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9.. 2학년2학기-44-
‘그럼 무협식으로 표현하면 내가 단전이 커졌다는 소리야?’
[어떻게 단전에 대해 아십니까?]
‘뭔 소리야? 무협지 보면 허구한 날 기연 만나서 1갑자니 2갑자니 내공 늘어나는 게 다반산데.’
[아주 정확합니다. 시스템에 따라 다르게 불리긴 하지만, 단전 혹은 마나홀, 혹은 카르마를 의미합니다. 현재 주인님은 100년 산삼의 영향으로 1갑자 수준의 내공을 얻으셨습니다.]
‘1갑자면 60년인가?’
[네. 60년 동안 내공 수련한 사람의 단전의 크기와 똑같다는 의미죠.]
‘오, 상당한데? 게다가 천무지체라고?’
[천무지체란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체질에 따라 수십가지의 유형으로 나뉘어집니다. 쉽게 말해 ‘자질’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마력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또 어떤 사람은 동물이나 신수와의 친화력이 월등히 높습니다. 천무지체는 타고난 무골이란 뜻으로 무공을 익히기에 최상의 몸상태라는 말입니다.]
‘가만, 그럼 나도 진짜로 무공을 익힐 수 있다는 소리야?
’도훈이 흥분해서 떠들었다.
외공이 신체적 피지컬과 꾸준한 단련으로 외력을 증가시키는 것이라면, 내공은 이와 전혀 다른 종류의 힘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제아무리 뛰어난 외력을 갖추더라도 내 공의 잠재력엔 비할 수 없었다.
[그렇죠. 관련된 스킬 북만 얻을 수 있다면요. 아참, 해당시스템에서는 ‘비급’이라고 표현합니다만.]
‘오오! 진짜로 내가 무공을? 그럼 막 날카로운 걸로 베어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금강불괴.]
‘어떤 독으로도 나를 죽일 수 없으며.’
[만독불침.]
‘막 물 위를 걷거나 허공을 날아다니며.’
[수상비, 허공답보.]
‘내 의지대로 칼날이 공중에서 춤을 추게 만들 수 있다는 소리야?’
[이기어검술은 사실 염력의 일종입니다.]
‘오잉? 그건 무공 아니었어?’
[주인님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무공이나 마법이나 혹은 주인님이 쓰시는 각종 초능력이나 결국 한 뿌리에서 나온 겁니다. 즉 시스템마다 각각의 방식으로 마나를 다루는 용법이 다른 것이지, 근원은 똑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잠깐. 아까부터 자꾸 시스템 이야기를 하는데 혹시 지구말고 다른 행성을 의미하는 거야?’
[네. 주인님이 말씀하신 모든 스킬들은 현존합니다. 지구에선 찾기 어렵지만요.]
‘헐, 씨발. 무협지 세상이 있다는 거였네?’
[왜 없다고 생각하시죠?]
‘그럼 무공비급도 마켓에서 구할 수 있다는 거야?’
[전에도 한번 보여드렸지만, 스킬북 구매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다만, 주인님이 언급하셨던 스킬들은 최상급의 스킬이기 때문에 그 값도 어마어마하죠.]
‘포인트라면 나도 많아.’
[글쎄요, 주인님이 가진 전 재산을 쏟아 부어도 ‘금강불괴’ 스킬북 하나 구매하기 어려울 걸요?]
‘그렇게 비싸?’
[해당 스킬은 그쪽 시스템에서도 랭커급부터 사용하는 스킬입니다. 아무리 마켓에서 차원별 보정이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타차원의 랭커가 쓰는 스킬이 헐값에 판매될 리 없겠죠.]
‘와···. 씹. 그나저나 이거 익히면 나 지구 최강자 되는거 아니냐? 말도 안 되잖아. 현실에 무공이라니?’
[주인님 말고 다른 플레이어가 무공을 익혔을 가능성에 대해선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어? 또 있어?’ 도훈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표정이었다.
[당연한 소리를···. 랭커 이하에서는 플레이어끼리 서로 신분을 노출할 수 없으므로 다른 플레이어가 얼마나 많은지 모를 겁니다. 하지만 주인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플레이어들이 이 세상에서 각각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근데 내가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네?]
‘현실에서 무공을 쓰고 막 마법도 쓰고 그런 능력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미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았을 거 아냐?
요샌 너튜브까지 발달해서 무조건 촬영 당할 테니까.’
[말씀드렸듯이 PK단의 존재 때문입니다.]
‘아···. 그 빌어먹을 새끼들.’
[그들의 표적이 되는 것은 무조건 피해야 할 일입니다.
놈들은 늘 플레이어를 감시하고 있으니까요. 능력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방법이겠죠. 그리고 이미 역사에 보시면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이적을 행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신화나 전설로 불리는 이야기지만요]
‘어쨌든 플레이어는 결국 놈들의 먹잇감일 뿐인 거야?
쥐 죽은 듯 숨어다니다 잡히면 언젠가 죽고 마는?’
[그건 너무 비관적인 생각이네요. 주인님이 언제 쥐 죽은 듯 숨어다녔다고요? 저는 주인님처럼 빠르게 레벨업하는 플레이어를 본 적이 없는데. 클래스가 좀 남달라서 그렇지.]
‘아, 그런가?’
[그리고 PK단이라고 플레이어를 찾는데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플레이어가 플레이어를 만나기도 힘든 판국에 PK단이라고 플레이어를 찾기 쉬울까요? 또 플레이 어라고 늘 사냥만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인님은 섹스킬에 올인 하셨지만, 다른 능력을 갖춘 플레이어도 많고 그들 중 일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합니다.]
도훈은 갑자기 자괴감이 들었다.
‘아, 씹.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좀 그럴싸한 꿈을 말할걸. 무슨 섹스에 한이 맺혔다고 대물 플레이어가 되었을까?’
[그땐 한이 맺히시긴 했죠.]
‘암튼, 그럼 어쨌든 무공비급을 마켓에서 구매할 수도 있다는 거지? 게다가 난 천무지체가 돼서 남들보다 훨씬 빨리 익힐 수 있는거고?’
[맞습니다.]
‘문제는 비급인가 스킬북인가가 비싸다는 거네?’
[네. 하지만 주인님이 말씀하신 스킬들이 워낙에 절정의 무공이라 그렇지 그 밖에 호신용으로 쓸만한 무공은 충분히 구매가능한 사정권에 있을 겁니다.]
‘그래?’
[경매장을 잘 뒤져보시면 가끔 헐값에 매물이 나오기도 하거든요. 게다가 주인님은 지난 번 승급때 받은 할인 쿠폰도 하나 가지고 계시구요.]
‘맞다. 완전히 까먹고 있었네.’
도훈은 내친김에 로시에게 말했다.
‘간만에 경매장이나 한번 둘러볼까?’
[정말로 비급을 사시려고요?]
‘왜, 요새 일진이 사납잖아. 아까도 악몽까지 꾸고. 난 그게 예지몽처럼 괜히 신경 쓰인단 말이야. 호신용으로 쓸만한 무공을 익힐 수 있다면 PK단과 조우해도 생존확률을 높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음, 대물 플레이어가 무공까지···. 그러고 보니 다른 시스템에서 그런 혼종 플레이어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응? 나 같은 놈이 또 있어?’
[정확히는 무공 베이스에 색공을 익혔다고 봐야죠. 해당플레이어에게 섹스란 내공을 늘리는 일환이었으니까요.]
‘그게 누군데?’
[색공의 대가라고···. 음양술을 극도로 익힌 색마가 있었습니다.]
‘색마라니. 그럼 사파잖아?’
[플레이어끼린 정사 구분이 없습니다. 결국엔 자신의 사명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거니까요. 아무튼 마켓에 입장해 보시겠습니까?]
‘그래. 경매장 한 번 가보자.’
[가상 현실을 실행시키겠습니다.]
도훈은 일전에 동전노래방에서처럼 오랜만에 마켓 경매장에 접속했다.
현실에 존재하는 가상현실과는 비교도 안되는 실제감에 또 다시 놀랐다.
‘여긴 봐도봐도 신기하네. 진짜로 내가 다른 세상으로 온 것 같아.’
[인간의 오감은 굉장히 취약합니다. 몇가지 감각만 속여도 현실과 가상을 구분 못하거든요. 그럼, 무공 비급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순간 도훈이 서있던 장소가 새하얗게 변하더니 갑자기 하늘에서 책장이 쿵쿵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굉음에 도훈이 움찔 놀라 몸을 피했다.
‘어우씨, 떨어지는 거 맞으면 뚝배기 깨지는 거 아니냐?’
[가만히 있으시는 게 좋습니다. 바둑알의 착점처럼 주인님의 자리엔 절대 떨어지지 않거든요.]
‘아 그래?’
도훈이 잠시 기다리자 책장들이 모두 배치를 완료했는지 배경 역시 고즈넉한 고서점으로 바뀌었다. 끈으로 묶인 수많은 책들이 빼곡히 꽂힌 일종의 도서관이었다.
‘여기가 무공비급을 파는 곳인가?’
[네. 정확히는 경매에 올라온 물건들입니다.]
‘이렇게나 많다고?’
[네. 해당 시스템에선 무공비급이 일종의 화폐처럼 거래됩니다. 자신이 완전히 익히고 나면 쓸모가 없어지기 때문에 경매에 올려 포인트를 올리는 식이죠.]
‘포인트는 왜?’
[또 다른 무공비급을 구하려면 포인트가 필요하니까요.]
‘잠깐. 그러니까 무공 하나를 완전히 익히면 중고로 되팔고 또 다른 신상을 구한다고?’
[비유는 좀 이상하지만 얼추 비슷하군요.]
‘와··· 미친. 대체 얼마나 강해지려고.’
[시스템마다 추구하는 가치가 전혀 다르니까요. 현 지구시스템에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삶의 목표라면, 무공이 있는 시스템에선 그저 강해지는 것이 전부거든요.]
‘한마디로 무공에 미친놈들의 모임이구만.’
도훈은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책장에 꽂힌 고서를 뒤졌다.
한자와 비슷한 글자였지만, 도저히 읽을 수가 없는 모르는 언어였다.
‘이게 뭐지? 전혀 못 읽겠는데? 한자가 맞는 거야?’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일종의 평행세계랄까요?]
‘그럼 구매해도 어떻게 읽으라는 건데?’
[당연히 번역이 됩니다. 실시간으로 띄워드리죠.]
로시의 말이 끝나자 마치 팝업처럼 스크린이 떠올랐다.
도훈이 시선을 주면 그 위로 말풍선처럼 설명이 따라붙는 AR의 일종이었다.
‘오호. 천마신공? 이게 뭐야.’
[저라면 꺼내지도 않겠습니다만.]
‘왜?’
[가격표를 보시죠.]
도훈은 AR스크린 밑으로 적힌 포인트를 보고 놀라 자빠질뻔 했다.
‘흐억, 숫자 단위가 저게 맞아? 조야 경이야?’
[주인님이 살만한 비급은 아닙니다. 정확히는 랭커 중에서도 해당 물건을 구매할만한 사람은 손에 꼽을 겁니다.]
‘으음, 시작부터 너무 비싼걸 집었군. 내가 가진 포인트로 살 수 있을만한 걸로 다시 배치해줘.’
[넵. 잠시만.]
로시가 필터링을 끝내자 책장이 테트리스처럼 제멋대로 재배치되더니 새로운 책장이 슬라이딩 되며 도훈의 앞으로 등장했다.
[이쪽 서가의 서적들은 주인님의 할인 쿠폰과 낙찰권을 이용해 구매 가능한 가격대의 비급입니다.]
‘오케이. 가만있자, 무슨 무공이 좋을까나?’ 도훈은 어렸을 때 즐겨 읽었던 무협소설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가 기억하는 것은 모두 절정의 신공일 뿐, 입문자가 익혀야 할 무공의 이름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으음,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아무거나 배울 순 없고.
혹시 지구상에서 쓸만한 무공이 있나?’
[지구상에서라뇨?]
‘아니. 네 말대로 너무 눈에 띄는 무공은 오히려 너튜브각 나올 거 아냐. 혹시라도 몰래 촬영당해서 PK단에 걸리면 빌미만 제공하는 꼴이니까.’
[흐음, 그렇다면 티가 잘 안나는 무공이 좋겠군요. 잠시 만요,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로시가 검색을 끝냈는지 책장 구석에 있던 서적이 하얗게 빛이 났다.
‘저거야?’
[꺼내보십시오.]
허리를 숙여 책을 꺼내자 표지에서부터 먼지가 풀풀 일어났다.
‘뭐야 이건? 왜 이렇게 먼지가 많이 묻었어?’
[가상현실의 디테일은 놀랍죠?]
‘굳이 이렇게까지 현실적일 필요는 없다고.’
도훈은 손대면 바스러질 것 같은 고서적을 천천히 넘겼다.
동시에 알 수 없는 언어가 자동 번역되며 스크린으로 떠올랐다.
<백보신권>
‘백보신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근데 이름이 좀 야한 거 아니냐.’
[네?]
‘아니 그 백보가···. 빽보···.’
[이런 미친놈이!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본심이. 백보신권은 이름 그대로 100보 바깥의 비석조차 가루로 만든다는 무시무시한 이름의 권법입니다.]
‘아, 그 백보야? 암튼 되게 거창해 보이는데?’
[물론 최고의 자질을 갖춘 기재가 절정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가능한 수준입니다. 비급이 아무리 좋아도 배우는 사람이 형편 없으면 높은 성취는 불가능 하거든요.]
‘어, 그럼 딱 난데?’
[네?]
‘최고의 자질···.’
[도른자!]
‘미안하다고.’
[아무튼 가격대도 그렇고 크게 티가 나지 않는 무공으로 치면 딱 적절해 보입니다.]
‘가격이 얼만데?’
[음, 기존 포인트에 할인 쿠폰을 쓴다고 가정하면···. 5000포인트?]
‘오잉? 그렇게 싸다고?’
[아뇨. 비급을 사고 나면 5000포인트가 남을 거란 말입니다.]
‘아이씨, 그럼 완전 개털되는 거잖아?’
도훈이 버럭 화를 냈다. 수많은 미션과 업적을 진행하며 꾸역꾸역 모은 포인트였다. 그것이 무공 비급 한 개의 값어 치밖에 안 된다는 소리에 열이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말씀드렸듯이 스킬북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일반적인 소모성 아이템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값어치가 있기 때문이죠.]
‘아니···. 아무리 그래도···.’
[물론 주인님이 천무지체가 되었다고 무공을 익히실 필요는 없습니다. 천무지체인 것 만으로도 이미 어마어마한 선물을 받으신 셈이니까요. 별탈 없다면 주인님은 주어진 수명까지 잔병치레 하나없이 건강하게 살 다 갈 수 있을 겁니다.]
‘PK단에 잡히면 그게 다 뭔 소용이야?’
[그러니까 별탈이 없다는 전제하에 말이죠.]
‘음···.’ 도훈이 갑자기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더니 생각에 잠겼다.
알뜰살뜰 이자까지 받아 가며 힘겹게 모은 포인트가 대부분 날아간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아까웠다. 이것으로 살수 있는 아이템만 따져도 결코 수지가 안 맞는 장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인트를 아끼려다, PK단에 붙잡히게 되면 속절없이 죽는 수밖에 없었다.
고민을 마친 도훈이 선언하듯 말했다.
‘에라이 모르겠다. 죽어서 싸갈 것도 아니고, 아끼다 똥되느니 일단 쓰자.’
[경매 입찰 물건은 반품이 불가능합니다. 정말 후회 안하시겠습니까?]
‘사, 그냥. 포인트야 또 벌면 돼. 어차피 중수 이후 미션부터는 인플레라며? 지금이야 커 보이겠지만 고수되고 랭커되면 미션 하나 값이지.’
[알겠습니다. 백보신권에 입찰을 넣겠습니다. 오랫동안 유찰된 비급이라 최저가에 바로 낙찰 받을 지도 모릅니다.
비급을 올려둔 플레이어가 마켓에 접속해 있다면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