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2.. 이사-2-
* * *
한편 함께 가다가 도훈이 먼저 떠나는 바람에 혼자가 된 영철은 괜히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군대 가기 전에는, 이렇게 술먹고 난 뒤 꼭 마음에 드는 여자애들 집에 바래다줬는데 말이야.'
술자리 회식 후 바래다 주기.
그가 여자를 꼬시는 방법 중 하나였다.
매력 어필도 했겠다, 술도 얼큰하게 취했겠다, 늦은 밤단둘이 걷다 보면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없던 마음도 생겨나는 것이다.
특히 혼자 자취하는 여자애들은 직빵이었다. 집 앞까지 비틀거린 채 데려다주면, 열에 아홉은 라면 먹고 가라며 자신을 유혹했던 것. 이는 물론 철저히 사전 작업을 끝내놨기 때문이지만, 어쨌든 영철은 그런 식으로 수많은 여자를 후릴 수 있었다.
'에휴, 군대 가기 전에는 진짜 잘나갔는데.'
그때와 비교하자 마음은 더욱 울적해졌다. 오늘의 경우는 자신이 마음에 두던 민주가 먼저 떠나는 바람에 김이 샌것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민주가 아니었더라도 8선녀 중 누구도 공략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아영이는 진즉 텃고, 정음이는 왠지 건드리면 안 될 것 같고···. 희주는 몰래 만나는 남자가 있고. 아, 맞다? 나연이랑 연두 걔네는 나한테 번호 받아가지 않았나?'
문득 나연과 연두가 떠오른 영철은 핸드폰으로 연락을 해보려다 이내 생각이 바뀌었는지 관두었다.
'아까 집에 갈 때 보니까 둘이 꼭 붙어 다니던데 무슨 수로 꼬시겠어? 둘 다 동시에 데리고 갈 것도 아니고 말이야.
'영철은 섹스 경험이 적지 않았으나 아직까지 쓰리썸 경험은 없었다. 게다가 그런 쪽으론 성적 판타지 또한 없었기 때문에 곧바로 마음을 접었다.
'서현이라고 했던가? 안경 쓰고 온 애. 걔도 은근 괜찮던데.'
서현은 술자리에나 노래방에서 눈에 띄는 타입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조용해서 굳이 신경쓰지 않으면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옆에서 서현을 봤을 때 영철은 오랫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어우 가슴이 그냥···. 우리과 여자애들 중에선 제일 큰 듯.'
앞에서 봤을 땐 눈치채지 못했으나, 옷이 바짝 밀착된 채로 옆에서 쳐다보는데 가슴이 무지막지하게 컸다. 너무나 커서 다른 건 안 보이고 가슴만 눈에 밟힐 정도였다.
'원래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그런 애들은 은근히 뒤로는 까졌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괜히 외로워진 영철은 불쑥 단톡방에 명단을 뒤져 서현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용건없이 보내면 이상하게 생각할 까봐, 괜히 핑계를 만들었다.
-김영철 : 서현아, 갑자기 생각났는데 1학년 전공 수업에 과제 있지 않았어? 이번 주까지 던가?
영철은 스스로 메시지를 남기고도 뜬금없다고 생각했지만, 어차피 서로 호감이 있다면 내용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두 번째 오는 반응에 더 신경쓰였다.
그의 경험에 따르면, 만약 여자가 남자에게 관심이 있으면 단답으로 그치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며 대화를 이어가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혼자 집으로 걸으며 답신을 기다리는데 서현에게서 답장이 도착했다.
-박서현 : 다음주요.
서현의 답장을 읽은 영철은 힘이 쭉 빠졌다. 대답도 단답인데다 너무 짧아 성의마저 없었다. 마지못해 답장을 했다는 반증이었다.
오기가 치민 영철은 또 다시 말을 걸어보려 했으나 그냥 포기했다.
'쳇, 좋게 봐줬더니 건방지게. 됐다, 무식하게 가슴만 커가지고.'
영철은 곧바로 서현도 손절했다. 어차피 가슴 큰 거 말고는 별다른 흥미도 없는 여자였다. 하지만 서현마저 실패하자 영철은 점점 자신감이 사라졌다.
이제 남은 여자가 경희와 효민밖에 없는 것이다.
다만 경희는 몸매는 좋은데 얼굴이 너무 타서 자기 취향이 아니었고 효민은 다른 8선녀에 비해 지나치게 평범한 게 흠이었다.
'으으, 천하의 김영철이 연락할 여자 하나 없어서 이렇게 쩔쩔매는 거야?'
군대를 전역할 때만 해도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남자는 예비역이 되어서야 진짜 성인으로 인정받는다는 말처럼, 자신의 창창한 앞날이 마침내 펼쳐질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던가. 특히 학과 내에서 연애사업은 너무나 지지부진했다. 누구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았고, 여학생들의 관심은 오로지 도훈에게만 쏠려있었다.
'으으, 역시 도훈이 형이 문제구만.'
영철은 냉철하게 사태를 파악했다. 아무리 행복 회로를 돌려 봐야, 결국 도훈이란 벽 앞에 가로막힐 뿐이었다. 도훈은 누가 봐도 완벽한 상위호환의 존재였고, 자신이 여자라도 굳이 도훈을 두고 자신을 좋아할 것 같진 않았다.
"하. 텄네 텄어. 그냥 체육과는 조교샘에게만 전념하는 걸로."
영철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모든 걸 내려놓았다. 생각해보면 자기만 혼자 집에 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건 도훈도 마찬가지였다.
"뭐, 나만 외로운 것도 아니잖아?"
그러다 문득 수상한 생각이 들었다.
"근데 잠깐. 도훈이 형이 친구한테 연락받고 갑자기 택시를 잡아서 갔단 말이지?"
처음엔 별생각이 없던 영철은, 어쩌면 그것은 도훈이 스스로 알리바이를 만든 뒤 자신을 따돌리기 위한 술책은 아니었을까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맞네. 그게 진짜 친구 전화였는지 아니면 여자애 전화를 받고 간 건지 모르는 거잖아?'
영철은 그제야 자신이 도훈에게 당했다는 생각에 이마를 탁- 쳤다.
"하하하! 뭐야, 나만 새 된거네?"
심증에 불과했지만, 영철은 자신을 따돌린 도훈이 8선녀중 한 명에게 향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다만 그게 누구인지는 도저히 알아낼 길이 없었다.
'대체 누구지? 도훈이 형이 만나러 간 여자애는?'
후보가 너무 많았다. 그가 보기엔 노래방에서 도훈은 최고의 인기스타였고, 모든 후배들이 도훈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설마 피임약 샀던 희주인가?'
영철은 희주를 의심했지만, 희주가 아니라 다른 여자애라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튼 도훈이형 대박이네. 한 수 배웠다.'
영철은 뒤통수가 얼얼하긴 했지만, 딱히 그에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또 여자 후배들에게 실망한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그에겐 민주가 있었고, 도훈이 민주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게 누구라도 신경 쓰이지 않을 것 같았다.
"좋겠다, 누구는!"
영철은 쿨하게 웃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 * *
"영철 선배는요?"
"응?"
"마지막에 같이 있지 않았어요?"
"내가 잘 따돌렸어. 급히 친구만나러 가야 한다고."
"아···. 그래도 눈치 채지 않았을까요?"
"왜? 혹시 걱정되니?"
"아뇨. 저 때문에 그런게 아니라 오빠가 곤란할까봐요."
역시 정음은 말도 예쁘게 했다.
자신이 아니라, 내가 구설수에 오를까봐 걱정스럽다는 말이었다.
"하하, 너무 걱정마. 설사 눈치챘더라도 영철이가 그렇게 입이 싼 놈은 아닌 것 같으니까."
"그럴까요?"
"응. 근데 정말 시간 괜찮겠어? 집에 들어가 봐야 하는거 아니야?"
정음은 시계를 쳐다보더니 숨을 깊이 내쉬었다.
"···음, 1시까지는 괜찮을 거예요."
"정말? 부모님께 뭐라고 말씀드렸는데?"
"집행부 회식있어서 늦게 간다고요."
"너무 늦는다고 걱정하시는 거 아닐까? 나 때문에 무리하는 거면···."
"정말로 괜찮아요, 오빠. 내가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런 건데요."
정음은 둘만 남게 되자 팔짱을 꼭 끼며 달라붙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애교가 많아졌는지 놀랄 정도였다.
"그래. 1시 전까지는 꼭 바래다 줄게."
"네."
"들어가자."
모텔 앞으로 온 우리는 곧바로 대실을 끊고 입장했다.
예전에는 10시 이후 대실이 안 되는 곳이 많았는데, 경쟁이 치열해져 그런지 대실도 가능한 모텔이었다.
정음은 쑥스러운 듯 카운터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고, 나는 계산을 하고 키와 1회용품을 들고 해당 층으로 향했다. 정음은 간만에 온 모텔이 민망한지 방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엄청 부끄러워 하는데?'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주인님이야 모텔을 제 집 드나들 듯 뻔질나게 다녔지만, 정음양은 주인님과 일전에 온 것이 전부일 텐데요.]
'아하.'
생각해보니 정음에겐 내가 첫 남자였다.
모텔에 온 경험이라곤, 나와 들른 적 말고는 한번도 없는 순진한 여자애이기도 했다.
"부끄러워?"
"아, 아니에요. 그냥 좀···."
방에 들어가 키를 꽂자 곧바로 에어컨이 켜졌다. 일부러 그럴싸한 건물로 들어왔는데, 시설은 보통 이상이었다.
"먼저 씻을래?"
"네, 넵!"
정음이 즉각 대답하더니 가운을 걸치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쑥스러워하는 모습이 무척 귀여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푸하-. 귀엽네."
나는 침대에 대자로 뻗어 누운 뒤 오늘 일을 복기했다.
우여곡절 끝에 로테이션이 완성되었다. 길고 지루한 과정이었으나, 이것을 통해 나는 안정적인 내공수급 책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후 내공심법에 관련된 비급을 구매하기 전까지는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기적의 복리계산기는 안 아까우십니까?]
'복리 계산기?'
[아무리 생각해도 노래 한 곡 부르자고 그 아이템을 경매에 넘긴건 실수 같은데요.]
'어쩔 수 없었어. 당장 포인트가 바닥인데 이자를 붙일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지만 나중을 생각하셔야죠. 나중에 포인트가 쌓이면 쌓일수록 두고두고 혜택을 볼 수 있는 아이템인데요.]
'그거야 나도 알지. 근데 내 생각에 앞으로 예전처럼 진득하게 포인트를 모을일이 없을 것 같아서.'
[무슨 뜻입니까?]
'특정 아이템을 살 정도로만 보유하지 않을까 싶어. 나머지 포인트는 최대한 활용해서 무공수련에 써야 하니까.'
[천상 크레프트 때문이군요?]
'그렇지. 어차피 거기서 수련하려면 꾸준히 과금이 될 거 아니야. 그럼 모으기 힘든 건 마찬가지거든.'
[흐음, 그리 생각하면 또 일리가 있군요.]
'PK단을 대비해서라도 무공을 꾸준히 연마해 둘 필요가 있어. 한국 속담에 그런 말이 있거든.'
[뭐요?]
'죽고 나서 저승길 돈 싸들고 갈 거냐는. 복리 계산기가 효력이 붙을 때까지 포인트를 아끼고 있다가 똥된다는 소리지.'
[흐음, 주인님의 판단이 맞길 바래야죠.]
'그래도 덕분에 노래방에서 인기 폭발했잖아. 거기서 창피당했으면 이제껏 쌓은 이미지 순식간에 망가졌을걸.'
[8선녀들의 호감도 상태면 노래 한 번 못 불렀다고 주인님을 떠나가진 않을 겁니다.]
'8선녀는 그렇다 치고 영철이 말이야. 오늘 보니까 아주 작정하고 깝치던데. 콧대 좀 꺾어 주고 싶어서.'
[결국 후배 때문에 무리를 하신 거군요. 어차피 경쟁자로 여기지도 않으시면서.]
'어쨌든 호시탐탐 내 어장을 노리잖아.'
[제가 볼 땐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겁니다. 주인님에게 매료된 여성들이 영철군에게 혹할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러게. 놈도 얼른 그걸 깨달아야 할텐데 말이야.' 혼자 침대에 누워있는데 물소리가 멎었다.
잠시 후 정음이 몸에 큰 타올을 두른 채 문틈 사이로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오빠, 저 다 씻었어요."
"그래? 그럼 내 차롄가?"
나는 기다렸다는 듯 훌렁훌렁 옷을 벗었다. 머리까지 수건을 두른 정음이 후다닥 자릴 피했다.
"금방 씻고 올게. 잠깐 기다리고 있어."
"네."
아침부터 샤워를 못 해 무척 찝찝했기에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자마자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한창 기분 좋게 비누를 묻히고 있는데 화장실 문이 다시 열렸다.
"응? 정음아 왜?"
정음이 이번엔 반대편에서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있었다.
어느 정도 말렸는지 타올을 풀어 흘러내린 머릿결이 촉촉해 보였다.
"저···. 씻겨 드릴까요?"
"응? 아니야. 괜찮은데."
"오빠 등쪽에는 비누칠 하나도 안 됐어요."
"아···."
정음은 내 뒤를 보고 있었다.
굳이 자진해서 도와준다는데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 등좀 밀어줄래?"
"네, 오빠."
몸에는 여전히 타올을 두른 정음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녀는 손에 바디워시를 꾹 짜더니 내 등에 천천히 펴발랐다. 부드러운 손길과 비누거품의 촉감이 너무 좋았다.
"고마워."
"아니에요. 근데 오빠 요새 운동 많이 하셨어요?"
"응?"
"등 쪽 근육이 되게 잘 잡혀 있어서요. 살도 좀 빠지신 것 같고."
역시 운동을 하는 아이라 그런지 눈썰미가 제법이었다.
환골탈태 이후 체지방이 쫙 빠진 몸은, 내가 봐도 조각처럼 멋있었다. 아마 등 근육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응, 방학 때 헬스를 꾸준히 했거든."
"아···. 엄청 딱딱해요."
정음은 손바닥으로 등을 문지르며 단단함을 몸소 느꼈다. 등에서 허리까지 내려온 정음의 손은 곧 배 앞까지 향했다.
"이쪽도···."
정음이 불쑥 배를 만지는 통에 나도 모르게 복근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쫙쫙 갈라진 복근 사이로 정음의 손가락이 골짜기를 헤치듯 파고 들었다.
"와아···. 이렇게 선명하게."
"여긴 어때?"
장난기가 인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강제로 밑으로 끌어내렸다.
"이쪽은 어때?"
일부러 그녀의 손에 대물을 쥐어주자, 정음이 민망해하면서도 잦이를 꽉 붙들었다.
"···단단해요, 오빠."
"더 단단하게 해줄래?"
"네."
정음이 뒤에서 나를 껴안았다. 마침 샤워타월이 흘러내리며 정음의 알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부드러운 피부와 탱탱한 유방이 등 뒤를 압박했다.
정음은 손에 힘을 주어 위아래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제가 깨끗이 씻겨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