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8.. 이사-8-
도훈을 먹튀라고 부른 여자는 채원이었다.
지리산에서 백년 산삼을 캐다가 만난 여대생.
"네가 여길 어떻게···."
"국성대 다닌다고 저한테 말했죠? 근데 의대생은 아니시던데?"
채원은 벌써 도훈에 대한 뒷조사를 마친 상태로 보였다.
의과대학 학생처에 가서 갖은 핑계로 수소문을 한 결과 그가 의대생이 아니란 것을 알아챈 것.
도훈에게 속았다는 생각에 분한 그녀는 국성대를 샅샅이 뒤져 끝내 도훈을 만나고야 만 것이었다. 언젠가 찾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하필 사범대 도서관 앞에서 그녀를 만난 도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게···. 전과했어."
"아하, 전과를 하셨다?"
채원은 도훈의 손에 들린 교재를 힐끔보더니, 체육교육과라고 써진 것을 확인했다. 그녀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비웃었다.
"그러니까 지금 의대에 다니다 사범대 체육교육과로 전과하셨다는 거죠?"
도훈은 본인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흥분한 채원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서로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잠깐 조용한 데 가서 얘기 좀 할까?"
"왜요? 또 저번처럼 병실로 데려가서··· 읍읍!"
"야, 야!"
도훈이 급히 입을 막았다.
채원이 발버둥을 쳤으나 도훈을 떼어낼 순 없었다.
[그러게 왜 그때 깔끔하게 뒷정리를 안하셨습니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걸 뻔히 예상하셨으면서요?]
'얘가 하도 거짓말하고 다니니까 그랬지. 기억을 날려버리면 본인이 먹튀 당한 것도 모를텐데, 그럼 뉘우치는 게 없을 거 같아서.’
[그래서, 먹튀로 참교육하신 결과에 만족하십니까?]
'일단 잘잘못은 나중에 따지고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
도훈이 침착하게 말했다.
"내가 다 설명할게. 그러니까 제발 여기서 난동 피우지 마. 다른 사람들이 보면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
채원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도훈이 겨우 그녀를 놔주었다. 그녀가 도훈을 째려보며 말했다.
"흥, 그래도 잘못한 줄은 아는 모양이죠?"
"그게 오해라니까."
"무슨 오해요? 말해봐요 그럼."
"일단 장소 좀 옮기자. 여기 도서관 앞이야. 안에서 애들 공부하고 있다고."
사범대 도서관 주변엔 도훈의 얼굴을 알만한 사람들이 많았다. 현 체육과 회장인데다, 워낙에 도서관을 자주 다녔으니 지나가다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구면이었다. 도서관 앞에서 낯선 여자와 티격태격하는 도훈을 본다면 오해할 게 불보듯 뻔했다.
"똑바로 설명 못 하기만 해봐, 나 진짜 열받았으니까."
채원이 으름장을 놓았다. 도훈은 성난 그녀를 달래며 사범대에서 최대한 벗어났다. 수업이 끝난 후라 학생들은 많지 않았지만, 캠퍼스 내에선 언제든 같은 과 선후배랑 마주칠 확률이 높았다. 멀리 공대까지 걸어온 도훈은 채원과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그래서 어쩌실 생각입니까?]
'뭘 어째. 본인도 과실이 있는데 같이 쌍방으로 몰아야지.’
[그냥 지금이라도 기억을 날려버리시는 게···.]
'그건 최후의 수단이고.’
"말해봐요. 그때 왜 도망친 건데요?"
"도망치다니. 내가 언제?"
"헐, 아니라고요? 어이 없어서 진짜···. 아니 병실에서 나한테 그런 짓을 해놓고선."
당시 도훈은 미션 수행을 위해 병실에서 홀랑 채원을 따먹고 말없이 도망쳤다. 우선 화가 잔뜩 난 그녀를 진정시켜야 했다.
"내 말 좀 들어봐. 그때 갑자기 서울에서 급한 연락이 왔어."
"연락요?"
"갑자기 서울로 올라갈 일이 생겨서 응급실 앞에 세워진 택시 타고 올라가느라 미처 말을 못 한 거라고. 나중에 전화를 하려고 했는데, 하필 네 번호를 저장 안했더라고."
"그걸 지금 핑계라고 대는 거예요? 그래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때 왜 의대생이라고 속인 건데요? 전과했다는 개소리 한 번만 더했다간 확 학교에 대자보 붙여 버릴 테니까."
채원은 신분을 속였다는 데 가장 화가 난 것 같았다. 사실 도훈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도, 그가 의대생에 집이 잘산다고 오해한 점도 있었던 것.
"대자보라니?"
"오빠가 의대생 사칭해서 나 따먹었다고요."
"잠깐만, 얘기가 좀 이상해지는데 내가 널 강제로 덮치기라도 했다는 거야?
"무, 물론 그건 아니지만. 그러게 왜 순진한 사람을 속이냐고요. 솔직히 말하면 됐잖아요!"
"좋아. 그 부분은 내 잘못이라고 쳐. 하지만 너도 불순한 의도로 접근한 거 아냐?"
"뭐가 불순한데요?"
"그렇잖아. 산에 쓰러진 너를 병원으로 업고 간 게 누구야?"
"오, 오빠죠."
"군대 있을 때 의무병 근무하면서 응급처치법을 배웠어.
산에 쓰러진 널 딱 보는데 뭔가 심각해 보였었고. 그때 거기서 사람들이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는데 딱히 대답할 말이 생각이 안나더라고."
"그래서 의대생이라고 거짓말했다고요?"
"의무병 출신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사람을 살리는 게 먼전데."
"그건 그렇다 쳐도 내가 다시 깨어났을 땐 솔직히 밝힐수 있었잖아요."
"음···. 그건 내가 잘못했어."
"촉진한답시고 더듬은 것도 일부러 그런 거죠?"
"그것도 미안."
"진짜 나쁜 사람이네.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도훈이 솔직히 사과하자 씩씩거리던 채원도 어느 정도 화가 누그러든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요?"
"뭐, 뭘?"
"아니, 순진한 여자를 건드렸으면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와, 생각보다 더 뻔뻔하네. 자기가 순진하다니. 숨쉬는 것도 거짓말인 계집애가.’
[이쯤되면 뭔가 의도가 느껴지는데요?]
'무슨 의도?’
[주인님이 의대생이건 아니건 어떻게든 다시 만나려고 찾아온 것 같습니다만.]
'흐음, 어쩐지 그런 거 같네. 그때 너무 좋았나 보지?’ 도훈은 채원의 의도를 간파했지만, 일부러 모른 척 물었다.
"어떻게 책임지라는 건데?"
"지금 몰라서 물어요?"
"어? 도훈이 형 안녕하세요."
채원과 함께 벤치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영철이 네가 여긴···."
일부러 아는 사람을 피해 공대까지 넘어왔는데, 하필 같은 과 영철을 만난 게 된 것이었다.
"공대에 아는 친구 좀 만나려고요. 근데 이분은 누구···."
영철은 도훈의 옆에 앉은 예쁘장한 여자를 보자 곧바로 관심을 보였다. 당황한 도훈이 채원을 소개했다.
"어, 이쪽은 내···. 그러니까 사촌 동생."
"사촌 동생분요?"
채원은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도훈의 의도에 맞추었다.
그를 곤란하게 해봐야 득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도훈 오빠 사촌 동생 채원이예요."
"아···. 넵. 저는 형이랑 같은 과 후배 김영철이라고 합니다.사촌 동생분이 우리 학교 다니시는 줄은 몰랐네요."
"저 여기 학생 아니에요. 신성 여대 다녀요."
"신성 여대면 흑석동···."
"네, 오늘 수업이 일찍 끝나서 잠깐 오빠 보러 왔어요."
도훈은 영철이 갑자기 끼어드는 바람에 골치가 아팠다.
'쟤는 왜 또 여기서 튀어나오는 거야? 수틀리면 그냥 채 원이 기억 날리고 정리하려고 했는데···.’
바람기가 충만한 영철은 늘씬하고 예쁜 채원을 보자 곧바로 호감을 표시했다.
"형! 사촌 동생이 이렇게 예쁜데 소개도 안 시켜주시고."
"엉?"
"호호, 별 말씀을. 그쪽도 잘 생기셨어요. 오빠가 후배들 잘생긴 애들 많다더니 정말이었네요."
채원도 훤칠한 영철이 나쁘지 않은지 죽이 척척 맞아 받아 넘겼다. 그 순간 도훈은 뭔가를 떠올렸다.
'가만, 이거 잘하면···.’
[네? 왜 그러십니까?]
'저 두 사람 왠지 잘 어울리지 않아?’
[영철군하고 채원양이요?]
도훈은 처음 본 사이에도 화기애애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둘을 조용히 쳐다보았다. 둘 다 키도 크고 늘씬한 게 나란히 서 있으니 제법 잘 어울렸다.
'생각보다 괜찮겠는데? 안 그래도 영철이가 자꾸 내 하렘 멤버들 집적거리는 거 신경 쓰였는데.’
[설마 채원양을 영철군에게 넘기시겠다고요?]
'넘기는 건 아니지. 소개해 주는 거지.’
[아니 주인님이 먹고 튄 여자를 어떻게 후배에게···.]
'나보고 책임져달라잖아. 그러니까 남자하나 소개시켜주는 거지.’
[채원양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물론 사회적 통념상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채원의 입장에선 전혀 달갑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도훈은 채원의 거짓말쟁이 특성을 떠올렸다.
'상관없을지도 몰라. 쟤는 원래 남 속이는 데 능숙하니까. 막상 둘이 잘 되면 나랑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뚝 뗄걸?’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에게 관심이 있을까요? 영철군은 현재 강민주 조교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고, 채원양은 주인님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온 건데요.]
'물론 그것도 있는데, 어차피 둘다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게 중요하지.’
[이룰 수 없는 꿈이요?]
'오늘 아침에 원룸까지 찾아와 대주고 간 민주가 영철이한테 털끝이라도 관심을 보일까?’
[물론 그럴리 없죠.]
'영철이도 바보가 아니라 금방 눈치챌 거야. 오르지 못할 나무라는 거. 게다가 내가 볼땐 영철이는 나만큼 바람둥이야. 오는 여자 안 막고, 특히 예쁜 여자라면 팔 벌려 환영하지. 채원이도 외모는 썩 준수하고.’
[영철군은 그렇다 치고 채원양은요? 채원양은 주인님에게 호감이 있는 거 아닙니까?]
'채원이는 아마 반반일거야.’
[반반이라면···.]
'채원이 나에게 호감을 갖게 된 이유는, 내가 의대생에 병원장인 아버지를 둔 배경 때문이었어. 솔직히 약간 속물같은 면이 있는 건 사실이잖아. 남자에게 빨대꼽는 전형적인 어장관리녀.’
[그건 그렇죠.]
'근데 내가 싹 다 거짓말이었다고 밝히는 바람에 나에 대한 호감이 어느정도 줄었을 거란 말이야. 지금 남은 건 오로지, 그때 강렬했던 섹스에 대한 쾌감 뿐이지.’
[흐음.]
'그걸 영철이가 채워줄 수 있다면 채원이는 굳이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주인님 뜻대로 된다면야···.]
'영철이도 불쌍하잖아. 막 전역하고 얼마나 꿈에 부풀었겠어. 안 그래도 바람기 충만한 녀석이, 군역이라는 의무까지 끝내고 세상에 다시 나왔으니, 어떻게든 빨리 여자친구 만들어서 섹스하고 싶었겠지.’
[그렇죠.]
'근데 나 때문에 되는 일이 없잖아. 후배들한테는 줄줄이 까이고, 민주는 쳐다도 안 보고. 그렇다고 내치자니 또 영철이 만한 남자 후배도 없는 형편이고.’
[그래서 채원양을 영철군에게 준다고요?]
'채원이도 솔직히 처치 곤란이잖아. 기억 소거해서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지만 한편 영철이를 데려가 주면 내 입장에선 일석이조란 말이지.’
[호오. 하지만 과연 두 사람이···.]
'안되면 되게 해야지. 마침 두 사람이 딱히 싫은 기색은 아니니.’
"아참, 영철아. 어제 집행부 일 때문에 고생했는데 같이 저녁이나 먹을래?"
"저녁요?"
"응. 마침 내 '사촌동생’이랑 저녁 먹으러 가려고 했거든. 채원이가 배고프대서. 그치?"
도훈이 채원을 향해 싱긋 웃었다.
채원은 도훈의 의도를 몰라 망설였지만,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어 도훈에게 장단을 맞췄다.
"그래요, 오빠. 맛있는 거 사주세요. 기왕이면 비싼 걸로."
"얼마든지."
도훈은 오늘 하루만 1억을 넘게 벌었기에 돈에 미련이 없었다. 특히 두 사람이 잘 됐으면 하는 마음이었기 때문에, 아낌없이 지원사격을 할 생각이었다.
"아···. 근데 동생분이랑 가는데 제가 따라가도 될지···."
영철은 갑자기 셋이 밥을 먹자는 소리에 눈치없게 껴든게 아닌가 걱정했다. 도훈의 괜히 미안해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닌가하고 묻는 것이었다.
"응. 채원이도 괜찮지?"
"전 상관없어요."
"근데 어제 회식 때 하필 소고기를 먹어 가지고···. 그래, 회는 어때?"
"회요?"
"무슨 회요?"
"참치회. 반주 삼아서 술 한잔 하기도 좋고."
"저, 정말요? 형 그거 비쌀텐데···."
"나 용돈 받았어. 돈은 신경쓰지 말고."
"그래요. 도훈 오빠네 엄청 잘살잖아요."
채원은 도훈이 아버지를 병원장이라고 속였던 것에 대한 복수로 일부러 한술 더 떴다. 도훈은 피식 웃으며 두 사람과 함께 참치 집을 찾았다.
* * *
"형, 진짜 괜찮아요? 여기 너무 비싼 거 같은데···."
채원이 화장실을 간 사이 잠깐 가게 앞에 나와 담배를 피우던 영철이 물었다.
"뭐가?"
"아니···. 잠깐 메뉴 봤는데 가격이 좀."
대학생인 영철은 인당 4~5만원에 이르는 고급 횟집을 무척 부담스러워했다. 그에게 오늘 하루만 1억을 벌었다고 자랑할수도 없는 노릇이라 적당히 둘러댔다.
"야. 어차피 사촌동생 오랜만에 봐서 비싼 거 사주려고 했어. 니가 먹을 복이 있는 거지."
채원의 얘기를 꺼내자 영철이 곧장 관심을 드러냈다.
"근데 정말 사촌 동생이에요?"
"왜?"
"아니···. 전 사실 형 여자친군 줄 알았거든요."
"푸하하. 무슨 여자친구? 내 여동생 혜원이랑 동갑이라 어렸을 때부터 많이 친했어."
"아···. 그러시구나."
"원래 부산 사는데 이번에 서울로 대학와서 처음보는 거거든."
"부산 살아요?"
"응. 왜? 관심있냐?"
넌지시 떠보자 영철은 입을 헤벌쭉 벌렸다.
"아, 아니에요. 오늘 처음 봤는데요 뭘."
"왜? 아까 물어보니까 아직 남자친구도 없는 것 같더라.
타지에서 자취하느라 외롭다면서···. 나보고 괜찮은 후배들 없냐고 묻더라고."
"저, 정말요?"
영철이 눈을 번쩍였다.
하여간 바람기 하나는 난 놈이다.
"사실 너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네가 딱 나타난 거야. 그래서 겸사겸사 같이 밥먹자고 한 거고."
"혀, 형!"
영철이 감동한 듯 말했다.
오히려 귀찮은 골칫거리를 치워준다니 내쪽에서 고마울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