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259화 (1,226/2,000)

1242.. 2학년2학기-57-

"영철이구나?"

"충성!"

영철은 여태 군기가 빠지지 않았는지 절도있게 거수 경례를 붙였다.

"뭐하냐. 사람들 쳐다본다."

"하하하! 드디어 저 민간인입니다. 어제부로 전역했습니다."

"민간인 아니고, 예비역."

"아, 맞다. 예비역이지. 암튼 올해는 전역 첫해라 면제래요. 형은 예비군 훈련 다녀오셨어요?"

"예비군?"

영철과 대화를 나누는데 나 역시 예비역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로시. 나 아직 예비군 안 끝났지?’

[네.]

‘근데 왜 예비군 훈련에 안 부르지?’

[주인님도 올해 전역입니다. 까먹으셨습니까?]

생각해 보니 원주인 도훈은 년 초에 전역 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다 비명횡사했다. 즉, 전역 첫해라 예비군 훈련을 면제받은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

"아냐. 나도 내년부터야."

"오, 그럼 형이랑 같이 받으면 되겠다. 학생 예비군은 일괄로 받는다면서요?"

"그렇겠지? 근데 무슨 전역 하루 만에 예비군 훈련 타령이냐? 군대가 체질에 맞았나?"

"당연히 아니죠. 근데 신기하더라고요. 어제 전역 축하기념으로 친구들이랑 늦게까지 술 마셨는데 아침 6시 되니까 벌떡 눈이 떠지더라니까요?"

"습관 무섭지. 3개월은 간다."

"형도 그러셨어요?"

"뭐···. 그랬지?"

‘원주인에게는 미안한 얘긴데 군대 있을 때 빙의 안 한 게 천만 다행이네.’

[왜요?]

‘생각해봐. 남의 몸에 들어갔는데, 현역 군인이면 얼마나 억울하겠어? 전역 다음 날 입대 전날로 회귀한다면 또다시 지옥문이 열리는 거라고.’

[그렇군요.]

"참, 형한테 말씀드릴 거 있는데."

"뭐?"

"저번에 집행부 얘기 말씀하셨잖아요."

"어. 너도 하게?"

"네. 남자가 없다니 제가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려고요."

영철은 집행부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안 그래도 똘똘한 남자 후배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자진해서 한다고 하니 이보다 기쁠 수 없었다.

"나이스 타이밍이네."

"네?"

"내일 개강총회 끝나고 교수님이 집행부만 저녁 사주신다고 했거든."

"오, 진짜요?"

"그럼 집행부 된 김에 첫 번째 임무를 주지."

"어떤 임무요?"

"내일 회식할만한 장소 좀 섭외해봐.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대학교 주변으로. 어른들 모시고 가야 하니 적당히 분위기 있는 곳으로."

"아···."

영철은 전역 첫날부터 임무를 받게 되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제, 제가요?"

"왜? 집행부 하고 싶다면서?"

"그렇긴 한데···. 아직 주변 상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요."

"친구 뒀다 뭐하냐? 수소문이라도 해. 할 수 있지?"

"넵!"

영철은 더 고민하지 않고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아직 군인정신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근데 수강 신청은 다 했어?"

"네. 저번에 말년휴가 길게 나왔을 때 조교 선생님 도움으로 끝냈어요."

"잘 된 것 같아?"

"망했어요. 지금 수업 가는 길에 선배 만난 거예요."

"그렇구나."

"네. 참, 형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데?"

영철이 그답지 않게 쭈뼛거렸다.

"조교 선생님은···. 미혼 맞으시죠?"

"강민주 샘?"

"네. 나이가 많아 보이시진 않던데."

[헐. 바람둥이 영철군이 강민주 조교를 타겟으로 삼은 걸까요?]

‘그러게. 이 자식은 혈기왕성하구나. 전역 하자마자.’

"응. 결혼 안 하셨을 걸? 그리고 우리과 선배잖아."

"네. 그건 들었어요."

"근데 왜?"

"아, 아니에요. 그냥 예쁘신 것 같아서. 하하하!"

[안 말리십니까?]

‘뭘?’

[영철군이 또 주인님의 어장을 노리는데요.]

‘냅 둬. 민주가 나 말고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상상할 수 없으니까. 혼자 또 헛물켜다 말겠지뭐. 차라리 팔선녀 애들한테 안 찝쩍대는 게 어디야.’

[그렇군요.]

"형, 저 그럼 수업 가볼게요! 식당은 오늘 중으로 예약하겠습니다!"

"그래. 파이팅."

영철에게 일을 떠넘기고 나니 무척 홀가분해졌다.

[역시 학회장의 권력인가요?]

‘회장이 직접 다 할 필요 있나. 적절한 인재에게 맡기면 되는 거지.’

[영철군이 그래도 빠릿빠릿한 편이라 다행입니다. 태영군이었으면···.]

‘태영이도 군대 다녀오면 좀 달라질거야.’

[그래야 할 텐데 말이죠.]

* * *

개강 첫날이라 그런지 국성대 체육과 1학년들은 다들 외모에 힘을 준 모습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여전히 주침야활 생활에 벗어나지 못했는지 꾸벅꾸벅 졸기 일 쑤였지만, 여학생들은 서로 경쟁하듯 한결 달라진 외모를 뽐내고 있었다.

"그럼 10분간 휴강."

2학기부터 시작되는 체육과 전공 수업 덕에 모두 모인 1학년 학생들은 휴식 시간이 되자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었다.

"정음아."

강의실 구석에 혼자 앉아있던 아영이 정음을 향해 인사했다.

"아영아, 오랜만!"

정음이 반갑게 아영을 맞았다. 그녀는 늘 씩씩하고 기운이 넘쳤기 때문에 정음의 곁에선 늘 긍정적인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왜 혼자 앉아 있어? 내 옆에 오지."

"아···. 그냥 늦어서."

"여기로 옮겨. 같이 수업 듣자."

정음은 외톨이처럼 지내는 아영을 챙겼다. 아영도 그것이 싫지 않은지 정음의 옆자리로 옮겼다. 두 사람이 같이 앉아있는데 잘생긴 남학생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녕. 오랜만이다."

"아, 영철 선배. 복학하셨네요?"

"······."

환하게 웃어주는 정음과 달리 아영은 그에게 감정이 상한 듯 쳐다도 보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머쓱해진 영철이 말했다.

"그래도 아는 얼굴이 조금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네. 수업잘 들어."

영철이 민망해하며 강의실을 나가자, 다른 애들과 놀고 있던 희주가 정음에게 다가와 물었다.

"저 잘생긴 남자분은 누구야? 전학생?"

"대학교도 전학 올 수 있어?"

정음이 눈을 크게 뜨고 되묻자 희주가 오히려 당황했다.

"노, 농담한 거잖아."

"아, 농담이었어?"

희주는 역시 정음이는 순수하다는 생각을 했다.

"군대 갔다 와서 복학한 선배님이셔."

"근데 네가 어떻게 알아? 두 사람이랑은 안면이 있어 보이던데?"

"아, 그게 방학 때···."

정음이 대답을 하려는 데 교수가 잠시 자리를 비운 교탁으로 여학생 한 명이 나와 이목을 집중시켰다.

"잠깐 얘들아. 나 할 얘기 있어."

피부를 잔뜩 태운 강경희였다.

그녀는 추계 전국 체전 참가를 위해 여름 방학 내내 테니 스장에서 훈련을 받느라 유난히 피부가 까맣게 타 있었다.

"1학기 과대였던 태영이가 입대하는 바람에 지금 1학년과대가 공석이잖아. 그래서···."

"경희 네가 부과대 아냐? 이어 받으면 될 것 같은데?"

누군가의 주장에 몇 명이 동조했다.

하지만 경희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 난 한 달 뒤 대회 출전이라 2학기 초에 많이 바쁠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그냥 이번 기회에 새로 과대를 뽑는 게 어떨까 싶어서."

부과대였던 경희는 공석인 과대 자리와, 자신의 대회 준비로 인해 교체를 원했다. 경희의 까맣게 탄 얼굴을 본 1학년 들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경희가 맡기엔 부담스럽겠다."

"학기 초에 행사도 제법 많잖아."

"그냥 이번 기회에 바꿀까?"

"다수결로 정해 그럼."

과대를 새로 뽑자는 쪽으로 중지가 모이자 누군가 의견을 냈다.

"1학기 땐 남자가 했으니, 이번 과대는 여자로 바꾸면 어때?"

"맞아. 남녀가 공평하게 돌아가야지."

남학생들의 주장이었다. 사실 체육과 1학년의 경우 다른 학년과 달리 여학생이 비교적 많은 편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다.

"난 그럼 정음이 추천할래."

"정음이?"

"그래. 정음이가 해라."

"육정음! 육정음!"

갑자기 과대 뽑기가 인기 투표로 변질되자 사회를 보던 강경희가 제지했다.

"잠깐. 일단 후보를 뽑고 다수결로 해."

그녀는 화이트 보드에 육정음이라고 적었다.

졸지에 과대 후보가 된 정음이 정중히 사양했다.

"나, 난 그런 거 못하는데···."

"에이, 날 때부터 과대가 어딨니?"

"맞아. 솔직히 태영이가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었잖아?"

"누가 해도 태영이보단 나을 듯."

"야. 니들 의리없게 군대 간 사람 벌써 뒷담화냐?"

다시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되자 경희가 또 나섰다.

"조용. 나 이거 교수님한테 양해 구하고 하는 거란 말이야. 쉬는 시간 동안 빨리 뽑아야 돼. 육정음 말고 또 추천할 사람?"

"양희주 추천합니다!"

"엥?"

희주를 추천한 이는 연두였다. 방학 중 머리를 옅은 연두색으로 염색해 이름과 매칭이 잘 되었다. 그러자 연두와 단짝인 나연까지 동조했다.

"맞아. 나도 희주가 좋을 것 같아."

"날 왜?"

희주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남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숨을 죽였다. 다들 말은 안 하지만 그녀의 커다란 가슴이 출렁하는 슴부먼트를 본 것이었다.

실은 간만에 만난 남학생들 사이에선 얼굴이 더 예뻐진 희주를 두고 말들이 많았다.

"그럼 양희주도 적고···."

"잠깐 내가 왜?"

희주가 강력히 반발했다.

자유로운 영혼인 그녀에게 책임감이 필요한 과대라는 자리는 안 맞는 옷과 같았다. 하지만 경희는 단호했다.

"추천을 받았으니 이름은 적어야지."

"그래 희주야. 너도 해봐."

"성격도 화통하니 잘할 거 같은데?"

남학생들이 육정음을 민 만큼 여학생들은 주로 양희주를 밀었다. 이는 약간 질투심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원래부터 과탑이었던 육정음에게 새롭게 떠오르는 양희주를 견주어 경쟁시키려는 속셈이었다.

"아이참, 그래 좋아."

두 사람 이름을 적은 경희가 동기들을 향해 물었다.

"후보 더 없으면 다수결 한다?"

"오케이."

"잠깐, 근데 투표를 거수로 할 거야? 무기명으로 해야 하는 거 아냐?"

"음···. 그것도 그렇네."

"단톡방에서 익명투표 하면 되잖아."

"오, 똑똑한데 서현이!"

서현의 의견에 따라 단톡방 공지로 투표가 올라갔다.

1학년 학생들만 모여 있었기 때문에 실시간으로 투표가 진행되었다.

"그럼 투표 끝났지? 결과는···."

투표 결과를 집계하던 경희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1학년 동기들의 수가 짝수였기 때문에 정확하게 반으로 나뉜 것이었다.

본래라면 육정음의 몰표가 예상되었으나, 여학생들의 질투와 더불어 몇몇 남학생들의 변절로 인해 박빙의 승부가 펼쳐진 것이다.

"어, 동률인데."

"이런 어떡하지?"

그때 화장실을 다녀온 영철이 다시 강의실로 복귀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맞다. 선배가 있었네. 저 선배님은 단톡방에 없잖아."

"근데 누구셔?"

영철은 자신에게 이목이 집중되자 잠깐 주춤했지만 이내 자신을 소개했다.

"난 올해 복학한 영철이라고 해. 별일 없으면 너희들하고 졸업할 때까지 같이 동기로 다닐거야."

영철의 세련된 외모에 몇몇 여학생들이 눈을 반짝였다.

잘생긴 남자 동기가 없다고 푸념했는데, 간만에 그럴싸한 뉴페이스가 등장한 것이었다.

사회를 맡고 있던 경희가 영철에게 말했다.

"선배. 투표 좀 해주세요."

"투표?"

"과대 뽑는 중인데 정음이랑 희주 중에서 한명만 골라 주심 돼요."

사정을 파악한 영철은 자신에게 결정권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영철은 주저 없이 정음을 골랐다. 그래도 안면이 있는 후배를 밀어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럼 2학기 과대는 정음이가 하는 거다?"

"아, 진짜로 내가 과대야?"

정음은 갑작스러운 과대 선출에 혼란스러워 했지만, 맡기면 또 열심히 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흔쾌히 받아들였다.

"부과대는 나중에 남학생 중에서 아무나 뽑는 걸로."

교수가 다시 돌아오면서 수업이 재개되었다.

정음의 옆에 앉아있던 아영이 조용히 물었다.

"괜찮아?"

"아니 좀 난감하게 됐는데. 나 과대 같은 거 할 줄 모르는데."

"잘 할거야. 내가 도와줄게."

"근데 과대는 뭐해야 하는 거야?"

"보통 회장님 도와서 동기들 단합시키는 거지."

"아···."

정음은 처음엔 무척 부담스러워했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1학년 과대가 되면 학회장인 도훈과 만날 일이 많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렇구나. 과대가 되면 오빠를 더 자주 볼수 있겠는데?’

정음은 도훈을 떠올리자 기분이 좋아졌다.

방학 중에 서로 바빠 자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와 다시 본다는 것만으로 설레는 정음이었다.

반면 한 표 차로 과대투표에서 낙선한 희주는 괜히 기분이 상했다. 처음엔 시켜줘도 하기 싫었는데 막상 정음에게 밀리니까 괜히 인기에서 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영철 오빠라고?"

"응. 이번에 제대하면서 복학했다는데."

희주는 도훈 말고 다른 남자는 성에도 안찼기 때문에 영철의 반반한 외모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가 정음과 구면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흐음, 정음이랑 아는 사이 같던데."

"진짜? 어떻게?"

"나도 모르지."

"근데 저 오빠 대충 들었는데 소문 별로던데."

"무슨 소문?"

"그게···. 1학년 1학기만 마치고 사라진 이유가 여자 문제였다는 소문이···."

"정말?"

영철의 소문을 듣게 된 희주는 그와 정음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복학생 오빠가 정음이한테 관심있나 본데? 그럼 나한텐오히려 잘 된 일인가?’

희주는 도훈과 정음이 썸씽이 있다는 사실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라리 영철이 정음을 꼬셔서 커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내가 도훈 오빠를 혼자 차지할 수도···.’

희주가 속으로 음흉한 음모를 꾸미는 사이 단 둘이 앉은 연두와 나연 역시 속닥거리며 작당모의를 하는 중이었다.

"나연아. 내일 개강총회 알지?"

"알지."

"괜히 또 저번처럼 싸우지 말고 순번 정하자."

"무슨 순번?"

"당연히 오빠랑 누가 먼저 하느냐지."

개강 첫날부터 수업은 뒷전이고 어떻게 하면 도훈을 꼬실지 여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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