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2학년2학기-32-
운전자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도훈은 빠르게 여자를 병원으로 후송시킬 수 있었다. 병원에 도착한 도훈은 그대로 채 원을 둘러업고 응급실로 뛰어들었다.
"무슨 일이죠?"
"등산 중에 산에서 쓰러졌어요. 호흡과 맥박은 있는데, 의식은 없고요."
응급실에 있던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빈 병상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눕히시죠. 진찰해 보겠습니다."
도훈이 채원을 조심스럽게 병상에 눕혔다. 의사는 채원의 눈꺼풀을 강제로 뒤집어 동공반사를 확인하는 등 신속한 조치에 들어갔다.
멀뚱히 구경하고 있던 도훈에게 서류철을 가슴에 안은 간호사가 물었다.
"환자분 보호자 되시나요?"
"아…. 네 일단은요."
"잠시 이쪽으로 오셔서 서류 좀 작성해 주시겠어요?"
도훈은 간호사의 질문에 따라 서류를 기입했다.
"환자분 성함이?"
"채원이요."
"…채원. 외자인가요?"
도훈은 순간 머뭇거렸지만, 괜히 망설였다가 오해를 받을까 봐 대충 얼버무렸다.
"예, 뭐."
"그럼 채원 환자분하곤 어떤 관계 시죠?"
"음, 친구입니다."
"친구요?"
"일행들과 함께 등산 중에 쓰러졌어요. 제가 급하게 업고 내려왔습니다."
"그러시면 남자친구라는 뜻인가요? 죄송한데, 법적인 관계가 아닌 이상 보호자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혹시 환자분가족하고 연락이 될 수 있을까요?"
"네, 잠시만요."
도훈은 채원의 친구에게서 받은 폰을 꺼냈다. 친구들에게 가족의 연락처를 물어본 다음 상황을 전달하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폰을 꺼내자마자 난관에 부딪혔다. 지문인 식이 걸린 상태라 폰을 열 방법이 없었다.
"앗!"
"왜 그러시죠?"
그것도 심지어 암호를 실수로 잊어버리면 주인도 못 찾는다는 악명 높은 에이폰이었다.
"어…. 급하게 산에서 내려오다 다른 친구랑 폰이 바뀐것 같아요. 제 폰이 아니네요."
"저런…. 혹시나 응급 상황이 되면 수술 동의가 필요한데…."
간호사가 난처해하고 있는데, 채원을 보고 있던 의사가 도훈을 찾았다.
"보호자 분? 잠시 이쪽으로."
의사는 도훈을 부른 다음 병상이 아닌 구석으로 데려갔다.
"왜 그러시죠?"
"환자분이 언제 쓰러지셨다고 했죠?"
도훈은 자신이 최초 발견한 시간과 산에서 내려온 시간, 그리고 병원까지 차로 이동한 시간을 종합해 계산했다.
"대충 30분 넘은 것 같아요."
"30분 전…. 쓰러지실 때 특이사항은요? 머리를 다쳤다거나."
"아뇨. 외상은 없었고요. 쓰러진 뒤에도 호흡과 맥박은 정상이었습니다."
"그죠?"
"네?"
"제가 계속 살펴봤는데 정상 맞습니다. 사실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어서요."
"어떤 거요?"
"동공반사 결과 현재 의식이 돌아온 상탭니다."
"네?"
이번엔 도훈이 놀랐다.
"의식이 있다고요?"
"네."
"근데 왜 정신을 못 차리죠?"
"아뇨. 깨어있는 상태 맞습니다. 잠든 척하는 겁니다."
"아니 그게 무슨…."
"저도 수상해서 진찰하면서 몰래 지켜봤는데, 슬쩍 눈을 떴다가 저랑 눈이 마주치니 다시 기절한 척 눈을 감더라고요. 깨어 있는 거 맞습니다."
"아…."
"다만 현 상황이 쪽팔리고 민망해 기절한 척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일시적인 쇼크로 쓰러졌다가 보호자 분이 환자분을 업고 내려오는 동안 정신을 차렸을지도."
"무슨 그런…."
"이해가 안 되시겠지만, 종종 있는 일입니다. 그래도 처음 쓰러진 이유를 알 수 없으니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지켜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엔 왜 쓰러진거죠 그럼?"
"이유는 모릅니다. 기립성저혈압이나, 일사병, 혹은 등 산 중이었다고 하면 발을 헛디뎌 낙상했을 수도 있고요."
"음…."
"일단 안정을 위해 링거 맞춰놨으니 다 맞을 때까지만 기다리시죠. 시간이 흐르면 스스로 깨어난 척 할 겁니다.
적당히 연기에 속은 척해주시고요."
의사의 당부에 도훈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 말이 사실이라면, 채원이 처음 어떤 이유로 쓰러졌든 그 뒤부터는 순전히 연기를 했다는 소리였다. 사실을 알게 된 도훈은 속았다는 생각에 갑자기 열이 확 뻗쳤다.
‘아니, 누군 사람 살려보겠다고 미친 듯 산을 뛰어 내려왔는데 그게 기절한 척 하는 연기였다고?’
허탈감에 도훈은 손발이 무거워지고 피곤이 한 번에 몰려왓다. 실은 그 역시 날을 꼬박 센 상태로 등산까지 했기 때문에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던 것.
"아오, 열 받네 진짜."
기만당했다는 생각과, 피곤함까지 겹치자 도훈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도훈이 성큼성큼 채원이 누워있던 병상으로 다가갔다. 채원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는데, 의사의 말을 듣고 나서 보니 의식이 없다니 보다 그저 잠을 자는 것과다를 게 없는 모습이었다.
"…일어나."
도훈은 의사의 당부도 까맣게 잊고 곧바로 채원에게 말했다.
"일어나라고, 깨어난 거 다 아니까."
"……."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 이거지?"
평소의 도훈이라면 모른 척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피곤 때문에 평소보다 예민해진 상태에서, 고생고생해서 병원까지 데려온 것이 떠오르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도훈은 채원에게 다가가더니 갑자기 옆구리를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일어나라고."
"……크, 큽"
예민한 부위였는지 채원이 곧바로 몸을 비틀며 반응했다. 그러나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채 꾹 참았다.
"계속 참아봐 한 번."
약이 오른 도훈은 이번엔 팔을 위로 번쩍 들더니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 이쯤 되자 채원도 참지 못하고 몸을 배배꼬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꺄, 꺄앗, 그, 그만요. 간지럽단…."
채원이 눈을 뜨자 도훈이 화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뭐하는 거야 지금?"
"……죄송해요."
"정신이 들었으면 말을 해줬어야 할 거 아냐?"
도훈이 화가 나서 따지자 채원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깨,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어요. 정신이 들고 보니 오빠가 저를 업고 막 산길을 뛰어 내려가는 중이라…."
"뭐?"
"창피하기도 하고, 민망해서 말을 못 했다고요."
"그럼 차 타고 병원으로 오기 전에 말해도 됐잖아?"
"그게…. 저도 타이밍을 놓쳐버려서…."
"어휴, 진짜."
도훈은 어이가 없었지만, 채원이 너무 민망해하는 통에 더 채근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눈을 뜬 채원이 너무나 예뻤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화가 수그러들고 말았다.
‘뭐야, 얘는? 눈이 왜 이렇게 커?’
채원은 쌍꺼풀 짙은 눈에 유난히 눈이 큰 편이었는데, 얼굴 생김새가 오밀조밀한 것이 상당한 미인이었다. 그 와중에 키도 크고 몸매도 늘씬한 편이라 도훈은 더 화를 낼 수 없었다.
[아니, 왜 혼내다 마십니까?]
‘젠장, 열 받았는데 화를 낼 수가 없잖아.’
[왜요?]
‘너무 예쁘니까.’
[아, 아니….]
"암튼 이제 괜찮다는 거지?"
"……."
"이건 친구 핸드폰이야. 좀 있다 전화 오면 병원위치 알려주고…."
그때 잠겨있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도훈이 그 모습을 보더니 말했다.
"딱 맞게 친구한테 전화 왔네. 난 이만 가볼 테니 알아서 얘기해."
"잠시만요."
"뭐?"
"정말 죄송한데 대신 받아주시면 안 돼요?"
"왜? 이제 정신 들었잖아? 의사 말로는 특별한 이상 없으니 잠깐 쉬면 괜찮아질 거라는데?"
"그게 아니라… 쪽팔려서요. 그냥 한 번만 대신 받아주 심 안돼요, 네?"
도훈은 채원의 뻔뻔함에 어이가 없었다. 거짓말을 들키고도 저렇게 당당할 수 있다니 낯짝이 두껍기가 놀라운 수준이었다.
‘와 씨, 이걸 확 그냥.’
하지만 강아지처럼 커다란 눈으로 애교를 부리는 채원의 청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아니, 진짜…."
[역시 주인님은 미인에게 약하시군요.]
‘기왕 도와준 거 그냥 끝까지 도와주는 수밖에.’
"여보세요?"
-채원이 어떻게 됐어요? 지금 어디세요?
"병원 도착했어요. 잠시만요…."
도훈은 지나가던 간호사에게 물어 병원의 이름과 주소를 알려준 뒤 말했다.
"의사가 확인했는데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하니까, 저는 이만 가볼게요."
-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통화를 마친 도훈이 채원에게 친구 핸드폰을 건넸다.
"됐지? 난 간다 그럼."
"고맙습니다. 저, 근데…."
"왜? 뭐 또 할 말 있어?"
"…호의로 도와주셨는데 성함이랑 연락처라도."
"뭐?"
"나중에 사례라도 하고 싶어서요."
"괜찮으니까 다음에는 기절했다가 깨어나면 미리미리 말하라고. 엄한 사람 고생 시키지 말고."
도훈은 까칠하게 대답하고는 그대로 일어서려고 했다.
그때 채원이 말했다.
"저, 저기요!"
"왜?"
"말씀 좀 지나치신 거 아니에요? 저 진짜로 기절했었다고요. 제가 무슨 거짓말이라도 한 것처럼…."
"알았으니까, 몸 잘 추스르고. 내가 좀 피곤해서…."
병원에 도착하면서 긴장이 풀린 도훈은 피로가 몰려오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날밤을 꼬박 센 채로 등산을 한데다, 마지막 하산에선 채원을 등에 업고 날 듯이 뛰어 내려왔기 때문에 체력이 완전히 바닥난 상황이었다.
육체적으로 무척 피곤한 상태에서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긴장감 하나로 버티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허탈하게 끝이 나자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진 것이다.
‘어휴, 피곤해 죽겠네.’
[주인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닙니다. 휴식이 필요해 보입니다만.]
‘얼른 집에 돌아가서 후딱 씻고 자야겠어.’
도훈이 보호자 의자에서 일어서는데 순간 눈앞이 까매지며 머리가 핑 돌았다. 어지럼증을 느낀 도훈이 급히 침상손잡이를 붙잡으며 몸을 지탱했다.
"어, 어."
육체적으로 지친 상태에서 일시적인 현기증을 느낀 도훈이 머리를 새차게 흔들었다.
"괘, 괜찮으세요?"
채원이 놀라 묻자 도훈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어. 좀 피곤해서 그래. 잠을 못 자서."
"아…."
"암튼 나 간다."
"아니, 컨디션이 안 좋으신데 그렇게 급하게 가실 필요 없잖아요?"
"……."
"제가 너무 죄송해서 그래요. 잠시만이라도 쉬었다가 가세요."
도훈도 지금 바로 움직이는 것은 상당한 무리임을 깨달았다. 채원이 당부까지 하니 도훈도 마음이 흔들렸다.
‘어휴, 진짜 이러다 쓰러지겠는데 잠깐 눈 좀 붙일까?’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현재 주인님은 30시간 이상 뜬눈으로 지새우셨습니다. 거기다 마지막엔 산을 오르내리느라 체력적으로 몹시 지친 상태고요.]
‘그러니까. 방금 자리에서 일어 나려는데 머리가 핑 돌더라니까? 하마터면 쓰러질 뻔.’
[채원 양에게 가짜로 기절했다고 뭐라 하셔놓고, 주인님이 쓰러지심 곤란합니다. 잠깐이라도 휴식을 취하길 권해 드립니다.]
‘흠. 그래야 겠어.’
"저 이제 괜찮으니까 여기 누우실래요?"
채원이 벌떡 일어나더니 자기 침상을 양해했다.
도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 보조 침상 빼서 쉬면 돼."
도훈이 병상 밑을 살폈다. 하지만 응급실용이다 보니 보조 침상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어라, 없네?"
"그냥 여기 누우시라니까요."
"아니, 아픈 곳도 없이 멀쩡한데 무슨 침상에 누워? 남들이 보면 어쩌려고?"
"잠시만요."
채원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침상 주변에 걸린 커텐을 치기 시작했다. 프라이버시를 위해 설치된 침상 커텐을 끝까지 움직이자 침상 전체가 커텐으로 둘러쳐진 것처럼 사방이 가로막혔다.
"이럼 괜찮죠?"
"난 괜찮다니까."
"고집 그만 피우고 얼른요, 딱 봐도 눈이 시뻘건데."
‘로시, 나 눈도 충혈됐냐?’
[네. 상태가 안 좋아 보이긴 합니다.]
‘흠….’
[어차피 쉬시는 거 그냥 채원양 말대로 하시죠?]
도훈은 고민하더니 병상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럼 여기 앉아만 있을게."
"에이, 그냥 올라가시라니까."
보고 있던 채원이 답답했는지 도훈을 강제로 눕혔다. 도훈은 한사코 거부했지만, 투덕거리다 보니 어느새 침상에 눕고 말았다.
등이 푹신한 쿠션에 닿게 되자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편안함을 느꼈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다고 막상 침상에 눕게 되자 도훈은 자신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오기 시작했다.
"아니 이러면 안 되는데…."
"걱정 마세요. 제가 망 보고 있을게요."
채원이 깜찍하게 말하더니 이번엔 자신이 보호자용 의자에 앉았다. 팔에 링거를 매단 채원은 앉아있고, 반대로 도훈이 병상에 누운 모습은 뭔가 아이러니한 모습이었다.
"아니 그게아니라… 아…."
도훈은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확실히 무리를 했던 모양이었다. 잠이 쏟아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게…."
결국 혼자 중얼거리던 도훈이 기절하듯 잠에 빠지고 말았다. 채원은 그런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더니 도훈에게 물었다.
"오빠, 자요?"
"……."
"헐, 진짜로 자나 보네?"
불러도 대답 없는 도훈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채원은 불쑥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친구 폰을 꺼내 들었다. 지문 인증을 몰랐지만, 패턴을 기억해낸 채원이 암호를 풀고는 다른 친구 폰으로 문자를 남기기 시작했다.
-김채원 : 애들아 나 채원인데, 병원으로 안 와도 될 것 같아. 깨어나서 부모님께 연락했더니 이쪽으로 데리러 오신데. 너흰 렌트카 반납해야 되니까, 부산 돌아가서 보자.
난 이제 괜찮아졌어.
문자를 발송하자마자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김채원? 니 증말 괜찮나? 가시나야, 얼마나 걱정했다고.
"응, 나 이제 멀쩡해."
-갑자기 픽 쓰러져서 얼마나 놀랬는 줄 아나?
"실은 생리통이…. 심해서…."
-뭐?
"암튼, 이제 괜찮아."
-부모님 오시고 있다고? 그럼 그 의대생 오빠야는?
"…의대생?"
채원이 잠들어 있는 도훈을 슬쩍 쳐다보며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