정식으로 사귀게 되면 그때나 말 할 거야.

’[아하. 근데 영철군이 채원양이랑 사귀려 들까요?]

'딱히 싫은 눈치는 아니었거든. 채원이 마음이 더 중요하지.’

[채원양도 주인님을 마음에 두고 있으면···.]

'아니. 어젯밤 일로 엄청 실망했을 걸. 차라리 영철이랑 만났으면 만났지, 이제 나랑 잘되긴 글렀어.’

[하아···. 뭔가 복잡하네요.]

'됐고, 오늘 오후 수업 끝나면 이사갈 집 채울 물건이나 보러가야 겠다.’ 오후 수업까지 모두 마친 도훈은 바로 차를 타고 대형 가전제품 매장으로 향했다. 인터넷으로 사는 게 좀 더 저렴하지만, 주식으로 큰 돈을 거머쥔 도훈의 입장에선 한푼 두푼아낄 필요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사야할 물품이 많았기 때문에 매장을 들러서 한번에 모두 주문하는 편이 훨씬 편했다.

"어서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매장에 들어가자 깔끔한 투피스를 입은 여성 직원이 도훈을 에스코트했다. 긴 머리를 뒤로 단정히 묶은 예쁘장한 여직원이었다.

"가전제품 좀 보러 왔는데요."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신가요?"

여직원은 도훈을 보고 연신 생글거렸다. 그것이 영업용 미소인지, 아니면 훤칠하고 잘생긴 도훈에 대한 관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세탁기도 사야하고···."

"세탁기는 저쪽으로."

"냉장고도 하나 봐야겠고."

"아, 냉장고도요?"

"시스템 에어컨도 있죠?"

"에어컨까지요? 혹시 혼수 장만 하시려는 건가요?"

여직원은 대형 가전을 거침없이 불러대는 도훈의 주문에 놀라서 물었다. 아무리 봐도 결혼하기엔 이른 나이로 보였는데, 부르는 품목은 새살림을 차리는 급이었기 때문이었다.

"네, 뭐 혼수가 될수도 있겠네요."

"와, 축하드려요. 결혼 되게 일찍하시나 보다."

가끔 사고치고 결혼하는 어린 커플들을 본적이 있었기에 여직원은 도훈도 그런 부류가 아닐까 생각했다.

'흐응, 잘 생겼는데 역시 얼굴값 하는구나.’

"결혼은 아닌데요?"

"네? 방금 혼수로···."

"아, 미리 다 준비해놓고 나중에 여자만 구하려고요. 하하."

도훈의 호탕한 말에 여직원이 솔깃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도훈은 그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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