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235화 (1,202/2,000)

1218. 2학년2학기-33-

의대생이라는 말에 채원이 솔깃해 물었다.

"···의대생이라고?"

-몰랐나? 가시나야, 니 그 오빠 아니었음 진짜 큰일 날 뻔 했데이!

친구의 말을 들어보니, 자신이 순간적으로 졸도한 사이 스스로를 의대생이라고 밝힌 도훈이 응급조치를 해 병원으로 데려왔다는 사연이었다.

"알았어, 일단 끊어봐."

전화를 끊은 채원은 어느 순간 깊이 잠들어 버린 도훈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저 몸매가 어딜 봐서 의대생이란 거지?’

반팔 티만 입고 누워있는데도 도훈의 몸매는 돋보였다.

어깨가 쩍 벌어진 체형에, 근육질의 상체가 유독 탄탄해 보였다.

‘···하긴 의대생이라도 헬스를 열심히 할 수 있는 거니까.’

채원은 호기심을 가지고 도훈을 찬찬히 뜯어 보았다.

오뚝한 콧날과 시원시원 넓은 이마가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한 미남이었다. 게다가 의대생이라는 후광까지 덧씌워지자 채원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이 오빠 뭐지? 보면 볼수록 잘 생겼잖아?’

극심한 생리통으로 의식을 잃었던 채원이 정신을 차린 것은 도훈이 한참 산중을 뛰어 내려오던 시각.

눈을 뜨자 배경이 휙휙 바뀌며 빠른 속도로 지나쳐갔다.

영문을 모르는 채원은 덜컥 겁이 난 나머지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이윽고 산을 내려와 도훈이 급히 지나가는 차를 잡아 세우는 모습에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땐 너무 창피해 도저히 깨어났다고 말할 수 없었다.

‘빈혈약 먹는 걸 깜빡해버렸어. 심한 날에는 꼭 챙겨 먹으라고 했는데···.’

타고나길 생리통이 심했던 채원은 생리 기간이 되면 하루 이틀은 앓아눕는 타입. 그 와중에 친구들과 추억을 남긴 답시고 무리하게 등산까지 왔으니 탈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아니고 생리통 때문에 졸도까지 했다고 밝히는 게 너무나 창피하고 쪽팔려 일부러 응급실에 와서까지 잠든 척을 했던 것이다.

"으음-."

그때 잠들어 있던 도훈이 뭐라 중얼거리더니 몸을 뒤집었다. 도훈이 깨어난 줄 알고 화들짝 놀랐던 채원은 다시 쿨쿨 자는 모습에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근데 이 오빠도 진짜 웃기네? 눕자마자 기절한 것처럼 뻗어버리다니···. 등산하면서 날 밤이라도 샌 건가?’

한참 도훈이 자는 모습을 지켜보던 채원은 문득 돌아누운 도훈의 뒷주머니에 꽂힌 뭉툭한 물체를 발견했다. 생김새로 보아 스마트 폰처럼 보였다.

‘저러다 깨지는 거 아냐?’

뒤척이다 휴대전화기가 부서질까 걱정된 채원이, 도훈의 뒷주머니에서 스마트 폰을 꺼냈다. 꺼낸 폰을 도훈의 머리 맡에 놓으려는데,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맞다. 연락처 알아야지?’

도훈의 연락처가 궁금했던 채원이 잠든 도훈 몰래 스마트 폰을 열었다. 하지만 지문인증이 걸려있어 도저히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혹시?’

채원은 문득 패턴 입력으로도 암호를 해제할 수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패턴을 대충 걸어 놓는다는 사실도.

채원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크게 ‘ㄱ’자를 그리자 놀랍게도 암호가 풀려버렸다.

‘헐! 대박 단순!’

채원은 혹시나 도훈이 깰까 두려워, 등 돌린 상태로 그의 폰을 살폈다. 그때 깨톡이 도착했는지 상단에 알림 바가 내려왔다.

-여자?

이름을 보고 여자라는 걸 확인한 채원은 힐끔 도훈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제멋대로인 성격에다 손버릇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남의 폰을 몰래 훔쳐보는데도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궁금한데 한 번 열어나 볼까?’

걸리지만 않으면 상관없다는 마음에 채원이 깨톡 어플을 실행시켰다. 대화창을 클릭해 읽지만 않으면 절대 들킬 리 없다고 판단했다.

깨톡 창을 열어 본 채원은 깜짝 놀랐다.

한 화면 전체에 안 읽은 메시지가 떠 있던 것.

‘깨톡을 아예 안 보는 타입인가?’

처음 든 생각은 도훈이 의외로 무심한 편이라 깨톡을 하루에 한 번 열어볼까 말까 하는 느긋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화면의 하단에 온 메시지의 시각이 채 2시간이 안 지났다는 걸 깨달은 채원은 이내 생각을 고쳤다.

‘2시간 만에 12명에게서 서로 다른 메시지라?’

궁금증이 인 채원은 발신자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단톡방으로 보이는 두 개를 제외하면 10개가 모두 여자에게서 온 것이었다. 게다가 프로필 화면으로 얼핏 보이는 조그만 사진만으로도 모두가 어리고 예쁜 여자들이란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헐, 완전 바람둥이였잖아?’

나름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도훈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던 채원은 불쑥 실망감이 밀려왔다. 아무리 그래도 미확인 메시지 대부분이 여자들에게서 왔다는 건 심각한 바람둥이라는 증거였다.

그러다 문득 잠들어 있는 도훈에게 시선이 향했다.

보고 또 봐도 훌륭한 몸뚱이에 채원이 생각을 달리했다.

‘아니지. 따지고 보면 저 오빠가 먼저 연락을 한 게 아니라 여자 쪽에서 일방적으로 연락했다고 볼 수 있는 거잖아? 저 얼굴에, 저 키에, 심지어 의대생이라고 하면 당연히 여자 쪽에서 먼저 들러붙지 않겠어?’

최대한 호의적으로 상황을 해석한 채원이 몰래 깨톡의 내용을 일일이 살폈다. 대화창을 터치해 들어가면 읽었다는 흔적이 남기 때문에, 대화방 목록에 보이는 일부분만 확인했다.

-오빠, 곧 2학긴데 개강 준비는 다 하셨어요?

-도훈 오빠. 2학기 교양 수업 들으려는데 추천···

-오빠. 혹시 학교세요? 저 잠깐 나왔는데, 학교 드러난 부분까지만 보더라도 대부분 여자 쪽에서 먼저 도훈을 찾는 내용. 그것을 본 채원은 괜히 마음이 편해졌다.

‘역시 여자 쪽에서 먼저 들이대는 거였어. 하여간 여우 같은 계집애들. 잘생긴 남자라면 가만두질 않는다니까?’

채원도 남자들에게 시달려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도훈의 마음을 십분 이해 할 수 있었다.

‘이름이 도훈인가 보구나.’

채원은 도훈의 폰에서 자기 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부재중 통화가 남자 이내 통화목록을 삭제한 채원은 조용히 폰을 내려놓았다. 절대 들킬 수 없는 완전 범죄였다.

‘히히, 안 그래도 남친하고 깨지고 외로웠는데 잘 된 일일지도?’

채원은 뭔가 운명적인 만남이라는 생각이었다. 빈혈이 심한 병약 미소녀와, 신체 건장한 의대생 남친. 우연한 산 행 중 만남까지. 딱 천생연분이었다.

‘똥차 가고 벤츠 온다더니, 나에게도 이런 행운이!’

채원이 혼자 행복한 상상에 빠져 즐거워하던 중.

갑자기 커튼이 젖혀지며 의사 한 명이 들어왔다.

"응? 왜 커튼을···."

"아···."

채원이 당황해 대답을 못 하자 의사가 물었다.

"이 환자분 아까부터 계속 누워있는 거죠?"

"네?"

"아, 제가 방금 당직 교대를 해서 환자 인수인계 중이거든요."

채원은 그제야 의사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교대 근무가 많은 응급실 특성상 처음 진료를 보았던 의사가 퇴근하고 새로운 의사로 바뀐 것이다.

‘이 사람은 내가 실려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구나?’

거짓말에 능수능란한 채원이 급히 팔에 꽂힌 링거를 등뒤로 감추었다.

"네. 한숨 자고 나면 괜찮을 거라고 하셨어요."

"아직도 보호자 연락이 안 됐나요?"

"아뇨. 제가 대신 연락했어요. 부모님께서 데리러 오신다고."

"아···. 여자친구분인가요?"

"네, 네."

"알겠습니다. 별 이상 없다고 했으니 깨어나면 원무과 안내 받고 퇴원하시면 됩니다."

"네."

교대로 바뀐 의사는 정신이 없는지 환자가 바뀐 것도 구분을 못 하는 눈치였다. 인수인계 해 준 의사가 ‘그냥 잠든 척’하는 거니 신경 안 써도 된다고 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부분도 있었다.

"그럼 이만."

"저, 근데 커튼은 치고 있으면 안 되나요?"

"왜요?"

"아니, 제가 피만 보면 기절할 것처럼 놀라는 증상이···."

채원이 잔뜩 겁먹은 표정을 짓자 의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Blood phobia시구나. 네, 알겠습니다."

괜히 의학용어를 들먹이며 아는 체를 하던 의사가 떠나가자 다시 커튼을 치던 채원이 피식 웃었다.

‘웃기시네. 영어로 말하면 있어 보이는 줄 아나?’

다시 둘만 남게 된 채원은 흐뭇한 표정으로 도훈을 내려보았다.

* * *

"크크. 언제까지 쥐새끼처럼 숨어지낼 수 있을 줄 알았나?"

"···이, 개자식들!"

도훈이 안갯속을 헤치고 나갔다. 희뿌연 안개는 누군가 도술을 부린 것처럼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도훈은 가슴에 중상을 입었는지 상반신이 피칠갑을 한 모습이었다.

쒜에엑-!

그때 안갯속에서 암기가 날아들었다.

도훈이 특유의 반사신경으로 피해 보려 했지만, 반달처럼 생긴 무기는 유도탄처럼 정확히 그의 아킬레스건을 자르고 되돌아갔다.

푸학-!

피가 분수처럼 뿜어지며 도훈이 끝내 바닥으로 쓰러졌다.

"크헉!"

도훈은 발목 뒤에서 뿜어지는 피 보라가 언젠가 보았던 BJ 가영의 분수쇼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미친. 곧 죽는 마당에도 그딴 생각 뿐이라니.’

잠시 후 안개를 가르며 4명의 인물이 쓰러진 도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근육질의 40대 남자. 젊고 호리호리한 청년.

요사스럽게 예쁜 백발의 여자. 마지막으로 또래로 보이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세상에. 무슨 플레이어가 이렇게 허약하담?"

"그러게. 이제껏 만났던 플레이어 중에서 역대급이네.

하긴, 클래스가 섹서랬지?"

"섹서가 뭔데?"

"뭐긴 뭐야? 박고 싸기만 할 줄 아는 천하의 난봉꾼이지."

"뭐? 푸하하하! 무슨 그딴 플레이어가 다 있어!"

네 사람은 쓰러진 도훈을 내려다보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이상하게도 그들의 얼굴은 짙은 음영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씨발, 나 여기서 죽는 거냐. 로시.’

[아아···. 주인님, 주인님과 만나 행복했습니다.]

‘빌어먹을. 아이템이고 스킬이고 죄다 쓸모도 없는 것들만 잔뜩 뽑아서는···.’

도훈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크게 후회했다.

레벨 업을 위해 대물과 섹스킬에 올인 한 것이 어쩌면 크나큰 패착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차라리 PK단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생존스킬이나, 아니면 그들과 맞서 싸워서도 꿀리지 않을 전투 스킬부터 익혔어야 했다고. 죽고 나면 소용도 없을 스킬들을 뭐하러 아등바등 긁어모았는지 모르겠다면서.

"그럼, 이제 떠날 시간이구나. 깔끔하게 목을 쳐줄 테니 고통 없이 가거라."

"잠깐."

"왜?"

"근데 이 새낀, 좆으로 까불던 놈이잖아? 목을 치기 전에 좆부터 자르는 건 어때?"

"엥?"

"맞네. 안 그래도 얼마나 큰지 궁금했는데."

"일단 바지부터 벗겨야 되는 거 아니에요?"

"벗겨!"

두 팔을 제압당한 도훈은 속절없이 팬티까지 홀라당 벗겨지고 말았다. 다 큰 성인 앞에서, 그것도 목숨을 노리는 적들 앞에서 반 나체가 되자 수치심이 밀려왔다.

"이야, 대물은 대물이네!"

"휘유, 한국인 맞어? 혼혈 아님?"

"안 꼴려도 이 정도면 꼴리면 대체 얼마란 소릴까?"

"그냥 죽이기 아까운데 잠깐이라도 노리개로 쓰다 죽이는 건 어때요?"

"안 돼. 이놈이 행한 패악질이 극에 달했어. 잡히는 대로 즉결 처분하라는 상부의 명령이야."

‘명령이야.’ 라고 외쳤던 사내가 어디서 났는지도 모를 칼을 망나니처럼 치켜들었다.

칼끝은 정확히 도훈의 대물을 노리고 있었다.

"부디 다음 생애에는 극락왕생하시오."

휘이익-!

서슬 퍼런 칼날이 도훈의 가랑이 사이로 떨어졌다.

"아, 안돼! 내가 고자라니!"

"예? 오빠? 왜 그러세요?"

"고자라니!!!"

순간 잠들어 있던 도훈이 식은땀을 흘리며 벌떡 일어섰다.

새하얀 커튼으로 둘러쌓인 공간.

옆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주인님,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어, 어떻게 된 거야? 나 죽은 건가?’

[무슨 소립니까? 여긴 병원입니다. 정신 차리십시오.]

‘병원? 진짜 내가 고자라고?’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도훈이 화들짝 놀라 가랑이 사이를 확인했다. 다행히 물건은 멀쩡했다.

[아무래도 자는 사이 악몽을 꾸신 것 같습니다만···.]

‘아, 악몽이라고?’

"괜찮으세요?"

그제야 정신이 든 도훈이 사태를 파악했다.

자신이 어쩌다 병원 침대에 누워있으며, 눈 앞의 처자가 누구였는지도 떠올랐다.

"아···. 나 혹시 방금 잠꼬대 했어?"

"네. 갑자기 고라니? 어쩌고 소리치더니 벌떡 일어나시던데요? 혹시 산에서 고라니 만나셨어요?"

"고, 고라니···. 어, 그, 그렇지."

"어머, 근데 식은 땀 좀 봐. 잠시만요."

채원이 목에 매고 있던 손수건을 풀더니 도훈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도훈은 잠을 깬 직후에도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다.

‘로시, 너무 생생한 꿈이었어.’

[대체 무슨 꿈이시길래 그러십니까?]

‘혹시 내 꿈은 못 들여다보나?’

[네. 무의식의 세계까지는 확인할 수 없으니까요]

‘아니···. 그러니까.’

도훈은 꿈속에서 플레이어에 쫓긴 이야기를 했다.

죽기 직전 잦이가 잘리는 수모를 당한 일까지.

[고자라고요?]

‘어. 다행히 잠결에 웅얼거리는 소리라 채원이가 고라니로 알아 들은 모양이야. 진짜 고자라니 하고 벌떡 깼으면 얼마나 쪽팔렸겠어? 어우 씨.’

[흐음. 이상하군요. 어째서 그런 꿈을···. 혹시 최근에 그 일 때문에 심적으로 위축되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불길한 조짐도 있으셨고···, 주인님이 워낙에 PK단에 신경쓰시니.]

‘그랬으면 좋겠는데, 혹시라도 예지몽 같은 것일까봐 걱정이야.’

[예지몽이라뇨?]

‘나에게 있는 귀기묘묘 스킬 말이야. 혹시 미래를 꿈으로 보여주기도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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