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282화 (1,249/2,000)

1265.. 2학년2학기-80-

* * *

도훈은 8선녀와 나란히 식당을 향해 걸었다.

하나 같이 개성 있고 예쁜 여대생 그룹이 줄줄이 걸으니, 길거리가 쇼케이스 장이 된 것 같았다. 늦게까지 대학가 근처에 남아있던 학생들은 줄지어 걷는 8선녀와 도훈을 보며 저마다 부러운 시선을 던졌다.

"와, 뭐야? 아이돌 홍보하러 왔나봐?"

"처음 보는 걸그룹 같은데?"

도훈의 양 옆으로 4명씩 나뉜 여학생들은 그의 곁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도훈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모습이 무척이나 이색적이었다.

'아···. 이건 진짜 아닌 거 같은데.'

도훈으로선 난처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저마다 한껏 미모를 뽐내고 나온 8선녀가 행인의 주목을 지나치게 끌었기 때문이었다. 서로에게 꿀리지 않겠다는 듯 잔뜩 치장한 바람에 평범한 옷차림의 도훈만 중간에서 붕 뜬 사람처럼 보였다.

"근데 저기 가운데 저 남자는 뭐야?"

"매니전가?"

"매니저 치곤 너무 잘생긴 거 아냐? 몸이 어우야···."

"요새 로드 매니저들은 경호원 역할도 같이 하잖아."

도훈은 들릴 듯 말 듯 자신을 향해 수군거리는 행인들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하렘왕에게 걸그룹 경호원 취급이라니···.

"오빠, 오늘 저녁 소고기 먹는 다면서요?"

"으, 응."

도훈의 옆에 찰싹 붙은 연두가 말했다.

그녀는 8선녀 중에서도 제법 기가 센 편이었기 때문에, 다른 여학생을 제치고 도훈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반대편에서 도훈에게 붙은 이는 양희주였다.

염색한 머리를 찰랑거리는 희주는 유독 노출이 심한 복장이었는데, 핫팬츠가 엉덩이에 끼일 것처럼 바짝 달라붙어 늘씬한 각선미를 드러내고 있었다.

"저희 많이 먹어도 되죠? 일부러 점심도 많이 안 먹었는데."

"그, 그래."

도훈으로선 수난 시대였다.

이쪽에서 말을 걸면 반대편에서 다시 말을 걸고, 저쪽의 질문을 받고 있으면 다른 편에서 괜히 시비를 걸었다.

"희주야, 너 그러다 살찔걸?"

"호호, 뭐래? 찔 때만 찌고 빠질 땐 알아서 빠지는데."

"과연 그럴까?"

여학생 중 몇몇은 교묘히 신경전을 벌였는데, 말에 가시가 달린 것처럼 상대를 찌르고 있었다. 도훈은 점점 머리가 아파 왔다.

'아아, 이건 아닌데. 나는 평화로운 하렘이 좋은데.'

[그건 모순이죠. 지금 여기 모인 여성분들은 하나같이 주인님만 쳐다보고 있을 텐데요. 언어도단입니다.]

'어떻게 서로 좀 안 싸우게 만드는 방법은 없나?'

[있죠.]

'뭔데?'

[주인님이 딱 한 명을 점찍어서 정실을 지정해 주는 거죠. 그럼 모두가 평화로워 질겁니다.]

'아아···. 그건 너무 곤란하다고.'

정실 이야기가 나오자 도훈은 고개를 힐끔 돌려 뒤따라오는 정음을 바라보았다. 정음은 일행과 살짝 거리를 둔 채 단짝인 아영과 함께 걷고 있었는데, 도훈과 눈을 마주치더니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아아, 애들이 정음이처럼 착하면 얼마나 좋을까? 괜히 나한테 부담될까 말도 안 걸고 멀리 떨어져 걷는 거 봐.'

[다들 개성이 다른데 어찌 똑같은 마음이겠습니까? 들이 대는 사람도 있고, 멀찌감치 지켜보는 사람도 있는 거죠.]

'하여간 얼른 로테이션 확정 지어서 분란이 안 생기도록 막는게 시급하겠어.'

이에 생각이 미친 도훈은 나연과 연두를 보고 말했다.

"너희 둘 잠깐 심부름 좀 다녀올래?"

"심부름요?"

"응. 오늘 술 많이 마실 것 같은데, 편의점에서 견디셔좀 사와."

"견디셔요?"

"아, 그 숙취해소제?"

"어."

도훈은 나연과 연두를 그룹에서 분리 시킬 생각이었다.

그는 지갑을 열더니 카드를 나연에게 건넸다.

"조교 선생님이랑 영철이까지 모두 11병이야. 부탁 좀 할게."

"네."

"알았어요."

연두와 나연은 모처럼 도훈의 부탁을 받고 일행에서 떨어져 편의점으로 향했다. 다시 목적지를 향해 걷던 도훈은 깜빡 뭔가 떠오른 것처럼 희주에게 말했다.

"아차. 담배 사야 되는데···."

"제가 다녀올까요?"

도훈에게 예쁨을 받고 싶던 희주가 덥썩 물었다.

"아니야. 그냥 내가 다녀올게. 희주 너 식당 어딘지 알지?"

"네. 아까 약도 봤어요."

"애들 데리고 먼저 가 있어. 난 담배 사고 나연이랑 연두랑 뒤따라갈게."

"아···. 네, 오빠."

도훈마저 방향을 돌리자 희주가 아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도훈이 혼자 사라지자 다른 여학생들이 영문을 물었다.

"근데 도훈 선배 어디 가시는 거야?"

"응. 담배 사러."

"맞다. 오빠 담배 피우시지?"

"좀 끊으면 좋을텐데."

"난 근데 도훈 오빠 담배 피우는 모습도 멋있더라?"

"그건 인정."

다들 도훈의 흡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딱히 그것을 문제 삼는 사람은 없었다. 똑같은 담배도 못생긴 남자가 피우면 흡연충이지만, 잘생긴 남자가 피우면 애연가인 이유였다.

* * *

"견디셔 11병 사오 랬지?"

"근데 이거 마시면 정말로 안 취하려나? 난 오늘 취하고 싶었는데."

"취해서 뭐하게?"

"흐흐, 취한 척 오빠 덮치려고."

"꺄아, 변태. 적당히 해 이것아. 오빠 아까 다른 애들 눈치 보는 거 못 봤니? 네가 찰싹 붙으면 얼마나 불편하시겠어."

편의점에 먼저 도착한 나연과 연두가 서로 떠들고 있는 데, 뒤에서 불쑥 도훈이 다가왔다.

"뭐야? 너희들 나 없다고 뒷담화 까냐?"

"엇!"

"오빠가 여긴 왜?"

"담배 사는걸 깜빡했어. 내 카드 너희한테 있잖아."

"아!"

"저희한테 그냥 사달라고 하시지."

"여자애한테 어떻게 담배 심부름을 시켜? 괜히 오해 받게."

"왜요? 저흰 오빠가 콘돔 사오래도 사올 수 있는데."

"난 안 써."

다른 여학생들의 눈치를 안 보게 되자 나연두의 수위가 곧바로 올라갔다. 도훈은 깊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이상한 소리 말고 견디셔 11병 챙겨서 카운터로 가져와."

"넹!"

도훈은 카운터에서 담배를 고른 뒤 함께 계산을 치렀다.

"오빤 근데 담배 피우면 기분 좋아요?"

"왜? 궁금해?"

"네."

"시작을 마. 한번 피우면 나처럼 끊을 수 없게 되니까."

연두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딱 오빠 같네."

"뭐가?"

"담배 말이에요. 한 번 시작하면 끊을 수 없으니까."

"야!"

도훈은 편의점 직원이 이상하게 쳐다보자 후다닥 계산을 마치고 나왔다. 나연과 연두는 도훈을 곤란하게 하는 게 재밌는지 계속 놀렸다.

"난 오빠 당황하는 모습 보면 귀엽더라?"

"너 오빠한테 자꾸 버릇없이 굴 거야?"

나연은 연두에 비해 훨씬 점잖은 성격이었기 때문에 연두를 못 마땅해 했다. 잠자코 지켜보던 도훈이 교통정리를 했다.

"너희들 욕구불만이야?"

"저희가요?"

"솔직히 말하면 그래요. 저희 여름 캠프 이후론 한 번도 못 했잖아요."

도훈이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 근데 자꾸 다른 애들 있는데서 곤란한 얘기하면 나 힘들다."

"힝, 그러니까 방치 플레이 말라고요."

"저흰 오빠만 바라보고 있는데."

"오케이. 그럼 이건 어때?"

"뭐요?"

도훈이 나연과 연두를 번갈아 쳐다보며 제안했다.

"매주 토요일. 시간내서 정기적으로 보는 거야."

"진짜요?"

"매주?"

나연과 연두가 뛸 듯이 기뻐했다.

"물론, 서로 일정이 틀어지면 힘들지만 그래도 날짜를 정해서 말이야."

"잠깐. 근데 왜 하필 토요일이에요?"

"맞아요. 다른 날도 널널한 날 많은데?"

"그럼 금요일엔 나연이 만나고 일요일에 연두 만날까?"

"잠깐. 왜 나연이가 먼저예요?"

"일요일은 주말이라 훨씬 길게 볼 수 있잖아요. 저도 싫어요."

"거봐."

도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항변했다.

"저번에 보니까 너희 두 사람은 따로 만나면 서로 질투하더라고. 아니야?"

"음, 맞아요."

"저 몰래 따로 만나는 건 싫어요."

"그래서 생각했어. 따로따로 보는 것보다, 차라리 한 번에 둘을 동시에 보는게 좋겠다고."

"아하."

"그런 뜻이!"

"그래서 시간이 제일 여유로운 토요일로 잡은 거야. 평일엔 과제다 조모임이다 바쁜 일이 많으니까."

"일요일은 왜 안돼요?"

"그럼 날을 샐 수 없잖아."

도훈의 말에 나연과 연두가 서로를 쳐다보며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마치 도훈이 토요일 밤마다 날이 새도록 자신들을 만족시켜주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빠 지금 한 말 진짜죠?"

"그럼 이번 주 토요일부터요?"

"어. 대신 너희들도 한 가지만 지켜줘."

"뭔데요?"

"말씀만 하세요."

"첫째. 토요일이 아닌 날에는 부르지 말 것."

"잉···."

"그런 게 어딨어요? 사람이 토요일만 꼴리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뭔가 기준이 있어야 할 거 아냐. 나 평일엔 공부하느라 바쁜 거 알잖아."

도훈은 1학기 단대 수석을 한 이후로, 모범생으로 소문이 자자해져 있었다. 특히 저녁마다 도서관에서 예습 복습을 철저히 하는 걸로 유명했다. 나연과 연두는 둘 다 공부를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도훈의 공부를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오케이. 그건 알겠어요."

"학점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죠."

"하나 더 있어."

도훈이 다시 말했다.

"뭔데요?"

"또요?"

"다른 여자애들 있는 앞에서 나한테 너무 들이대지 마."

"뭐라고요?"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오빠?"

도훈이 약을 팔았다.

"그게 아니라 다른 애들이 눈치 챌까봐 그래."

"무슨 눈치를 채요?"

"맞아요. 저희 아무한테 얘기한 적 없어요."

"당연히 말은 안했겠지. 근데 혹시라도 말 실수해서 소문이라도 나봐. 너희 두사람이랑 나랑 셋이 같이 잔다고 말이야."

"아···."

"음, 오빠가 곤란하긴 하겠네요."

"나만 곤란한 게 아니지. 우린 뭐, 서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건 정상적인 만남은 아니잖아. 남자 하나에 여자 둘인 상황은."

"그건 그래요."

"그래서 하는 말이야. 괜히 다른 애들한테 꼬투리 잡혀서 대학 생활 파탄나기 전에 알아서 조심하자는 거지. 특히 연두. 넌 너무 농담이 과해."

"네. 앞으론 조심할게요."

"나연이도 알았지?"

"네, 오빠."

나연과 연두는 도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매주 정해진 요일에만 만나는 것이 마음에 썩 드는 조건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기약없이 기다리는 것보다는 일주일에 한번은 무조건 도훈을 보는 편이 이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오빠, 이번 주 토요일부터요?"

"이번주는···."

"뭐예요? 첫 주부터 안되는 거예요?"

"약속이 틀리잖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

도훈이 흥분한 두 사람을 설득했다.

"어쩌면 나 이사갈지도 몰라."

"오빠 이사가요?"

"원룸 사시지 않았어요? 집주인이 나가래요?"

"아니 그게 아니라···."

도훈은 미국에 계시는 아버지가 미리 집을 구하라면서 큰 돈을 보내왔다고 둘러댔다.

"앞으로 이 돈 불려서 결혼할 때 보태라더라고. 어차피 은행에 넣어둬봐야 이자도 안 붙는데 집이라도 좀 큰데로 옮겨야지. 지금 원룸은 다달이 월세 나가니까 전세 가능한 곳으로."

"아, 그럼 더 큰집으로 가시는 거예요?"

"아파트?"

"아파트는 아니고, 그냥 단독으로 알아보고 있어. 담배피우기 편한 곳으로. 아파트 살면 맨날 엘리베이터 타고 1층으로 내려가야 하니까."

"오빤 진짜 담배를 좋아하시는 구나."

"그럼 이번주 토요일에 이사하신다고요?"

"아마도 그럴 것 같아."

"흐음.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저랑 연두가 가서 도와드릴까요?"

"엇, 그거 좋겠다. 오빠 저 빨래 잘해요. 제가 빠는 건 다 잘해서, 헤헤."

"야. 나도 잘해."

도훈이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을 겨우 말렸다.

"아니야. 이사는 어차피 이삿짐 센터 부를거라 따로 손이 필요하진 않을거야. 그 대신."

"대신 뭐요?"

"이사가면 너희 둘을 제일 먼저 초대할 게. 어때?"

"좋아요!"

"콜!"

나연과 연두는 이사하는 도훈의 집의 첫 번째 손님이 된다는 소식에 무척 기뻐했다. 두 사람과 이야기 하다보니 어느새 세 사람도 목적지인 식당으로 도착한 상태였다.

도훈은 나연과 연두를 먼저 들여보냈다.

"나 밖에서 담배 한 대만 피우다 갈게, 먼저 들어가."

"저희들만요?"

"같이가요 오빠. 기다려 드릴게요."

도훈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방금 말했잖아. 괜히 다른 애들한테 오해받을 행동은 삼가자고. 셋이 같이 들어가면 애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 아냐."

"아, 맞다."

"듣고보니 그게 좋겠네요."

"응. 금방 들어갈게."

"네, 오빠."

"견디셔 나눠주고 있을게요."

나연과 연두가 식당으로 들어가자 도훈이 새 담배를 꺼내들고 불을 붙였다.

'후아-. 진짜 쟤들은 2:1로 상대해야 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네.'

[그래 보입니다. 주인님이 아주 쩔쩔 매시는 군요.]

'그래도 다행이야. 토요일로 확정 시켜서.'

[이제 그럼 효민양과 정음양만 남은 건가요?]

'정음이는 어차피 마지막에 단 둘이 남을 때 얘기하면 되고, 효민이는 중간에 한 번 기회를 엿 봐야지.'

[근데 강민주 조교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애들 먼저 들여 보낸 거야.'

도훈은 스마트폰을 꺼내 민주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도훈 : 어디야?

답장은 언제나처럼 칼같이 도착했다.

-강민주 : 차타고 와서 저희가 제일 먼저 도착했어요. 주인님은 왜 안 들어오세요?

-이도훈 : 잠깐 할 말 있으니까, 주문 시켜놓고 차에 가는 척 주차장으로 와봐.

-강민주 : 주차장으로요?

-이도훈 : 어, 네 차 근처에 있을게.

-강민주 : 네, 주인님!

연락을 마친 도훈은 민주의 차를 찾아 주차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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