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6.. 2학년2학기-61-
[어떻게 되긴요. 잦되는 거죠.]
‘뭐 인마?’
[아니, 뻔히 예상되는 결과를 생각도 안 하고 계시면 어떻게 합니까? 주인님이 한 번씩 찔러본 여자들과, 개학하고 처음 만나는 자리잖습니까?]
‘흐음. 어쩔 수 없다고. 집행부 회식을 내가 소집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어쨌든 주인님이 우표 수집하듯 하나하나 끌어모았으니, 그 책임도 오롯이 주인님이 지셔야 된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학과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8선녀 회동이 계속 이어질텐데, 그땐 어떻게 감당하시려고요?]
‘하긴. 언젠간 해결해야 할 문제긴 하네.’ 1학기 때 8선녀를 공략할 땐 연두 나연 정도만 제외하면 대부분 1:1로 만났다. 각개 격파로 해치우다 보니 나중에 입막음만 잘하면 딱히 문제될 부분이 없었다. 하지만 이젠 학과의 대소사를 주관하는 집행부로 부딪히다 보니 1:다수의 만남이 잦을 게 뻔했다.
아직까지 8선녀 대부분은 나와 몰래 비밀 연애를 하고 있다고 여기거나, 혼자서만 섹파를 하고 있다고 오해할 것이다. 따라서 모임이 끝나고 나면 나를 따로 보기 위해 각자 움직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만에 하나 누가 폭탄 발언을 하는 날에는 주인님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8선녀 사이에 피튀기는 쟁탈전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질투와 오해로 호감도는 급락할 것이고, 학과 내에 쌓아온 주인님의 훌륭한 인품과 덕망도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될수도 있고요.]
‘헉. 그럼 진짜 개쓰레기 되는 건데.’
[그러니 어서 대책을 마련하셔야지요. 주인님께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내일 회식까지는 대략 하루 남짓한 시간 뿐.
그 안에 8선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앞으로 무슨 일이 펼쳐질지 장담할 수 없었다.
‘방법을 찾아봐야 겠군.’
"···도훈 오빠?"
"으, 응?"
"뒷풀이 계획 있냐고 여쭸는데···."
"아아, 그렇지?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근데 너무 늦지 않겠어? 저녁 먹고 나면."
"전 괜찮아요."
"저도 12시 전에만 들어가면 돼요."
"정음이는?"
"음, 식사만 마치고 돌아가면 애들이 섭섭해하지 않을까요?"
믿었던 정음마저 이번엔 내편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은 정음이야 말로 내일의 회식을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개학하고 처음 만나는 거니까···.
"그, 그런가? 암튼 2차 여부는 내일 식사 마치고 애들한테 의견을 묻고 결정하도록 하자."
"네, 선배."
일단은 대충 얼버무린 채 식사를 끝냈다. 오후에 바로 2학년 실기 수업이 이어졌기에, 점심만 후딱 먹고 1학년 여자애들과 헤어져야 했다.
"그럼 내일 뵐게요!"
"날 더운데 수업 잘 들으세요!"
꾸벅.
아영은 말은 않고 슬쩍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두 볼이 빨개진 것으로 보아, 딴에는 최선을 다해 감정표현을 한 모양이다.
[아영양은 말이 없군요.]
‘원래 말수가 별로 없는 애야.’
[주인님이랑만 있을 때는 많이 다르던데요?]
‘정음이처럼 자기가 편한 사람하고 있으면 말을 좀 하는 것 같더라고. 근데 오늘은 처음보는 애들도 옆에 있으니 입을 꾹 다문 것 같아.’
[낯가림이 심하군요.]
"와, 도훈이형 인기 진짜 많으시다."
"부러워요, 형."
함께 점심을 먹은 동생들이 나를 부러워했다. 하지만 정작 나는 내일 회식에 대한 걱정으로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뭐가 또?"
"1학년 여자애들이 형 엄청나게 따르던 대요?"
"아영이란 후배는 오늘 처음 봤는데 엄청 예쁘네요."
"못 봤냐? 저번 수영 캠프 때 왔었잖아."
"나 그때 집에 일 있어서 못 갔잖아."
"쟤도 대박이야. 나도 정음이가 우리과에서 제일 예쁜 줄 알았는데, 나란히 같이 있는 거 보니까 우열을 가리기 힘들더라고."
"안경 쓴 여자애는 서현이지? 와···. 진짜 걔 축복받았던데. 가슴이 막···."
누가 남자애들 아니랄까 봐 곧바로 여자 후배들 품평에 들어갔다. 다른 여자도 아니고, 8선녀에 대한 뒷말은 참기 힘들었다.
"야. 니들 적당히 해라. 요즘이 어떤 시댄데 여자애들 외모 품평이야? 지난 번 다른 학교애들 단톡방에서 그런 얘기 하다가 성희롱으로 징계받은 거 몰라?"
"아, 앗! 죄송합니다."
"저희는 그저 예쁘다고만···."
"그러니까. 그런 말이면 앞에서 대놓고 하라고. 뒤에서 몰래 쑥덕거리지 말고."
"네, 넵!"
"시정하겠습니다."
그래도 말귀를 알아듣는지 곧바로 태도를 고치는 후배들이었다.
운동장에 도착하니 포수 펜스와 비슷한 안전 바인더가 좌우로 설치되어 있었다. 현석이 그 모습을 보고 말헀다.
"아아, 2학기부터 투척 종목 배운다던데 그건가 봐요."
"투척이라고?"
"너 못 들었어? 투포환, 원반, 창, 해머 던지기 말이야."
"오잉? 투포환은 그렇다 치고 창이나 해머는 너무 한거아니냐?"
동구는 안전 바인더 앞으로 원뿔 형태로 그려진 라인을 보더니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잘라놓은 수박처럼 생긴 커다란 호에는 5M 간격으로 줄이 그어져 있었는데, 대략 간격을 보니 80M라인 까지 표시되어 있었다.
"아무리 체육교육과라도 이건 좀 아니지 않냐? 체중이나 체고 같은데 교사로 부임할 거 아니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을 것 같은데···."
2학년 학생들이 모인 곳에 도착하니 다들 동구와 비슷한 생각인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걸 진짜 배운다고?"
"완전 에바야. 커리큘럼 미친 듯."
"우릴 진정 체육인으로 만들 작정인가?"
다들 수업 내용과 난이도에 불만을 토로하는 데 나는 반대로 너무 기록이 잘 나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뿐이었다.
‘아···. 하필 투척 종목이라니.’
[주인님. 내공을 쓰시면 곤란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알긴 아는데 실기 수업 결과는 바로 평가에 반영된단 말이야. 너무 못 던져도 학점에 불리하다고.’
[아···.]
‘조절을 할 수 있을까 모르겠네.’
웅성거리는 가운데 수업이 시작되었다.
짙은 선글라스를 강사가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다. 2학년은 나 처음보지? 소싯적에 창던지기 종목전국체전 1위 했던 강창모라고 한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전국 체전 1위였다고?"
"와··· 등빨 좀 봐."
"조용, 조용. 이번 학기 실기는 투척 종목 위주로 배운다. 다 큰 성인들이고 나름 체육인들이니 알아서 잘 하겠지만, 투척 종목은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
"넵!"
"오늘은 투척 종목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투포환 던지기로 시작해 보겠다. 혹시 학창시절에 시대표나 도대표로 선수 나가본 사람있나?"
2학년 남학생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쉽게 나서지 못했다.
강교수가 허리에 손을 올리더니 한심 하다는 투로 말했다.
"니들 체육과 맞냐? 어떻게 대회 출전 해본 놈이 없어?
너 주종목이 뭐야?"
"검도입니다."
"너는?"
"수영 배웠습니다."
"허-. 육상 전공자 없냐?"
"저요."
"오, 그래. 육상 쪽이 투척도 곧 잘하지. 뭐였는데?"
"마라톤이요."
"에이씨, 단거리 출신 없어?"
그때 누군가 손을 번쩍 들었다.
1학기 때 나와 100M 달리기에서 완패했던 이지환이었다.
"100미터 좀 뛰었습니다."
"너 나와."
"네?"
"나오라고. 시범을 보여야 할 거 아냐?"
"아···."
지환이 머쓱해 하며 앞으로 나왔다. 강교수는 다짜고짜지환에게 묵직해 보이는 쇠공을 건냈다.
"뭐해? 안 받아?"
"교, 교수님. 저는 투포환은 한 번도 안 해봤는데요."
"어차피 배워야 하니까 일단 받으라고."
강 교수는 굉장히 터프한 타입으로 보였다. 아무래도 선출인데다, 2학년이 대부분 남학생들밖에 없으니 군대처럼 빡시게 굴리려는 모양이었다.
포환을 받은 지완이 무게에 놀라 휘청거렸다.
"잘 들어라. 성인용 포환의 무게는 약 7 .3Kg. 이것을 저기 보이는 원 안에서 최대한 멀리 던지는 경기지."
"넵."
"룰은 심플해. 하지만 잘 던지기는 무척 어렵다. 이제부터 이지환 학생이 시범으로 던져 보일거야."
"어, 어떻게 던져야 하는지···."
"그냥 던져 인마. 참고로 단거리 선수들이 투포환을 비교적 빨리 배우는 편이다. 순간적인 대쉬나 힘을 주는 근육이 단거리와 유사하거든."
"아아."
"지환이 잘해라!"
지환은 생전 처음 보는 투포환이 상당히 불편한 모양이었다.
"공 귀에 바짝 붙여."
지환은 교수의 말을 따라 손바닥 위에 얹은 투포환을 귀에 바짝 밀착시켰다.
"던지기 전까지 떨어지면 실격이다. 알아 두도록."
"넵!"
이제보니 강교수는 학생 한명을 뽑아 시범을 보이게 하고선, 동작을 직접 눈으로 보고 교정하는 스타일이었다. 지켜보는 이들이야 교보재가 있어서 좋지만, 막상 동작을 수행해야 하는 지환에게는 굉장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대쉬하면서 사선으로 팔 쭉 밀어봐."
"이렇게 말입니까?"
지환은 그래도 나름 운동경력이 있어서인지 곧바로 포환을 멀리 밀었다. 생각보다 비거리가 있게 날아가자 본인도 무척 놀란 눈치였다.
"좋아. 역시 육상 선출이라 자세가 좋군."
"감사합니다."
"하지만 팔각도가 너무 높다. 몇도가 가장 좋을 것 같나?"
갑자기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가 누군가 대답했다.
"45도 아닙니까?"
"틀렸나. 투척각은 42도로 한다."
"네?"
"이유는 묻지 마. 수 많은 선배들이 경험칙으로 얻은 결과니까. 그리고 방금 전 시범 보인 지환이도 잘했는데, 투포환은 팔힘으로만 던지는 게 아니야. 허리의 회전을 충분히 이용하여 다리서부터 시작해서 허리, 몸통, 어깨, 팔, 손순서로 힘을 전달해줘야해. 이번엔 내가 직접 시범을 보여 주겠다."
"오오, 교수님이 직접."
"근데 교수님 창던지기 선수래지 않았냐?"
"그래도 비슷한 계열이니까 포환도 잘 던지실 듯."
지환이 써클에서 물러나자 강교수가 포환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정면을 바라보던 지환과는 달리 등을 반대로 돌린 괴상한 자세였다. 포환을 잡은 교수가 설명했다.
"지금 보는 투척법이 바로 오브라이언 투구법이라고 한다. 회전력을 늘리기 위해 등지고 시작해서 이렇게···."
교수가 웅크린 몸을 회전 시키며 팽이처럼 돌더니 그대로 포환을 쏘아 냈다.
"우아아아!"
온 힘을 쥐어 짠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멀리 날아갔다.
지환이 던진 비거리의 두배는 족히 넘는 거리였다.
쿵-!
쇠공이 떨어지며 내는 묵직한 소리에 다들 움찔 놀랐다.
그제야 나는 교수가 생초보인 지환을 시범 조교로 뽑은 이유를 깨달았다.
‘쳇, 생각보다 야비한 구석이 있네.’
[네? 누가 말입니까?]
‘강교수 말이야. 아니지, 강강산가? 아무튼. 일부러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지환이를 먼저 시킨 거잖아.’
[아···.]
‘지환이가 아무리 잘해봐야 전공자인 자신보다는 못 할 테니까. 그리고 체급만 봐도 상대도 안 되 보이는데.’
[그렇군요. 뭐, 나름의 교육철학이라고 봐야죠.]
‘근데 15M정도 날아간 건가?’
[눈금으로 보아 그렇군요.]
‘나는 얼마나 던질 수 있을까?’
[나서지 마십시오 주인님. 괜히 튈 필요 없습니다.]
‘아니 그냥 궁금해서 말이야. 그나저나 올림픽 기록은 얼마나 되려나?’
그때 강교수가 다시 자리로 돌아오더니 수업을 이어갔다.
"다들 봤겠지만 던지는 자세보다 던지기 나서 동작이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몸이 써클 밖으로 튀어 나가면 실격···. 어이, 거기 학생."
"예?"
"아니, 거기 키 큰 학생. 지금 뭐 하고 있나?"
[주인님. 주인님을 부르는 거 같은데요?]
‘아씨, 나야?’
순간 투포환 기록을 폰으로 검색하던 차에 딱 걸렸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급히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수업 시간에 폰이나 만지고 있고···. 그렇게 내 수업에 집중이 안되나?"
"죄송합니다. 기록 좀 찾아보느라···."
"기록? 기록이 왜 중요한가? 나처럼 전국체전이라도 나가려고?"
강교수는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 내가 맘에 안들었는지 사과를 하는데도 계속 시비를 걸었다. 어쩌면 첫 시간이라 군기를 잡으려고 본보기를 보이려는 의도같기도 했다.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참나. 실기 수업이 그렇게 만만해? 설명하는 데 수업 안듣고 몰래 폰 봐도 된다 이거야?"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거듭 사과의 뜻을 밝혔으나 강교수는 아예 작정한 것처럼 나를 갈궜다. 처음엔 나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가 한 잘못에 비해 지나치게 혼을 낸다는 생각에 반발심이 들었다.
"하-. 이 자식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보는 것 봐? 그게 죄송한 태도야?"
"······."
‘주, 주인님.’
[이건 좀 심한 거 아니냐? 내가 무슨 고삐리도 아니고 수업 중 종목 기록좀 찾아봤다고 이렇게 혼을 나야해? 애들다 보는데서?]
‘그래도 참으셔야 합니다.’
"너 이름 뭐야?"
"이도훈입니다."
"그래, 이도훈이. 너 나와."
"네?"
"나와보라고."
나는 꿀릴 것이 없었기 때문에 당당히 걸어 나갔다.
딱 보니 본인이 선출이란 걸 과시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솔직한 말로 우습게 느껴질 뿐이었다.
"힘 좋게 생겼네. 니가 한 번 던져봐라."
"저요?"
"그래. 자신 있으니까 수업 중에 딴짓하고 폰 쳐다본 거 아냐?"
"죄송합니다. 근데 진짜 올림픽 신기록이 궁금해서 기록을 찾아 본겁니다."
"니가 대회 출전할 것도 아닌데 기록은 왜 찾아?"
"죄송합니다."
"됐고, 던져. 얼마나 잘 던지는 한 번 보자."
"······."
"던져보라니까? 니가 내 기록 넘으면 내가 너 이번 학기 A+ 준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귀가 솔깃했다.
"···그 말 진심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