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6. 2학년2학기-31-
‘설마라니?’
[아이템은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근방에 약초가 아직 더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오옷! 그럼 산삼이 더?’
도훈은 순간 산삼이 홀로 발견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번식이 까다롭긴 하지만, 대체로 한 뿌리기 발견되면 근방에서 여러 개가 동시에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과부 귀신도 한 뿌리만 있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네. 더 찾아볼까?’ 영약을 더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난 도훈이 수맥을 찾는 사람처럼 야삽을 들고 뱅글뱅글 돌았다. 하지만 아까처럼 명확하게 빛이 확 밝아지진 않아 도무지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왜지? 테두리에 불빛은 그대로인데, 방향을 도통 못 잡겠는데? 아까랑 뭐가 다른 거지?’
[아···. 혹시 그거 아닐까요?]
‘뭔데?’
[힐러의 모종삽에 추가된 기능 중 약효의 효험에 따라 불빛의 강도가 달라진다고 들었습니다. 즉, 약효가 떨어지는 경우엔 지금처럼 밝기가 선명치 않다는 뜻이죠.]
‘그렇다면 추가로 발견될 산삼의 연령이, 100년 묵은 삼보다는 떨어진다는 뜻인가?’
[아마도요.]
‘아···.’
도훈은 살짝 실망했다.
100년 삼을 하나만 더 찾으면 체질 개선에 도움이 될 거라고 여겼는데, 아마도 그에 훨씬 못 치는 산삼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기왕 오셨으니 계속 찾아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효능이 좀 떨어지더라도 어쨌든 쓸모는 있을 테니까요.]
‘그렇겠지? 뭣하면 팔아서 돈이라도 벌 수 있으니까.’ 도훈은 아까보다 집중해 불빛이 변하는 방향을 확인했다.
미약하긴 하지만 특정 방향을 지향할 때마다 아이템의 밝기가 변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쪽이군."
감을 잡은 도훈은 그대로 직진했다.
그러자 잠시 후 산삼 뿌리 3개를 더 발견할 수 있었다.
"찾았어!"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100년 산삼에 비하면 확실히 이파리의 크기부터 작았다. 가장 큰 것이 그 절반 수준이었고, 나머지 두 개는 너무 작아 캐기 미안할 정도였다.
‘흐음. 이건 뭐···. 나머지 두 개는 그냥 두는 게 좋겠는데.’
[그냥 두신다고요?]
‘내가 먹을 것도 아닌데 캐서 뭐 하게? 후인을 위해 남겨 둬야지.’
[그럼 제일 큰 하나만 더 캐시겠습니까?]
‘응, 만약 연령별로 사이즈가 비례한다면 적어도 50년은 되지 않았을까? 그 정도면 어떤식으로든 쓸모가 있겠지.’
[넵.]
도훈이 다시 아이템을 부리자 힐러의 모종삽이 열심히 혼자 산삼을 캐냈다. 도훈은 나머지 산삼 하나를 더 인벤토리에 넣은 후 산을 내려올 채비를 갖췄다.
‘자, 이제 일 다 봤으니 바로 가보자고.’
도훈이 하산하려고 하는데 문득, 지금의 위치에서 산장이 머지않음을 떠올렸다.
‘맞다. 혹시 그 산장에서 바로 서울로 직행할 순 없는 거지?’
[네. 마법의 문고리는 처음 연결한 공간이 닫히기 전에는 다시 열릴 수 없습니다. 스킬을 해제하시고 재사용하실 수 있지만, SP가 이중으로 소모됩니다.]
‘음, 한동안 안 써서 SP는 충분하지만, 굳이 급한 일도 없으니까.’
도훈은 무릎이 슬슬 아파 왔지만, 묵묵히 산을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가는데 산 중턱에 일단의 사람들이 뭉쳐있는 것이 보였다.
머리에 두른 띠 모습으로 보아 아까 입산할 때 마주쳤던 ‘청솔 산악회’ 사람들 같았다.
"뭐지? 단체로 휴식 중인 건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점점 청솔 산악회 사람들에게 가까워지자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정말 큰일 인데!"
"여기 헬기가 올 수 있는 위친가?"
"어림없다고. 절벽 근처라 밧줄을 내리지도 못할걸? 응급 헬기 부르려면 더 트인 곳으로 이동해야 해."
도훈이 들어보니 상당히 다급한 목소리였다.
‘설마 뭔일 있는 건가?’
[한번 가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음···.’
도훈은 몸이 피곤했지만, 다급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청솔 산악회 사람들 쪽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세요?"
"아, 아니. 사람이 쓰러졌는데 의식이 없는 것 같아서."
"네?"
"아저씨 제발 도와주세요. 이러다 뭔 일 나겠어요!"
다른 여자의 목소리.
도훈이 가만히 보니 둥그렇게 모여있는 이들은 청솔 산 악회의 회원들이었고, 가운데 쓰러진 여자와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다른 여자 두 명은 다른 등산객 무리였다.
즉, 여자 셋이서 등산 온 일행 중 한 명이 졸도했는데, 중간에 청솔 산악회 회원들 일부와 마주친 상황으로 보였다.
도훈이 보니 가운데 쓰러진 여자는 식은땀을 흘리며 졸도한 상태. 호흡도 불안전하고 무엇보다 의식이 없는 것이 큰 사달이 난 것 같았다.
[어엇, 이건 응급상황 같은데요?]
‘그러게. 근데 왜 산악회 사람들은 멀뚱히 보고만 있는 거야?’
"아저씨 제발요!"
"아, 아니 우리도 의사가 아니라 도저히 어떻게 해줄 수가···."
"이 자리에선 응급 헬기를 부를 수가 없어. 더 넓은 장소로 옮겨야 해."
"근데 만약 옮기다 문제라도 생기면···."
다들 걱정은 하면서도 괜한 일에 끼어들었다가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는 말투였다. 단순히 119에 전화만 해서 끝날 일이 아니라, 졸도한 사람을 헬기가 있는 곳으로 옮기는 과정 중에 다른 문제가 생기면 복잡해질 것을 우려했다.
"아, 아저씨! 이러다 뭔일 나면 어떻게 해요!"
"그, 그냥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외상을 입은 것도 아니고 단순히 더위를 먹었을 수도 있으니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도훈은 무책임한 사람들의 모습에 속으로 분개했다.
‘아니 저게 지금 할 소리야? 사람이 쓰러졌는데?’
[저 사람들도 어쩔 수 없지 않을까요? 의료지식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인데요.]
‘그러면 눈 뜨고 계속 보고만 있겠다는 소리야?’
도훈은 괜한 정의감에 갑자기 혼자 풀발기 했다.
"잠시만요! 제가 한번 볼게요."
"어, 어?"
"저 친구는 아까 그 청년!"
이제야 도훈을 알아본 청솔 산악회 회원들이 뜨악하며 놀랐다. 모습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산을 올라간 도훈이 그 새 하산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벌써 정상을 찍고 온 건 아니겠지?’
‘설마···. 천왕봉을 반나절만에 왕복하면 기네스북 감이지.’
다들 반신반의하면서도 도훈의 놀라운 체력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그에게 경외감을 표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청년이었다.
"앗, 설마 의사신가요?"
쓰러진 여자의 친구에 물음에 도훈이 당당히 대답했다.
"아뇨. 의사는 아닙니다."
"아···."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
그때 도훈이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의대생입니다."
"의, 의대생!"
"오오!"
의대생이라는 도훈의 선언에 주변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의대생이라면 최소한 응급상황에 대한 지식이 민간인보다 뛰어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참말로 다행이구만!"
"저 여학생 좀 살펴주세요. 등산 중에 갑자기 픽 쓰러졌다는 데 도저히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어서."
"예."
도훈은 긴 말 없이 짧게 대답했다.
사실 거짓말 한 것을 들킬까 말을 아끼는 것이었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에서 사람들에게 더욱 신뢰감을 얻었다.
[휴먼, 제정신입니까?]
‘어떡해 그럼? 아픈 사람을 그냥 보고 지나치란 말이야?’
[그래도 이건 너무 오지랖인데요? 잘못 되면 주인님이 덤터기 쓰는 거란 말입니다. 산악회 사람들이 악의가 있어서 보고만 있던 게 아니라고요.]
‘직접 처치를 하거나 그럴 건 아니니까 안심해. 다만 나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도훈이 쓰러진 여학생 주변으로 다가갔다.
긴 생머리의 여성은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청순한 미인이었는데, 안색이 파리한 것이 어딘가 심각해보였다.
도훈은 어디서 보던 대로 경동맥을 짚어 맥박을 살폈다.
그의 표정이 워낙에 신중하고 진지했기 때문에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이 숨을 죽인 채 지켜보았다.
"음···. 일단 호흡은 안정적입니다."
"오! 안정적이래!"
"역시 의대생!"
"차원이 달라!"
별것도 아닌 소리였지만 사람들이 흥분했다.
[주인님, 너무 막 나가시는 것 같은데요?]
‘아니야. 내가 의학 상식은 부족하지만 맥박이 뛰고 호흡은 일정한 편이니 아주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아. 근데도 의식이 없는 것 보면 정말 산악회 사람들 말대로 더위를 먹었거나 탈진했을 수도 있어. 일단 업고 내려가야겠다.’
"저기···. 혹시 넘어지면서 외상을 입었나요?"
"외상이요?"
"아니요. 제가 뒤에서 봤는데 다행히 돌바닥이 아니고 흙 쪽으로 넘어졌어요. 크게 다친 곳은 없을 거예요."
도훈은 신중한 표정으로 쓰러진 여학생의 다리를 살폈다.
요새 유행한다는 쫙 붙는 레깅즈를 입고 있어 각선미가 훤히 드러났는데, 몸매가 상당한 편이었다.
‘이럴수가.’
[왜 그러십니까?]
‘존나 미인이야.’
[아니 주인님!]
‘큼큼, 농담이었어.’
"그런 것 같네요. 척추만 다친게 아니라면 업어도 괜찮을 겁니다."
"업으신다고요?"
"네. 의료헬기가 올 수 있는 곳까지 데려가야 하니까요."
"아니 근데 누가···."
여학생은 살 찐 체형은 아니었지만 키가 상당히 큰편이었다. 거의 170에 가까운 키였기 때문에 남자가 업기에도 부담스러웠다.
"제가 업을게요."
"의대생 청년이?"
"오오, 그래 맞어. 저 청년 체력 무진장 좋잖아."
"그렇네. 충분히 할 수 있겠어."
청솔산악회 사람들은 도훈을 무슨 구세주라도 된 것처럼 떠받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이 쓰러졌는데 무력하게 지켜만 보고 있던 그들은 상당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는 데, 마침 도훈이 나타나 그들의 부담을 덜어준 것이었다.
"우리가 도와주세."
"일으켜 보자고."
산악회 멤버 두 사람이 여학생의 양어깨를 잡아 도훈에게 업혔다. 의식을 잃어서 평소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질 법도 했지만, 스파르탄 벨트를 찬 도훈에게는 충분히 감당할 무게였다.
"읏차!"
도훈이 단숨에 몸을 일으키며 졸도한 여학생의 친구에게 말했다.
"두분 폰 저한테 하나만 줘보세요."
"폰이요?"
"그래야 저한테 연락할 거 아닙니까. 제가 먼저 뛰어내려갈테니까. 나중에 저한테 연락하세요."
"아··· 네, 넵!"
여학생 하나가 자기 폰을 내밀어 도훈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잠깐만. 여기서 뛰어 내려간다고? 사람을 업은 채?"
"너무 무모한 방식일세. 우리가 따라가면서 옆에서 같이 부축해 줌세."
산행 경험 많은 산악회 사람들이 극구 만류했다.
사람을 업은 채로 하산을 하는 것은 무게 중심이 쏠리기 때문에 무척이나 위험한 행동이었다. 자칫 낙상이라도 하게되면 2차 사고의 우려까지 있었다.
그러자 도훈이 냉정하게 말했다.
"제가 의사는 아니지만, 혹시 큰 문제가 발생했을 수 있습니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으니 혼자 뛰어 보겠습니다."
"아···."
"그, 그래. 의대생 말이 맞겠지."
"맞아. 우리가 뭘 알겠어?"
다들 도훈의 권위에 짓눌려 아무말도 못하자 도훈이 여학생의 친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제가 최대한 병원에 빨리 데려갈테니 하산하시면 연락하세요."
"네, 네!"
"우리 채원이 잘 좀 부탁드릴게요. 너무 감사해요!"
‘채원?’
[업히신 분 이름인가 본데요.]
‘그렇군. 일단 가자.’
"그럼,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도훈이 채원을 업고 쏜살같이 하산을 시작했다.
기절한 사람 하나를 업고 뛰는데도 놀라운 속도에 다들 입이 쩍 벌어졌다.
"우오옷!"
"저, 저 의대생 대체 정체가!"
"체대생이야 의대생이야?"
그도 그럴것이 스파르탄 벨트의 효과로 부쩍 힘이 좋아진 도훈에게 50Kg 미만의 여성을 드는 것은 딱히 부담스러운 무게는 아니었다.
게다가 여러 운동 재능을 복제하면서 만들어진 신체 밸런스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곡예를 하듯 산길을 뛰어내려가는 데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수준이었다.
‘좋아, 안정적이야.’
[근데 어쩌시려고요?]
‘뭘 어째. 최대한 빨리 병원 데려가야지.’
[업어서 말입니까?]
‘차가 다니는 곳까지만 가면 돼.’
도훈은 다급한 마음에 속도를 올렸다. 오르는 것이 아니라 내려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관성이 붙자 믿기 어려운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주인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이 속도라면 발 한번만 삐끗해도···.]
‘괜찮아. 통제 되고 있어.’ 도훈은 자신의 힘과 균형감각에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기절한 사람이 잘못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바짝 긴장하긴 했지만, 지금 보여주는 신체 능력은 일반인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 넘고 있었다.
조폭과의 싸움때도 느꼈지만, 이 정도 신체능력이면 현역 격투기 선수라도 충분히 해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로시.’
[네?]
‘근데 나 생각보다 강한 거 아니냐?’
[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 이 정도면 쓸만한 아이템 같은 것 하나만 있으면 PK단이랑 붙어볼 만한 거 아니야? 여기에 산삼까지 먹으면 말이야.’
[설사 그렇다 해도 PK단 과는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플레이어가 꼭 PK단에게 진다는 것은 아니지만, 괜히 모험을 하실 필욘 없으니까요.]
‘물론 그렇긴 한데···.’
정신없이 뛰다 보니 어느새 차가 다니는 곳까지 단숨에 당도한 도훈이었다. 도훈은 산길을 지나가는 승합차를 보고 큰 소리로 소리쳤다.
"여기요! 여기! 응급환자예요!!!"
찻길 한가운데 서서 소리치는 도훈을 본 승합차가 급히 멈춰섰다.
"무슨 일이세요?"
"사람이 쓰러졌어요! 급히 응급실에 데려가야 할 것 같아요!"
승합차 기사는 도훈에게 업혀 기절해 있는 여자를 보더니 깜짝 놀라 승합차 뒷문을 손수 열어주었다.
"태우세요! 10분안에 갈 수 있는 병원이 있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