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239화 (1,206/2,000)

1222. 2학년2학기-37-

응급실 입구로 들어가던 도훈이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잠깐. 아무 대책 없이 돌아가 봐야 또 말장난만 하다 시간 낭비 할 것 같아.’

[그럼요? 혹시 다른 계획이라도?]

‘계획을 떠나 우선 장소가 응급실이라는 게 가장 큰 문제야.’

[문제라구요?]

‘커튼을 둘러쳐 놨다고 해도 어차피 밀실은 아닌 거거든.

방음도 안 될뿐더러 아무나 막 열고 들어 올 수 있는 개방된 공간이잖아.’

[흐음, 그렇긴 하죠.]

‘거기서 설사 채원이를 공략했다고 쳐. 막 하고 있는데 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삽입만 한다고 미션이 성공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럼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지금 생각 중이야. 장소 섭외부터 다시 해야겠어.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잖아.’ 도훈은 응급실에서 나와 통로를 타고 1층 로비 쪽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오빠 믿지’ 립밤을 꺼내 발랐다.

[또 누구한테 사기를 치시려고요?]

‘나 직업여성한테 버프 걸려있는 거 맞지?’

[직업여성이라고 하시면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직장여성이라고 하십시오.]

‘좌우당간.’

[맞습니다. 직장 다니는 여성들에겐 특별히 호감도 버프가 걸려있습니다.]

‘좋아. 거기에 립밤까지 더하면 충분히 신뢰를 얻을 수 있겠지?’

[신뢰요?]

도훈은 바로 1층 원무과로 다가갔다.

여직원 한 명이 도훈을 보고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

여직원은 도훈의 훤칠한 외모가 마음에 드는 듯 상쾌한 미소를 머금었다. 좋은 첫인상을 남겼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도훈이 물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KBZ방송국에서 나왔습니다."

"방송국이요? 거기서 왜 이런 시골 병원에까지."

"실은 제가 섭외 담당인데요, 근처에서 드라마 로케 촬영 중이거든요."

"아···."

도훈의 훈훈한 외모가 먹혔는지 병원 직원은 곧이 곧대로 그의 말을 믿었다.

"그런데요?"

"실은 병원 씬이 하나 들어가는데 지금 장소를 알아보러다니고 있거든요. 병실이 하나 필요합니다."

"잠시만요, 이건 제 선에서 결정할 게 아니고 원무과장님께 여쭤봐야 할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일단 병실 구조가 촬영에 적합한지부터 확인하고 컨택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이 병원에 빈 병실이 남아 있을까요? 아, 1인실이면 더 좋구요."

"빈 병실이요? 잠시만요."

여직원은 컴퓨터를 두들기더니 곧 대답했다.

"네, 아직 남은 1인실이 있네요."

"혹시 잠시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아···. 입실 전이라 시건되어 있을 텐데···."

여직원이 곤란한지 입술을 깨물었다.

도훈이 환하게 웃으며 재차 말했다.

"좀 부탁드립니다. PD님께서 얼른 섭외하라고 성화셔서 ···."

"그, 그래요. 그럼 잠시 저랑 같이 가요."

여직원은 서랍에서 열쇠 꾸러미를 챙기더니 도훈을 병실로 안내했다.

‘오홋, 이거 진짜 먹히네?’

[당연하죠. 지금의 주인님에게 호감을 갖지 않기란 쉽지 않거든요. 비유하면 초절정 미녀가 낯선 남자에게 부탁하는 상황과 비슷하달까?]

‘내가 그정도로 잘생긴 건 아니잖아?’

[직장여성 버프 때문입니다.]

‘이건 정말 효과가 좋군.’

병실은 3층에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가는 도중 여직원이 물었다.

"혹시 근데 드라마 제목이 뭔지 여쭤봐도 돼요?"

"죄송합니다. 아직 매스컴에 알리지 않은 상태라 비공개 촬영중입니다."

"아···. 그러시구나. 근데 병원에서 찍는 장면이 있는 걸 보면 의학 드라마 뭐 이런 종류인가요? 장르만이라도 알려 주세요."

"메디컬 드라마는 아니고요, 쉽게 말하면 약간 판타지?"

"그럼 도깨비같은?"

"뭐 비슷합니다."

"와! 재밌겠다. 누구 나와요? 그것도 비밀이에요?"

"아···. 어디가서 절대 말하면 안됩니다."

"네. 절대 말 안 할게요."

"여주로 신혜정 배우가 나옵니다."

"세상에! 영화 멋진 신세계의 신혜정 배우요?"

"네. 그리고 남주는···."

도훈은 누구나 알만한 유명한 배우를 한 명 더 떠올렸다.

"최태식 배우입니다."

"그, 미안했다 사랑했다?"

"네. 맞습니다."

"와! 엄청나네요! 배우 이름만 들어도 대작인 것 같아요."

"하하, 그런가요? 참고로 이 병원이 로케 장소로 섭외되면 두 배우 얼굴을 직접 볼 수 있을 겁니다."

"저, 정말요?"

"네. 저도 친하진 않지만 편의를 제공해 주셨으니 나중에 사인이라도 한 장 받아드릴게요."

"어머, 진짜요? 좋아요!"

"병실은 이쪽인가요?"

"네. 잠시만요. 잠겨있어서."

여직원은 유명한 배우의 사인을 받아준다는 말에 신이 나서 병실문을 열어주었다. 도훈은 병실 안으로 들어가더니 정말로 촬영을 하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사각형을 만들어 보이며 구도를 잡는 척 했다.

"채광 좋고, 공간 충분하고···. 소품만 몇 개 바꾸면 딱 좋겠네요."

"와, 그럼 여기로 결정 된 거예요?"

"저는 섭외 담당이라 결정은 PD님이 하실 거예요. 사진 몇장 찍어가도 되죠?"

"네, 당연하죠."

도훈은 폰 카메라를 들고 여러 위치에서 의미없는 사진 들을 몇장 찍었다.

"다 됐습니다."

"벌써 끝난 건가요?"

"일단 PD님께서 사진 보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면 병원으로 직접 연락을 할 겁니다."

"네. 꼭 됐으면 좋겠어요! 최태식 배우랑 신혜정 배우가 우리 병원에 온다니! 정말 꿈 같아요."

"네. 저도 잘 됐으면 좋겠네요."

병실에 나온 두 사람은 다시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여직원이 신이 나서 엘리베이터에 오르는데 도훈이 안들어가고 멀뚱히 서 있었다.

"뭐하세요?"

"아, 제가 뭘 깜빡한 것 같아서···."

"혹시 병실에 뭐 두고 오셨어요?"

"잠시만요."

도훈이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금장으로 된 지포 라이터를 꺼냈다.

"여깄네요. 찾았습니다."

"그거 라이터 아니에요? 병원에선 금연인데?"

"담배 피우려는 게 아니고요, 잠시 이쪽을 봐주시겠습니까?"

"네?"

화르륵불꽃이 튀는 순간 여직원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도훈이 빠르게 1층을 누르더니 문닫힘 버튼을 누르고 빠져나왔다.

여직원 혼자 탄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걸 보며 도훈이 말했다.

"이걸로 병실은 확보했군."

[와, 완전 거짓말쟁이군요. 갑자기 웬 드라마 촬영 얘기를 하나 했습니다. 배우 사인 받아준다는 건 또 뭐고요.]

‘어차피 기억도 못 할테니 멋대로 씨부린 거야. 여직원은 아마 나를 만난 사실도 기억 못 할걸.’

[병실은 그렇다 치고 어떻게 채원양을 병실로 데려오려고요? 방법이 있으십니까?]

‘이제부터 해봐야지.’

도훈은 아까 여직원이 안내한 빈 병실로 다시 이동했다.

문이 잠겨있었지만 만능 열쇠가 있는 이상 열지 못할 문은 없었다.

다시 안으로 들어간 도훈이 실내에 설치된 거울을 보며 말했다.

‘로시. 변장 세트 중에 의사 가운도 있나?’

[의사가운이요? 네 있습니다.]

‘그거랑 적당히 얼굴을 다르게 보일 수 있는 도구도 챙겨 줘.’

[알겠습니다.]

거울 앞에서 변장 도구 세트를 착용한 도훈은 순식간에 돌변했다. 역용술처럼 얼굴 자체를 달라지게 할 순 없었지만, 의사 가운을 입고 두꺼운 뿔테 안경과 가발을 쓰자 얼핏 봐선 도훈이라고 믿기 힘든 30대 남자로 변모해 있었다.

"좋아. 이거면 깜빡 속여 넘길 수 있겠지."

변장에 성공한 도훈은 곧바로 응급실로 향했다. 마침 응급실은 갑자기 몰려든 환자로 정신이 없는 상태. 삼중 추돌사고가 발생했는지 엠뷸런스가 여러대 도착하고 들것에 실린 사람들이 여러명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틈을 탄 도훈이 재빨리 채원이 누워있던 침대로 이동했다. 그는 채원을 보자마자 목소리를 변조시켜 말했다.

"김채원 환자 분 맞죠?"

"네, 방금 다녀가셨는데요?"

채원은 변장한 도훈을 한 눈에 못 알아보고 무슨 일이냐고 되물었다.

"예후가 안 좋습니다. 정밀 검사가 필요할 것 같아서 일단 병실을 옮기려고 합니다."

"네? 예후가 아, 안좋다뇨? 그럴 리가 없는데?"

"바이탈 체크 결과 미약한 심실세동 증세가 포착되었습니다. 오전에 산에서 쓰러지셨다고 하셨죠?"

"네. 그건 사실 생리통이···."

"병명의 진단은 의사가 합니다. 혹시 몰라 검사하는 거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아니 잠시만요. 근데 제 담당 의사님은···."

"지금 응급실 상황이 급해서 심장외과에서 콜 받고 직접 내려온겁니다. 일단 이동하겠습니다."

"네? 아니 잠시만···."

채원이 뭐라 하기도 전에 도훈이 병상에 고정된 바퀴를 풀더니 뒤에서 밀기 시작했다. 하늘이 돕는지 하필 그 순간 교통 사고 부상자들이 모여있는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코드 블루, 코드 블루!"

심정지를 뜻하는 의학용어에 응급실이 난리가 났다. 그들은 병상을 밀고 나가는 낯선 사내를 의심할 여유도 없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다.

도훈은 유유히 응급실을 빠져나와 병원 침대가 한 번에 들어가는 의료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때 침대에 누워 있던 채원이 도훈을 보고 다시 물었다.

"저 근데 진짜 멀쩡하거든요? 그 검사라는 거 꼭 받아야 해요?"

"저는 지시대로 할 뿐입니다. 일단 병실에서 대기하고 계시면 담당의가 설명해 드릴거에요."

"아··· 이건 아닌거 같은데."

도훈은 아까 확보했던 1인 실로 채원을 데려갔다.

1인실에 있는 침대로 자리를 옮긴 채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막 수술해야 하고 그런건 아니죠?"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단순한 심장 초음파 검사만 할 겁니다."

"근데···. 여긴 입원실 아닌가요? 검사하는 데랑 거리가 먼 것 같은데요?"

채원을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내자 의사로 변장한 도훈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까 보셨다시피 응급실이 지금 난리라 급한 대로 1인 실로 옮겼습니다. 여기서 대기하시다 검사실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아···. 맞다. 저 같이 온 일행이 있는데 이쪽으로 옮겼다고 말 좀 전해주실래요? 아까 잠깐 밖으로 나갔었는데."

"이름이?"

"도훈이요. 아마도?"

"도훈. 네. 전달하겠습니다."

채원을 1인실로 옮긴 도훈이 씩 웃으며 빠져나갔다.

아직 비어있는 병실이긴 했지만 도훈은 만약을 대비해 밖으로 나가자 마자 방음 장치를 설치했다. 또한 병실 번호를 찾지 못하게끔 ‘착각의 문패’까지 걸었다.

‘이 정도면 완벽한 밀실이지?’

[역시 주인님은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이렇게 까지 치밀하게.]

‘한명의 여자를 따먹는데 만명을 꼬시는 마음으로 공략하는 거야.’

도훈이 변장 도구를 급히 정리했다.

곧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도훈이 병실 문을 노크했다.

똑똑-

"들어오세요."

채원의 대답에 도훈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벌써 익숙한 공간이었지만, 도훈은 처음 보는 것처럼 놀란 표정으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누가 너 여기로 옮겼다고 가보라길래·

··."

채원은 도훈을 보자마자 심란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갔었어요, 진짜! 무서워 죽는 줄 알았구만."

"왜? 무슨 일 있었어?"

"말도 마요. 응급실에 교통 사고 환자 우르르 들어오는데 피가 철철나고, 누군 막 심정지 되고···. 어휴."

"엠뷸런스 여러 대 들어오는 건 봤었어."

"암튼, 저 심장에 이상있다고 정밀 검진해야 한대요. 응급실이 복잡해서 일단 1인실로 옮겼다고."

"아, 그래? 부모님께 다시 연락해봐야하는 거 아냐?"

"그, 그렇겠죠?"

채원이 살짝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실 그녀는 부모님께 연락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제와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직 검사 결과가 나오거나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었으므로 최대한 뒤로 미루기로했다.

"참 근데 오빠 의대생이시잖아요."

"어."

"심실세동이라는 게 뭔 뜻이에요?"

"심실세동?"

도훈이 놀라는 척 큰 소리로 되물었다.

"누가 그러는데?"

"아, 아니 아까 저 여기로 데려다 준 의사가요."

"그 의사가 너보고 심실세동이랬다고?"

"왜 그렇게 무섭게 물어요. 혹시 죽을 병이에요?"

도훈의 격한 반응에 채원도 겁을 덜컥 먹었는지 울먹이는 표정이 되었다.

"아, 아니야. 증상 자체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나올 수 있는데 심장 박동에서 심실의 각 부분이 무질서하게 불규칙적으로 수축하는 상태를 말하는 거야."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저 진짜 위험한 거 아니죠?"

"혹시 아까 산에서 쓰러진 것과 관련이 있을까?"

"아니 그건···."

채원은 지금이라도 사실을 밝혀야 할지 고민했다.

단순히 생리통으로 쓰러진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심장병 진단이 나올 참이었다.

"그건 뭐? 짐작가는 게 있어?"

"짐작이라뇨?"

"아니 평소에."

"평소에 이런적 없었어요."

"가족력은?"

"가족력이요?"

"혹시 직계로 부모님이나 조부모님 중에서 심장병 앓으셨던 분이 계실까?"

"아, 아뇨? 제가 알기론···."

도훈이 걱정하는 척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으며 바짝 다가갔다.

"내가 의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문진 정도는 할 수 있거든. 도와줄게."

"어, 어떻게요?"

"천천히 생각해봐. 직계 말고라도 사촌 중에 심장병 관련 증상을 겪었던 분 계셔?"

"아··· 잘 모르겠어요."

"안 되겠다. 내가 직접 들어보고 싶은데."

"네?"

"청진기가 없네. 실습 때 했었는데···."

"정말요?"

"어. 혹시 돌팔이 같은 의사가 오진을 내렸을 수도 있잖아. 나도 들으면 딱 구분할 수 있거든."

"아···. 착각한 거면 좋겠어요."

"지금 도구가 없어서 그런데 혹시 촉진으로 해봐도 될까?"

"촉진이 뭐예요?"

"손으로 짚어보면 알 수 있을 거 같다고."

도훈이 마침내 흉계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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