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6.. 2학년2학기-81-
* * *
민주의 차는 이전에도 몇 번 타봤기 때문에 찾기 쉬웠다.
차 앞에서 그녀가 나오길 기다리다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로시. 혹시 만능 열쇠로 차 문도 딸 수 있나?'
[가능합니다. 열쇠가 들어가는 곳이라면 무엇이든 열 수 있죠.]
'호오, 그렇단 말이지?'
열쇠를 꺼내 차 문에 꽂고 돌리자 정말로 문이 열려버렸다.
'헐, 이거 완전 차량털이 전문 아이템이네?'
[근데 주인님이 차에 들어가 있으면 민주 양이 당황하지 않을까요?]
'뭘, 그런 걸 가지고.'
차에 타서 한참 기다리자 민주가 식당에서 나왔다. 그녀는 주차장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한참 나를 찾고 있었다.
빵-!
클락션을 살짝 울리자, 민주는 내가 차에 타고 있는 걸 발견했다. 놀라서 뛰어온 그녀가 차 문을 열고 물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가셨어요?"
"조심 좀 하지. 차 문을 열어놓고 갔던데? 내가 발견 안했으면 어쩔 뻔했어?"
"아···. 제가 깜빡했나 봐요. 영철이가 옆에서 하도 정신없게 해서···."
"영철이가?"
민주가 차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보조석에 앉고 민주가 운전석에 앉았다.
"아니, 아까 같이 차 타고 오는데···."
민주가 영철의 이야기를 꺼냈다.
* * *
"조교 선생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응? 뭐?"
"애들 말로는 저희과 출신이시라고."
"어. 맞어. 그건 왜?"
"그럼 개인적으로 있을 땐 선배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
영철의 말에 민주가 풉-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해, 그게 편하면."
"감사합니다, 선배님!"
영철은 신이 나서 계속 물었다.
"선배님은 근데 왜 남자친구 없으세요?"
"나? 글쎄···? 학과 일이 바빠서?"
"아···."
"실은 얼마 전에 맞선 봤었어."
"맞선을요?"
영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맞선은 대체로 나이가 들었을 때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혹시 결혼 정보회사 가입하셨어요?"
"뭐? 얘 말하는 것 좀 봐? 내가 그렇게 절박해 보이니?"
"아, 아뇨. 그냥 신기해서요."
"그냥 친척분 권유로 만난 거야. 한 번만 만나보래서."
"아···. 뭐 하시는 분이었는데요?"
"직업? 변호사던가?"
민주는 별 뜻 없이 대답했지만, 영철은 변호사라는 직업을 듣자 살짝 주눅이 들었다.
'역시 민주 선생님 정도 외모면 그 정도 직업하고 만나는 구나···. 와, 씨. 엄청 꿀리는데.'
"그, 그래서요?"
"뭐가 그래서야?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 한 번 만나고 그냥 끝냈지, 뭐."
"그래도 변호산데요? 변호사면 돈 엄청 잘 벌지 않아요?
"
"그게 중요하니?"
오히려 민주가 되물었다. 영철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아···. 민주 누나는 직업 말고 다른 걸 더 중시하는가 보구나. 그래도 변호사까지 되는 사람을 미련 없이 차버리다니, 눈이 대체 얼마나 높은 거람?'
"그죠. 직업이 뭐 대순가요? 마음이 더 중요하지."
"사실 별로 만나기 싫었는데 억지로 끌려나간 것도 있었고."
"선배님, 혹시 비혼주의 뭐 이런 건 아니죠?"
영철이 최근 유행한다는 비혼주의에 대해 언급했다. 시대가 바뀌면서 여자들도 결혼이나 출산 육아에 얽매이는 것보다 자신의 인생을 즐기는 쪽으로 트렌드가 바뀌었다.
"아닌데. 나 결혼할 건데?"
"아···."
"그냥 아직은 아닐 뿐이지."
"그러시구나."
영철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눈은 높은 것 같지만 희망이 아주 없는 건 아니야.
'"영철이 넌 여자친구 있어? 아, 군대 막 전역해서 아직 없겠네."
"그쵸."
"잘 됐다."
"뭐가요?"
영철이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올해 우리 과 예쁜 후배들 많이 들어왔잖아."
"8선녀요?"
"8선녀? 걔들을 그렇게 불러?"
"모르셨구나. 지금 회식 가는 집행부 애들 별칭이예요."
"처음 들어. 근데 왜 여덟 명이야? 여자애들 더 있지 않나?"
현 1학년에는 8선녀 말고도 다른 여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외모가 이에 미치지 못해 언급이 안 될 뿐이었다.
"그, 글쎄요. 저도 전역하니까 누가 알려준 거라."
"흐음. 그래? 다른 애들이 많이 서운해하겠는데."
"하하, 뭐 그냥 별명인데요."
"암튼 후배들 많으니 잘해봐. 나도 우리과 졸업했지만, 여학생이 이렇게 많이 들어온 건 처음인 것 같아. 그 전년도에는 딱 두 명 들어왔었거든."
"지금 2학년이요? 도훈이 형 있는."
"응."
도훈을 언급하자 민주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다행히 주행 중이라 앞을 보고 있었기에 영철은 눈치챌 수 없었다.
"저···. 근데 제가 실은 연상 취향이예요."
"연상?"
"네. 예전부터 이상하게 연상이 좋더라고요. 어렸을 때부터."
"풉-. 웃기네. 남자들은 보통 어린 여자를 더 좋아하지 않나?"
"그게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잖아요."
"하긴."
민주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영철은 속마음을 고백한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민주 누나도 연하를 좋아하는지 물어 보고 싶다.'
"혹시 선배는 그럼 남자 나이 같은 건 신경 안 쓰세요?"
"나이?"
영철의 질문에 민주는 도훈을 떠올렸다.
"음, 딱히?"
"엇? 정말요? 그럼 연하도 상관없으시다는."
"사람만 좋으면 됐지,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어?"
"그, 그럼 학생하고도 연애할 수 있으세요?"
민주가 도훈을 생각하며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서로만 괜찮다면."
민주는 도훈을 염두하고 내뱉은 말이었지만, 영철은 완전히 오해하고 말았다.
'나이쓰! 희망이 있어. 연하도 상관없다잖아? 설마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영철은 혼자 헛바람이 들어서 민주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선배님 저 그럼···."
"꺄악!"
그때 민주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영철은 앞으로 튕겨 나갈 뻔했다. 다행히 벨트를 하고 있어 큰 사고는 면했지만, 조금만 늦게 밟았어도 앞차를 박을 뻔한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괘, 괜찮니?"
"네, 전 괜찮아요. 선배님은요?"
"나도. 어휴, 얘기하다가 정신 팔려서···."
민주가 은근슬쩍 영철을 나무라자 영철도 의기소침해져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 * *
"진짜로 영철이 때문에 사고 날 뻔했다니까요? 운전하는데 계속 옆에서 말 걸어서 끼어드는 차를 놓쳐버렸어요."
"정말로? 안 다쳤어?"
민주가 명치 쪽을 어루만졌다.
"벨트에 여길 눌린 걸 빼면 괜찮··· 앗, 주 주인님."
나는 민주의 손을 치우며 직접 가슴 쪽을 마사지했다.
"여길 눌렸어?"
"아··· 아···. 네 맞아요."
"정확히 이쪽이야?"
"아뇨, 좀 더 안쪽이요."
민주가 얼굴이 빨개지며 내 손을 젖가슴 위에 올렸다.
"이쪽이 더 아픈 것 같아요."
그녀의 행동이 귀여워 군말 없이 젖가슴을 주물러 주었다.
"여기 말이지?"
"네···. 하, 하아···. 주, 주인님."
"근데 대화 내용을 대충 들어보니까 영철이가 너한테 정말로 관심 있는 거 같은데?"
"영철이가요?"
신기한 것은 제3자가 봐선 바로 간파할 수 있는 뻔한 내용이었는데 민주는 조금도 눈치 못 챘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영철을 아예 남자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긴 하지만.
"응. 영철이가 진짜 너 좋아하면 어쩌려고?"
"주인님이 있는데 제가 왜 다른 남자한테 한눈 팔겠어요?"
나는 일부러 젖가슴을 세게 움켜쥐었다.
"학!"
"그지? 넌 내 거지?"
"흐, 흐으··· 주, 주인님···. 민주는 영원히 주인님 거예요."
"그래도 상관없다고 들이대면 어쩔 건데? 걔 은근히 잘생기지 않았어?"
"정말 눈꼽 만큼도 영철이한테는 관심 없어요. 감히 주인님에 비빌 수나···."
"후후. 듣기 좋네."
나는 다시 민주의 가슴을 놓으며 본론을 꺼냈다.
"암튼, 다른 게 아니고 오늘 회식 때 애들 기강 좀 잡아 줘."
"기강이라뇨?"
민주의 가슴을 놓자 아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솔직히 1학년에 쓸만한 남자 후배가 없어서 여자애들로 대부분 채우긴 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남자 선배다 보니 애들이 나를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 원래 여자애들은 남자 선배 별로 안 무서워한다며."
"흐음···. 그렇긴 해요."
"그러니까 내가 나중에 잠시 자리 비우게 되면 여자애들에게 확실히 정신 교육 해달라고. 민주 너도 우리과 출신이니까 애들이 말 잘 들을 거 아니야. 하늘 같은 선밴데."
"알겠어요. 저한테 맡겨 주세요. 애들 절대 까불지 못하게 해드릴게요."
민주가 결의를 다지듯 말했다. 기강을 잡으랬다고 너무 확실하게 잡아 버릴까 살짝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아, 그리고 오늘은···."
"네."
"아쉽지만 회식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아."
"아···. 저, 정말요?"
"미안. 실은 낼 아침 일찍 공인 중개사 만나기로 했거든.
"
[주인님이요?]
'그냥 뻥치는 거야. 어차피 내일 오전 수업이 공강이라.'
[아하!]
"공인 중개사는 갑자기 왜요?"
"원룸 옮기기로 해서 새 집 알아보려고."
"주인님 이사하세요?"
"응. 계약이 만료된 김에 아예···."
"괜찮으시면 저희집으로 들어오셔도 되는데."
민주가 갑자기 뜬금없는 동거 제안을 했다.
"너네 오피스텔?"
"네. 마침 집에 빈방도 있고···. 제가 아침 저녁으로 식사도 차려드리고···. 또···."
민주는 혼자 말하다 말고 두 볼이 빨개졌다. 아마도 나와 함께 사는 야릇한 상상을 펼쳤던 모양이다. 그런 그녀의 기대를 깨뜨리자니 조금은 미안했다.
"미안한데, 그건 좀 힘들 것 같아. 같이 살면 아무래도 불편할 일이 많아서. 가끔 미국에서 가족들도 올 수 있고."
"아···."
"대신 자주 놀러 갈게. 너네 집 어딘지 아니까."
"저, 정말요?"
"응."
"아 주인님···. 주인님을 모실 수 있으면 민주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
"아무튼 그것 때문에 오늘은 적당히 놀다 일찍 들어가 봐야돼. 내일 오전에 새집 둘러보고 바로 오후 수업이라."
"그러시구나."
민주는 많이 아쉬운 눈치였으나 그래도 어른스럽게 납득했다.
"알겠어요, 주인님. 다음에 또 기회가 오겠죠."
"그래. 이해해 줘서 고마워. 일단 너무 늦게 들어가면 의심하니까 나 먼저 들어갈게. 1분 정도 뒤에 따라와."
"네, 주인님."
나는 민주를 차에 남겨두고 다시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안으로 들어가자 미리 잡힌 좌식 테이블에 후배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엇, 오빠다."
"오빠. 왜 이제 오세요? 담배만 한 대 피우고 오신다더니."
"아···. 갑자기 급한 전화가 와서. 난 이쪽에 앉으면 되나?"
일부러 눈치를 살피다 정음과 효민 사이에 앉았다. 자리를 정하는 행동 하나로도 따가운 눈길을 감당해야 했다.
'어휴, 가시방석이 따로 없네.'
[다 주인님의 업보죠.]
"오셨어요, 선배."
정음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여전히 동기들 앞에선 선배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그녀를 보니 괜히 마음이 안쓰러웠다.
[정음양도 좀 챙겨주시죠.]
'안 그래도 그럴 거야. 눈치 안 보는 다른 애들에 비하면 얼마나 배려를 하는지. 미안할 정도라니까?'
"응, 고기 왔는데 왜 안 굽고 있어?"
"아···. 조교선생님 오시면 시작하려고요."
그때 민주가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도훈 학생도 왔네? 뭣들해? 고기 왔는데 안 굽고. 교수님 없으니까 편히 먹어도 돼."
"와,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조교 선생님 최고예요!"
소고기를 불판 위로 올리는 여자애들은 신이 나 보였다.
민주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사는 게 아니고, 교수님께서 사주시는 거야. 너희들 1년간 집행부 활동하는 데 수고하라고. 다들 회장 도와서 열심히 할거지?"
"네!"
"맡겨만 주세요!"
민주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가장 상석에 앉았다.
어쩌다 보니 나와는 완전히 반대편 테이블이었다. 옆에선 영철이 시중들 듯 방석을 빼주고 있었다.
'영철이 저 놈은 한 번 꽂히면 그냥 눈에 뵈는 게 없구나.
'[그러게요. 다른 사람 시선은 신경도 안 쓰네요.]
회식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무래도 배고플 때 맛있는 소고기가 들어가자 다들 정신없이 먹기만 했다. 우리 테이블에선 정음 혼자 고기를 올리고 자르며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내가 정음에게서 집게와 가위를 빼앗았다.
"굽지만 말고 너도 좀 먹어."
"앗, 괜찮아요 선배. 제가 할게요."
"계속 굽기만 하고 하나도 못 먹고 있잖아. 난 구우면서도 잘 먹으니까."
"아···. 감사합니다."
정음이 그제야 맘 편히 식사를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보자 어딘지 마음 한구석이 찡했다.
'이번에 과대 됐다고 했지?'
[정음양이요? 네.]
'애들 이끌려면 고생 좀 하겠는데. 다들 자기밖에 모르니 원.'
정음은 확실히 여느 여자애들과 달리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늘 동기들을 먼저 챙기고, 희생하는 타입이었다.
책임감이 남다른 점도 있고 원체 정이 많은 성격 때문인 것 같았다.
'확실히 8선녀 중 맏이는 정음인 것 같아.'
[주인님과 속궁합도 최고긴 하죠.]
'그건 당연하고.'
여럿을 한데 모아놓고 보니 장단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배려심과 충성심이 넘치는 정음이 같은 애들도 있지만, 약간은 이기적이고 질투심 많은 나연과 연두도 있었다.
독립적인 성격의 희주나 경희도 있는 반면, 의존적인 서 현과 효민도 있었다.
그리고 늘 말수가 없어 존재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 아영도 있었다. 지금도 아영은 정음의 옆에 꼭 붙어 말없이 고기만 먹고 있었다.
나는 집게를 들어 정음과 아영의 그릇 위에 다 익은 고기를 올려주며 말했다.
"이거 먹어. 더 놔두면 타겠다."
그러자 아영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깊고 커다란 눈동자가 어딘가 사연이 많은 여자같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