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9.. 이사-9-
"근데 왜 아직까지 남자친구가 없대요?"
"응?"
"되게 예쁘신 것 같아서···."
미끼로 던진 한마디에 영철이 곧바로 물었다.
"채원이가? 하하. 난 어려서부터 봐서 그닥."
"에이, 저 정도면 엄청 미인이죠."
"하긴 뭐 못생긴 편은 아니지. 아무래도 여중, 여고, 여대를 나와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
"맞다. 지금도 여대 다닌댔죠?"
"응, 남자를 만날 기회 자체가 없었을 거야. 오죽하면 사촌 오빠인 나한테까지 와서 소개팅 얘기를 꺼냈을까."
"형한테 소개팅이요?"
"대놓고 말한 건 아닌데, 혼자 자취하는 중인데 외롭다고 계속 돌려서 말하더라고."
"아하."
영철은 자취라는 말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했다.
부모님과 같이 사는 여학생보다는, 타지에서 상경해 자취하는 여자들이 꼬시기 쉬운 측면이 있다는 점을 의식하는 것 같았다.
"여튼 잘 됐지 뭐. 마침 나도 너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인위적인 소개팅 자리보다 자연스럽게 밥 먹으면서 친해지는 게 더 좋지 않겠어?"
"형···.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마음에 들면 내가 적극적으로 밀어줄 게. 근데 영철이 혹시 너 다른 여자랑 연락하고 지내는 건 아니지? 그건 확실히 대답해 줘. 괜히 중간에 곤란해 지기 싫으니까."
"제가요?"
영철이 펄쩍 뛰며 부인했다. 자신의 바람기에 대한 소문을 의식하는 행동 같았다.
"전혀 없어요. 형, 저 전역한 지 일주일도 안 됐잖아요."
"그래?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야."
[영철군은 전역 전 말년 휴가때부터 열심히 작업했던 것 같던데 별 성과가 없는 모양이군요.]
'내 주변 여자들을 눈독 들였던 게 화근이지. 그것만 아니었어도 진즉 여자 하나 쯤 꼬셨을 놈이야.’
[하긴, 바람기는 주인님에 버금가긴 하죠. 근데 두 사람이 정말 잘 돼도 문제 아닙니까?]
'뭐가?’
[채원양을 사촌동생이라고 소개한 거요. 나중에 아무 사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까요?]
'채원이는 절대 말 못 할 걸.’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어쨌든 이 사기극에 본인도 동참한 셈이잖아. 만에 하나 영철이랑 사귀게 되면 더 말 못하지. 나와의 관계를 솔직히 밝히는 게 더 껄끄러워지니까.’
[아하.]
'그리고 워낙에 거짓말이 능수능란해서 어떻게든 넘길거야. 둘이 결혼까지 간다면 모를까, 굳이 사귀는 사이에 가족관계를 깊이 파고들진 않겠지.’
[역시 주인님은 다 계획이 있으시군요.]
'그나저나 내가 한 번 먹은 여자를 후배한테 소개시켜 주는 건데, 미션 같은 거 안 뜨나? 뭔가 미션 조건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난번 NTR 미션 때와는 상황이 좀 다르죠.]
'어째서?’
[NTR 미션의 핵심은 주인님의 여자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채원양과 섬씽이 있긴 하지만, 두분의 관계가 바람이라고 하기도 뭐한 수준이라···.]
'하긴 채원을 오롯이 내 여자라고 말하긴 어폐가 있구나.
그냥 여름방학 때 우연히 휴가 갔다가 원나잇 했던 여자 정도 느낌이니까.’
[그렇죠. 하지만 관련 업적은 있을 겁니다.]
'업적이라고?’
[예전에 한 번 지나가는 말로 말씀 드렸는데, EVERY B ODY 구멍동서라는 업적입니다.]
'뭐냐 그건 또.’
[업적을 띄워드리겠습니다.]
95 . EVERY BODY 구멍동서. (친구나 직장 동료등 지인과 한 여자를 공유하는 미션입니다. 단, 지인의 호감도가 80 이상일 때 활성화됩니다.)
-당신은 진정한 공유경제를 실천하고 있군요!
-업적 보상 : [중고거래의 달인] 호칭이 부여됩니다. 호칭 특전으로 성경험이 많은 여자와 첫 관계를 맺을 때 그동안 관계했던 남성의 숫자만큼 포인트가 지급됩니다. (단, 성매매 행위는 횟수에 인정되지 않습니다.)
'오잉? 이런 업적이 있었다고? 근데 이전에 몇 번 전력이 있지 않았나?’
[다른 여자를 빼앗거나, 경험이 있는 여자와 관계한 적은 있어도 지인이라 불리는 사람과 대상을 공유한 적은 없죠.]
'오호라.’
따지고 보니 환생 후 친한 지인과 여자를 공유한 적은 없었다. 대부분 상대와 적대적 관계이거나 나에 대한 호감도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지인의 범주에 들지 않은 상태였다.
[영철군은 주인님을 가끔 질투하지만, 기본적으로 학과 선배로서 무척 존경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위 위업 조건에 해당이 됩니다.]
'그렇군. 근데 보상은 뭐야? 호칭?’
[중고거래의 달인 호칭은 경험이 많은 여자를 공략할 때 포인트를 제공해 줍니다. 1명당 100포인트로 계산되므로, 남성 편력이 화려할수록 주인님의 포인트 획득에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랑 관계할 여자의 과거 숫자만큼이 포인트로 들어온다?’
[정확합니다. 일종의 후다폭격기랄까요? 처녀를 선호하는 주인님께는 다소 아쉽지만요.]
'나름 괜찮군.’
"형, 근데 이제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어. 그러자."
업적까지 걸린 마당에 영철을 적극적으로 밀어줘야할 이유가 생겼다. 채원이 남에게 줘도 아쉽지 않을 여자라서 다행이었다.
* * *
"대체 이게 뭔 상황이람?"
화장실에 온 채원은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치는 중이었다. 도훈을 찾으러 왔다가, 그의 후배와 함께 저녁을 먹는 상황은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갑자기 나를 사촌 동생이라고 소개하다니···. 무슨 생각인 거야?"
그러면서도 채원은 영철의 생김새를 떠올렸다. 도훈이 근육남 스타일이라면, 영철은 호리호리하게 생긴 미소년에 가까웠다.
"나름 봐줄 만은 하던데···."
화장을 고친 채원은 가슴뽕을 들어 올리며 모양을 다듬었다. 그녀의 콤플렉스인 밋밋한 가슴을 감추기 위해 평소차고 다니던 것이었다.
"뭐, 일단 두고 봐야지."
채원이 화장실에서 나오자 마침 도훈과 영철도 가게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세 사람은 홀이 아닌 주방앞의 바에 나란히 앉았는데 채원이 가운데 앉고 좌우로 도훈과 영철이 앉았다. 주방 바로 앞이라 회칼을 손질하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술도 한 잔씩 할래?"
"술요?"
"형, 어제도 마셨는데 너무 달리시는 거 아니에요?"
"많이는 말고. 적당히 반주 삼아서."
"전 상관없어요."
"그래. 사장님, 여기 사케 한 병요."
술과 함께 막 해체한 참치회를 곁들이는데 맛이 무척 좋았다. 특히 대학생 신분인 영철과 채원은 고급 횟집의 분위기에 금방 매료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멋지게 차려입은 주방장이 바로 앞에서 회를 썰어 주는 모습이, 고급 일식집에 온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도훈은 전생에도 자주 와봤기에 감흥이 덜했지만, 이제 막 성인 된 두 사람에겐 흔치않은 경험이었다.
"형 덕분에 이런 곳도 와보고···. 정말 감사합니다. 참치 너무 맛있어요."
"나야말로 고맙지. 영철이가 평소에 나 엄청 도와주거든."
"아···."
도훈이 일부러 채원 앞에서 영철이를 칭찬했다. 스스로 자랑하는 것보다 주변에서 띄워주는 게 훨씬 효과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얘가 군대 막 전역해서 그런지 엄청 빠릿빠릿하더라고."
"오빠도 예비역이에요 그럼?"
"아, 네. 전역한 지 일주일 됐어요."
"그냥 말 편하게 해도 돼. 채원이 스무살이거든."
"그래도 초면인데···."
"전 괜찮아요. 편하게 하세요."
도훈은 채원 앞에서 최대한 영철을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엔 얼떨떨하던 채원도 곧 도훈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그에게 눈치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때 영철이 화장실을 간다고 일어섰다.
"형, 전 잠시 화장실 좀···."
"어, 다녀와."
영철이 일어나서 둘 만 남은 상황에서 채원이 다짜고짜도훈에게 따졌다.
"지금 나랑 뭐하자는 건데요?"
"뭐긴. 내 후배 소개시켜주는 거지. 영철이 괜찮지 않아?"
"아니, 그러니까 오빠 후배를 왜 소개 시켜 주냐고요."
"나보고 책임지라며?"
"책임요?"
"책임지는 의미로 내가 아끼는 후배 소개시켜 주겠다는 거야. 아까 물어봤는데 영철이도 너 마음에 들어 하더라."
"자, 잠깐만요. 그러니까 저보고 오빠 후배랑 사귀라고요?"
"아니. 그거야 네 선택이지."
"와 이 오빠 진짜 어이없네?"
채원은 기가 막혔다. 어찌 됐건 자신은 도훈과 몸을 섞은 사이. 그 와중에 친한 동생을 소개시켜주는 도훈의 의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오빠 혹시 변태예요?"
"내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를 후배한테 넘길 수가 있어요?"
"그러면 안되는 사이야?"
"예?"
"아니 뭐, 니가 내 여자친구도 아니고, 내가 니 남자친구도 아닌데 소개 정도는 시켜 줄 수 있는 거지."
"그래도 이건 아니죠!"
"아까도 말했지만 싫으면 싫다고 해도 돼. 나도 내 나름대로 책임감 때문에 그러는 거니까."
"이게 어떻게 책임감이에요?"
"솔직히···. 그래, 너랑 내가 그런 일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너랑 내가 사귈 건 아니잖아. 요즘 세상에 한 번 잤다고 사귀는 게 어딨어? 한 번 잤다고 다 사귀었으면 벌써 수십 명 사귀었겠다."
"제 앞에서 그걸 자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솔직히 밝혀도 되는 부분입니까?]
'그게 나아. 오만정 떨어지게. 나에 대한 반감이 강해질수록 영철의 존재감이 커질 테니까.’
"자랑이라서 말하는 게 아니야. 그만큼 내가 만나는 여자들이 많다는 거지. 채원이 너도 나같은 바람둥이 만나는 것보다 영철이처럼 순진한 놈이 좋지 않겠어?"
"저분도 알아요? 오빠 이런 사람인 거?"
"모르지."
"그럼 제가 다 까발려도 상관없다는 거예요?"
"까발리다니?"
"오빠 그냥 매장 시켜버리게요."
"정말 그럴거야?"
"왜요? 이제와서 겁나요? 사람 가지고 놀았으면 대가를 치를 각오도 하셨어야죠?"
"흐음. 그건 별로 안 좋은 생각 같은데···."
[괜히 벌집을 들쑤신 게 아닐까요? 채원양이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요.]
'말은 저렇게 하지만 함부로 경거망동 못 할 걸.’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먹튀한 내가 미웠으면 여기까지 따라오지도 않았겠지.
아직까진 나름 호감이 있으니까 졸졸 따라온 거란 말이야.’
[근데 주인님이 바람둥이란 걸 밝혔으니 있던 호감도 다 사라지지 않았을까요?]
'당장은 화가 나겠지. 근데 막 판을 뒤엎거나 그렇진 않을 거야. 워낙에 잔머리를 굴리는 스타일이라.’
그때 영철이 화장실에 나왔다.
씩씩거리던 채원은 영철을 보자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술을 홀짝였다.
"엇, 계속 마시고 계셨네요."
"안주가 맛있어서 그런지 잘 들어가네요, 호호."
"채원이가 술을 좀 마시는 구나. 어렸을 땐 전혀 몰랐는데."
"맞다. 사촌이라고 했지? 근데 도훈이 형은 어렸을 때부터 운동 잘했어요?"
"도훈 오빠요?"
"네. 저 실력이면 무슨 종목이든 프로로 데뷔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영철의 말을 들은 채원이 도훈을 쳐다보더니 씩 웃었다.
도훈은 그 웃음이 살짝 불길했다.
"아, 오빠가 원래 좀 다재다능했어요."
"그쵸?"
"운동을 안 한 이유가, 공부도 곧잘 했거든요."
"공부요?"
"네. 원래 의대가려고 했다던가? 맞지 오빠?"
"무, 무슨···."
"의사 될거라고 공부 엄청 했었는데···."
"아, 아니야. 뭘 지난 일 가지고."
영철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구나! 어쩐지 도훈이 형 우리과 수석이거든요."
"수석요?"
"아니 사범대 전체 수석요. 공부를 잘하는 이유가 그거였구나!"
영철의 오해로 도훈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도훈은 채원이 자신을 속인 것에 복수하기 위해 아무말이나 막 내뱉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저게 지금 나 멕이려는 거지?’
[그런 것 같은데요? 입막음을 해야 하지 않을지.]
"아항, 역시 울 오빠는 못하는게 없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또 여자···."
"여자요?"
영철이 고개를 갸웃하자 채원이 당황하는 도훈을 비웃으며 말했다.
"···여자친구만 사귀면 딱인데."
"하하, 저도 그게 가장 의문이에요. 저렇게 완벽한 도훈선배가 아직까지 여자친구가 없다는 게 말이에요."
도훈은 채원에게 하지 말라는 사인을 계속 보냈으나, 채 원은 당황하는 도훈을 보고는 재미를 붙인 듯 계속 말을 지어냈다.
"여자친구를 안 사귀는 건지 못 사귀는 건지 모르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왜 그래 채원아, 취했어?"
"안 취했어요. 무슨 이거 마시고 취해."
[더 곤란해지기 전에 조치를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어으, 확 입에다 좆막음을 해버릴라.’
[그러다, 업적을 그르치지 않을까요? 주인님은 지금 영철군과 채원양이 잘되게 밀어줘야 하는 상황인데···.]
'아니지. 어차피 내거 돌려먹는 건데 한 번 건드려도 똑같은 거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채원양이 영철군과 맺어지려면 결국 주인님과는 멀어져야 할 테니까요.]
'그 반대면 어때?’
[네?]
'차라리 채원이를 완전히 복종시켜서 영철이를 만나게 하는 건.’
[설마 지금···.]
'결국 둘이 하게 만들면 되는 거 아니야, 방법이야 어쨌건.’
[와, 주인님 진짜.]
'저렇게 계속 삐딱선 타게 두느니 그게 더 빠를 수도 있겠어.’
전략을 바꾼 도훈이 갑자기 채원을 노려보았다. 채원은 째려보면 어쩔거냐는 식으로 도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입만 뻥긋하면 도훈을 매장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채원은 여전히 여유만만이었다.
도훈은 그 여유를 확 꺾어버리겠다고 생각했다.
기고만장한 채원을 밑에 깔려 헐떡 거리게 만들어 버리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