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0.. 2학년2학기-55-
2학기 개강 첫날.
도훈은 간편한 츄리닝 차림으로 거리에 나섰다. 여전히 낮은 찌는듯한 무더위가 이어졌지만, 아침은 제법 선선한 날씨였다.
샤워용품을 백 팩안에 챙긴 도훈은 가방 끈을 당겨 등허리에 바짝 밀착시켰다. 신발 끈도 야무지게 조이고 머리에 후드를 뒤집어 쓰자 영락없는 복싱 선수의 런닝 차림이었다.
[학교에 등교하시는 분이 웬 운동 선수같은 차림이십니까?]
‘간만에 운동 좀 하고 싶어서. 몸 안에서 에너지가 펄펄끓는 것 같단 말이지.’
[아···. 양기가 너무 과해서 생기는 문제로군요.]
‘양기가 과하다니?’
[현재 주인님께서 얻은 내공은 극도로 순수한 양의 기운입니다. 두 분 스님께 얻은 동자공이나 100년 산삼 역시 양강의 기운을 가지고 있죠.]
‘그래서 몸에서 열이 펄펄 나는 거였어? 근데 어젠 안 그랬는데?’
[김양 때문입니다.]
‘봉순이?’
[네.]
‘어째서지?’
[주인님의 음양보합술이 김양의 음기를 흡수해 양기로 전환시켰습니다.]
‘오호.’
[하지만 천무지체로 인해 평소때보다 흡수율이 높아지는 바람에 밤 사이 몸속으로 축적되지 못하고 남은 기운이 몸을 펄펄 끓게 만드는 것입니다.]
‘와, 이건 생각지도 못했는데. 기운이 남아 돌아서 생기는 문제라는 거네, 한마디로?'
[네. 지금으로선 운동으로 해소시키는 게 최선입니다.]
‘가만. 근데 해소를 못 시키면 어떻게 되는 건데?’
[성욕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겁니다.]
‘지금도 강한 편이지 않냐?’
[그렇죠. 여기서 더 강해지시면 음마, 혹은 색마라 불리는 경지까지 가버리는 거죠. 당분간 너무 많은 음기를 받아 내셨다간 주인님 스스로 넘치는 기운을 감당 못하고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잠깐, 주화입마라니? 그게 또 뭔 소리야?’ 도훈은 어이가 없었다.
PK단의 습격에 대비해 무공을 익혔는데, 도리어 그 무공 때문에 주화입마에 빠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건 말이 안되는데? 포인트 다 꼴아 박고 얻은 게 겨우 주화입마라고? 나 지금 삽질했다는 소리야?’
[아닙니다. 말이 됩니다. 이는 무공 때문이라기 보다, 주인님이 이전에 얻으신 음양보합술 때문이니까요.]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봐.'
[본디 음양보합술은 주인님의 정력을 보하는 수준의 흡수율을 보였습니다.]
‘그러지. 쥐똥만큼 올라갔잖아. 티도 잘 안 날만큼.’
[하지만 천무지체로 체질이 바뀐 뒤 음기의 흡수율이 말도 안 되게 좋아져 버린 것입니다. 어제 김양과 섹스 한 번으로 넘치게 내공이 남아돌게 되셨잖습니까? 밤새 자는 동안 계속 몸속으로 흡수 하셨는데도 말이죠.]
‘비유하자면 한약을 먹었더니 에너지 흡수율이 너무 높아지는 바람에 도리어 살이 쪄서 비만이 되는 상황인 건가?’
[딱 그렇습니다. 양강의 기운이 극도로 쌓이면 주인님의 성욕이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폭발할 겁니다. 그걸 자제 못 하면 마구잡이 난봉꾼이 되는 것이고, 죄의식조차 없다면 강간마가 되버리겠죠.]
‘강간마라니? 말 조심해. 난 이제껏 누구도 강제로 따먹은 적 없어.’
[당연하죠. 주인님께 늘 여자가 먼저 다가왔으니까요. 다만 제 말 뜻은 그 정도로 심해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자제력을 잃어 버리면요.]
‘흐음···. 이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맨날 이렇게 운동으로 남는 에너지를 태울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물론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뭔데?’
[내공심법을 통해 밖으로 흘러 넘치는 기운마저 모두 갈무리해내는 것입니다. 즉 소화를 시키면 됩니다.]
‘내공심법?’
[네. 주인님이 익힌 무공은 권각술의 일종으로 내공을 쌓는 심법과는 거리가 멉니다. 정확히 말하면 순서가 거꾸로 되었죠.]
로시의 말에 따르면 본래 무공을 익힐 때는 내공을 먼저 단련해 쌓고, 그 바탕 위에 술기를 덧씌워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도훈의 경우는 반대로 기연을 통해 내공이 먼저 체내에 쌓이는 바람에 곧바로 기술을 익히느라 정상적으로 내공을 늘리는 심법을 익히지 못한 것.
‘거참, 복잡하기도 하지. 아무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닌데 당분간은 양기 조절에 유념해라 이 뜻인가?’
[정확합니다.]
‘알았어. 일단은 운동으로 풀어 내는 수밖에.’
준비를 마친 도훈이 가볍게 스타트를 끊었다.
본인 딴에는 조깅 정도의 느낌으로 치고 나갔는데, 그 속도가 스프린터의 스타팅을 방불케했다. 몸을 지나치는 바람의 속도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우오오! 뭐야 이건.’
도훈은 살짝 기시감을 느꼈는데, 일전에 물약 아이템을 통해 100미터 비공인 신기록을 세울 때 느꼈던 맞바람과 거의 비슷했다.
즉, 100미터를 10초 내외로 달리는 속도였던 것이다.
도훈은 주변을 의식해 살짝 속도를 줄였다.
'왜 이렇게 몸이 가벼워? 설마 무영보라는 스킬이 벌써 적용되기 시작한 건가?'
[아닙니다. 천무지체로 인해 골격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환골탈태?'
[네. 주인님의 몸은 현재 극상의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올림픽 대표급 스프린터가 매일 5시간씩 연습해야 유지되는 수준을, 평소에도 아무렇지 않게 발휘할 수 있다는 거죠.]
'그렇다고 해도 말이 안되는데? 나 그럼 대학교 때려치고 달리기 선수로 전향하는 게 더 낫지 않아? 그 뭐냐, 볼튼가 너튼가 걔보다 기록 잘 나올것 같은데?'
도훈은 아직 전력을 다하지도 않았다.
작정하고 뛰면 기록이 얼마나 단축될지 예상도 되지 않았다.
[본래 무림세계의 인물들이 현실로 소환된다면 대부분 스포츠 신기록을 경신할 겁니다. 말도 안되는 게 아니라 당연한 소립니다.]
'와, 이거 참. 교사를 꼭 해야 한다는 규칙때문에 이런 재능을 가지고도 썩혀야 하는 구나.'
[비단 달리기 선수 뿐이겠습니까? 살짝 도약을 해보시죠.]
'도약? 점프하란 소리지?' 도훈은 달리던 와중에 가볍에 위로 뛴다는 생각으로 붕떠올랐다.
그러자 놀랍게도 달 위에서 멀리뛰기를 하는 것처럼 공중으로 붕 솟구치는 것이었다. 도훈 스스로도 체공시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에 당황할 정도였다.
"우, 우아와앗!"
누가 보면 스턴트 맨이 실을 매달아 연기를 한다고 착각했을 정도. 착지를 마친 도훈은 누가 혹시 본 사람은 없는지 주변부터 뒤졌다.
"이게 뭐야?"
[주인님은 운동능력은 이미 범인의 한계를 아득히 벗어나 있습니다.]
도훈은 다시 눈치를 살핀 뒤 제자리에서 서전트 점프를 뛰어 보았다. 통상 NBA 선수들이 뛴다는 1미터를 아득히 넘는 1 .5미터에 달하는 높이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도훈은 자신의 말도 안되는 능력에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무공이 이렇게나 뛰어난 거였어?'
[당연하죠. 그래서 다른 차원에서 목숨을 걸고서라도 아득바득 익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도무지 상상이 안가는 군. 이 정도면 거의 인간 병기급 아니냐?'
[굳이 살상력을 따진다면 주인님은 이미 초인에 가깝습니다.]
'헐, 대박.'
도훈은 살짝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튀어난 못이 정 맞는다고, 너무 눈에 띄는 신체 능력은 자칫 PK단의 이목을 끌지 몰랐다.
그들의 끄나풀이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우연히 영상에 찍혀 너트뷰에 올라가는 날에는 몇시간도 안돼 전국구로 이름을 날릴 판이었다.
'아침에 달려보길 잘했네. 과유불급이란 말이 딱 맞는 거 같아. 이건 좀 자제해야 겠어.'
[능력은 주인님이 조절하시면 됩니다. 어제 최실장 패거리를 혼내 주셨을 때 처럼요.]
'조절이라.'
도훈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100의 힘이 있다고 100을 다 쓸 필요는 없었다.
정작 필요할 때 꺼내쓰고 평소에는 힘을 숨기며 살면 그만이었다.
'이건 뭐 주인공이 힘을 숨김도 아니고.'
[네?]
'아니야. 조절해 볼게.'
도훈이 다시 런닝을 시작했다.
어쨌든 넘치는 기운은 모두 태워야 했다.
안 그러면 겉잡을 수 없이 성욕이 강해질 것이 두려웠다.
휙- 휙휙!
다시 달리기 시작한 도훈은 에너지를 해소코자 무의식적으로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복싱 선수의 쉐도우 복싱을 따라한 것이었는데, 별도로 복싱을 배우지 않았는데 영상에서 가끔 보던 동작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우아, 저사람 좀 봐. 복싱 선수인가봐."
"짱 멋있다."
길가에 서있던 학생들이 도훈의 경쾌한 발놀림과 펀치를 보더니 경탄했다. 그의 동작은 모르는 사람이 봐도, 대단해 보일 만큼 절도가 있고 힘이 넘쳤다.
'동작이 그냥 나오는데?'
[천무지체의 힘입니다. 아마도 눈으로 본 것은 거의 복제하듯 따라하실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운동신경이 발달한 사람이 여러 종목을 다 잘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뛰어난 동체시력, 그리고 미세한 동작을 컨트롤 하는 협응력, 동작은 받쳐줄 수 있는 민첩성과 충분한 근력이 있기 때문에 100프로 모사가 되는 것이죠.]
'한마디로 어떤 종류의 운동이든 보는 즉시 흡수 할 수 있다는 거군?'
[맞습니다. 거기에 재능모방자의 능력까지 더해진다면, 주인님의 해당분야에 일거에 권위자급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죠.]
'아, 재능이 너무 아깝네. 이런 재능을 가지고 학교에서 체육이나 가르쳐야 하다니.'
도훈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것은 플레이어, 혹은 PK단도 가진 숙명입니다. 어디 주인님 뿐이겠습니까?]
'하긴.' 도훈이 비록 강해졌지만, PK단이 괴물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자신은 여전히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지금 사람 없는 것 같아. 전력으로 한 번 달려보고 싶어.
'
[가능할 것 같습니다.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보시죠.]
도훈이 한산한 거리를 틈타 전력을 끌어냈다.
뛰고 있는 다리쪽에 내공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주어진 근력 이상으로 불가해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비밀이 거기에 있었다.
"으자자자!"
두 발이 보이지도 않게 빠른 피치가 이어졌다.
운동화 밑창에서 연기가 날 정도로 빠른 걸음에 도훈은 오토바이를 헬맷없이 타고 달리는 기분이었다.
"조, 조혼나 빨라!"
도훈은 지금의 속도를 가늠했다.
스키를 처음 배우던 시절.
멋모르고 상급코스에 올라 어쩔 수 없이 활강할 때 느꼈던 것과 비슷했다.
'이건 진짜 말도 안되는데?'
[사람이 보입니다. 멈추십시요.]
'오케이.'
전력으로 내달리던 도훈이 아무렇지도 않게 뚝- 멈춰섰다.
관성을 무시한 움직임이 가능한 것은 그의 근골이 육체의 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강인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정지에 후폭풍이 뒤에서 몰려왔다.
어느새 학교 정문에 다다른 도훈은 이마에 땀을 닦으며 자연스럽게 걸었다. 시계를 보니 차로도 10분 걸리는 거리를 동일한 시간에 주파해 있었다.
'대체 얼마나 빠르게 온 거지? 차보다 빠른 것 같네.'
[신호가 없으니 그런것도 있을 겁니다. 넘치는 에너지는 조금 해소가 되셨습니까?]
'어. 한바탕 쏟아내고 나니까 상쾌한데?'
도훈은 그대로 체육관으로 향했다. 아직 등교하기엔 이른 시간이라 일찍부터 운동하는 사람들은 몇 없었다.
[샤워 하시려고요?]
'땀을 잔뜩 흘렸잖아. 에너지를 쏟아내는 건 다 좋은데, 씻는 게 좀 불편하네.' 곧바로 탈의실로 향한 도훈은 락커에 짐을 넣고 샤워용품 가방을 챙겨 샤워실로 들어갔다. 샤워실엔 도훈 혼자였다.
나체의 모습으로 거울을 보던 도훈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 거렸다.
'이상해. 겉으로 봐선 딱히 티가 나는 것 같진 않은데. 오히려 살이 좀 더 빠진것 같기도 하고.'
[살이 빠진게 맞을 겁니다. 불필요한 지방은 대부분 태워지고, 근육만 오롯이 남았으니까요.]
'그런것 같아. 데피니션이 더 좋아졌네.'
데피니션이란 벌크업 이후 커팅을 통해 올리는 근선명도를 의미했다. 도훈은 마치 시즌이 한창중인 보디빌더가 식단관리를 한 것처럼 체지방이 바짝 줄어 있었다.
[현재 주인님의 힘의 근원은 단순한 근육량의 총합을 뛰어 넘습니다. 스파르타 벨트로 뻥튀기 된데다 내공까지 실려있으니까요.]
'그렇군. 근데 잦이는 더 못 키우나?'
[네?]
'아니. 내공으로 말이야. 다른 건 다 좋아졌는데, 이건 왜 그대로지?'
[18센티도 충분히 큰 것 같습니다만.]
'물론 크긴 하지. 내공의 증진하곤 별개인가 싶어서.'
[내공을 얻었다고 키가 커지거나 손가락이 길어지지 않듯, 내공으로 성기 사이즈가 변하진 않죠. 다만 더 단단해 지고, 훨씬 오래갈 겁니다.]
'그건 어제 김양으로 증명했어.' 김양과의 일을 생각하자 도훈이 슬며시 웃었다.
아직 사채업자 박회장의 복수가 남아있었지만, 그녀를 악의 구렁텅이에서 빼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축할만한 성과라고 생각했다.
'나예림이랑 잘 어울려야 할텐데 말이지.'
[거기서 부턴 스스로 해결할 문제죠. 주인님은 이미 충분한 도움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인생을 모두 책임져 주실 순 없는 거니까요.]
'그렇겠지?'
샤워를 마친 도훈이 개운한 마음으로 체육관으로 다시 나왔다. 샤워실이 헬스장 내부에 있던 관계로 밖으로 나가려면 헬스장을 지나쳐와야 했는데, 그 사이 못 보던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어? 저건."
도훈은 런닝머신을 달리고 있는 여학생을 주목했다.
몸에 짝 달라붙는 레깅스에 배꼽이 훤히 보이는 탱크탑을 입어 주변의 시선을 잡아끄는 여자였다.
"양희주?"
오랜만에 본 그녀는 놀랍도록 예뻐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