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8.. 2학년2학기-63-
'도, 도훈 오빠다!'
목소리만 듣고도 아영은 심장이 벌렁거렸다.
'근데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사실 도훈은 내일 있을 집행부 회식을 부담스러워 하고 있었다. 이대로 아무 조치 없이 내일을 맞이했다간 뒤풀이에서 자신을 두고 사생결단이 벌어질 것을 우려한 것.
이에따라 도훈은 미리 약속을 잡는 방식을 택했다.
즉, 차후에도 자신을 만날 수 있다는 신뢰를 줌으로써 내일 자신을 두고 벌어질 쟁탈전을 미연에 차단하자는 계획이었다.
도훈은 하루에 한명씩 여자를 로테이션 하기로 했다. 월요일의 여자, 화요일의 여자 등 요일별로 8선녀를 돌아가며 만나기로한 것.
다만 8선녀는 여덟이고 요일은 일주일이었기 때문에 부득불 나연두는 세트로 묶을 수 밖에 없었다. 어차피 두 사람과는 주로 2:1로 하거나, 최소 하룻동안 번갈아가며 했기 때문에 무리가 없을것 같았다.
그렇게 가장 먼저 선택된 여자가 바로 아영이었다.
요일별로 여자들의 매칭을 끝낸 도훈은 어장관리어플에 뜨는 위치추적 기능으로 학내에 아직 남아있던 아영을 찾아간 것이었다.
"여기서 혼자 뭐해? 음악 듣고 있었어?"
"네? 네? 아, 잠시만요."
아영이 서둘러 이어폰을 끄자, 도훈이 다시 웃으며 물었다.
"혼자 뭐하고 있었냐고."
"아. 그, 그냥. 수업 끝나서 쉬고 있었어요."
아영은 감히 도훈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채 소곤거렸다. 처음 도훈을 만날 때만해도 당돌했던 태도에 비하면 무척 부끄러움이 많아진 모습이었다.
[아영양이 주인님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내가 봐도 그러네. 갑자기 왜 저러지?' 사실 아영은 도훈을 고깝게 보는 축이었다. 대책없는 바람둥이에 여자들을 노리개처럼 가지고 논다고 생각하며 한 때는 경멸했다.
하지만 막상 도훈을 겪고 나자 본인도 도훈에게 푹 빠지고 말았다.
나쁜 남자는 그저 나쁜 새끼의 다른 말이라는 생각으로 살았던 아영이지만, 정작 본인이 도훈과 같은 난봉꾼을 만나게 되자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된 것이었다.
특히 여름캠프 이후 DVD방과 야구장 데이트를 통해 도훈에 대한 감정을 확신하게 된 다음부터는 그에게 완전히 반했다. 평소 쿨하고 시크하다는 평가를 받은 그녀였지만,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좋아하게 되자 다른 여자들과 별반다를 게 없었다.
말도 조신조신하게 되고, 잘보이게 싶어서 화장도 하고 옷도 예쁘게 입는 등 천상 여자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그렇구나. 나도 수업 끝나고 이제 집에 가는 길이야."
"네."
"아영이 넌?"
"저도 이제 집에 가려고요."
"그래? 같이 갈까?"
"오빠 차 가지고 오시지 않았어요?"
아영의 집은 차를 타면 학교까지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시간을 아쉬워하는 아영에게 도훈이 말했다.
"오늘은 운동할 겸 걸어왔어. 가자, 바래다 줄게."
"아···. 괜히 저 때문에."
"아니야. 어차피 걸으면서 운동할 겸 가는 거라."
아영은 무척 기뻤다. 도보로는 최소 30분은 걸릴 거리였다. 그 시간동안 도훈과 함께 할 수 있다니,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고마워요."
두 사람은 캠퍼스를 나란히 걸었다. 아영은 도훈과 함께 교정을 걸으니 데이트를 하는 기분이었다.
"아까 밥먹을 땐 왜 얘기 별로 안했어?"
"제가 좀 낯가림이 심해서요. 모르는 선배들도 많고."
"하긴. 2학년 선배들은 아직 잘 모르지?"
"오빠 말고는 아는 사람 없어요."
1학기 내내 아웃사이더였던 아영은 체육과의 다른 선배들과 접점이 없었다. 그나마 여름 캠프 때 친해진 정음과, 우연히 야구장을 함께 간 영철 정도가 전부였다.
"그렇구나. 너도 이젠 집행부니까 과활동 자주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친해 질거야. 너무 부담갖지 말고."
"네."
아영은 도훈과 나란히 걷기만 해도 너무 좋았다. 섹스할 때와는 또 다른 설렘이 있었다.
다소 거리를 두고 걷던 두 사람은 교정을 나서자 좀 더 가까워 졌다. 정확히 말하면 아영이 용기를 내 도훈쪽으로한 걸음 다가갔다. 대학 내에선 혹시 아는 사람을 마주칠까 눈치가 보였는데, 밖으로 나오자 좀 더 과감해진 것이었다. 도훈도 가까이 붙는 아영이 싫지 않은지 곁을 내주었다.
"2학기 첫 수업은 어땠어?"
"좋았어요. 정음이랑 서현이랑 수업도 몇 개 맞췄거든요."
"아까 그래서 다 같이 학식 먹으러 왔구나?"
"네. 이젠 혼자 다니지 않으려고요."
아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도훈은 다른 의도를 읽었다.
'오늘따라 아영이 유독 적극적인 느낌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마치 주인님을 염두한 발언 같군요.]
'아영이 월요일의 여자였지?'
[네. 주인님 로테이션 계획에 따르면요. 근데 요일별로 나눈다는 발상은 어떻게 하신 겁니까?]
'팔선녀 하루 두탕은 도저히 무리겠더라고. 일정이 꼬일수도 있고, 누구는 일주일에 두세번 보고, 누구는 한 달에 만나면 형평성도 안 맞고. 중간에 미션 같은 거 해결하려면 여유도 있어야 하고.'
[그렇긴 하죠.]
'또 다른 부분도 있어.'
[어떤거요?]
'곰곰히 생각해보니까 내공심법을 익히기 전까지는 별도로 내공을 늘릴 방법이 마땅치 않잖아.'
[그렇겠죠?]
'근데 나에게도 내공을 늘릴 수 있는 스킬이 마침 있더라고.'
[음양보합술!]
'맞아. 효율도 좋아져서 섹스 한 번 하고 나면 생각보다 음기를 많이 흡수 할 수 있단 말이지. 근데, 반대로 생각하면 여자들은 섹스를 하면서 나에게 기를 뺏기는 거잖아.'
[아아, 그래서!]
'간격을 두고 돌아가면 음기의 손실은 최소화하면서 내공을 쌓기 좋을 것 같더라고. 일종의 지속가능한 내공증진 수단을 마련한 거지.'
[역시 주인님은 현명하십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는 가르지 않는다는 전략이군요.]
'무시하지마. 이제 IQ 100 넘는다고.'
[넵!]
"아영이는 평소에는 뭐하니?"
"저요?"
"응. 학교 끝나고 집에 가면."
"시즌 중에는 주로 야구 경기 봐요."
아영이는 야구에 관해서라면 열혈 팬이었다. 운동엔 별관심없던 그녀가 체육교육과를 굳이 고른 이유도 야구를 좋아한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선생은 되고 싶은데 딱히 좋아하는 과목이 없으니, 그나마 야구랑 관련이 있어 보이는 체육교사를 희망한 것.
"근데 야구 중계는 월요일은 쉬지 않아?"
"네, 맞아요. 주6일이니까."
"그럼 월요일엔 뭐해?"
"음 월요일은 딱히···."
도훈이 아영을 월요일의 여자로 낙점한 이유였다.
"할일 없으면 월요일에 오빠랑 운동이나 할래?"
"운동요?"
아영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체육교육과긴 하지만 운동에는 별로 흥미도 재능도 없던 아영에게는 신선한 제안이었다.
"응. 지금은 교양 위주로 듣겠지만, 2학년 올라오면 실기 수업이 많아지거든. 겸사겸사 대비도 할 겸."
체육교육과는 사범대긴 하지만 예체능 분야였기 때문에 임용시험에서도 실기시험이 있었다. 따라서 운동을 너무 못해서도 임용에 불리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익힐 필요가 있었다. 도훈은 바로 그점을 파고든 들었다.
"저번에 캠프 때 가서 보니까 센스가 좋아서 체력만 좀 더 보강하면 곧잘 운동 하겠더라고. 지금은 너무 근육이 없는 편이라."
"아···."
"어차피 나도 꾸준히 운동을 해야하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야. 마침 월요일은 야구 경기도 안하는 날이니까."
아영은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했지만, 이것이 어쩌면 도훈과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는 핑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근데 오빠 시간 괜찮으시겠어요?"
도훈은 학과내에서도 바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도훈이 자신에게 시간을 할애한다고 하니 아영으로선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음, 물론 매주는 안 될수도 있지. 갑자기 조모임이나 학교 행사가 잡힐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꾸준히 운동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서. 어때?"
"좋아요."
아영으로선 당연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일주일 중 야구 경기가 유일하게 없는 날. 어차피 해야 하는 운동이었고, 운동만으로 만남이 끝난다는 보장도 없었다.
남녀가 같이 붙어서 땀흘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좋은 감정을 갖고 발전할 가능성도 컸다.
"근데 어떤 운동을···."
"일단 기초 체력이 가장 중요해. 내가 보니까 아영이 너는 다른 동기들에 비해서 운동 경험이 많이 없는 편 같더라고."
"네, 맞아요. 저는 주로 보는 쪽을 선호해서."
"일단은 내가 기초체력 보강 위주로 플랜을 짜볼게."
"고마워요, 오빠."
"뭘. 이제 1년간 함께 할 집행분데."
아영은 도훈의 제안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언제나 외톨이였던 자신을 바깥 세상으로 끄집어 준 것도 도훈이었고, 자신의 인생에서 불필요하다고 여겼던 남자가 꼭 필요한 존재임을 각인시켜 준 것도 도훈이었다.
비록 바람기도 충만하고, 실제로 그가 섹파를 여럿 두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지만 아영은 자신을 챙겨주는 도훈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 오빠가 바람둥이라도 이젠 상관없어. 내가 노력하면 되니까.'
함께 걷던 아영이 조심스럽게 도훈의 손을 잡았다. 도훈역시 빼지 않고, 손을 꽉 잡아 주었다. 두근대는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었다. 손만 잡아도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오빠."
"응?"
"나 오빠 좋아하는 것 같아요."
도훈이 고개를 돌려 지긋한 눈빛으로 아영을 바라보았다.
"나 어떤 사람인 줄 알지 않아?"
"이젠 상관없어요."
"그렇구나."
도훈이 잡은 손을 깍지끼며 아영에게 말했다.
"나도 너 마음에 들어."
"정말로요?"
"응. 아닌 것 같아?"
아영은 입을 열려다 다시 다물었다.
'나 말고도 많잖아요.' 라는 말을 하려다 그것이 쓸데없는 사족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래. 도훈 오빠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 오빠를 억지로 바꿀 필욘 없어. 내가 더 좋아하면 언젠가 오빠도 내 진심을 알아줄 거니까.'
도훈을 겪은 아영은 그가 절대 한순간에 바뀔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바람같은 남자였고, 집착하면 할수록 오히려 멀어질거란 사실도.
따라서 아영은 도훈을 오랫동안 만나면서 지켜볼 생각이었다. 진심을 결국 통하기 마련이고, 자신이 정성을 다해 그를 따르면 아무리 나쁜 남자인 도훈이라도 결국엔 자신에게 올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물론 도훈이 아영의 마음을 꿰뚫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음, 아영이가 장기 공략을 선택했군.'
[장기 공략요?]
'가끔 그런 여자들이 있거든. 나쁜 남자를 굳이 고쳐쓰고 싶어하는 여자들. 언젠간 진심을 알아줄거라 믿으면서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저런. 상대를 잘못 짚었군요. 주인님은 그냥 나쁜 새낀데 말이죠.]
'뭐 인마? 내가 바람을 피우는 건 플레이의 숙명 때문이라고. 나도 양심은 있어.'
[양심은 있긴 있으시겠죠. 그게 깃털처럼 가벼워서 문제지.]
'암튼 아영이 제안을 받아들여서 다행이야. 바람둥인 줄 알면서도 끝까지 비밀을 지켜줄 타입이기도 하고.'
[주인님은 복 받으신 겁니다. 저런 미인이 주인님을 짝사랑 하는 게 가당키나 하는 일입니까?]
'매력이 철철 넘치는 것을 어찌할 순 없지.'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어느새 아영의 아파트 단지 앞이었다. 시간이 쏜살같이 간다는 말을 실감하며 아영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바래다 주셔서 고마워요, 오빠."
"뭘. 나도 어차피 운동삼아 걷는 건데. 부모님이랑 같이사나봐?"
"네."
"나는 자취해."
"네, 들었어요."
"조만간 이사가려고."
"이사요?"
"응. 집이 조금 비좁은 것 같아서. 운동기구도 들일 생각인데 나중에 근력운동 하게 되면 우리 집에서 같이 하면 되겠다."
"좋은 생각이에요, 오빠."
"그럼 조심히 들어가."
"저, 오빠."
"응?"
"한 번만 안아봐도 돼요?"
아영은 허락을 구한게 아니었다.
말을 마치자마자 덮치 듯 도훈을 포옹했다.
길거리 한 복판에서 미녀에게 안기는 도훈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부러운듯 쳐다봤다.
"아, 아영아."
포옹을 마친 아영이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미안해요. 아까부터 너무 참아가지고."
도훈을 진하게 포옹한 아영이 쑥스러운 듯 뒤로 물러섰다. 더 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욕심을 내면 좋았던 관계를 해칠까봐 겨우 자제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오빠."
"그래."
아영이 아파트로 돌아가자 도훈이 쑥쓰러운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거참, 아영이 때문에 꼴려버렸네."
아영이 만약 자취를 했다면 도훈도 참지 못했을 것 같았다.
"아무튼 아영이는 정리했으니 다음 여자를 찾아볼까?"
도훈은 다시 어장관리 어플을 통해 팔선녀의 동선을 파악했다.
마침 아영의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희주가 살고 있었다.
도훈은 곧바로 희주에게 전화했다.
"뭐하냐 양희주."
-오빠! 어쩐 일이세요. 전화를 다 주시고?
희주가 생글거리며 물었다.
전화상으로도 텐션이 느껴질 만큼 반기는 목소리였다.
"아침에 아쉽게 헤어지고 나니 오후 내내 생각나더라고."
-정말요? 나도 그랬어요.
"나와. 저녁이나 같이 먹게. 할 얘기도 있고."
-당장 나갈게요. 어디에요?
"너네 집 근처 커피숍에 가 있을게."
-네, 오빠 지금 나갈게요. 아참, 오빠.
"응?"
-노팬티로 갈건데 상관없으시죠?
"풉-. 얼른 나오기나 해."
통화를 끊은 도훈이 크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