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237화 (1,204/2,000)

1220. 2학년2학기-35-

도훈은 채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잡아뗄 것이 분명했지만, 채원이 얼마나 거짓말을 잘하는지 궁금했다. 채연은 곧바로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까 오빠 잘 때 보니까 뒷주머니에 폰이 있더라고요.

뒤척이다 깨질까 봐 제가 빼놨어요."

태도가 너무 당당해 로시가 고자질하지 않았다면 깜빡속아 넘어갈 만한 연기였다. 하지만 도훈은 찔러보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니, 그 말이 아니라 내 폰 열어 봤냐고. 안 본 깨톡이 하나 열려 있길래 하는 말이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정확하게 잘못을 지적했는데도 채원이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설마 제가 오빠 폰을 몰래 훔쳐보기라도 했다는 거예요, 지금?"

"아니야?"

"제가 왜요?"

믿는 구석이 있는지 채원이 따지자 도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내가 착각했나 보네."

"와, 진짜 어이없어."

채원이 무척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와, 저렇게 뻔뻔할 수가···. 정말이지 숨 쉬듯 거짓말을 하는 여자군요. 낯빛 하나 안 변하다니.]

‘그러게. 연기자 했으면 잘했겠는데.’

"미안. 내가 원래 깨톡을 잘 안 보는 편이거든. 대화창하나가 열려 있길래 이상해서 물어본 거야."

"쳇, 오빠가 착각한 거겠죠. 진짜 사람을 뭘로 보고···.

근데 뭐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으세요? 내가 보면 안 될 내용이라도 있나?"

"아냐, 그런 건."

"왜요? 오빠 여자 많게 생겼는데?"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느꼈는지 채원이 다시 들이대기 시작했다. 도훈은 이쯤 되자 채원이 무슨 속셈으로 자신에게 끼를 부리는지 궁금해졌다.

‘이상한데? 호감도만 봐선 이 정도까진 아닌 것 같은데.’

[조심하십시오. 질 나쁜 여자앱니다. 주인님을 곤경에 빠뜨릴 지도 모릅니다.]

‘내가 어디서 당하는 거 봤어? 그것도 여자한테?’

"내가? 어딜 봐서?"

그러자 채원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애초에 머리가 아프다는 것도 순 핑계같았다.

"잘생겼잖아요."

"내가 잘생겼다고?"

"하여간 남자들도 웃기다니까?"

"뭔 소리야 뜬금없이?"

"스스로 잘생긴 거 뻔히 알면서 괜히 모르는 척, 순진한척. 그거 컨셉이죠? 힘숨찐 같은?"

"힘숨찐?"

"힘을 숨긴 찐따 컨셉 말이에요."

"으음. 도통 뭔 소리 하는 줄 모르겠네. 암튼 부모님 언제쯤 오신다는데? 다시 연락이라도 해봐."

"알아서 오시겠죠. 왜요? 그렇게 떠나고 싶으세요? 애인 이랑 약속 늦으실까 봐?"

"자꾸 뭐라는 거야? 나 애인 없다고."

"에이, 거짓말."

"진짜야."

도훈의 확고한 대답에 채원이 실실 쪼겠다.

‘캬, 찔러보는 거 솜씨 보소?’

[이래저래 성가신 캐릭터군요. 얼른 혼쭐이나 내주십시오.]

‘그래야지. 가만있자, 미션 기한이 오늘까지랬나?’

[네. 정확히 금일 자정까집니다. 시간제한이 걸린 미션입니다.]

‘그럼 채원이 부모님이 병원 오셔서 채원이 데려가 버리면 나만 새 되는 거 아냐?’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근데 좀 이상합니다.]

‘어떤 점에서?’

[주인님 자는 동안 채원 양을 지켜본 결과 친구랑 통화한 거 말고 별다른 통화가 없었거든요. 대체 언제 부모님께 연락을 취했다는 걸까요?]

‘혹시 문자로 보낸 거 아니야?’

[아뇨. 주인님 주변에 계속 머무르고 있어서 제가 봤는데, 문자를 보낸 적도 없었습니다. 깨톡 역시 마찬가지고요.]

‘헐, 그럼 그것마저 거짓말이라고?’

[그냥 주인님을 붙잡아두려고 한 게 아닐까요?]

‘얘는 대체 거짓말이 아닌 게 뭐야? 아까 보니 나이도 속였더만?’

[나이를요?]

‘정보창에 따르면 스무살이래잖아. 자기 입으론 분명 스물한 살이라고 했었고.’

[헐, 그렇군요. 정말이지 이름 빼곤 죄다 거짓이군요.]

‘입만 열면 뻥이야, 하여간.’

"저도 남친 없는데."

"응?"

"저도 솔로라고요. 모솔이란 뜻은 아니고요."

"나 안 물어봤는데?"

"피, 그냥 없다고요! 내 입인데 말도 못 하게 하네."

채원이 토라진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휙 돌렸다.

이쯤 되자 도훈은 자신이 채원을 공략하는 건지, 채원이 자신을 꼬시는 건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다만 이해가 안 되는 건, 자신에 대한 호감도로 보나 성적 개방성으로 보나 결코 지금 수준에서 보일 수 없는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순진한 남자라면 껌뻑 속아 넘어갔겠지만, 상대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도훈에겐 이상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어쩨 점점 수상해지는데.’

[네?]

‘현재 나에 대한 채원이의 호감도는 67이야. 이성적으로 관심을 보일 정도지, 절대 좋아하는 단계까진 아니란 뜻이지. 스킨십도 힘들고. 근데 보면은 대놓고 끼를 부리고 있잖아. 나한테 들이대면서.’

[한마디로 연기를 하고 있다는 뜻이죠?]

‘어. 그것도 굉장히 가식적으로. 이유를 알아야겠어.’

"근데 왜 넌 남자친구가 없어?"

"있었으면 여자친구들하고 셋이서 지리산에 왔겠어요?"

"남자친구 있어도 친구랑 등산은 올 수 있지."

"뭐 하러요? 하여간 민정이 말을 듣는 게 아니었어."

"민정이?"

"오빠한테 폰 건네 준 친구요. 걔가 그러더라고요. 요새 등산하는 여자들 인기라면서. 등산 갈 때 레깅즈 입고 가면 남자들이 꽁무니를 졸졸 쫓아온다고."

그러면서 채원이 은근슬쩍 레깅즈 입은 다리를 드러냈다.

노골적인 어필에 도훈이 애써 눈길을 돌리며 물었다.

"정말 그래?"

"그럴 리가 있겠어요? 막상 가니까 죄다 아저씨들 뿐이더라고요. 난 꼰대들 딱 질색인데."

그러면서 은근슬쩍 도훈을 쳐다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오빠같은 대학생이 낫지."

"그렇군."

"근데 오빤 왜 산에 왔어요? 혼자 오신 거 맞죠?"

"어. 뭘 좀 찾을 게 있어서."

"산에서요? 왜, 몰래 금덩이라도 묻어 두셨나?"

대화가 길어질수록 채원이 은근슬쩍 말을 놓기 시작했다. 물론 도훈은 그녀와 친해져야 하는 처지였으므로 최대한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야. 그냥 비유적인 표현이야. 난 가끔 머리 복잡할 때 혼자 산에 오르거든."

"흐음. 나 오빠가 왜 여자친구가 없는 줄 알겠다."

"그래?"

"첫째, 여자 맘을 너무 몰라요."

‘그럴 리가 있나. 여자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데.’

[자기가 들이대는 걸 안 받아 줬다고 그러나 본데요.]

"그럼 둘째는 뭔데?"

"둘째, 취미가 너무 고리타분해요. 세상에 등산이라니.

20대가 무슨 등산이 취미에요?"

"너도 산에 올랐잖아?"

"아니 그건 아까 말했지만 민정이가···. 됐고, 하나 더 있어요."

"또 있어?"

"마지막으로 오빤 너무 숫기가 없는 것 같아요."

[억!]

‘미친. 나보고 숫기 없덴다.’

[성욕의 화신아닙니까? 카사노바의 재림, 히든 클래스대물 플레이어!]

‘그냥 날 도발하는 거 같은데?’

[도발요?]

‘아까부터 자꾸 자길 건드려 보라는 식으로 말이야. 왜 저러지? 날 딱히 많이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속마음을 한 번 읽어보시죠.]

‘그렇지. 마음의 소리 준비해.’

도훈은 속으로 어이가 없었지만, 채원의 꼼수에 넘어간 것처럼 흥분한 척 소리쳤다.

"내가 숫기가 없긴 왜 없어?"

"아니에요?"

"날 언제 봤다고!"

<히히, 좀만 더 꼬시면 넘어가겠는데? 역시 예상대로 공부랑 헬스만 열심한 범생인가봐. 그러니 카톡에 여자들 메시지가 십수개 쌓여도 여자친구 하나 없는 거지.>

"딱 보니까 알겠는데요? 꼭 여러 번 봐야 아나? 혹시 저 자주 보고 싶으세요?"

"무, 무슨 말이야 갑자기?"

<의대생이라고 했었지? 뭐, 이 기회에 의대생 남친 하나 두는 것도 나쁘진 않지. 의대생이면 집도 적당히 살 거 아냐? 용돈 받는 거 빨아먹기도 좋고, 과외 시켜서 선물 사달라고 졸라도 되고.>

[와! 역시 이 속셈이었군요.]

‘나를 현금인출기로 본 거 맞지?’

[확실합니다. 주인님을 공부만 열심히 하느라 여자도 제대로 못 만난 호구 정도로 보고 있군요.]

‘내가 그 정돈 아니지 않아? 이 얼굴에, 이 몸매에 호구라고?’

[아무래도 의대생에 대한 선입견 같은 게 있을 테니까요.

실제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들어가기도 무척 어렵고, 또 공부도 하면서 연애를 병행하는 건 쉽지 않으니까요.]

‘쉽게 말하면, 호감 있는 척 들이대서 날 꼬신 다음 모기처럼 빨대 꽂아서 쪽쪽 빨아 먹으려고 했다는 거지, 지금?’ 채원의 속셈을 간파한 도훈은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 쉬듯 거짓말을 일삼고, 사기만 쳐서 살아온 인생이라 그런지 진심은 하나도 없으면서 그저 도훈을 움직이는 AT M기 따위로 취급한 것이다.

차라리 자신과 한번 자보고 싶다거나, 얼굴이 잘생겨서 매력을 느꼈다 한다면 이 정도로 기분은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한테 빌붙으려는 꼼수보다, 자신의 성적 매력이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도훈이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와, 열받네. 진짜로 꼬셔버리고 싶어지는데?’

[어차피 미션 때문에 꼬셔야 합니다만?]

‘그게 아니라 진짜 나한테 푹 빠지게 만들어서 간이고 쓸 개고 다 바치게 하고 싶다고.’

[굳이 그럴 필요까지···. 그리고 오늘 지나면 다시 볼 사이도 아닌데요. 부산에 산다지 않았던가요?]

‘아, 그런가?’

"왜 대답이 없어요? 자주 보고 싶냐니까요?"

"내가 널 왜? 그리고 너 부산 살잖아."

"아닌데요?"

"아니라고? 아깐 분명 부산에서 부모님 오신다고···."

"제 고향이 부산이란 거죠. 지금은 방학이라 집에 잠깐 내려왔고요. 그리고 저 서울에서 학교 다니거든요?"

"엥? 서울이었어? 어딘데?"

"왜요? 같은 서울이라니까 솔깃하세요? 아항 제가 부산에서 대학 다니는 줄 아셨구나?"

"아니 나는 당연히···."

"저 신성 여대 다녀요."

"신성이면···. 흑석동 근처 맞지?"

"네."

"그랬구나."

"오빤 어딘데요?"

"나?"

"저도 알려줬으니까 말해주세요."

"국성대."

"오호, 그럼 지금은 본과생?"

도훈은 순간 질문을 이해 못 하다가 채원이 자신을 의대 생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니, 예과야."

"아직도요? 그거 2년만 하는 거 아니었나?"

"맞어. 근데 난 대학을 좀 늦게 들어간 편이라."

"아아! 그랬구나. 어쩐지 교양 어쩌고···."

"교양이라니?"

도훈이 날카롭게 찔렀다.

아무리 거짓말이 능수능란한 사람도 자꾸 말을 하다 보면 말이 꼬이기 마련. 도훈은 채원이 마침내 말 실수를 했다고 여겼다. 이를 놓칠 도훈이 아니었다.

"아니 어쩐지 교양있는 분 같더니 지금도 교양수업 듣고 계셔서 그랬나 보다고요."

"그게 뭔 말이야?"

"됐어요. 그냥 오빠 매너좋다고 칭찬한 건데 뭘 부끄럽게 자꾸 물어요?"

도훈은 채원의 순발력에 혀를 내둘렀다.

‘와, 저걸 저렇게 빠져나간다고?’

[대단하군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또 거짓말을!]

‘이쯤 되면 천하제일 거짓말쟁이 대회 우승자 출신 아니냐?’

[그 점에선 주인님도 만만치 않으신데요?]

‘내가?’

[평소에도 여자들한테 잘 쓰지 않습니까? 당장 의대생이라고 구라치신 것도요.]

‘아니 그건 당시 상황이···. 가만, 그 방법을 이용해 볼까?’

[왜요? 좋은 방법이라도 떠오르셨습니까?]

‘이독공독이라는 말 알아?’

[독으로써 독을 공격한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상대가 계속 거짓말로 나온다면 똑같이 거짓말로 맞서겠다 이거야. 누가 더 뻥이 센가 보자고.’

[아니 왜 굳이 그런···.]

‘어차피 나한테 빨대 꽂으려던 여자애잖아. 자꾸 날 기만 하려 한다면 역으로 설계해 주겠다 이거야.’

"그나저나 여기 병원 좀 심하네."

"네?"

"아니. 아무리 지방 병원 응급실이라도 그렇지 의료설비가 좀···."

"설비가 왜요? 국성대 대학병원보다 후져요?"

"아니 우리 대학병원 말고···."

"말고요?"

"우리 아버지 병원 보다 못한 거 같아서."

"아···. 아버님도 그럼 의사?"

채원의 태도가 급 공손해졌다.

도훈은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아니."

"방금 아버지 병원이라고···."

"병원장이셔. 지금은 의사 안 하시거든. 뭐, 의사 출신이긴 하지만."

"아 병원장···. 와, 그럼 의사 집안이셨네요?"

"어. 위로 형이랑 누나도 싹 다. 그래서 내가 의료기기 같은 건 어려서부터 자주 봤었거든."

"네."

"저거 봐 저거. 저게 지금 제세동기라고 있는 건데 엄청 노후화됐잖아."

"전 말해도 뭔지 모르겠어요."

[아니 주인님 뻥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채원이는 모기같은 여자잖아. 기왕이면 살집이 포동포동 피 잘 빨릴것처럼 보이는 게 좋지.’

[그래도 병원장 아버지에 있지도 않는 형 누나까지 창조해내시다니요.]

‘흐흐. 기왕 칠거면 크게 쳐야지.’

"여튼 지방은 이래서 문제야. 비하하는 건 아닌데, 사고 나서 여기 왔다간 살 사람도 죽겠네."

"그래요?"

"뭐, 의료 인프라 문제도 있고 그런 거니까 딱히 여길 탓하는 건 아닌데···. 씁쓸하긴 하네."

"근데 오빠 그럼 막내에요?"

"응?"

"가족이 다 의사시라면서요? 아까."

"아, 우리 형이랑 누나? 어. 형은 지금 한국대 병원에서 전임교수고 누나는 미국에서 펠로우 하고 있어."

"와 뭔지 몰라도 대단하시네요. 한국대 병원이면···."

"우리형이 좀 잘나긴 했지. 한국대 의대 나와서 한국대 병원에서 교수까지 됐으니까. 그에 비하면 나는···."

"왜요? 오빠도 의대생이잖아요."

"난 국성대잖아."

"그래도요. 그게 어딘데요? 어차피 의사되는 건 다 똑같은데. 오빠도 잘나셨어요."

"그래?"

"네. 진짜 딱 남친 삼고 싶은?"

"농담이 심하네."

"농담 아닌데?"

채원이 눈을 더욱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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