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286화 (1,253/2,000)

1269.. 2학년2학기-84-

[역시 주인님은 모사꾼이 딱 입니다.]

'갑자기 웬 모사꾼?'

[배후에서 사람 조종하는 역할말입니다. 좋은 일에는 늘 공을 독차지하고 궂은일은 꼭 아랫사람 시키잖습니까?]

'어쩔 수 없어. 나보다는 민주가 얘기하는 게 더 적절했으니까.' 도훈이 굳이 민주를 시켜 기강을 잡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현재 도훈의 제의를 받고 집행부가 된 여자 후배들은 다들 불순한(?) 목적이 대부분. 즉, 집행부 일을 하고 싶어서 자원했다기보다는 그와 함께 있으면서 콩고물을 얻으려는 심산이 더 강했다.

'콩고물인지 떡고물인지 모르겠지만.'

[주인님도 그걸 더 원했던 거 아닙니까? 이번에 무리하게 로테이션 짠 것도 그를 위한 포석이었고요. 내공을 목적으로요.]

'물론 그것도 일부는 있겠지. 하지만 오로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애초에 음양보합술을 이용한 내공 증진은 엊그제 생각한 거니까. 다만 기왕 회장직을 받아들였으니 학과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이었어.'

[체육과를 생각하시는 마음이 이리도 큰 줄은 몰랐군요.]

'내 전임자였던 성수만 봐도 그렇잖아. 집행부 활동하면 임용에 페널티가 될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희생을 자처했단 말이지. 그 덕에 한 학기 동안 별 탈 없이 과가 잘 굴러간 거고. 나도 그 수혜자야.'

[그건 그렇죠.]

'솔직히 오늘 행사는 별것 아니었어. 민주 혼자서 했어도 무리는 없었을 거야. 실제로 거의 다 진행했으니까. 하지만 집행부 행사가 오늘처럼 대충 넘어가 버리고, 오로지 술먹고 즐긴 뒷풀이만 기억에 남는다면 앞으로 맞이할 다른 행사에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거야. 결국 동기들이랑 술이나 마시고, 나랑 친분을 유지해 재미나 보는 수단으로 전락했을 테지.'

[아….]

'그걸 민주가 콕 찝어서 잡아 준 거야. 집행부가 마냥 놀기만 하는 자리는 아니라고. 다음에 복잡한 행사를 준비할 때는 모두다 합심해야 할 테니까.'

[역시 주인님은 한 수 앞을 내다보시는군요. 그것까지 고려했을 줄은 몰랐습니다. 역시 전략가입니다.]

'언제는 모사꾼이라며? 암튼 내가 아니라 어른인 민주가 대신 얘기했기에 더 효과가 클 거야. 여자들끼리 위계 문제도 있고.'

"아니에요, 오빠. 다음엔 저희가 더 열심히 할게요. 뭐든 시켜만 주세요."

정음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도훈이 그런 정음을 보고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래. 네가 있어서 든든하다."

정음은 도훈의 칭찬이 듣기 좋은지 그의 곁에 바짝 몸을 밀착시켰다. 동기들이 옆에 없다 보니 조금은 과감해진 스킨십이었다. 술기운의 도움도 있고.

"오빠랑 이렇게 단둘이 있는 것도 참 오랜만인 거 같아요."

"그러게. 요샌 도통 바빠서…."

[다른 여자랑 떡 치느라 바쁘셨죠.]

'업무가 공사다망했다고 해줄래? 내가 나 좋자고 쳤냐?

플레이어의 숙명이라 그런 거지.'

[그래도 정음양 좀 챙겨 주시죠. 주인님밖에 모르는 일편단심인데요.]

'그래서 마지막에 남겨뒀잖아.'

[마지막이요?]

'원래 주인공은 늘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거든.'

"정음이 너 혹시 종교 믿는 거 있어?"

"종교요?"

"응, 교회나 절. 뭐 이런."

정음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어렸을 땐 교회 몇 번 나간 적 있어요. 친구 따라서 부활절 행사도 참여하고. 그건 왜요?"

"아니 일요일에 별다른 일정이 있나 해서. 교회라도 다니면 빠지기 곤란할 테니."

"아니에요. 저 따로 믿는 거 없어요."

"그렇구나."

"…제가 믿는 건 오빠뿐이니까."

"응?"

마지막에 정음이 혼자서 중얼거리더니 이내 얼버무렸다.

"아니에요, 헤헤. 근데 일요일은 왜요?"

"일요일에 같이 운동이나 해볼까 해서."

"이번 주에요?"

"아니."

"그럼 다음 주? 다음 주도 저 시간 괜찮아요."

"그것도 아닌데."

"아…. 그럼 언제요?"

정음은 자꾸 약속이 뒤로 미뤄지자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도훈의 얼굴 보기가 이리도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에 조금은 지친 모습이었다.

"매 주."

"네?"

"매 주 일요일 널 보고 싶다고."

"저, 정말요?"

"응."

"…아, 그, 그게…."

"왜? 별로야? 시간 안 될 것 같아?"

"아니에요! 너, 너무 좋아서 그랬어요."

정음은 살짝 감격한 듯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그 모습에 도훈이 오히려 미안했다. 평소 얼마나 못 챙겼으면 일주일에 한번 보자는 약속에도 저렇게 감격할까 하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역시 정음이가 최고구나. 반응부터 달라.'

도훈은 다른 여자 후배들에게도 똑같은 제안을 했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다들 제안을 받아들이면서도 일주일에 한 번 보는 것이 아쉽다는 반응이 대다수. 하지만 정음은 제안만으로 감격한 듯 눈시울을 붉힌 것이다.

"설마 우는 거 아니지?"

"아, 아니에요."

정음이 눈가를 훔치더니 훌쩍거렸다.

"오빠가 그런 얘기 해주셔서 저도 모르게 너무 기뻤나 봐요."

[양심의 가책 좀 느끼십시오. 어떻게 저런 현모양처를 두고.]

'로시 네가 말 안 해도 지금 충분히 미안하거든.'

[하여간 주인님은 복 받은 줄 아셔야 합니다.]

'나도 알아. 이미 한 번 갔다 온 몸인데, 그걸 모를까.'

도훈은 불쑥 전생의 결혼 생활이 떠올랐다.

전생의 마누라는 흔히 말하는 악처였다.

물론 당시에는 악처인 줄도 모르는 호구 중의 호구였다.

죽고 나서야 와이프의 바람기를 알았고, 이후 유일한 딸자식마저 혈육이 아니란 걸 알았을 땐 그나마 살았던 정도 뚝 떨어졌다.

최악의 결혼 생활을 경험해 봤기에 도훈은 지금의 정음이 얼마나 소중한 줄 알고 있었다. 그가 다른 여자 후배들과 달리 정음을 더 아끼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후-. 참기 힘드네."

"네?"

"우리 그냥 노래방 가지 말고 둘이 빠질까?"

"빠, 빠져요?"

"모텔 가자. 지금 당장."

"아…. 오, 오빠."

정음은 얼굴이 빨게지면서도 걱정스럽게 말했다.

"안 돼요. 다른 애들이 수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다른 애들은 왜 신경 써? 지들이 뭐라고."

"그래두요. 오빤 저희과 회장님이잖아요."

"음…."

[역시 정음양은 사리분별도 훌륭하군요. 그리고 모텔 가자가 뭡니까?]

'그럼 야 놀자 그럴까?'

[네?]

'그냥 해본 말이야. 나도 지금 단둘이 빠지면 좆된다는 건 알고 있어. 다들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을텐데, 이러면 정음이만 더 곤란해져.'

도훈은 정음이 질투의 대상이 되는 것을 경계했다.

모두에게 똑같은 애정을 주는 것처럼 떡밥을 뿌린 것도, 정음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정말이지 어장관리가 쉽지 않구나. 이게 뭐람. 좋아하는 여자랑 같이 모텔 가는 것도 눈치를 봐야하고.'

[주인님이 선택한 길입니다. 지금이라도 일부종사를 하시던가요?]

'하렘왕의 숙명을 거부할 수 없구나. 왕관을 썼으니 그 무게를 견뎌야지.'

[개소리 작작….]

"끝나고…."

"응?"

"노래방 끝나고 가요, 그럼."

정음이 겨우 용기내서 수줍게 말했다.

도훈도 기쁜지 정음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 * *

"자자, 체육과 2차 뒤풀이 진행을 맡은 MC영철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아아!!!"

영철은 커다란 홀 가운데서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 소품으로 준비 된 셔터 선글라스에, 빤짝이 의상까지 걸친 그는 완전히 업된 모습이었다.

[영철군이 엄청 분발하는데요?]

'민주도 없는데 왜 저렇게 날 뛰지?'

[민주양이 없어서 더 그런거 아닐까요? 눈치볼 사람이 없으니 이제 자기 세상이다 싶은 거죠.]

'하긴. 어디 한 번 얼마나 잘 노는지 지켜 보자고.' 어쩌다보니 2차 노래방의 최연장자가 된 도훈은 소파 구석에 자릴 잡고 영철의 진행을 지켜보았다. 적당히 술에 취한 여자 후배들도 영철의 깜짝 포퍼먼스에 열광했다.

"꺄아아아, 오빠 넘 웃겨요!"

"잘생겼다!"

"분위기 좀 띄워주세요!"

여학생들의 뜨거운 호응에 영철은 더욱 신이 났다.

마치 8선녀 모두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역시 이 놈의 인기란!'

몰론 여학생들의 열띤 반응은 생소함 때문이었다.

이제껏 남자 동기들이나, 혹은 선배들 중에서도 영철처럼 까부는 캐릭터는 없었던 것이다.

눈치 제로 고문관에 가까웠던 태영이나, 성실하지만 무뚝뚝하고 숫기가 없던 우선과 달리 영철은 비주얼도 훌륭하고 텐션도 좋은 편이었다.

영철은 템버린을 애병처럼 휘드리며 진행을 이어갔다.

"요샌 트롯이 대세니까 신청곡은 모두 트롯으로 가겠습니다."

"꺄아! 이 오빠 뭘 좀 아네!"

"아무거나 불러요?"

"2절 끊기 없기?"

다들 신이 나서 노래방 책자를 뒤적였다.

혼자서 부르겠다는 이도 있고, 둘이서 함께 듀엣곡을 고르는 경우도 있었다. 아니면 아영처럼 무표정하게 앉아있는 사람도 있었다.

도훈은 간만에 진행의 압박에서 벗어나 느긋한 관찰자 시점으로 후배들의 재롱잔치를 구경했다.

'풉-. 재밌네 영철이. 호색한인 것만 빼면 나름 괜찮은 녀석일지도.'

[주인님보다 더한 호색한도 있습니까?]

'나는 당연히 예외지. 한 과에 카사노바가 둘일 순 없는 거라고.'

"오빠가 먼저 불러봐요."

"맞아요. 저희 고르기 전에 한 곡 뽑아주세요!"

몇몇이 영철의 이름을 연호하며 노래를 주문했다.

영철은 머쓱한 듯 빼더니, 곧 책자도 보지않고 번호를 눌러댔다.

"오오! 번호를 외우고 있어!"

"18번인가봐!"

"기대된다!"

영철이 선정한 곡은 '오빠만 믿어'였다.

간주가 나오자 영철이 멘트부터 들어갔다.

"반갑습니다, 오늘은 제가 여러분의 현빈입니다. 박현빈!"

"꺄아아아아아!"

"저 오빠 짱웃겨!"

"원래 저렇게 재밌었어?"

영철이 노래를 시작하자 도훈도 팔짱을 끼고 감상모드에 들어갔다.

'어디 얼마나 잘 부르려나?'

-오빠 한 번 믿어봐~

구성지게 시작하는 첫소절에서 여자 후배들이 쓰러졌다.

"흐앗, 노래도 잘해!"

"영철 짱! 영철 짱!"

영철은 확실히 끼가 있었다.

이제껏 바람둥이로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건, 잘생긴 얼굴 때문만이 아니라 놀 땐 놀 줄 아는 타고난 유쾌함 때문이었다.

영철이 진행에 이어 멋진 노래 솜씨까지 뽐내자 도훈도 살짝 경쟁심이 들기 시작했다.

'제법인데? 좀 놀잖아?'

[설마 질투심 느끼시는 건 아니죠?]

'내가? 에이, 설마. 내가 한 번 나서면 바로 무대 평정인데.'

도훈은 조금의 위협도 느끼지 못했다.

그에겐 짧은 시간 가수처럼 변신할 수 있는 '오늘은 내가 가수다' 아이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철의 노래가 끝나자 자연스럽게 노래방에 또 다른 남자인 도훈에게 시선이 쏠렸다.

"회장님도 한 곡 뽑아주세요!"

"도훈 오빠 노래 짱 잘하잖아요!"

"정말? 그렇게 잘해?"

"못 들어봤어? 진짜 완전 가수라니까?"

"이도훈! 이도훈!"

"한곡 해! 한곡 해!"

분위기를 띄우는 여자 후배들의 성화에 도훈이 한 발 뺐다.

"난 나중에 할 게."

"그러지 마시구요."

"오빠앙, 오빠 꿀 목소리 듣고 싶어영!"

"아니 난 트로트는 좀…."

그러면서 몰래 바닥으로 손을 뻗은 도훈이 인벤토리를 뒤적였다. 그의 손목 아래가 잘린 것처럼 사라졌지만, 어두운 노래방에서 이를 목격한 이는 없었다.

'안되겠다. 로시, 목캔디 준비해.'

[목캔디요?]

'어. 나는 가수다 뭐 있잖아.'

[주인님. 해당 아이템은 현재 재고가 떨어졌습니다.]

'뭐, 뭐라고?!'

[목캔디가 소모성 아이템인 건 아시죠? 저번부터 쭉 사용하시다가 마지막 한 알까지 다 드셨는데요?]

'그, 그걸 왜 지금 얘기해?'

도훈은 순간 등에서 땀이 났다.

그 와중에도 여학생들은 도훈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회장님! 회장님!"

"한 곡 뽑아 주세영!"

"회장된 기념으로다가!"

도훈은 오랜만에 멘붕을 느꼈다.

'구, 구매는 가능해?'

[마켓에서 구매는 언제든 가능합니다. 하지만 지금 주인님 잔고가 바닥인데요?]

'이런 미친!'

문제는 현재 도훈에게 조금도 포인트가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무공 비급을 사느라 거의 다 소진한 상태에서 가상 체험인 천상크레프트를 이용하느라, 바닥까지 긁어낸 것.

'좆됐다!'

"오빠? 마이크 가져다 드릴까요?"

"여기 책자요."

나연과 연두가 동시에 마이크와 노래방 책을 들며 다가왔다.

아이템을 믿고 한 껏 여유부리던 도훈은 눈 앞이 아찔해 지는 것을 느꼈다.

'어, 어떡하지? 생목으로 불러야 하나?'

[원 주인의 생목은 사람 수준이 아니던데요?]

'아, 안돼. 이제까지 노래 졸라 잘부르는 이미지였잖아.

여기서 망하면 회장의 위신이고 뭐고 다 끝장이라고!'

하필 앞선 영철이 노래를 잘부는 상황.

당연히 비교될 수 밖에 없는 처지에서 도훈의 벼랑 끝에 몰린 기분이었다.

'이, 일단 째야겠다.'

"미안, 나 진짜 오늘 목이 좀 안좋아서."

"아잉, 노래 잘하는 거 다 아는데."

"전 한번도 못 들어봤어요. 한번만 들려주세요."

"오빠 트로트 부르는 거 보고 싶어용!"

도훈은 밀려드는 주문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이대로 있다간 빼박 무대로 끌려나갈 판이었다.

'안돼. 이대로 좆될 순 없어.'

도훈이 좌중을 물리치며 말했다.

"오케이! 부를게. 근데 일단 남자들만 부르면 좀 그러니까 너희들 부르고 나서."

"칫. 오빠 노래 듣고 싶었는데."

도훈의 난처한 표정을 본 정음이 불쑥 나섰다.

뭔가 사정이 있으리라 여긴 나머지 구원투수를 자청한 것이었다.

"그래, 내가 먼저 할게."

"정음이 네가?"

"응. 그냥 뭐, 아무거나 불러도 되지?"

도훈은 정음의 등판에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결국엔 자신의 창피한 노래 솜씨를 들킬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도훈은 간만에 위기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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