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280화 (1,247/2,000)

1263.. 2학년2학기-78-

* * *

"한솔샘. 그쪽에 식순 좀 붙여줄래?"

"여기요?"

"아니. 좀 더 왼쪽. 어, 거기가 좋겠다."

사범대 국어과 강의실에선 개강총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산뜻한 오피스룩 차림의 민주가 분주하게 움직이며 마이크와 음향을 점검하고 있었고, 보조인 한솔이 뚱한 표정으로 식순이 인쇄된 종이를 칠판 구석에 붙이는 중이었다.

식순을 뽑기 위해 대학 본부에 들러 플로터로 인쇄해온 한솔은 속으로 굉장히 불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아니, 조교 선생님은 매 학기 있는 개강총회가 대체 뭐라고 이렇게까지 신경 쓰시는 거람?'

가령 학부모들도 참가하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나, 학사모 촬영이 있는 4학년 졸업식이라면 본인도 어느정도 납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개강총회는 말 그대로 학기마다 있는 형식적인 행사였고, 대체로 학부생들이 도맡아 준비를 해왔던것.

한솔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민주가 해명했다.

"1학기 때 멋모르고 얼렁뚱땅 넘어간 게 마음에 걸려서 그래. 학과장님께서 준비가 미흡해 보였는지 언짢아하시는 것 같더라고."

하지만 한솔에겐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 설명이었다.

'학과장님께서? 별 관심도 없는 것 같던데···. 나 몰래 관심법이라도 익히신 건가?'

"기왕이면 학생들하고 같이하면 좋을텐데요. 새로 회장도 뽑혔는데···."

크고 작은 학과 행사는 보통 집행부들이 동원되는 게 관례.

하지만 민주는 딱 잘라 말했다.

"애들도 어제 막 개강했는데 정신없지 않겠어? 별거 아니니 우리끼리 얼른 마무리해 버리자."

"···네."

한솔이 볼멘 목소리로 대답했다.

민주가 굳이 무리해 준비를 서두르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새롭게 회장이 된 도훈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

'주인님 신경 쓸 일 없게 싹 다 준비해 놔야지. 주인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어.'

결국 민주는 도훈의 첫 번째 행사가 완벽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일찍부터 보조인 한솔을 데리고 나와 준비하는 것이었다.

마음속 한구석에는 예쁜 짓을 해 도훈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속셈이 깔려있었다.

"대충 된 거 같은데요?"

"음···. 식순 종이가 살짝 삐뚤어지지 않았어?"

"네? 어디 가요?"

"왼쪽으로 살짝 기운 거 같은데."

"제가 보기엔 멀쩡한데요?"

"아니야. 멀리서 봐봐. 약간 이상한데···. 차라리 오른쪽에 붙이는 게 더 나으려나? 그냥 다시 뜯어서 옮길까? 구겨지면 인쇄를 다시 해와야 하나?"

"···조교 선생님."

별것도 아닌 걸로 요란 법석을 떠는 민주의 태도에 결국 한솔이 한마디 했다.

"행사 식순 같은 걸 누가 신경 쓴다고 그러세요? 그냥 대충 하셔도 돼요."

"아니 그래도···."

민주가 대답하려는데 갑자기 강의실 문이 열리며 남학생둘이 들어왔다. 영철은 민주를 보자마자 90도 허리를 숙이며 씩씩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조교 선생님!"

"어, 어? 네가 여긴 어쩐 일로?"

"저도 이제 집행부잖아요. 개강총회 준비하려고 수업 끝나자 마자 달려 왔어요."

"아니, 거의 다 했는데···. 엇, 주인···."

"안녕하세요."

뒤이어 등장한 도훈의 모습에 민주가 당황해 말이 헛나오고 말았다. 민주가 말실수를 덮기 위해 주절거렸다.

"오늘의 주인공인 도훈학생도!"

"네?"

"공식적인 회장 첫 행사니까 말이야."

"아, 네. 근데 벌써 끝내신 거에요? 저희가 준비하려고 왔는데."

"아니야 아니야. 시간 난 김에 한솔샘이랑 같이 했어."

민주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자 한솔이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희한하네. 민주샘은 도훈 학생만 보면 왠지 저자세가 되는 것 같단 말이지?'

평소 민주는 학부생들 앞에선 늘 카리스마를 내뿜었다.

자과 출신의 선배기도 하고, 학창 시절부터 원체 잘나갔기 때문에 학생들은 오히려 민주를 어려워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도훈 앞에서만 유독 기를 못 펴는 것 같은 느낌에 한솔은 의구심을 품었다.

'확실히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좀 더 일찍 와서 도와드렸어야 했는데···. 마지막 수업이 늦게 끝나가지고요."

"괜찮아. 어차피 내가 진행하는 행산데."

한편 민주를 바라보는 영철은 감탄의 눈빛으로 넋이 나가있었다.

'오, 역시 조교샘의 블랙엔 화이트 오피스룩! 진짜 애들하곤 비교도 안 되는 성숙미 뿜뿜이란 말이지.'

오늘 민주는 상당히 꾸미고 나온 차림새였다. 늘 트렌디한 패션을 선보이지만, 오늘은 정말이지 대기업 비서같은 완벽한 모습이었다.

'그래. 1학년 후배들이 아무리 잘나봐야 막상 민주샘 앞에 비비면 상대도 안된단 말이지?'

"선생님. 저희가 뭘 하면 될까요? 말씀만 하세요."

"괜찮아. 우리끼리 거의 다 마무리했어. 사무실에서 차라도 한 잔 마실래?"

"앗, 완전 감사죠."

영철은 민주가 자신에게 말하는 줄 알고 입이 귀에 걸리게 웃었다.

네 사람은 다시 학과사무실로 돌아갔다. 한솔이 투덜거리며 커피를 타는 사이 민주와 영철, 그리고 도훈이 테이블에 앉았다.

"영철 학생은 복학한지 얼마 안 됐지?"

"네. 민간인 신분으로 바뀐지 3일째입니다."

"적응하기 힘들겠네."

"하하! 전혀요. 제가 또 별명이 카멜레온이걸랑요. 친구들이 보면 전역한 지 한참 된 줄 알아요. 보세요. 머리도 벌써 이만큼이나 길렀는데."

영철은 말년 때부터 머리를 적당히 길러서 왔기 때문에 헤어스타일만 봐선 예비역 같은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는 민주와 함께 있는 자리가 만족스러운지 계속 싱글벙글이었다.

"그렇구나. 도훈 학생은 어때?"

민주가 이번엔 도훈에게 물었다.

사실 그녀는 오직 도훈의 근황이 궁금할 뿐이었다. 오로지 영철만 혼자 헛물켜고 있을 뿐.

"아무래도 2학기 되니까 전공수업이 좀 많더라고요. 시간표도 좀 빡빡한 것 같고."

"그치? 거기에 회장일까지 하려니 힘들겠다."

"아니에요. 조교선생님께서 많이 도와주시니까요. 감사합니다."

"뭘, 당연히 해야하는 일인데."

도훈을 바라보는 민주의 눈에선 꿀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의 곁에 있기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에 살짝 홍조가 띄었다. 생기가 도는 민주의 모습에 영철은 더욱 열광했다.

'키아-. 봄처녀가 따로없네. 민주 샘은 진짜 보면 볼수록 매력적이란 말이지?'

"아참, 선생님. 저녁 회식 때 같이 오시죠?"

"응."

"제가 괜찮은 소고기 집으로 예약해놨거든요. 소고기 마음에 드세요?"

"좋지."

"영철이가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도훈이 겉치레를 하자 민주도 호응했다.

"도훈이는 영철이가 있어서 든든하겠다."

"차 드세요."

그때 한솔이 쟁반에 커피를 내왔다.

"감사합니다, 한솔 선생님."

"잘 먹겠습니다."

"한솔 샘은요?"

커피는 3잔 뿐이었다. 한솔이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

"음···, 전 시간이···."

개강총회는 오후 6시였기 때문에 보조인 한솔로서는 굳이 학교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었다. 민주가 깜빡했다는 듯 말했다.

"앗! 벌써 퇴근시간이었네? 미안해요. 오늘은 먼저 들어 가요."

"네, 선생님."

한솔이 짐을 챙겨 나가자 영철이 생글거리며 물었다.

"혹시 데이트 가시는 거 아닐까요?"

"누구? 한솔샘?"

"네. 급하게 나가시는 거 보니까 남자친구 만나러 가나 해서요."

"글쎄···. 남자친구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사실 영철은 한솔에 대해선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한솔의 외모는 평범 이하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녀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민주를 돋보이게 하는 배경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굳이 데이트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다음 질문을 위한 포석이었다.

"그렇구나···. 조교 선생님은 그럼 데이트 안 가세요?"

"나?"

"네. 당연히 있으시겠죠?"

영철은 오직 그것이 궁금할 뿐이었다.

물론 골키퍼 있다고 골을 안 넣을 것은 아니었지만.

민주가 무의식적으로 도훈을 쳐다보았다.

말없이 커피를 홀짝거리는 도훈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하, 난 아직."

"엇? 정말요? 전 당연히 있으실 줄 알았는데?"

영철이 호들갑을 떨었다. 마치 민주가 애인이 없다고 선 언하자 기쁨을 주체 못하는 모습이었다.

"말도 안돼요. 조교 선생님처럼 예쁘신 분이···."

"호호, 말만으로 고맙구나. 괜찮은 사람 있으면 영철이 네가 소개시켜 줄래?"

"앗, 정말요?"

영철은 민주와 사적으로 친해진 기분에 우쭐했다.

'안되면 저라도 데려가십쇼, 조교선생님!'

영철이 속으로 행복회로를 오지게 돌리는데 도훈이 입을 열었다.

"조교선생님은 눈이 높으실 것 같아요."

"내가?"

"네. 그래서 아직까지 솔로이신가 해서요."

민주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도훈이 마치 자신에게 문제를 내준 것 같았다.

눈이 낮다고 하면, 자신과 섹파 사이인 도훈을 무시하는 것 같았고, 그렇다고 높다고 말하면 너무 건방져 보일 것을 우려했다.

어떤 대답을 하든 난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곤경에 처한 민주를 위해 영철이 구원했다.

"형, 당연한 말씀을! 민주 샘 같은 분이 아무나 만나시겠어요?"

"그런가?"

"아니야. 뭘 또 그렇게까지···. 하, 갑자기 덥네."

민주가 얼굴이 빨개지더니 급해서 손부채를 붙였다. 영철이 벌떡 일어났다.

"엇, 에어컨 온도 좀 낮출까요?"

영철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후다닥 에어컨 조절기로 달려 갔다. 사각이 생긴 틈을 타 도훈이 테이블 위에서 민주의 손을 덥썩 움켜쥐었다..

"솔로라고?"

도훈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민주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기억해. 넌 내 좆집이라는 거."

"···네 주인님."

"선생님! 온도 더 낮출까요?"

"어, 아, 아니야. 괜찮아."

영철이 다시 돌아오자 민주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말했다.

"영철이는 무척 자상하구나."

"하핫, 제가 좀 매너남으로 유명하죠."

영철은 방금 둘 사이에 무슨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지 연신 헤벌쭉거렸다. 대강 눈치를 보니 도훈과 민주는 적당히 거리를 둔 사이 같았다. 학생과 조교 이상의 관계로는 보이지 않았다.

'좋아. 민주샘은 도훈이형이랑은 별로 안 친한가 보구나.

별로 말도 안 하는 걸 보면. 하긴 뭐 둘이 친할만한 사이도 아니긴 하지.'

영철은 왕희준에게서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도훈이 군대가기 전 사귀었던 선배 송지희와 강민주가 서로 절친이라는 것.

즉, 절친의 전남친이었던 도훈과 민주의 관계가 껄끄러울 수 밖에없다는 소리였다.

'오히려 과거가 없다는 점에선 내가 유리하지.'

민주가 4학년일 때 영철은 입학도 하지 않았다. 또한 영철이 개차반으로 새내기를 보낼 때도 민주는 조교가 아니었다. 즉, 둘은 전혀 접점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게 새로웠다.

'흐흐, 확실히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겠어. 민주 샘이 연하를 딱히 싫어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그때 민주가 말했다.

"아참, 한솔샘한테 뭐 부탁할 거 있었는데 퇴근해 버렸네."

"네? 뭔데요?"

"오늘 개강총회 때 나눠줄 유인물을 학교 복사실에 맡겨 놨거든. 그거 찾아달라고 부탁했는데, 깜빡했나봐. 어쩌지?"

민주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하자 그녀에게 점수를 따고 싶어하는 영철이 다시 벌떡 일어났다. 종을 치면 꼬리를 살랑거리는 강아지 같은 반응속도였다.

"제가 찾아올게요!"

"영철이 네가?"

"네! 복사실 얼마 안 멀잖아요. 후딱 갔다 올게요."

"아니야. 그럼 미안해서···. 내가 갈게."

민주가 한사코 거절했지만, 영철은 막무가내였다.

"에이, 뭐 그런 일을 조교선생님이 직접 하세요. 제가 금방 다녀올게요. 사범대 1관 복사실 맞죠?"

"응, 맞는데···."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영철이 쪼르르 달려나갔다.

민주는 알아서 사라져주는 영철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아이참, 안 그래도 되는데···."

영철마저 학과사무실을 나가자 민주는 마침내 도훈과 단둘이 남았다. 그때까지 별말이 없던 도훈은 소파에 앉아 다리를 양옆으로 쩍 벌렸다.

"솜씨가 제법인데? 아주 노예가 하나 생기셨구만?"

"주인님하고 단둘이 있고 싶어서요."

"풋. 뭐해? 안 들어오고?"

도훈이 건방지게 손가락을 까딱 거렸다.

민주가 군말 없이 도훈의 가랑이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스타킹이 바닥에 쓸리는데도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개강총회 준비 잘해 놨더라?"

"네, 주인님 신경 쓰지 않도록 미리 해놨어요."

"잘했어. 잘했으니 상을 줘야지."

도훈이 지퍼를 끌어 내렸다.

찌익- 하고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에 민주가 침을 꿀꺽 삼켯다.

"감사해요 주인님. 민주 너무 기뻐요."

"참, 내가 아침에 운동하고 급하게 샤워를 못했거든? 상관없지?"

벌어진 지퍼 사이로 비릿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사타구니에 찬 땀이 특유의 쩐내와 섞여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민주는 거리낌없이 팬티 사이에서 대물을 천천히 꺼냈다.

"그럼요. 제가 깨끗이 씻겨드릴게요."

도훈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난 너 이래서 좋더라."

"감사해요, 주인님."

냄새가 풀풀 나는 잦이를 민주가 한입에 물었다.

도훈은 강아치처럼 말을 잘 듣는 민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착해. 착한 강아지 같아. 맛있게 먹어."

"웁웁-"

민주가 씻지도 않은 잦이를 입에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도훈의 꼬카인에 심취한 듯 민주가 게걸스럽게 잦이를 빨아댔다. 그녀는 어느때보다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마치 이 순간만 기다린 사람처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