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1.. 2학년2학기-76-
* * *
"네?"
"히히, 저 공대 여자잖아요. 기계에 관심 많거든요?"
미리가 부쩍 친근감을 표했다.
왠지 가식적이라고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아니다.
그녀의 정보창을 보고 나선 확신이 든다.
미리는 지금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했다.
[왜 저러는 걸까요?]
'냄새를 맡은 거지.'
[주인님 땀 냄새요? 페로몬이라는 게 그렇게 모두에게 다 유쾌한 자극을 주는 것은 아닐 텐데요.]
'그게 아니라 미리가 잘하는 짓 있잖아.'
[무임승차요?]
'그래. 호구 냄새를 강하게 느낀 거지. 저런 애들이 또 눈치는 빨라서 빌붙을 사람을 귀신같이 알아보거든.'
[근데 갑자기요?]
'갑자기가 아니지. 단서를 찾은 거야. 가령 내가 아까 보여주었던 영어 독해 실력, 만능 만년필로 그려낸 스케치 솜씨, 그 밖에 훤칠한 외모나 여유 넘치는 태도에서 기댈 구석을 캐치한거야. 이 남자라면 쓸만하겠다. 묻어 가자고.'
[캬! 역시 주인님의 분석 능력은···.]
로시가 감탄했지만, 오롯이 내 능력은 아니다.
나의 가장 첫 번째 스킬임과 동시에, 가장 사기적인 스킬.
바로 정보창 덕분이다.
사람 맘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 정보창 앞에, 공략 못 할 여자는 없다. 아참, 미리가 지금은 공략 대상이니까 일부러라도 잘 보여야 하려나?
"아하, 이거 그냥 짝퉁이에요."
"짝퉁이요? 사과 마크 언뜻 본 것 같은데?"
미리가 불쑥 손목을 잡아 채더니 스마트 워치를 훑었다.
나는 그녀의 적극적인 스킨쉽에 속으로 감탄과 동시에 집요함을 느꼈다.
'대단하군.'
[네?]
'완전 고의잖아. 일부러 손목 잡은 거라고. 시계 구경하는 척.'
[역시! 무임 승차의 여왕.]
'남자들은 대체로 미인의 스킨십에 약해. 물론 나에겐 어림 없는 짓이겠지만.'
"되게 좋아 보이는데요? 시계 줄도 스테인리스가 아니라 특수 금속 같고요."
공대생이라 그런지 제법 눈썰미는 있었다.
물론 곧이곧대로 얘기할 생각은 없었다.
"되게 그럴 듯하죠? 해외 직구로 싸게 산 거예요. 겉보기는 멀쩡해보이는 데 시계랑 알람 기능 밖에 없는 모델이에요. 중국산일거예요 아마."
"아하···."
[주인님. 아무리 그래도 천상계 과학력의 집대성이라는 인공지능 기계를···.]
'미안. 어쩔 수 없잖아. 지구 밖 물건이라고 소개할 수도 없고. 어쨌든 겉보기엔 그냥 평범한 스마트워치니까.'
"근데 저보다 오빠 아니세요? 말 편하게 하세요."
"그럴까? 사실 난 예비역이야. 올해 23 ."
"어? 나돈데?"
경영대 범우가 맞장구를 쳤다.
통성명을 하고 보니 여자애들은 둘다 스물 한 살로 동갑이었고, 나와 범우도 스물 셋으로 동갑이었다.
"이야, 우리 조는 아귀가 딱딱 맞네."
"오빠들 서로 말 편하게 하세요. 저희들 끼리도 말 놓을 게요."
"그래. 그게 좋겠다."
"영어 회화 조 정말 잘 만난 거 같아요. 이거 완전 복불복이라던데."
"무슨 소리야?"
미리가 뭔가 들은 게 있는 것처럼 설명했다.
"이게 학년만 같고 완전 랜덤이잖아요. 선배들이 그러는데 조원 잘못 걸리면 실제로 Fail이 나오기도 한다더라고요."
"이걸 낙제를 준다고? 졸업 필수 과목을?"
"그러니까요. 회화 강사마다 조금씩은 다른데 전반적으로 깐깐하대요. 조별 과제도 많이 내주고."
"하아-. 1학점 짜리라고 쉽게 봤더니, 피곤하게 됐네."
가만히 지켜보니 미리가 대화를 주도하고 범우가 보조하는 흐름이었다. 둘과 달리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오신 아는 그 와중에도 혼자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순간 뭔가 촉이 왔다.
'저거 그거 아니냐?'
[뭐요?]
'그 랜덤 채팅 어플이라는.'
[아아, 오신아 양의 비밀스러운 취미활동이요?]
'왠지 그런 것 같지? 무슨 어플인지만 확인해 볼까?'
[무슨 수로요? 감출게 뻔한데.]
'다 생각이 있어.'
"맞다. 말 나온 김에 우리 단톡방이나 만들까?"
"단톡방?"
"좋은 생각이에요. 오빤 번호가 어떻게 돼요?"
미리가 적극적으로 나에게 물었다. 관심을 보이는 척하지만, 이성적인 호기심보다는 어떻게 하면 호감이 있는 척 위장해 무임 승차하려는 의도로 읽혔다. 하여간 뻔뻔하긴.
"그냥 한 명이 다 초대하는게 빠르지 않을까? 다들 나한테 번호 알려줘 봐."
"맞네. 그게 좋겠다. 공일공···."
다들 번호를 말하자 내가 바로 번호를 저장해 깨톡의 친구 목록을 새로 고쳤다. 잠시 후 친구 목록에 영어 회화 수업 조원들의 이름이 하나씩 떠올랐다.
나는 미리와 범우를 먼저 초대한 후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 신아는 왜 안 뜨지?"
"저요? 번호 잘못 저장하신 거 아니에요?"
"공일공··· 이거 네 번호 아냐?"
"맞는데?"
"이상하네. 그냥 아이디로 초대해 볼게. 아이디 알려줘봐."
"아이디요? 그런 것도 있었어요? 저 모르는데."
"음, 그게···. 잠깐만 폰 줘볼래?"
아이디를 못 찾아 헤매는 신아의 폰을 받아들고 아이디를 찾는 척했다. 신아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내 손에 들린 자기 폰을 빤히 쳐다보았다. 뭔가 감추는 게 역력한 모습이었다.
[저렇게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하는데 어떻게 하시려고요?]
'다 방법이 있지.'
[무슨 방법요?]
'물건에 담긴 기억을 읽는 능력.'
[설마 싸이코메트리!]
'빙고. 자주 폰 채팅을 즐기는 신아라면 여기에 강렬한 기억이 남아 있을 거야.'
스킬을 사용하자 폰과 얽힌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찰나의 순간이 영겁처럼 느껴질 만큼 강렬한 기억이었다.
"찾았다. sexycow? 이게 네 아이디구나?"
"앗. 그, 그러네. 그거 그냥 아무 생각없이 적은 거예요."
신아는 자신의 은밀한 취향을 들킬까 봐 얼굴이 빨개졌다.
딱 봐도 커다란 젖가슴을 젖소에 빗댄 닉네임이었다.
'케이트 업튼 좋아하시네? 섹시카우가 딱이구만.'
[다 확인 하셨습니까?]
'어. 생각 보다 심한데?'
신아의 폰에 담긴 음란한 기록은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 * *
오신아는 중학 시절부터 랜덤 채팅이라 불리는 핸드폰 어플에 푹 빠졌다.
커다란 가슴 때문에 남학생들의 놀림을 받곤 했던 신아는, 신체에 대한 콤플렉스로 소심한 성격을 갖게 되었고 오프라인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것보다, 온라인으로 익명의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걸 더 좋아하게 되었다.
물론 신아가 처음부터 음란 채팅을 즐겼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그녀도 순수하게 대화만으로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데 매력을 느꼈고, 남자들이 괜히 야한 소리를 지껄이거나 변태 같은 행동을 하면 곧바로 방을 나가버리곤 했다.
그때까진 신아도 순수한 중학생일 뿐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방학이라 늦게 자게 된 신아가 새벽 늦게까지 랜덤 채팅을 즐기는데, 본인은 대학생이라고 밝힌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대학생은 굉장히 매너있고 유머스러운 말투로 신아를 매료시켰다. 점잖으면서도 위트가 있었고, 동시에 또래에겐 없는 자상함과 매너가 몸에 배어 있었다.
점점 대학생 오빠에게 빠져든 신아는 몇 날 며칠이고 그와 채팅을 즐겼다. 결국 나중엔 16살이라고 솔직히 나이를 밝히자 대학생 오빠는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면서 다 이해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남자는 점점 본색을 드러냈다. 수위를 넘는 야한 농담을 뻔뻔하게 내뱉는가 하면, 신아에게 사진이 있냐면서 먼저 요구를 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변태인 줄 알았다면 대화를 시작도 안 했겠지만, 그땐 이미 어린 마음에 홀라당 빠져버린 신아는 그가 불편해 할까 봐 싫은 소리도 못하고 다 받아주고 말았다.
낯설었던 야한 단어들이 점점 익숙해지고, 신아도 점점 자극을 받는 날이 많아졌다. 이상하게 대학생 오빠와 야한 얘기를 하고 나면 가랑이 사이가 간질간질하면서 젖기 시작했다.
신아가 엉겹결에 그 사실을 밝히자 대학생 오빠가 인증을 요구했다. 신아는 몹시 부끄러웠으나 어차피 얼굴도 모르는 사인데 어쩌겠냐는 마음으로 그에게 야한 사진을 찍어 전송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3인 신아는 그때 이미 D컵에 육박했기 때문에 대학생은 갈수록 그녀의 사진에 집착했다. 때로는 단순한 정면 사진이 아니라 야한 포즈를 요구한 적도 많았다.
장난으로 시작했던 랜덤 채팅은 점점 수위를 넘어갔고, 신아는 나중에 대학생에게 자위하는 영상까지 보내고 만다.
둘 사이의 음란한 대화는 3개월여를 이어졌고, 대학생의 군입대를 마지막으로 흐지부지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 스스로 숨겨진 욕망을 깨달은 신아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랜덤 채팅에 빠져들었다.
남자들 성기사진을 요구하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오히려 얼굴도 모르는 낯선 남자들에게 홀딱 벗은 자신의 사진을 드러내면서 강한 쾌감을 느꼈다.
친구들은 젖소 같다고 놀렸지만, 채팅에서 만나는 대부 분은 자신의 큰 가슴 사진에 열광했다. 신아는 점점 슴부심을 갖게 되었고, 더이상 그녀의 커다란 가슴은 부끄러운 콤플렉스가 아니었다. 오히려 온라인에선 하나의 권력처럼 작동했다.
그러던 신아는 고등학교가 끝날 무렵, 용기를 내 오프까지 도전했다. 맨날 음란한 채팅을 주고 받던 상대와 직접 만난 신아는 그날 바로 아다를 뗐고, 이후부턴 원나잇처럼 채팅으로 남자를 만나는 일에도 재미를 들리고 말았다.
때론 괜찮은 사람도 있었고, 때론 사진과 전혀 다른 사내가 나온 적도 있었지만 신아는 그것을 일종의 복권 긁기와 비슷한 게임처럼 여겼다.
즉, 로또를 사고 당첨을 기다리는 순간이 가장 행복한 것처럼 상대를 떠올리며 음란한 상상을 하는 순간 자체를 즐기게 된 것이다. 오히려 들쑥날쑥 사람이 바뀌는 것에 신아는 더 강한 중독성을 느꼈다.
비정상적으로 남자를 만나다 보니 신아는 대학에 와서 정상적인 연애를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욕망은 어마어마한데, 또래의 남자들은 너무나 유치하고 순진하게 느껴졌다.
가끔 그녀에게 고백하는 남자들도 있었지만, 신아는 미안하다는 말로 거절했다. 어차피 그녀에게 남자란 늘 차고 넘쳤다.
신아는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씩 낯선 남자를 만나러 다녔다. 물론 누구도 알 수 없는 그녀의 은밀한 사생활이었다.
* * *
'이렇더라니까.'
[정말 사람 속은 알 수가 없군요.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 는데···. 그런 짓을 하고 다녔다니.]
'뭐, 자기 몸뚱이 맘대로 굴리는 거야 자유긴 한데. 알고 나니 좀 달라보이긴 하네.'
도훈은 음탕하기 짝이 없는 신아에게 흥미를 느꼈지만, 정작 미션이 걸린 사람은 처녀인 윤미리였다.
"자 그럼 단톡방 초대도 끝났으니까···."
어느새 조별끼리 친해진 학생들이 목소리를 높여 떠들고 있는데 강사인 제니퍼가 말했다.
"역시 같은 또래들이라 금방 친해지는군요. 기대 이상이에요."
제니퍼는 환하게 웃더니 마지막 과제를 시켰다.
"이제 조별로 이름만 정하면 오늘 수업은 끝이에요. 조원끼리 합심해서 멋진 조이름을 정해주세요."
제니퍼의 말이 끝나자 범우가 말했다.
"음, 뭘로 하지?"
"이것도 닉네임처럼 영어로 지어야 돼요?"
"그렇지 않을까? 맞다. 다들 혈액형 뭐야?"
"혈액형은 왜요?"
"일단 말해봐."
"전 B요."
"난 o형."
"나도 o형. 신아야 넌?"
"전···F?"
"엥? 그런 혈액형도 있어?"
"농담이에요 농담. A요."
신아는 가끔씩 이해못할 농담을 던지곤 했는데, 도훈만 그녀의 음탕한 의도를 캐치했다.
'대담하네. 가슴사이즈 밝힌 거지?'
[F컵이면 엄청난 거 아닙니까?]
'크긴 크잖아. 물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것 같긴 해.
생각보다 허리는 늘씬할지도.'
혈액형을 종합한 범우가 말했다.
"그럼 우린 ABO2 어때?"
"에이비오투요?"
"어. 혈액형 따서."
"별론데."
"너무 구식 아니에요?"
"그, 그런가?"
"도훈 오빠는 뭐 좋은 생각 없어요?"
"나?"
갑자기 질문을 받은 도훈은 엉겹결에 대답했다.
"트애니원, 트애니쓰리."
"아! 우리 나이요?"
"응, 여자들은 스물하나. 남자들은 스물 셋. 괜찮지 않아? 숫자로 쓰기도 쉽고."
"2123! 좋아요."
도훈의 의견에 미리는 무조건 찬성했다. 신아도 고개를 끄덕였는데 오로지 범우만 반발했다.
"아니, 내거랑 무슨 차이가···."
"이게 더 세련됐잖아요. 혈액형은 좀 아닌 듯."
"저도 뭐 숫자가 괜찮은 것 같아요. 단순하면서 의미도 있고."
"그럼 우리 조는 2123으로 하죠."
"좋네요."
조별 이름까지 정하자 제니퍼가 다시 말했다.
"조별 이름은 다 정했나요? 정한 조는 앞으로 나와서 조별 이름하고 조장 이름 적어놓고 가세요. 아, 연락처도. 앞으로 과제는 조장을 통해 전달하도록 할게요."
제니퍼의 말에 다들 서로를 쳐다보았다.
조장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해본 것.
미리가 곧바로 도훈을 추천했다.
"전 도훈오빠가 했으면 좋겠어요."
"나?"
"네. 오빠가 잘하실 것 같아서요. 신아 너는 어때?"
"나도 뭐. 찬성."
"아, 아니 나는 말도 안 했는데···."
범우는 괜히 도훈에게 밀리는 것 같아 점점 열등감에 휩싸였다. 평소 같으면 조장같은건 귀찮아서 질색했을 테지만, 미션이 걸린 도훈으로서는 받는 게 유리했다.
"알았어. 그럼 내가 조장할게."
"아싸. 잘해봐요 매직존슨 오빠."
"풉-. 매직."
신아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혼자 빵 터졌다.
도훈에게 완벽히 밀린 범우는 그를 고깝게 쳐다보았고, 미션이 걸린 도훈으로서는 다른 사람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곧바로 제니퍼에게 가서 조이름과 연락처를 적었다.
그때 제니퍼가 다가와 도훈에게 말을 걸었다.
"오우, 핸섬 가이. 조장으로 뽑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