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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287화 (1,254/2,000)

1270.. 2학년2학기-85-

잠시 시간을 벌기는 했으나 도훈으로선 몹시 난처한 상황이었다. 아이템만 믿고 있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다.

'아니, 로시! 미리미리 아이템 재고 상황을 알려 줬어야지!'

[죄송합니다. 소모성 아이템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순 없는 노릇이라···.]

애꿎은 로시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도훈은 이내 그만두었다. 어쨌든 자신의 불찰이었다. 해당아이템을 마지막으로 사용한 지가 언제인지도 가물가물했고, 포인트가 바닥난 상황이었으니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어야 옳았다.

다급해진 도훈은 정음이 노래를 선곡을 누르는 사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지금 당장 포인트를 벌 방법은 없어? 미션 같은 거 안뜨나?'

[당장 돌발 미션이 뜰 상황이···.]

낯선 환경, 처음 보는 인물.

미션이 생성되는 조건에 따르면 현재로선 가망이 없었다.

노래방을 처음 온 것도 아니고, 심지어 현재 멤버는 1년 내내 늘 마주치던 후배들이었다. 설사 미션이 뜬다 하더라도, 8명이 서로를 감시하는 상황에선 손발이 묶인 것이나 마찬가지.

도훈은 절망감을 느끼다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었다.

'혹시 환골탈태로 목청도 좋아질 수 있나?'

[네?]

'아니, 그렇잖아. 근골이 바뀌고, 오장육부도 싹 다 신상으로 교체되었다면서? 그럼 노래를 잘하게 되었을 수도 있는 거 아냐?'

달라진 신체 능력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약했던 술도 세진 만큼, 못 부르던 노래를 잘 부르는 것도 가능할지 몰랐다. 도훈이 일말의 희망을 걸고 물은 질문에 로시는 암울한 답변을 내놓았다.

[현실적으로 어려울 겁니다. 노래를 잘하는 요소에는 좋은 목소리도 있지만, 박자나 리듬감 등 다른 변수가 더 많기 때문이죠. 환골탈태가 주인님의 많은 것을 변화시켰지만, 노래를 갑자기 잘 부르긴 어렵지 않을까요?]

로시의 냉철한 분석에 도훈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마이크를 잡고 직접 불러봐야 한다는 소린데, 빼도 박도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몰랐다.

마치 음치를 찾아내는 모 TV 프로그램처럼, 노래를 잘할 것이라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음치로 판명나면서 개망신을 당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제껏 늘 완벽한 모습을 보였던 도훈에게, 하물며 자신을 좋아하다 못해 흠모하는 이들이 잔뜩 모인 자리에서 창피를 당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이는 도훈에게 5분 토끼컷 이상의 수모였다.

'아, 안돼. 여기서 나의 카리스마가···.'

[주인님. 그냥 컨디션이 안 좋았다고 물러나시죠. 주인님이 꼭 노래를 불러야 하는 상황도 아닌데요.]

물론 도훈은 그런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나가서 창피를 당하느니 그냥 시도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앞선 영철이 오래간만에 숨겨진 매력을 뽐낸 마당.

여기서 물러나자니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다. 마치 후배의 기에 눌려, 지레 겁먹고 포기하는 모양새였다. 이는 8선 녀와의 호감도에도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일단, 후배한테 밀린다는 것 자체가 용납이 되질 않았다.

"그대 내 곁에 선 순간···."

"꺄아!"

"육정음, 육정음!"

"음색 죽인다!"

난처해하는 도훈을 대신해 먼저 정음이 노래를 시작했다.

제목은 <사랑밖에 난 몰라>.

마치 도훈을 향해 바치는 것처럼 서글프고 애절한 노래였지만, 멘붕에 빠진 도훈에겐 노랫 가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저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지 생각할 뿐이었다.

'로시, 그냥 밖으로 뛰쳐나가서 아무 여자나 붙잡고 미션이 뜨길 시도해 보는 건 어떨까? 전혀 없는 일도 아니잖아.

'[밖으로요?]

'어. 담배 피운다고 나가서.'

[정음양이 노래 부르는 중인데 중간에 박차고 나가시겠다고요? 실망하지 않겠습니까? 주인님 대신 먼저 나선 건데.]

'아, 아니 그건···.'

[그리고. 미션이라는 게 그렇게 무턱대고 뜨는 것도 아닙니다. 설사 천우신조로 미션이 발동했다고 쳐도 보상으로 포인트가 나올지 아이템이 나올 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고요.]

'아흑, 그럼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도훈이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어느새 노래는 클라이막스로 치달았다.

"···할 수 없어. 사랑밖에 난 몰라~"

"오, 정음이 제법인데!"

"다시 봤다."

"너무 예쁘다!"

조금은 어설프지만 정음의 노래는 모든 이들의 박수를 이끌어냈다. 평소라면 도훈도 흐뭇한 표정으로 감상했겠지만, 지금은 시시각각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마치 사형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무대라는 사형대로 끌려가기 직전이었다.

'좆됐다. 도저히 방법이···.'

[주인님. 포인트를 확보하는 방법이 딱 하나 있긴 합니다만···.]

'뭔데? 있었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물론 100%는 아닙니다.]

'그래도 말해봐. 시도는 해봐야 할 거 아냐.'

[경매장입니다.]

'경매장?'

[네, 주인님이 무공비급을 사셨던 아이템 경매장이요.]

'잠깐만, 아이템 경매로 포인트를 사라고? 뭔 수단으로?'

도훈이 이해가 되질 않는지 혼란에 빠졌다.

그가 아는 경매장이란 마켓에 없는 아이템을 플레이어끼리 거래하는 곳이었다. 그러다 문득 거래라는 말에 힌트를 얻었다.

'혹시 나보고 팔라는 거야? 내 아이템을?'

[네. 주인님도 팔만한 아이템은 충분히 있으니까요.]

'근데 그게 올리자마자 팔릴 수가 있나?'

[당연히 실시간 거래 성사는 쉽지 않습니다. 물건을 찾는 사람과 파는 사람의 타이밍이 딱 맞아 떨어져야 하니까요.

하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죠.]

'뭐, 뭔데?'

도훈은 다급했기 때문에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이었다.

[파격 할인가로 내놓으시면 됩니다.]

'파, 파격 할인이라고?'

[일부 플레이어들은 흔히 '리셀러'라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경우가 있거든요.]

'리셀러?'

[헐값에 경매장에서 물건을 확보했다가, 나중에 제값, 아니 그보다 웃돈을 붙여 차익을 남기는 경우죠.]

'아씨, 그냥 팔이잖아!'

[글쎄요, 본인은 리셀러라고 하던데요.]

'아니 남한테 중고물품 싸게 사서 비싸게 팔면 양아치지 그게!'

[물건을 보는 훌륭한 안목과, 시세를 읽는 냉철한 눈, 그리고 늘 시장을 주시하는 부지런함까지···. 모두 갖춰야 리셀러가 될 수 있다면서.]

'그냥 싹 다 개소리고, 되팔이 새끼들이잖아, 한마디로.'

[어쨌든요.]

'그래서. 지금 나보고 경매장 들어가서 헐값에 아이템을 던져라?'

[오늘은 내가 가수다 아이템은 그렇게 비싼 물품이 아닙니다. 주인님이 안 쓰시는 아이템을 빠르게 팔아치울 수 있다면 충분히 포인트 확보가 가능 할 겁니다.]

'이런···. 제기랄!' 도훈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고작 노래 한 곡을 위해 피같이 모은 아이템을 던져야 하는 상황. 그 와중에도 시간은 시시각각으로 흐르고 있었다.

어느새 정음의 노래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도훈은 시간이 없었다.

[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자. 창피를 당하느니 뒤지고 말지.'

[경매장 열겠습니다.]

'자, 잠깐 여기서?'

[아시다시피 경매장에선 시간이 현실의 1/100로 느려집니다. 주인님이 경매장에 입장한 순간 시간이 멈춘 듯한 효과가 있을 겁니다.]

'아, 그렇지.'

[그래도 남들이 볼 땐 수상하게 보일 수 있으니 바닥으로 뭔가를 떨어뜨리십시오.]

'바닥으로?'

[네.]

도훈은 로시의 말을 알아듣고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바닥으로 던졌다.

"엇, 내 라이터가."

그러면서 테이블 아래로 몸을 숙이는데 로시가 말했다.

[지금 그 자세로 그대로 경매장 입장하겠습니다.]

졸지에 도훈은 테이블 밑으로 머리를 박을 채 경매장에 입장하게 되었다.

* * *

방금 전까지 어두컴컴하던 주변이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세상으로 변했다. 얼마 전 경험한 천상크레프트의 세상과 같았다.

'도착한 건가?'

[경매장에 바로 입장하겠습니다. 팔 물건을 정하고 계십시오.]

'팔 물건?'

[기억이 안나시면 보유하신 아이템 목록을 드리겠습니다.]

'잠깐. 이미 정했어.'

[무엇으로 말입니까?]

이제껏 내가 수집한 아이템 중에서 활용 빈도가 가장 떨어지는 아이템을 찾아야 했다. 하나같이 알뜰살뜰 모은 아이템이었지만 당장 쓸모없는 것. 그것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기적의 복리 계산기.'

[복리 계산기를요?]

기적의 복리 계산기는 보유한 포인트에 이자를 붙여주는 아이템이다. 재벌가의 여식 고은성에게 '금테 둘렀냐' 업적을 달성하면서 받았다.

[상당히 고가의 아이템인데 괜찮겠습니까?]

'당장 잔고가 바닥이잖아. 현재로선 아무짝에 쓸모없다고.'

[그래도 미래를 위해선 다시 한번 고려해 보심이···.]

'아냐.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야.'

[알겠습니다. 주인님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순식간에 배경이 바뀌었다.

허름한 전당포처럼 생긴 곳이었는데, 창구에는 인간이 아닌 존재가 앉아있었다.

"저거 설마 로봇이야?"

전체적으로 회색빛을 띄는 안드로이드형 로봇이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존재를 실제로 마주하자 몹시 신기했다.

[네, 초기에 계발된 형태로 본래는 다른 용도로 쓰였으나 현재는 퇴역하여 경매장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신기하구만. 어떻게 하면 되지?'

[물건을 맡기시고 가격을 정해 등록하시면 됩니다.]

로봇에게 다가가자 구형 안드로이드 기계가 눈을 반짝이며 기계음으로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플레이어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한국말도 할 줄 알아?"

"저에겐 모든 세상의 언어가 저장되어있습니다."

"아이템을 경매장에 팔려고 왔는데…."

"말씀하시면 저희 쪽으로 바로 전송시킬 수 있습니다.

팔려는 상품과 판매 가격을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얼마에 올려야 하지?'

[주인님 마음입니다. 다만 시간이 없으니 급매로 넘기셔야 할 겁니다.]

'급매가 대충 얼만데?'

[1000포인트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지···.]

'뭐? 소모품도 아니고 아이템을 1000에 그냥 넘긴다고?

'[말 그대로 급매니까요. 본전을 생각하셨다간 시간이 지체될 겁니다. 얼른 결정하셔야 합니다. 1/100로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현실의 주인님은 지금 테이블 밑에 머릴 처박고 있습니다. 길어지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구요.]

'아씨, 젠장.' 나는 로시의 말대로 창구 로봇에게 아이템과 가격을 결정해 알렸다. 로봇은 재차 확인하더니 곧바로 절차를 진행했다.

"경매장에 물건이 등재되었습니다. 낙찰이 이루어지면 곧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잠시 여유가 생기자 로시에게 물었다.

'근데 저 로봇은 대체 뭐야? 천상계 물건 치고는 엄청 구식으로 보이는데?'

[당연하죠. 지구 시간으로 1000년전에 만들어진 골동품입니다. 물론 인공지능을 계속 업그레이드 되었지만, 작동방식만 치면 구시대의 유물급이죠.]

'뭐? 1000년? 그러니까 고려 시대에 저런 걸 만들었다고?'

[네. 천상계와의 과학력 격차는 그 이상일 겁니다. 지구에선 이제 겨우 로봇 산업을 시작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긴···.'

잠시 딴 얘기를 하고 있는데 다시 로봇의 눈에 번쩍 불이 들어왔다.

"판매하신 물품, 기적의 복리 계산기가 1000포인트에 낙찰되었습니다. 포인트는 플레이어님의 계좌로 바로 입금됩니다."

"얼레? 벌써 끝난거야? 어떻게 이렇게 빨리 팔렸지?"

"평균가의 1/5 가격에 올리셨더군요."

"아씹! 되팔이 새끼들!"

"네?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습니다만?"

로봇이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의문을 표했지만, 아쉬워할 시간도 없었다. 나는 곧바로 경매장을 나와 현실로 돌아왔다.

"오빠? 바닥에 뭐 떨어졌어요?"

다시 시간이 정상으로 흘렀다.

나는 자연스럽게 바닥에 떨어진 라이터를 집어 들었다.

"어, 잠깐 라이터가."

"오빠. 정음이도 했으니까 오빠도 얼른 준비하세요. 선곡 뭘로 해드릴까요."

1000포인트.

나는 바로 로시에게 '오늘은 내가 가수다.' 목캔디를 구매하게 시켰다.

그리곤 천천히 책자를 뒤졌다.

아이템이 다시 갖춰지자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여자후배들이 떠드는 소리다 귀에 쏙쏙 들려왔다.

"회장님 노래도 잘해?"

"너 못 들었어? 1학기때 한 번 노래방에서 불러줬잖아."

"진짜? 나 그때 못 가서."

"엄청 잘해. 완전 가수급이야."

"골랐어. 리모컨 줘봐."

"네."

아이템이 있는 이상 어떤 노래든 상관없었다.

나는 센스있는 선배인척 요즘 최신곡을 선곡했다.

"오오옷,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오빠 저런 노래도 할 줄 알아요?"

"꺄아!"

"오빠 나와서 불러요. 신나는 노래잖아요!"

희주가 손을 잡고 무대로 이끌었다.

나는 마지 못한 척 끌려나왔다. 반주가 시작되자 여학생들 모두가 무대로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모두가 즐기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아이템 도착했습니다.]

'그럼 일발 장전.' 나는 목청을 다듬은 척 생수를 까서 마시며 손에 든 목캔디를 밀어 넣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가수다.

"니가 왜, 니가 왜,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노래방의 분위기가 문자 그대로 폭발했다.

그날 최고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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