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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285화 (1,252/2,000)

1268.. 2학년2학기-83-

생각해보면 효민에 대해선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새터 때 우연히 정음과의 관계가 발각되면서 좆막음을 이유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MT가서 때씹한다는 말을 몸소 실천하게 될 줄이야.'

[무슨 관용구 같은 건가요?]

'있어, 그런게.'

그러나 당시만 해도 같은 과에서 하렘을 구축할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이후 붉은 실 가위를 이용해 인연을 날려버렸다. 나름 손절을 한 셈이다.

'근데 또다시 엮이게 될 줄이야.'

보통 한번 사귀었던 여자라도 다시 만나는 것은 서로 부담이 된다. 헤어졌다면 헤어진 계기가 있을 것이고, 설사 재결합을 성공하더라도 근본 원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고 돌아 효민은 다시 나와 연을 맺게 되었고, 지금은 8선녀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효민은 8선녀 중에선 가장 흔녀에 가까운 타입이다. 만약 8선녀를 8인조 여자 아이돌에 빗댄다면 리더는 당연히 정음. 얼굴 마담엔 아영, 댄스 담당으로 희주가 들어갈 것이다.

그 밖에 글래머 캐릭터인 서현이나, 건강미 넘치는 태닝녀 포지션에 경희. 그리고 각종 예능 프로에 주로 섭외되는 역할로 나연이나 연두가 딱 적절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효민의 경우엔 선뜻 어울리는 자리가 떠오르지 않는다. 소위 깍두기 역할.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은 옅지만, 없으면 분명히 아쉬운 타입이다.

[사람보고 깍두기가 뭡니까 깍두기가?]

'근데 아이돌에 빗대면 그렇지만, 현실은 또 전혀 다르거든.'

[다르다뇨?]

효민 같은 타입이 소위 말해 스타성이 부족하다. 개성이 약하고,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지 못한다. 몸매가 월등 한것도, 외모가 빼어난 것도, 그렇다고 눈부신 재능을 숨기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현실에선 효민과 같은 흔녀가 의외로 인기 많은 경우가 있다.

'흔하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만만하다는 거니까.'

[만만해요?]

'들이대기 쉽다고.'

남자들은 미인을 좋아한다.

아이돌에 열광하고 모델을 흠모하고, 예쁜 여자를 보면 저도 모르게 시선이 따라가는 숫컷의 뇌리에 박힌 본능이다.

하지만 남자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백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를 백번 찍어보는 사람보다, 자기가 넘길 수 있는 다른 나무를 찾는 사람이 더 많다.

효민은 그런 면에서 남자들의 도전정신을 불러 일으킨다.

8선녀 중에서 조금 밀릴 뿐이지, 효민의 외모는 무척 귀엽고 매력있다고 볼 수 있다. 몸도 작고 아담해 딱히 부담을 느끼거나 꿀린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솔직히 아영이 같은 얼음 공주나, 희주처럼 대놓고 까진 스타일, 또는 정음이처럼 너무 예쁘면 들이대기 부담스럽잖아. 하지만 효민은 어떻게 하면 해볼 수 있을 것 같거든.'

[아아···, 그래서 만만하다고.]

'이게 좀 웃긴 건데, 남자가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건 그 여자가 가진 우월성도 있지만, 보통은 공략 가능하느냐도 중요하단 말이야. 시간과 정성, 자원을 들여서 투자했는데 성과가 없으면 삽질한 셈이니까.'

[효민양은 그럼 해볼만 하고요?]

'그렇지. 도전욕구를 불러일으키지. 8선녀 다른 애들이라면 모를까, 효민이 정도면···. 이런 거 말이야. 원래는 희주가 그런 포지션이었어. 과거의 희주는 장단이 뚜렷했거든. 신이 내린 몸매에 비해 얼굴은 평범 이하였지. 그런데 희주가 용되면서 지금은 그 쩌리 포지션을 효민이 물려받았단 말이야.'

[아니 그래도 사람보고 쩌리라뇨.]

'솔직히 맞는 말이잖아. 8선녀가 아이돌이었다면 효민이 인기를 끌 일은 없었겠지. 어차피 아이돌은 물고 빠는 존재지, 현실에서 만날 가능성은 전혀 없으니까. 그런데 8선녀는 리얼이거든. 이러면 오히려 효민처럼 해볼만한 상대에게 인기가 쏠리는 경우도 있단 말씀. 이른바 흔녀의 역설이 랄까?'

[주인님의 개똥철학 잘 들었구요.]

"···오빠?"

"응?"

"제안할 거 있다면서요? 왜 갑자기 말씀을 안하세요?"

잠깐 로시와 잡담이 길었던 모양이다.

"아아, 그게 아니라 날짜를 좀 생각하고 있었어."

"날짜요? 무슨 날짜요?"

"아니. 내가 평소에 이것저것 하는 게 많아서 좀 바쁘거든."

"알죠. 오빠, 맨날 운동하고 공부하고···. 제가 아는 선배 중에선 제일 바쁘신 것 같아요."

"암튼, 그러다 보니까 얼굴 볼 일이 자주 없잖아."

"네."

"그래서 이번 학기에는 억지로라도 시간 내서 가끔 볼까 해."

"누굴요? 저요?"

효민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더니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니 뭐, 매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시간 내서 차라도 한 잔 마시자는 거지. 식사를 해도 좋고."

"헉! 정말요? 설마 지금 저한테 데이트 신청하시는 거?"

"데이트라기 보단 음···. 그냥 뭐 친목 유지?"

술에 취했기 때문인지 효민이 무척 기뻐했다.

"히히, 저야 좋죠. 오빠랑 같이 노는 거면."

"대신 한가지 부탁이 있어."

"부탁이요?"

"응. 다른 애들한테는 비밀로 해줘. 괜히 너만 편애한다는 소문이 돌면 내가 입장이 난처해지니까."

"아···."

효민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저랑 가끔 만나는 걸 동기들한테는 비밀로 해달라고요?"

"응. 할 수 있겠어?"

효민이 잠시 생각하더니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콜이요. 약속."

"괜찮겠어?"

"당연하죠. 근데 저도 하나 오빠한테 물어볼 거 있어요."

"뭔데?"

새끼손가락을 걸고 있는데 효민이 뜬금없이 물었다.

"오빠 이 얘기 저한테만 한 거 아니죠?"

헉!

[오호, 효민양이 눈치가 제법인데요?]

'하여간 여우라니까.'

"무슨 소리야?"

"그냥요. 여자의 직감이랄까? 오빠가 저랑 썸씽이 있긴 하지만, 저한테만 잘해주실 이유는 없을테고···. 굳이 비밀로 만나자는 거 보니 들키면 안될 사람이 있나 싶어서요.

제 말 맞아요?"

[들킨 거 아닙니까? 주인님의 돌려먹기?]

'어쩌지? 무슨 속셈인지 알 길이 없네? 일단 지르고 보자. 어차피 망각의 라이터가 있으니까.'

효민이 설사 나의 비밀을 안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망각의 라이터로 제안 자체를 원천 무효화 시킬 수 있으니까.

"정말로 그렇다면?"

"음···. 조금 섭섭해요."

"섭섭해?"

효민이 허심탄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나는 역시 세컨이구나 싶어서요."

"세컨이라니?"

"솔직히 저도 주제는 알거든요. 다른 동기들에 비해서 제가 잘난 게 없다는 것도."

"아니야. 뭘 또 그렇게 얘기해?"

"괜찮아요. 그거야 제 잘못은 아니니까. 친구들이 잘난게 제 탓은 아니죠. 부모님을 원망할 것도 아니고."

"아니 효민아, 그러니까 내 말은···."

"오케이. 세컨도 상관없어요."

"뭐?"

효민이 피식 웃었다.

"괜찮다구요. 이래봬도 저 쿨해요."

"······."

"비밀로 해드릴게요. 솔직히 저도 손해 볼 건 없으니까."

"정말이야?"

"네. 뭐 어때요? 일주일에 한 번 가끔 밥만 먹는 사인데.

밥만 먹고 끝날진 모르지만."

"무슨 뜻이야?"

"후식도 있단 말이죠."

효민이 갑자기 혀를 내밀어 윗입술을 핥았다.

도발적인 행동에 나도 모르게 당황했다.

'와, 애도 취하니까 사정없이 끼부리네?'

[효민양은 정말 의외로군요. 섹파 제안이란 걸 알면서도 그걸 허용하더니.]

'평범해 보이지만, 그걸 무기로 삼을 줄 아는 애야. 머리 회전이 나쁜 편은 아닌거 같아.'

"여튼 좋아요. 이해했어요."

"풉-. 쿨해서 좋네."

"아니거든요? 오빠니까 참는 거지."

"미안."

"근데 누군데요? 나 진짜로 말 안할게요. 오빠 퍼스트가 누구에요?"

효민은 정말로 궁금한 듯 몸을 바짝 기울여 나에게 들이 댔다. 약간의 취기와 호기심 섞인 눈빛이 유난히 총기가 넘쳤다.

"그건 노코멘트 할게."

"치."

"뭐, 나중에라도 알려줄 수 있고."

"네. 알았어요."

"아 그리고 나 만날 때 집행부 애들 근황도 같이 알려주면 좋겠어."

"근황이라뇨?"

"그냥 뭐 이것저것 사소한 것들이라도. 솔직히 조금 걱정되는 부분이 있거든."

"방금 말씀은 잘 이해를 못하겠는데요?"

"아니 그러니까. 여자애들끼리 있다보니 이런저런 알력 다툼이 있을수도 있잖아. 내가 모르는. 괜히 곪아서 터지는 것보다 바로바로 조치할 수 있게 네가 정보를 달라는 거야.

"

"아하! 저 그럼 스파이에요?"

"스파이? 뭐, 그냥 정황보고 정도로만 하자."

"알겠어요. 그건 저한테 맡겨두세요. 제가 또 친구들이랑 두루두루 친하거든요."

확실히.

그건 효민의 장점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여자가 너무 예쁘면 필수적으로 안티가 생긴다. 1학기 때 정음이 원톱으로 떠오를 때 질투하던 나연과 연두가 그랬다.

하지만 효민은 흔녀(?)라는 점을 이용해 누구에게도 질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경계심이 없다는 것은 반대로 친화력을 발휘하기 좋다는 뜻이 된다.

8선녀 내 갈등 중재를 효민에게 맡기려는 이유다.

"그래 부탁할게. 난 집행부가 1년간 탈 없이 잘 굴러갔으면 좋겠거든."

"그건 저한테 맡겨두세요. 근데 그럼 저흰 언제 봐요?"

"스케줄 계산해보니 목요일이 제일 한가하더라. 넌 어때?"

"목요일 좋아요."

"그럼 별일 없으면 매주 목요일 저녁 식사하는 걸로. 그때 특이사항 있으면 알려주고."

"네. 히히. 신난다."

"너무 신나하지마. 우리 둘만의 비밀이니까."

"앞으로 비밀이 자꾸 쌓이겠네요."

효민이 만족스럽게 웃더니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역시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그래."

효민을 가게로 보낸 도훈은 마침 2차로 갈 노래방을 섭외하고 돌아온 영철을 만났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형! 아니 회장님, 노래방 예약하고 왔어요."

"갔다 왔어?"

"어, 근데 안 들어가고 계셨어요?"

"잠깐 화장실에서 똥싸다가."

"아···. 똥."

영철이 민망한 듯 고개를 긁적거렸다.

"역시 고기 먹었음 똥 한 번 때려줘야죠."

딴에는 민망하지 말라고 내뱉은 말 같았으나, 오히려 서로 뻘쭘해지고 말았다.

"흠흠, 그나저나 어딘데?"

"300M 쯤 가면 사거리 모퉁이에 광장 노래방이라고 있더라고요. 홀이 제일 큰 방 알아보니까 10명 넘게 들어갈 수 있대서요."

"잘했어. 그럼 마저 먹고 2차로 갈사람 물어보자."

"헤헤, 무조건 가야죠. 전 오늘 끝까지 달립니다!"

* * *

"예? 안 가신다고요?"

식당으로 돌아온 영철은 집에 일찍 들어간다는 민주의 말에 바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응, 미안. 학생들 노는데 주책맞게 계속 있는 것도 눈치 보이잖니."

"아···. 조교선생님도 가시면 좋을텐데···."

"아니야. 대신 내가 교수님 카드 줄테니까, 그걸로 계산하고 재밌게 놀아줘."

영철은 1차만 끝나고 돌아간다는 민주의 대답에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눈치를 보니 같은 테이블에 있는 다른 여자애들은 별다른 반응 없이 조용히 고기만 먹고 있었다.

영철은 잠깐 나갔다 온 사이 분위기가 미묘하게 바뀌어 있는 걸 깨달았다.

'뭐지? 나갔다가 온 사이 무슨 일 있었나?'

영철과 민주가 앉은 테이블에는 희주와 나연, 그리고 그 옆에 연두까지 앉아 있었다. 까불기로는 국어과 1학년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이들인데, 지금은 유독 민주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사실 도훈과 영철, 그리고 효민이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여자들만 남게 된 자리에서 민주가 1학년 여학생들에게 한 소리를 했던 것.

기강을 잡으라는 도훈의 말에 민주가 오늘 개강총회 건을 가지고 1학년 집행부를 크게 나무랐다. 과 내 행사가 있는데, 수업을 핑계로 행사 직전까지 얼굴 한 명 비추는 사람이 없더라면서.

체육교육과 여자들 사이에서, 그것도 1학년들에게 민주는 하늘처럼 높은 선배였다.

평소에도 말도 붙이기 어려운 사람이, 작심하고 야단을 치니 정음을 비롯한 8선녀들은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 대신 민주도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에 2차는 안가겠다고 한 것이었다.

"아쉽네요 조교선생님."

영문을 모르는 영철이 아쉬움을 토로했으나 민주는 끝끝내 사양했다.

1차를 끝내고 계산을 마친 민주가 먼저 떠나자, 영철이 주도적으로 나섰다. 먼저 떠난 사람에게 미련을 두지 말고 후배들과 재밌게 놀겠다는 마음이었다.

"다들 나만 따라오라고."

영철을 선두로 노래방으로 향하는데, 마지막까지 민주를 배웅한 도훈이 뒤늦게 일행에 따라 붙었다. 정음이 혼자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다른 애들은?"

"영철 선배가 데리고 갔어요."

"아···. 그래. 설마 나 기다린 거야?"

"네. 오빠랑 같이 가려고요."

"좋네."

도훈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정음이 기특한지 머리를 쓰다듬었다. 주변에 눈치볼 사람이 없다는 게 이렇게 편할 줄 몰랐다.

"오빠."

"응?"

"죄송해요. 오늘 개강총회 많이 못 도와드려서."

"아니야, 괜찮아. 다들 바빴잖아."

"그래도요. 아까 오빠 없는 사이 조교선생님께서 그거 가지고 한 소리 하셨거든요."

"민주 샘이?"

"네. 집행부가 돼가지고 자각이 부족한 것 같다고요. 오빠랑 영철 선배만 신경쓰는 것 같다면서···."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너무 신경 쓰지마."

"아니에요. 저희들끼리 아까 화장실에서 얘기했는데 오늘 일은 저희가 잘못한 거 같아요. 집행부라고 뽑아주셨는 데, 오빠 혼자만 다 일하는 거 같고···. 죄송해요."

"에휴, 조교 선생님은 왜 또 그런 얘기를 하셔가지고···."

자기가 시켜놓고, 혼자만 사람 좋은 척하는 도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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