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7.. 2학년2학기-62-
전직 창던지기선수 강창모는 현역 시절부터 내기를 무척 좋아했다. 처음 투척 종목에 입문하게 된 계기도, 초등학교 시절 운동을 배우던 같은 반 친구의 도발 때문이었다.
-야, 창모. 니가 그렇게 힘이 좋다며? 나랑 한번 시합 해볼래?
-시합? 좋아. 이기면 뭐 해줄 건데?
-까까 천원치 사줄게. 대신 지면 니가 사.
-좋아!
그날 창모는 자신이 투척 종목에 굉장히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고만장한 자식. 덩치 좀 있다고 까불기는. 오늘 첫 대면이니까 2학년 남학생들 기를 팍 꺾어 놔야겠어.’
강창모는 본래 중학교 2학년 때까지 포환던지기 선수였다.
하지만 고학년이 되면서 적성에 맞는 종목으로 찾았고, 이후 창던지기 선수로 전향한 것이었다.
"내가 지금 너랑 농담 따먹기할 군번이냐? 분명히 말해 두지. 여기 이도훈 학생이 내 기록을 넘으면, 이번 학기는 수업은 두 번 다시 안나와도 A+ 준다. 똑똑히 들었지?"
"와···."
"엄청 파격적인데?"
"근데 아무리 도훈이형이라도 선수출신을 어떻게 이겨?"
체육과 2학년 남학생들은 갑자기 벌어진 승부에 흥분해 서로 떠들었다. 하지만 결론은 강창모가 던진 15M 넘는 기록은 절대 못 깬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이건 힘들 듯."
"솔직히 반칙이지. 도훈이형은 포환 던져본적도 없을텐데."
창모는 말없이 포환을 집어드는 도훈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단."
"?"
"네가 지면 이번 학기 수업준비는 너 혼자서 다 하는 거다. 그 조건을 수락 못 할 거면 지금이라도 그만 둬."
"헐, 저건 에반데."
"오늘만 해도 일찍 온 애들이 체육 창고에서 안전 바인 더랑 포환 다 꺼내왔잖아. 이건 완전 억지야."
다들 도훈이 내기 조건을 수락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애초 강창모가 학점을 걸고 내기를 건 이유가 도훈이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거라는 계산이었다.
‘흐흐. 어떠냐? 슬슬 고민되기 시작하지? 어서 포기해 인마. 보기엔 쉬워 보여도 초심자가 한 번 보고 따라 할 수준은 절대 아니니까.’
쇠로 된 공을 만지작 거리던 도훈이 강창모에게 다시 되물었다.
"그러니까 제가 교수님 기록을 깨면 이번 학기 A+을 받고 지면 학기 끝날 때까지 수업 준비 혼자서 도맡아 하라는 말씀이시죠?"
"그래. 해 볼테냐?"
창모는 여전히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현역 때보다 못하지만 15M면 아직도 도민체전에서 우승할 수준이라고. 내가 운동을 뻘로 배운 줄 알아?’
고양시청에서 창던지기 선수로 활약하던 창모는 3년 전부터 대학 강사 쪽으로 진로를 틀었다. 비인기종목의 특성상 선수생명이 짧다 보니 지금이라도 교육계 쪽으로 발을 담그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선수를 은퇴한 뒤에도 창모는 꾸준히 몸 관리를 해왔고, 지금이라도 몇 달만 몸을 만들면 현역들과 겨뤄도 손색이 없다고 자부했다.
‘어서 포기해. 던지지 않고 그만두면 바보는 아닌 걸로 치마. 용기와 무모함은 전혀 다른 거니까.’
"알겠습니다. 한 번 해볼게요."
"진짜로?"
도훈의 내기 승낙에 지켜보던 체육과 2학년 들이 더 흥분했다.
"우아아! 도훈이형이 승부를 받았어!"
"역시 체육과 회장님!"
"여름 캠프때 성수형이랑 씨름으로 붙은 거 봤지? 힘이 장사라니까?"
지루하던 수업이 자존심 강한 두 천재의 대결로 갑자기 흥미진진해졌다. 그때 도훈이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 부었다.
"근데, 교수님도 다시 측정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처음에 살살 던지신 것 같은데요."
"···뭐?"
듣고 있던 창모는 어이가 없었다.
무리한 내기를 받아들이는 것도 그렇고, 선출인 자신에게 기회를 더 준다는 식으로 말하는 도훈이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 생각에는 그게 공평한 것 같습니다."
내기를 유난히 좋아하던 창모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보통 때라면 웃고 말겠지만, 도훈의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자 진짜로 콧대를 꺾어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이었다.
"공평한 거 좋아하는 구나. 좋아, 그럼 나도 진심으로 던져주지."
"네. 제가 투포환 경험이 없어서 한 번만 더 제대로 자세를 배우고 싶습니다."
"흥, 포환 이리내."
창모가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더니 오른팔을 붕붕 돌리기 시작했다. 과거 시합에 나갈 때 하던 루틴 그대로였다.
‘이 새끼가 진짜 보자보자하니까 사람을 아주 호구로 보는 구나? 혼쭐을 내주마.’
포환을 들고 서클안에 입장한 강창모가 이번엔 진심을 다해 힘을 끌어 모았다. 도훈은 창모의 준비자세를 안력을 돋아 훑었다.
‘완벽히 보이는군. 무릎을 굽힌 각도, 발가락 방향 위치까지.’
무공을 익히면서 깨우친 운동 능력으로 도훈은 순식간에 강창모의 자세를 습득했다. 눈으로 보기만 해도 10년을 익힌 사람처럼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었다.
"으라차!"
창모가 아까 선보인 오브라이언 투구법으로 힘차게 몸을 돌려 포환을 밀어냈다. 그의 자세는 교과서에 삽화로 실려도 될만큼 완벽했다. 심지어 어린 도훈의 도발로 열까지 받아있었기 때문에 현역 시절급 이상으로 무리해서 힘을 폭발시켰다.
"우아아아!"
"나, 날아간다!"
지켜보던 학생들은 강창모의 ‘전력투구’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쿵!
대포알이 떨어진 것처럼 땅이 깊게 패이며 포환이 낙하했다.
줄자로 잰 기록은 16 .9M
창모는 스스로도 살짝 놀랐다.
‘이 정도면 현역때랑 거의 차이 안나겠는데?’
"됐다. 네 차례다."
창모가 낙하지점에 기록푯말을 꽂더니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물러났다. 창모에게서 포환공을 인계받은 도훈은 아까 창모가 보여준 연속 동작으로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본 대로 똑같이 따라 하면 되겠지?’
[잠시만요 주인님!]
‘왜?’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뭔 소리야?’
[강창모 강사는 현역 선수 출신입니다.]
‘그래서?’
[전국체전까지 출전했던 선수의 기록을, 포환을 배운적도 없는 주인님이 단 번에 넘어선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당연히 개쪽팔리겠지.’
[그게 아니라 오늘의 결과로 주인님이 곤란해질 수 있다는 겁니다. 괜히 강창모가 주인님을 체육계 인사들에게 알리거나, 언론에 제보해 버리면 그땐 어떡하실려고요?]
‘흐음···.’
[PK단은 어디에도 없고,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그들은 어둠속에서 늘 플레이어를 감시합니다. 괜히 일 크게 벌리지 마시고 자중하십시오.]
‘그럼 나보고 매 수업 때마다 일찍 나와서 교구나 나르란 말이야? 그건 나도 싫어.’
[주인님!]
‘아니 막말로 A+은 어차피 실기 평가 봐서도 받을 수 있어. 뭘로 평가해도 1등할 자신 있으니까. 근데 이건 이미 학점을 떠난 자존심 문제야.’
[하아-. 그 자존심이 주인님을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
도훈은 로시의 간절한 조언에도 아랑곳않고 자세를 잡았다.
강창모가 시험을 보였던 준비 자세 그대로였다.
"오오! 도훈이형 이제 던지려나 봐!"
"근데 형 투포환 배웠었나? 자세가 완전 제대론데?"
"형 배구 특기 아니었어?"
"배구 분과긴 한데 배구는 아닐걸?"
"저 형은 대체 못하는 게 뭐야?"
창모도 가슴팍에 팔짱을 낀 채 흥미로운 눈으로 도훈의 자세를 지켜보았다.
‘음? 생각보다 자세가 좋은데? 건방지긴 해도 눈썰미는 제법 좋군.’
창모는 내기도 좋아하지만, 실력 있는 선수를 존중하는 스포츠인이었다. 이제 배우는 단계인 대학생이 해봐야 얼마나 하겠냐며 얕잡아 보던 그는, 도훈의 자세를 보는 순간 그의 태도가 근거 없는 자신감만은 아닐 거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포환은 절대 힘만으로 하는 게 아니야. 체격에 제법 잡혀 있다만, 초심자가 제대로 된 기록을 내려면 수만 번의 연습이 필요한 법.’
한참 웅크려 있던 도훈이 마침내 움직였다.
팽이처럼 몸을 돌리며 팔을 쭉 밀어내는 폼이 심상치 않았다.
"어엇!"
창모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완벽하잖아? 이 새끼 이거···.’
창모의 예상은 정확했다.
42도 각도로 날아간 도훈의 포환이 매서운 속도로 허공을 가로지른 것이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지켜보던 체육과 학생들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 뭐야?"
"우악! 날아간다!"
휘유유융- 쿵!!!
도훈이 던진 포환이 강창모보다 한 뼘 정도 거리를 두고 안착했다. 결과를 지켜본 학생들은 너나 할 것없이 기립하며 경악을 토했다.
"도훈이형 미쳤다!"
"와, 대박. 지금 교수님 기록 이긴 거지?"
"눈 뒀다 뭐해? 아까 푯말보다 공이 앞에 있잖아?"
강창모 역시 학생들의 반응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더욱 놀라고 있었는데, 준비부터 투척에 이르기까지 도훈의 자세가 너무나 퍼펙트 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기록조차 말도 되지 않았다.
‘저, 저게 초심자라고?’
포환 던지기 종목의 국내 기록은 18M. 해외까지 통 틀어도 23M였다. 하지만 초보자인 도훈이 처음 던진 공이 17M를 찍은 것이었다.
"···너, 너!"
도훈이 머쓱해하면서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 제가 졌습니다. 금 밟으면 파울맞죠?"
"으잉?"
내기에 정신이 팔려있던 창모는 그제야 도훈의 한 발이 서클을 밟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식 경기로 치면 기록이 인정되지 않는 파울이었다.
"역시 어렵네요. 한 수 배웠습니다 교수님."
도훈이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창모는 비록 승부는 졌지만 내기는 이긴 괴이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를 해야할 지 고민했다.
‘이, 이건 명백한 파울이긴 해. 하지만 만약 금을 안 밟았더라면···.’
"흠흠, 그래. 제법 잘 던졌지만, 파울은 파울이지."
"와, 아쉽다."
"도훈이형 진짜 잘 던졌는데."
"저 형은 진짜 괴물이라니까?"
승부가 마무리되자 구경하던 학생들도 아쉬움을 토로했다. 하지만 파울은 파울이었다.
"잠깐 휴식할테니 화장실 다녀와라. 그리고 이도훈 학생이랬나? 자넨 잠깐 나좀 보지."
"네."
창모는 혼란스러운 수업을 잠시 중단하고 도훈을 따로 구석으로 불렀다.
"너 포환 배운 거 왜 말 안했냐?"
"아···. 그게. 정식으로 배운 건 아니고, 초등학교 은사님이 수업 때 알려주셨습니다."
"초등학교 수업 때···. 음···. 비록 승부는 지긴 했지만, 훌륭한 자질을 갖춘 것 같구나. 혹시 선수 해볼 생각 없나?"
"제가요?"
"그래. 내가 창던지기 종목이긴 한데, 너 정도 자질이면 충분히 국내 신기록도 도전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혹시 체육 특기생인가?"
"아닙니다."
"음···. 그럼 따로 배우는 종목도 없겠군."
"배구부 후보입니다."
"배구만 하기엔 너무 아까운데···."
"아무튼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수업 시간에 핸드폰을 본 제 잘못입니다. 다시 사과드리겠습니다."
도훈이 재차 사과하자 창모도 쿨하게 받아주었다.
"아니야. 나도 필요이상으로 자넬 혼낸 것 같아서 미안하네. 그리고 내기는 없던 일로 하겠네."
"네? 아니 그래도···."
"학생 정도 실력이면 이번 학기는 보나마나 A+이야. 암튼 나중에라도 선수 생각이 있으면 연락 주게."
"네, 교수님."
강창모와 화해를 한 도훈은 화장실을 다녀온다며 잠시 자리를 비켰다.
[일부러 그러신 거죠?]
‘당연하지. 이겨도 문제고, 져도 쪽팔리니까.’
[주인님이 그런 기발한 수를 쓰실 줄이야.]
‘사실 내공 절반도 안 쓴 거야.’
[정말이십니까?]
‘전력으로 던졌다면 지금 기록의 배 이상은 날려 보냈을 걸. 힘 조절을 한다고 했는데, 운 좋게 국내 신기록은 안 넘겼네.’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괜히 저번 100미터처럼 기록 세웠다가 일만 커질 테니까.’
[잘하셨습니다. 강창모 교수가 주인님을 무척 좋게 본 것 같더군요.]
‘그러게. 완전 꽉막힌 사람은 아니라서 다행이야. 어쨌든 이번 학기 실기도 A+은 확정이구만.’ 도훈은 2학기 개강 첫날부터 교수에게 잘 보이게 돼서 기분이 무척 좋았다.
* * *
아영은 혼자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었다.
청순한 외모에 한 손엔 클리어파일을 든 그녀는 대학 모래에 나오는 여대생 모델을 연상시켰다. 지나가는 남학생들이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며 아영의 미모에 감탄했다.
"와, 엄청 예쁘다."
"말이라도 걸어 보던가?"
"미쳤냐? 보나마나 까일걸?"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아영의 미모는,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고고함이 느껴졌다. 헌팅도 급이 맞아야 시도할 수 있는 법인데, 지금의 아영의 풍기는 느낌은 모델급 포스였기 때문에 감히 누구도 말을 걸지 못했다.
아영은 핸드폰이 보물이라도 되는냥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아영은 다시 폰을 확인했다.
-박아영 : 오빠, 오늘 수업 끝나고 잠깐 뵐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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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보낸 메시지엔 아직도 숫자 ‘1’이 남아있었다.
아영이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수업이 안 끝나셨나? 첫날부터 오후내내 수입인가 보네.’
아영은 도훈의 답장을 기다리며 계속 벤치에 앉아있었다. 우연히 점심시간 학교 식당에서 마주친 도훈을 떠올리자 심장이 다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멋있어. 아니, 못 본 새 더 샤프해 진 것 같아.’
그녀는 도훈만 떠올리면 두근대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눈을 감아도 얼굴이 생각나고, 귀를 막아도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아영이 손에 핸드폰을 꼭 쥐고 앉아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아영이니? 여기서 혼자 뭐해?"
목소리만 듣고도 아영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