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5.. 2학년2학기-70-
도훈은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를 보는 것 같았다.
어찌 보면 한복 같고 또 달리 보면 중국 전통 복장처럼 보이는 의복에 한 손엔 공작의 깃으로 만든 화려한 부채를 들고 있었다.
'으잉? 천천히 떨어지잖아?'
선녀의 미모에 얼이 빠져있던 도훈은 순간 선녀에게 적용된 중력이 기이하게 작동한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분명 날개가 없는데 선녀는 중력을 무시하듯 사뿐하게 착지하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여신 강림이었다.
"우옷! 보, 보인다!"
도훈이 흥분한 채 선녀의 치마폭 아래로 뛰어들었다. 한복 치마처럼 펑퍼짐하게 퍼진 치마 밑에서 도훈이 고개를 쳐들자 선녀가 당황하며 치마폭을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꺄악! 미친 변태 새끼!"
"얼레? 말도 하네? NPC 아니었어?"
밑에 있는 도훈을 피해 멀리 떨어져 착지한 선녀가 말했다.
"절 몰라보시겠어요?"
"누군데 넌?"
도훈이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화들짝 놀란 듯 호들갑을 떨었다.
"설마 로시?"
"후훗-."
"미친!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로시가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입가를 살짝 가린 모습이 몹시나 섹시했다.
"왜요? 저한테 이길 자신이 없으신가요?"
"아니 자신이고 나발이고, 니가 내 상대가 되겠냐고. 야만 전사도 시원찮을 판에."
"주인님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군요."
"내가 뭘?"
"첫째. 이곳의 창조주이며 신은 주인님이지만, 저 또한 동등한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주인님의 인공지능으로서 말이죠."
"그래서?"
"둘째. 저는 주인님보다 천상 크래프트 모드 사용이 훨씬 익숙하다는 점입니다. 쉽게 말해 동기화율이 더 높습니다."
"엥?"
"제가 방금 중력을 조절하는 거 보셨죠?"
"아하, 그래서 늦게 떨어진 거야? 난 또 팬티 보라고 주인 배려한 줄."
"이이! 매사 그렇게 야한 생각만 하실 겁니까!"
선녀로 변한 로시가 갑자기 부채를 거칠게 휘둘렀다. 멀리서 부채를 휘두르는 동작을 예사로 보던 도훈은 순간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반짝이는 물체를 간파했다. 강화된 동체시력이 화살처럼 빠른 물체의 움직임을 캐치한 것이었다.
'암기?'
도훈은 본능적으로 걸음을 내딛으며 암기를 피했다.
푸부뷱!-
놀랍게도 도훈이 방금 전 서 있던 곳으로 뾰족한 대바늘 3개가 빠르게 지나치더니 대리석 바닥에 꽂혔다. 길이가 15cm는 족히 넘어 보이는 가는 은침이었다.
"뭐야? 미쳤어?"
"대련 상대 필요하시다면서요?"
"아니, 그렇다고 주인을 암살하려고 해? 내가 저걸 못 피했으면···. 얼래? 근데 나 어떻게 피한 거지?"
도훈은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생각해도 방금 전 급습을 피한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 생전 처음 보는 경로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암기의 투로를 벗어난 것이었다.
"방금 선보인 동작이 바로 무영보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위기의 순간에 반사적으로 발동하지요."
"호오-. 그러니까 일부러 무영보를 발동시키기 위해 나를 암습했다?"
"바로 맞췄습니다. 어때요? 제가 멍청한 NPC들 보단 훨씬 낫죠?"
도훈이 씩 웃었다.
"근데 왜 넌 선녀 형상이야? 때리기 미안하게."
"왜요? PK단엔 여성 플레이어가 없을 것 같나요?"
"아니 그건 아닌데···. 너 근데 말투가 좀 그렇다? 맨날극존칭 쓰던 애가 왜 갑자기 말을 편하게 하는데?"
"호호호. 일종의 연기라고 생각해 주시길."
로시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 모습이 몹시 교태로워 도훈은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씨발, 쟤는 근데 왜 저렇게 예쁘게 하고 나타난 거야?
확 따먹고 싶게.'
음흉한 생각이 든 도훈이 선녀로 변신한 로시에게 물었다.
"나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여기서 섹스도 가능?"
"···예?"
"아니, 치고 박고 때릴 수 있다는 말은 타격감이 있다는 거잖아. 오감 중 촉각이 지구랑 똑같이 작동한다면 섹스도 충분히 가능한 거 아니야? 내말이 맞지?"
"······."
로시가 할 말을 잃은 듯 한숨을 푹 쉬었다.
"발정 난 개새끼인 건 여전하군요. 지구에서나 가상에서나."
"뭐? 너 지금 말 다 했냐?"
"연기에 몰입하는 중입니다. 흥, 어디 자신 있으면 날 쓰러뜨려 보시던가?"
말하던 중 갑자기 톤이 변한 로시는 순간적으로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 순간 긴 머리가 하늘로 솟구치더니 반짝이는 은발로 변했다.
"배, 백발 마녀?"
"선녀라구욧!"
로시가 다시 한 번 부채를 휘둘렀다.
도훈이 암기를 우려해 안력을 돋워 집중했지만 이번엔 그대로 강풍이 몰려와 도훈을 날려버렸다.
"우엇!"
허리케인에 직격 당한 것처럼 어마아마한 풍속에 도훈도 피할 방법이 없었다. 허공으로 날아간 도훈은 뒤로 공중제비를 돌더니 가까스로 착지했다.
"뭐야 방금 기술은? 암기가 아니었어?"
"술법, 다른 말론 마법이라 불리는 스킬의 일종입니다."
"갑툭 마법은 반칙 아니냐?"
"PK단에 술법사가 없을 것 같습니까?"
"오호라. 그러니까 네가 PK 스킬까지 사용해 주시겠다?
"
"그렇습니다. 이젠 좀 상대할 마음이 생기셨나요?"
두 번이나 연속 공격을 당하자 도훈도 호승심이 일었다.
어차피 상대는 가상의 인물. 도훈이 설사 전력으로 때린다고 해도 딱히 윤리적 문제는 없었다. 일종의 게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나도 한 번 제대로 힘을 써볼까?"
도훈이 온 몸의 내공을 폭발시켰다.
평상시엔 눈치가 보여 자제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내공 운용법을 익힌 도훈이 두 주먹에 기운을 보내자, 놀랍게도 그의 주먹으로 푸른 불꽃의 형상이 피어 올랐다.
"어라? 이건 또 뭔데?"
"기운이 응축되어 가시영역에서 발현되는 것입니다. 생각보다 정순한 내공을 지니셨군요. 푸른 빛의 기운은 정순한 내공의 표식과도 같습니다."
"뭔지 모르지만 어쨌든 좋은 거라 이거지?"
도훈이 씩 웃더니 그대로 선녀로 변한 로시에게 달려들었다.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는 반응 속도였다.
'이것도 무영보인가?'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다는 각술이 발동되자 도훈의 스피드는 평소의 두 배 이상 빨라졌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도훈이 인정사정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걸렸다!'
손에 걸리는 느낌이 제대로 왔다. 순식간에 오른손 훅을 날린 도훈이 연속으로 복부를 가격했다.
"이 타!"
또다시 이어지는 3타!
둔탁한 타격감에 도훈이 순간 멈칫했다.
'설마 이거 맞았다고 죽는 건 아니겠지? 어쨌든 가상의 공간이니까.'
도훈이 망설이는 순간 그의 앞에서 선녀가 픽하고 쓰러졌다. 분명히 때릴 때는 사람의 살과 뼈를 때리는 묵직한 느낌이 있었는데, 쓰러진 로시를 다시 보니 선녀 옷을 걸친 허수아비가 아닌가?
"으잉? 이게 뭐야?"
"호호호! 혼자서 잘 노시는군요. 두 눈 똑바로 뜨십시오.
"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도훈이 휙 고개를 돌리자 저만치서 로시가 부채를 살랑거리고 있었다. 도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뭐야? 방금 주먹에 분명 맞는 느낌이 났는데?"
"분신술입니다. 주인님이 때리신 건 저로 착각한 허수아비구요."
"이건 사기야!"
"왜요? PK단에 현혹술사가 없을 것 같으신가요?"
말을 마친 로시가 갑자기 작정하고 분신술을 시도하는지 좌우에서 또 다른 로시가 불쑥 나타났다. 순식간에 3명으로 불어난 선녀를 보는 도훈이 아연실색했다.
"뭐, 뭐야?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어느 게 진짜게요?"
"와씨, 이건 무공 배웠다고 상대할 수준이 아닌데?"
도훈은 혼란에 빠졌다. 주먹으로 소도 때려 죽일만큼 강해졌지만, 정작 본체를 맞출 방법이 없었던 것. 아무리 강력한 총을 들어도 맞추지 못하면 없는 것과 같았다.
로시가 가르침을 주듯 말했다.
"주인님. 단순히 육체적 힘이 강해졌다고 PK단을 대적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저처럼 법술을 쓰는 능력자도 얼마든···."
히죽-.
로시가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도훈이 코 밑을 손가락으로 비비며 웃고 있었다.
"지금 웃으시는 건가요?"
"분신까지 합쳐서, 포썸 가능?"
"이, 이런 미친!"
"오른쪽 네 년이구나!"
도훈은 나머지 분신을 팽개치고 오른 쪽 선녀에게 벼락처럼 달려들었다. 말과 행동을 똑같이 하던 로시의 분신 중 갑자기 혼자 흥분해 욕설을 내뱉은 것이 단서였다.
'흐흐. 흥분하면 분신술이 흔들걸 줄 알았지.'
이번에는 로시도 피하기 힘들었는지 부채를 이용해 도훈의 주먹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퍽! 퍽!!
무쇠 같은 주먹이 연달아 쏟아졌지만, 로시는 부채를 요리조리 움직여 모두 거둬냈다. 하지만 점점 안색이 파리해지는 게 타격을 입고 있는 눈치였다. 도훈은 곧바로 확신을 얻었다.
'그래. 파워가 갈수록 강해지니까 막아도 충격이 쌓이는 거야. 이대로면 5번째부턴 유효타가 나오겠는데?'
"자, 잠시만요 주인님!"
"이제와서? 7단 콤보로 가버렷!"
3타 4타를 겨우 막아내던 로시가 갑자기 부채를 촤르륵펼치더니 주문을 읊조렸다.
"이 마녀, 또 무슨 사술을!"
도훈은 아랑곳 않고 부채를 꿰뚫을 것처럼 주먹을 내질렀다.
실제로 주먹이 부채 살을 뚫고 들어가더니 로시의 가슴 팍에 닿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도훈이 비디오 화면이 정지한 것처럼 멈췄다. 단순히 마비가 걸린 게 아니라 모든 물리적 시간이 완전히 멈춰선 느낌이었다.
'이, 이건 또 뭔데?'
[잠시 시간 축을 변경했습니다.]
'잠깐. 이러는 게 어딨어? 내가 이겼잖아?'
유효타를 날리기 직전이라 도훈이 흥분해 따졌다.
[그게 아니라 주인님께 깜빡 설명을 못 드린 게 있습니다.]
'뭔데? 여기서 섹스 가능이라고?'
[···아, 아니 주인님 그게 아니고 천상 크래프트는 모드설치에도 비용이 들지만, 사용료도 실시간 과금 된다는···
.]
'억? 뭐?'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지구보다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무한정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어차피 실제 흘러간 시간만큼 철저하게 과금이 되고 있으니까요.]
'뭐, 뭔데? 지금 그럼 계속 포인트가 떨어지고 있다는 소리야?'
[네. 마침 남아있던 포인트가 모두 바닥났습니다. 바로 현실로 복귀합니다.]
'아, 아니! 거의 다 이겼는···.' 번쩍-.
도훈이 눈을 뜨자 익숙한 천장이었다.
원룸 한 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도훈이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아씨. 한참 느낌 좋았는데.'
[죄송합니다. 5,000 포인트 결제 후 남아있던 잔여 포인 트마저 모두 소진되고 말았습니다. 미리 말씀해 드렸어야 했는데···.]
'과금 비용이 얼마나 드는데?'
[시간당 100포인트입니다.]
'나 그럼 잔고가 100도 안됐다는 말이야?'
[네. 딱 5030포인트 남아있었거든요. 그것도 최근에 기적의 복리계산기로 이자가 붙어서 가까스로 넘긴 겁니다.]
'하아-. 잔고가 빵원이면 복리고 뭐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네?'
도훈이 아쉬움을 토로했다.
가상공간에서의 훈련은 분명히 엄청난 발견이었다.
하지만 실시간으로 떨어지는 포인트를 생각하면 돈 먹는 하마나 마찬가지였다.
[포인트는 다시 벌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갑자기 개털이 되고 나니 마음까지 빈곤해진 느낌이야.'
[주인님 현찰은 많으신데요?]
'현실의 돈을 포인트로 바꿀수도 없는데 무슨 소용이야.' 도훈이 한탄하더니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
로시 말대로 미션과 업적을 통해 포인트는 다시 벌 기회가 있었다.
'맞다. 근데 로시 너 왜 그 얼굴로 변한거야?'
[네?]
'아니. 내가 본 여자 중에서 가장 예쁘더라고.'
[후훗-. 당연히 주인님의 이상형에서 따왔으니까요.]
'그래? 근데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기분 탓일 겁니다. 아무튼 무영보 활용법은 충분히 익히셨죠?]
'응. 만족스러워.'
도훈이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옷이 흠뻑 젖어 있었다. 방바닥에 앉아 있는 사이 옷이 축축해질 정도로 땀을 흘린 것이었다.
'얼레? 날이 더웠나? 무슨 땀을 이렇게···.'
[가상의 공간이라도 심력의 사용은 똑같으니까요. 현실의 시간은 거의 흐르지 않았지만, 주인님은 짧은 순간 폭발적으로 두뇌를 과용하신 겁니다.]
'그러네. 육체가 피로한게 아니라 머리가 피곤해 진거구나.'
[맞습니다. 때문에 가상 공간에서 무한정 시간을 보내는 것은 현실에 상당한 무리를 줄 수 있습니다. 적당히 사용하셔야 합니다.]
'알겠어. 어차피 포인트도 없어서 당분간 입장도 못하는데. 일단 좀 씻어야 겠다.'
도훈은 젖은 옷을 벗어 던지고 그대로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거울로 벗은 몸을 보는데, 스스로도 놀랄 만큼 몸매가 멋지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때 불쑥 전공 수업 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맞다. 보디빌딩 대회. 나 그거 출전해볼까?'
[미스터 국성 선발대회요?]
'어. 거기 나가면 백퍼 우승할 것 같지 않아?'
도훈이 거울 앞에서 보디빌더의 포즈를 흉내냈다.
[충분히 가능해 보입니다.]
'그리고 색다른 것에 도전하면 미션을 받을 기회도 생길 거 아냐. 난 지금 간만에 미션이 고프다고.'
[포인트 버실려고요?]
'응. 그걸로 가상현실 쪽을 더 연구해 봐야겠어.'
[알겠습니다. 주인님의 뜻이 그러시다면요.]
도훈이 미지근한 물을 틀어 샤워를 시작했다.
그때 조용히 있던 로시가 속삭이듯 말했다.
'뭐라고? 방금 뭐라고 하지 않았어?'
평소와 달리 너무 가느다란 목소리였기에 샴푸를 하던 도훈이 눈을 감고 다시 물었다.
[···가능.]
로시가 뒤늦게 답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