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7.. 2학년2학기-82-
아영은 아까부터 묵묵히 먹기만 했다.
그렇다고 식탐이 있는 사람처럼 허겁지겁 먹고 있는 게 아니라, 쌈 채소 위에 마늘과 고추 쌈장을 차곡차곡 포개최대한 천천히 씹어먹는 중이었다. 섬세한 손길로 오밀조밀 상추쌈을 만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퍽 여성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이따금 나와 눈이 마주칠 때면 황망히 시선을 돌려 잔에 채워진 콜라를 벌컥벌컥 마시곤 했다.
[아영양이 굉장히 수줍어 하는군요.]
'쟤는 원래 단둘이 있을 때랑 여럿이 있을 때랑 완전히 다르잖아.' 어쩌면 아영에게는 무척 불편한 자리였을 것이다.
아싸가 괜히 아싸가 아니다.
특히 왕따가 아닌 자발적 아싸인 아영과 같은 경우 여럿이 함께 어울려 떠드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정신적 스트레스로 느껴질 것이다.
여럿이 모여 수다를 떨며 웃고 떠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소수의 마음 통하는 사람들과 적적할 정도로 고요한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아영은 전형적인 후자로서, 그나마 마음이 통하는 정음이 옆에 있기에 꾸역꾸역 버티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물론 나 때문에 참석한 자리겠지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억지로 걸치고 있는 듯한 아영을 보고 있자니 괜히 마음 한 구석이 미안해졌다. 일부러 잘 익은 고기 몇점을 그녀에게 더 건넸다.
"야무지게 잘 싸먹네. 더 먹어. 고기는 많이 있으니."
"···네, 선배님."
그때 옆에 있던 정음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오늘 개강총회 잘 마무리 된 것 같아 다행이에요."
"다 너희들 덕분이지."
"아니에요. 저희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수업 늦게 끝나서 준비도 많이 못 도와드렸는데."
"아니야. 동기들한테 일일이 연락하고, 끝나고 청소까지다 했잖아.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해."
"네, 선배. 언제든 시키실 일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
정음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언제나 학과를 생각하고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참, 너 이번에 과대 됐다면서?"
"아···. 네, 어쩌다보니···."
"잘 됐다. 축하해. 기념으로 한 잔 할까?"
"수, 술이요?"
식사 자리엔 반주를 위해 소주 맥주가 각 1병씩 놓여 있었다. 술을 좋아하는 몇몇은 벌써 야금야금 마시고 있긴 했는데, 우리 테이블에선 아직 개봉도 안한 상태였다.
"응. 과대된 기념으로."
"근데 선배 술 잘 못 드시지 않으세요?"
정음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빈약한 나의 주량은 학과에 익히 알려져 있다. 올봄 새터 때 사발주로 의리게임을 했다가 그 자리에서 필름이 끊겨버렸기 때문이었다. 특히 정음은 그날 새벽 나와 뜨거운 밤을 보냈기 때문에 누구보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괜찮아. 한 잔 정도는. 일부러 차도 안가져 왔는데."
"아···. 그래도 조금만 마시세요."
"그래. 소주로 줄까 맥주로 줄까?"
"맥주요."
맥주병을 따 술을 따르는데 잠자코 있던 아영도 말없이 빈잔을 내밀었다.
"아영이 너도?"
"···네, 조금만."
생각해보니 아영은 생각보다 술을 잘 마셨던 기억이 난다.
시끌벅적한 술자리는 안 좋아해도 술 마시는 것 자체는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래. 너도."
"오빠오빠, 저도요."
그때 맞은 편에 앉아있던 효민도 끼어들었다.
"저는 말아 주세요."
"소맥?"
"네. 섞어 마셔야 제맛이잖아요."
소맥을 제작하기 위해 다시 소주병을 까려는데 갑자기 효민이 팔을 뻗더니 들고 있던 소주병을 가로챘다.
"응?"
"뭐 하세요? 흔들고 까야죠."
"흔들어?"
효민이 씩 웃더니 갑자기 소주병을 뒤로 돌려 팔꿈치로 병 밑을 쿵쿵 찍었다.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무척 익숙한 동작이었다.
"이렇게 한 번 위아래로 섞어야 깊은 맛이 우러나거든요."
마개를 딴 효민이 나에게 먼저 소주병을 들이밀었다.
"먼저 한 잔 받으세요."
"아, 소주는···. 그래, 뭐."
특유의 알콜 냄새 때문에 내키진 않았지만, 일단 소주잔으로 술을 받았다. 나를 먼저 따라 준 효민은 글라스에 소주을 통째로 붓더니 적당한 시점에 멈추고 이번엔 남은 맥주를 모두 털어 부었다.
너무나 익숙해 보이는 행동에 지켜보던 정음과 아영도 얼이 빠져 지켜만 보았다.
"효민이 넌 그런거 어디서 배웠어?"
"뭘 또 배우기까지? 그냥 알음알음 눈대중으로 익힌 거지. 정음이 너도 말아줄까?"
"아, 아니 나는 그냥 맥주 마실래."
"아영이는?"
"···나도 별로."
두 사람이 사양하자 효민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다들 술 마실줄 모르는 구만. 애기야 애기. 자, 그럼 잔채웠으니까 모두 짠해요!"
평소엔 소심하던 효민이 술자리 분위기를 주도하는 형국이었다.
'원래 얘가 이렇게 텐션이 높았나?'
[어째 좀 오버하는 것 같기도.]
'그러게.'
"체육과 새 집행부를 위하여!"
효민의 적극적인 진행으로 술잔이 돌기 시작했다.
우리 테이블에서 건배를 하며 술을 마시자 다른 테이블에서도 하나 둘 술병을 까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들 위주의 회식이라 술은 많이 안 마실 거로 생각했던 건 순전히 내 착각이었다.
'거참, 다들 배가 고픈 게 아니라 술이 고팠나 보네.'
[어쩌면 주인님 때문이 아닐까요?]
'나 때문이라고?'
[평소 소심하던 효민양만 봐도 그렇잖습니까? 일부러 술에 취하게 만들어 기회를 엿보려는 것 아닐까요?]
로시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술은 사람의 정신을 흐뜨러트린다. 실수해놓고 핑계대기 딱 좋은 것도 술이다. 어쩌면 오늘 참석한 8선녀 중 상당수는 술자리의 끝을 나와의 잠자리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흐음, 이것 참 조심해야겠는데. 근데 나 왜 술 마셔도 별로 반응이 없지?'
[네?]
'아니 예전에는 한 잔만 마셔도 속이 뜨끈뜨끈하고 낯빛이 빨개졌거든.'
술이 약한 건 전생의 이정우가 아니라 이도훈의 타고난 체질이었다. 간에 알콜분해효소가 없는 편인지 체격에 비해 유달리 술에 빨리 취했다.
그런데 지금은 술이 물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아! 환골탈태!]
'응? 무공 말이야?'
[맞습니다. 주인님은 체질이 180도 변한 상태입니다. 근골이 바뀌면서 어쩌면 간도 튼튼해 진 것 같습니다.]
'오잉? 진짜로? 그럼 나 이제 술이 세진 거야?'
[본래 무림의 고수들은 내공을 이용해 몸 속에서 알콜을 태울 수 있다고 합니다. 주인님이 그 정도 경지는 아니더라도, 일반인보다 훨씬 강해졌을 것은 당연합니다.]
'호오, 정말 그렇단 말이지?' 문득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
소맥을 한 방에 원샷 때린 효민에게 부탁했다.
"나도 한 번 말아줘 볼래?"
"서, 선배? 괜찮으시겠어요?"
정음이 놀라 만류하자 내가 괜찮다는 듯 말했다.
"어째 오늘 술이 좀 받는 날 같아서. 한 잔만 줘봐."
"히히, 진짜요? 금방 말아드릴게요."
효민이 또 다시 소맥을 말았다. 어째서 인지 소주 비율이 높아 보이는 것 같았지만, 일단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꿀꺽꿀꺽-
목 넘김부터가 달랐다.
일전에는 소주의 알콜향이 코끝을 찌르며 나도 모르게 거부감이 느껴졌는데 정말로 술이 달게 느껴졌다.
"크아-. 시원한데?"
"와, 오빠 술 엄청 잘 마시네요?"
"선배. 무리하지 마세요."
정음은 계속 날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회장이 됐다고 후배들 앞에서 괜히 센척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아니야. 정말로 오늘은 술이 잘 받아서 그래. 혹시 견디셔 때문인가?"
"아, 이거요?"
효민이 조그만 녹색병을 가리켰다. 다들 술을 마시기 전 원샷을 때린 상태였다.
"진짜 그런가봐. 봐, 나 얼굴 하나도 안 빨개졌지?"
"그러네요. 평소보다는···."
'와, 이거 대박인데? 나 얼마나 술이 세진거지?'
[아마 주당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견줘도 꿀리지 않을 겁니다. 환골탈태의 순간 내부의 장기도 새롭게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죠. 주인님의 오장육부는 20년 동안 한 번도 쓰지 않은 새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좋구나. 유일한 약점마저 사라지다니. 으하하.' 술이 세졌다는 소식에 기분이 좋아졌다.
전생의 이정우는 이렇게 술이 약한 편이 아니었다. 직장생활을 오래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술이 늘었는데, 그때는 2차 3차도 아무렇지 않게 잘 다녔던 것이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을 계속 마셨다. 처음엔 우려하던 정음도 내가 술을 마셔도 취한 기색이 안 보이자 그제야 안심했다.
한창 술자리가 이어지다 보니 다들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 딱 기분 좋게 취할 정도였다. 그때 효민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가게?"
정음의 물음에 효민이 턱 끝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아마도 화장실을 간다는 사인으로 보였는데, 나 때문에 대답을 똑바로 못한 것 같았다.
효민이 자리를 나서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시에 민주 옆에서 재롱을 부리고 있는 영철을 호출했다.
"영철아 밖에서 바람 좀 쐬고 오자."
"네?"
손가락 두 개를 붙여 입술에 대는 제스처를 보이자, 영철이 이해했다는 듯이 벌떡 일어섰다.
"넵, 회장님."
영철까지 함께 데리고 나온 건 알리바이를 위해서였다.
동시에 민주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나는 건물 밖으로 나가며 민주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도훈 : 민주야. 애들 기강 좀 잡아. 밖에 좀 있다가 올게.
-강민주 : 네, 주인님.
영철은 함께 끌려온 영문도 모르는 채 신난 상태였다.
"와, 전역한 날 친구들하고 꽐라될 때 까지 마시고 간만에 마시는 것 같아요."
영철은 얼굴이 뻘개져 있었는데, 민주의 옆에서 술시중을 제대로 든 모양이었다.
"많이 마셨냐?"
"아뇨. 형님은요?"
담배를 입에 물자 영철이 매너좋게 라이터 불을 붙여주었다. 그리곤 자기도 담배를 꺼내며 나에게 허락을 구했다.
"저도 한 대 펴도 되겠습니까?"
"편하게 해 인마. 언제 눈치 봤다고."
"제가 취하니까 군대 버릇이. 하하."
"아직도 다나까 말투가 남아있네."
"전역한지 일주일도 안됐으니까요."
영철이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지금쯤 민주가 여자 후배들에게 단단히 정신교육을 하고 있을 것이다. 여자들에겐 여자들만의 위계가 있어서 내가 나서는 것보다 민주가 말하는 게 훨씬 좋다.
"형도 많이 드셨어요?"
"그냥 오늘 좀 술이 받는 날인가 봐."
"그러게요. 하나도 안 빨개지셨어요."
영철은 취기 때문인지 몰라도 살짝 업된 느낌이었다.
굳이 묻지도 않았는데 계속 혼자 신이나서 떠들었다.
"올해 전역하길 정말 잘한 거 같아요."
"왜?"
"집행부 후배들 말이에요. 하나같이 예쁘고 착하더라고요."
"그래?"
"혹시 형···. 여기에 저 모르는 형수님 계시는 건 아니죠?"
"뭔 소리야,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에 영철이 실실 거리며 말했다.
"아니 1학년 후배랑 비밀 연애같은 거요. 형수님이면 제가 또 실수하면 안되니까 헤헤."
"취했네 이 새끼. 그런 거 없어 인마."
"정말요? 그럼 형은 8선녀 애들하곤 썸 같은 거 조금도 없으세요?"
썸이라···.
썸이 아니라 이미 지지고 볶고 다 했엄마.
라고 말하고 싶지만 굳이 술취한 영철이에게 밝히고 싶진 않았다. 일단 효민을 중간에서 가로채야했기 때문에 영철에게 말했다.
"야. 헛소리 말고 부탁 하나만 하자."
"넵, 형님. 명령만 내리십쇼."
"이따가 2차 갈건데 자리 좀 있는 지 보고 오라고."
"2차요? 어디로요?"
"노래방 정도가 괜찮지 않겠어? 사람도 많으니까."
"그럴까요?"
"어. 홀 넓은데로. 30분 안에 갈거라고."
"네, 형님. 금방 다녀올게요."
영철은 2차 간다는 소식에 신이 나는지 쪼르르 달려갔다.
영철을 먼저 보낸 나는 식당 안 화장실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우리가 자리한 룸에선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잠시 후 여자화장실에서 효민이 비틀거리며 걸어나왔다.
"앗, 오빠."
효민은 문 앞에서 내가 기다리고 있자 놀라면서도 반가운 눈치였다. 그녀는 균형을 잃은 척 나에게 몸을 기대며 쓰러졌다.
"아이코, 죄송해요."
"술 많이 마셨니?"
"네 쬐끔요. 헤헤. 근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오빠도 화장실 가려고요?"
"아니. 네가 하도 안 나오길래 혹시 토하고 있나해서."
"그 정도로 취하진 않았어욧!"
효민은 버럭 소리를 쳤는데, 확실히 취한 사람으로 보였다.
나는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
"아이고 하나도 안 취했네. 일단 밖에서 바람 좀 쐬자."
"바람이요? 저랑 바람 피우시게요?"
"뭐래, 진짜."
"히히, 농담이에요 농다암!"
"잠깐 얘기할 것도 있고."
식당 밖으로 나오자 효민이 갑자기 두 팔을 벌리며 뛰어다녔다.
"아, 시원해! 접때 해변 생각나지 않아요?"
"해변?"
"왜, 오빠랑 저랑 술먹고 저녁에 해변 걸을 때요. 그때 좋았는데."
효민이 여름캠프 이야기를 꺼냈다.
그 해변의 끝에서 야외 섹스를 했던 추억을 떠올리려는 의도처럼 보였다.
'하여간 여우같은 애라니까.'
[효민양도 은근히 할 건 다 하는 타입이죠.]
'저러다 오늘 사고칠 거 같으니 얼른 로테이션 제안을 해야겠어.'
"효민아. 잠깐 앉아봐."
"앉아보라고요?"
식당 앞에는 흡연자들을 배려해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효민과 나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너 혹시 수업 끝나고 따로 하는 거 있어?"
"수업 끝나고요? 아뇨?"
"음, 내가 너한테 뭐 좀 제안할까 해서."
"어떤 건데요? 히히. 벌써 두근두근 한데요?"
효민이 두 손으로 턱을 괴더니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당돌하면서도 깜찍한 매력이 느껴지는 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