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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288화 (1,255/2,000)

1271.. 이사-1-

* * *

혼자 건물 밖으로 나온 영철은 골목길 구석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꼬나물었다.

"존나 사기캐네."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노래방에서 그는 언제나 주인공이었다.

잘생긴 그가 마이크를 잡고 분위기를 띄우면, 그를 싫어하던 여자들도 의외라는 눈으로 그를 다시 보았던 것.

원래 못생긴 애들이 까불면 얼굴값 한다고 하겠지만, 잘생긴 영철이 스스로 망가지는 모습은 의외성이란 매력을 부여했다.

게다가 영철은 노래도 곧잘했다.

가수 뺨치게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의 18번 곡들은 수많은 연습으로 완성시킨 것이었다.

노래 실력이 죽을까 봐 군대 있을 때도 틈틈이 노래방에서 꾸준히 연습까지 했다. 요즘엔 동전 노래방 기계 정도는 오락 목적으로 배치한 부대가 많았기 때문에 그는 군대가서 노래 실력이 전혀 녹슬지 않은 채로 제대할 수 있었다.

'매력 발산하려고 벼르고 있었건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도훈의 무대장악력을 떠올리자 헛웃음이 나올정도였다.

'음정, 박자, 심지어 가창력까지···. 완벽한 무대였어.'

도훈이 언제 그렇게 노래를 연습했는지는 알길이 없었다. 그는 늘 운동을 하거나, 아니면 도서관에서 공부만 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노래방에서 보여준 솜씨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여자 후배들이 왜 도훈에게 그렇게 빠져드는 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오늘밤 불쏘시개에 불과했다.

도훈이라는 스타가 더 밝게 빛날 수 있도록 던져진.

"캬악- 퉤."

가래가 끼는 지 영철이 땅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그때 밖으로 나온 희주가 영철을 보더니 말했다.

"오빠. 바닥에 그렇게 함부로 뱉으면 안 되죠."

"아, 미, 미안."

머쓱해진 영철이 바닥에 뱉은 침을 신발로 문지르더니 피우고 있던 담배를 등뒤로 감췄다.

"그냥 펴요. 애들도 아니고."

희주는 괘념치 않는 듯 영철에게 말했다.

'쟤가 희주던가?'

"괜찮아?"

"담배 좀 피우는 게 어때서요? 도훈 오빠도 피우는데."

도훈의 이름이 나오자 영철은 다시 열등감이 피어올랐다. 도훈이 있는 한 그는 늘 2인자 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도훈이 형도 흡연자니까. 근데 왜 나왔어?"

"좀 더워서요. 한참 뛰다 보니까 몸에 땀나네요."

희주가 얇은 티셔츠를 들추더니 팔랑거렸다. 잘록한 허리가 그대로 노출되며 영철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오우씨, 몸매 오지네.'

민주도 없는 마당에 영철은 희주라도 꼬실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희주는 누가봐도 예뻤고, 성격 또한 화통한 편이라 얘기가 잘 통할 것 같았다.

"희주 맞지?"

"네. 기억하시네요?"

"다른 애들은 몰라도 넌 기억에 남더라."

"후훗-. 왜요?"

"그냥···. 뭐."

영철이 얼버무렸지만, 충분히 의도는 전달한 셈이었다.

희주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오빠, 저 지금 약국 좀 갈 건데 심심하면 같이 가실래요?"

"약국을?"

"네. 뭐 좀 살 게 있어서요."

"그럴까?"

영철은 왠지 예감이 좋았다.

'이거 잘하면 뭔가 썸씽이···.'

"정신없으시죠? 듣자하니 전역하자마자 바로 학교로 복학하셨다던데."

"그냥 뭐 그렇지. 그래도 칼복학하는 게 더 좋은 것 같아. 임용시험 보려면 겨울에 졸업해야 자격이 나오거든."

"아···. 저희 학번이랑 같이 치시겠구나."

"그렇지. 너희들이랑은 4년동안 같이 다니는 거지."

영철이 은근히 복학생의 메리트를 언급했다.

현역 동기들과 달리 4년간 함께 학교를 다니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잘됐네요. 앞으로 오빠랑 친하게 지내야 겠다."

"나야 좋지."

'오, 이거 분위기 좋은데?' 영철은 희주의 대답에 혼자서 의미를 부여했다.

왠지 날라리처럼 생긴 희주라면 쉽게 꼬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민주 샘은 민주 샘이고, 후배는 후배지. 내가 언제부터 가려서 여자를 만났다고.'

민주는 혼자 좋아하는 관계지만, 영철은 그것 때문에 오는 여자를 막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제 버릇 개 못준다고 특유의 바람기가 발동한 것이었다.

"근데 희주 넌 남자친구 있어?"

"저요? 왜요?"

"왠지 있을 것 같아서."

희주가 피식 웃었다.

"없으면 오빠가 소개시켜 주시게요?"

"뭐, 그것도 괜찮고."

'나도 있고.'

"없어요."

"없어?"

"네. 1학기 때 잠깐 만나다 정리했어요."

"그렇구나. 사귀다 헤어질 수도 있는 거지."

영철은 희주가 솔로라는 말에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남자친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없는 시기인 모양이었다.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랄까?'

"오빠는 군대 막 전역해서 없겠네요?"

"어."

"혹시 고무신 거꾸로 신은 거 아니죠?"

"아니야. 가기 전에 헤어졌어."

"아···. 그럼 여태껏 솔로?"

"그렇지 뭐. 군인을 좋아하는 여자는 없더라고. 하하하!"

영철은 여태껏 여자가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희주가 배시시 웃더니 영철에게 물었다.

"혹시 저희 동기들 중에 마음에 드는 애는 없으세요?"

'있지. 바로 너.' 영철은 얼마전에 아영에게 들이대다 까인 적이 있었다.

1차 회식 때까지는 민주 앞에서 아양을 떨었다. 그러다 희주와 단둘이 있는 상황이 생기자 그새 희주에게로 관심이 옮겨간 것이었다.

"뭐···. 아예 없다고 말하긴 그렇고."

"오! 진짜요? 누군데요?"

'너라니까?' 영철은 계속 속마음을 밝히고 싶었지만,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며 대답을 피했다.

"근데 아직은 확실한 게 아니라서."

"그렇구나. 잘 해보세요. 오빠는 잘 생겼으니까 잘 될지도 모르겠네요."

"에이 뭘. 도훈이 형도 있는데."

"도훈 오빠는 논외로 쳐야죠."

"응?"

"오빠는 그냥 우리과 연예인 같은 사람이잖아요. 원래 T V에 나오는 연예인하고 비교해봐야 자기만 슬프니까."

영철은 희주가 말한 뜻을 단숨에 이해하기 힘들었다.

'뭔 소리야? 그러니까 도훈이 형이랑 비교해 봐야 나만 슬플거라는 거야? 아니면 애초에 다른 세계 사람이니까 신경 쓰지 말라는 거야?'

영철은 점점 아리송했으나 더 깊이 묻진 못했다.

그때 약국에 도착한 희주가 영철에게 말했다.

"다행히 아직 안 닫았네요. 오빠, 저 금방 사고 올테니까 잠깐만 여기서 기다리세요."

"어, 알았어."

영철은 희주가 뭘 사려는 지 몰라도 같이 들어가면 불편할 것 같아 잠자코 밖에서 기다렸다. 희주가 잠시후 약국에서 나오더니 비닐 봉지에 뭔가를 담아 들고나왔다.

"다 샀어요. 9시 넘어서 아슬아슬했는데 다행히 문이 열렸네요."

"그러게."

'근데 뭘 산 거지?' 금방 사서 나온 걸 봐선 처방전이 필요없는 약 같았다.

아마도 생리통 약이나, 변비약 같은 종류가 아닐까 영철은 생각했다.

'나에게 보여주기 민망한 종류였나 보네.'

두 사람이 다시 노래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희주가 깜짝 놀라며 중간에 멈춰섰다.

"아! 이런, 저 약국 다시 가봐야겠어요."

"왜? 뭐 두고 왔어?"

"삼페이 결제하다가 핸드폰을 거기 놓고 온 것 같아요."

"저런! 얼른 가보자."

"저 혼자 다녀올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희주가 급히 뒤로 돌아 뛰어가는데 들고 있던 비닐봉지에서 뭔가가 툭하고 떨어졌다. 영철이 그것을 발견하고는 희주를 불렀으나 희주는 이미 횡단보도를 다시 건너간 뒤였다. 반대편으로 멀어진 희주를 보며 영철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좀 있다 다시 돌려줘야 겠다."

영철은 희주가 떨어뜨린 약봉투를 들고 길거리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종이로 쌓인 약봉투를 보던 영철은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근데 뭘 산거지?'

호기심이 인 영철은 살짝 약봉투를 열어보았다.

조그만 상자에 든 그것을 본 영철이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잠깐 이거 설마.'

놀란 영철이 약봉투에서 상자를 꺼내 내용물을 확인했다.

'헐! 피, 피임약이잖아?'

잘못 봤나 하고 깜짝 놀란 영철은 종이상자에 적힌 깨알같은 설명까지 일일이 확인했다.

'지, 진짜로 피임약인데? 이걸 희주가 왜 먹지?'

영철은 순간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분명 남자친구 없다지 않았나? 근데 떨어질까봐 약국닫히기전에 급히 사야할 정도로 열심히 먹고 있다고?'

영철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희주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자신이 크게 오해 하는 것 둘 중 하나였다.

'흐음. 뭐 여자들은 생리주기 조절하려고 일부러 먹기도 한다니까···. 근데 그런 이유라면 약국 닫히기 전에 사야 할 정도로 급한 건 아니지 않나?'

아무리 생각해도 정답은 하나였다.

희주가 매일 피임약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

즉, 몰래 만나는 남자와 지속적으로 노콘 섹스를 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오늘도 남자랑 만날 예정이라 피임약을 급히 복용해야 한다는 것.

'헐, 대박. 역시 느낌이 이상하더라니.'

희주는 정음이나 아영과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솔직히 말해 좀 까진 애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크크. 역시 관상은 사이언스 라니까?'

잠시 기다리는 데 폰을 찾은 희주가 후다닥 달려왔다.

"오빠, 혹시 저 아까 여기서 약 떨어뜨리지 않았어요?"

"응. 내가 주워놨어. 불렀는데 듣지도 않고 가더라."

"아하, 고마워요."

희주가 약 봉투를 받더니 다시 봉지에 넣었다.

다시 노래방으로 향하는데 희주가 먼저 말했다.

"요새 수영장 다니는데 생리 주기 좀 조절하려고요."

"응?"

영철은 일부러 못 들은 척했다. 아는 척을 했다간 몰래 약을 훔쳐본 것이 들통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희주가 약봉지를 흔들었다.

"이거요. 피임약이거든요."

"아하. 그랬어?"

하지만 희주의 그런 행동이 오히려 영철의 의심을 부추겼다.

'내가 몰래 봤다고 생각하고 미리 발뺌을 하는구만? 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의심스럽거든.'

영철은 희주가 섹스 때문에 피임약을 먹는다고 확신했다.

"암튼 오빠 잘해보세요. 누군지는 몰라도 제 도움이 필요할 일 있으면 말하시고요."

"응, 그래 고맙다."

하지만 희주의 피임약을 본 이후 영철의 호감은 급격히 떨어진 상태였다. 누군가와 신나게 노콘 질싸를 즐기는 여자에게 매력을 느낄 순 없었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희주 넌 아웃이다. 난 남의 여자는 관심 없거든.'

영철은 희주의 이름을 삭제했다. 현재까지 그의 명단에서 삭제된 멤버는 고백했다가 까인 아영, 그리고 도훈의 비밀 여친으로 의심되는 정음, 방금 전 비밀을 확인한 희주까지 모두 셋이었다.

'괜찮아, 그래도 예쁜이가 5명이나 더 있으니까.'

그는 여전히 공략할 상대가 더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 * *

"와, 너무 재밌었다."

"회장님 진짜 최고였어요!"

노래방을 나온 체육과 학생은 다들 상기된 표정이었다.

아직까지 여흥이 남은 듯 다들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우리 3차가요 3차!"

"맞아요. 이대로 끝내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아요."

어느새 시간은 10시가 넘어선 상황.

흥분한 여학생이 더 놀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도훈은 냉정하게 딱 잘랐다.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힝, 회장님. 딱 한 잔만요."

"저희 견디셔 먹어서 하나도 안 취했는데···."

"내일 수업도 있잖아. 더 늦어지면 지하철도 끊길거고.

미련이 남을 때 끝내야 다음에도 또 놀고 싶지."

"아···."

다들 아쉬워하는 표정이었지만, 도훈은 칼같이 끊었다.

"알았지?"

"네."

"그래, 도훈 오빠 말대로 하자."

"맞아. 회장님 말 잘 들어야지."

몇몇 여학생들은 아까 민주에게 한 소리 들은 게 생각났는지 곧 생각을 고쳤다. 귀가 방향에 맞춰 팀을 짠 도훈은 하나 둘씩 후배들을 돌려보냈다.

다들 아쉬워하는 표정이었지만, 도훈의 말이라면 철석같이 따랐다. 실은 도훈이 노래방에서 몰래 문자로 작업을 해놓은 결과였다.

-오늘은 아쉽지만 다른 애들 눈치가 있으니까 바로 집으로 가. 우리 따로 보는 날 알지? 그때 만나자.

이름도 특정하지 않고 보낸 단체 문자였지만, 여자들은 모두 자기 혼자만 문자를 받았다고 착각했다. 문자를 받은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다음을 기약하며 하나둘씩 떠나갔다.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은 영철과 정음, 그리고 도훈 뿐이었다.

"영철이는 집이 어느쪽이랬지?"

"전 여기서 별로 안 멀어요. 걸어갈게요."

"그래? 그럼 정음이 보내고 같이 가자."

"네, 형."

마지막 남은 정음이 두 사람에게 꾸벅 인사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응, 정음아. 잘가."

"내일 보자."

정음까지 사라지자 마지막 남은 두 사람은 습관적으로 담배를 피웠다.

"후우-. 오늘 고생 많았다 영철아. 식당이랑 노래방 예약하느라."

"형님이 더 많으셨죠."

두 사람이 밤늦은 거리를 길빵하며 걷는데 문득 도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어, 정훈아. 왜? 뭐? 지금?"

도훈은 심각하게 전화를 받는 척하더니 통화를 끊고 영철에게 말했다.

"영철아. 나 지금 친구가 잠깐 보자고 해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지금요?"

"어. 급한 일인가 봐."

"어 그럼 얼른 가보세요. 내일 봬요, 형님."

"그래."

도훈은 급히 택시를 잡더니 어디론가 향했다.

택시는 같은 코너를 한 바퀴 돌더니 도훈이 탄 곳에서 멀지 않은 장소에서 다시 멈춰섰다.

"기사님 죄송합니다."

너무 짧은 거리를 타느라 기본료만 지불한 도훈이 택시에서 내리자, 어두운 전봇대 아래 누군가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다.

"···오빠?"

"미안. 영철이 떼어 내느라. 오래 기다렸지?"

"아니에요."

집에 가는 척하고 몰래 기다리고 있던 정음이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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