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0. 2학년2학기-25-
"드릴게요. 빨리만 가주세요."
"아따, 젊은 총각이 성격도 급하기는. 일단 돈부터···. 엇, 타십시오, 손님."
말 많던 기사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도훈이 지갑에서 오만원짜리 5장을 꺼낸 것을 본 직후였다.
"선불로 드릴게요. 얼마나 걸릴까요? 최대한 빨리 가야 하는데."
"혹시 총알 택시라고 들어봤소, 총각?"
"총알 택시요?"
"나가 한때 포천에서 알아주던 드라이버였당께. 위수지역 점프뛰는 군인들 서울까지 30분 안에 꽂아 줘브렀제. 벨트부터 메쇼잉."
택시기사는 돈을 미리 받아선지, 아니면 모처럼 달릴 기회를 얻어선지 무척이나 흥분된 표정이었다.
"네. 최대한 빨리요."
"근디 광주 어디로?"
"상무지구라고, 혹시 아세요?"
"거기 모르믄 간첩이제."
"한 시간 내로 끊어주시면 10만원 더 드릴게요."
"젊은 양반이 화끈하구만. 한 번 달려봅시다잉!"
과거 총알택시 기사였다는 주장은 헛소리가 아니었다.
운전대를 잡은 기사가 요란한 굉음을 내며 시골도로를 박차고 나갔다. 방심하고 있던 도훈은 몸이 뒤로 밀리는 충격에 급하게 머리맡의 손잡이 붙들었다.
"근디 이 시간에 여기서 광주까진 왜?"
"······."
왠지 말을 섞으면 계속 귀찮게 굴 것 같아 도훈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와중에도 시골 풍경이 빠른 속도로 스쳐갔다. 텅 빈 야간의 시골은 아우토반처럼 뻥 뚫려있었다.
도훈이 대답을 피하자 기사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기야 나야 돈만 받으믄 되지, 손님이 어딜 가든 뭔 상관있간디?"
기사는 그 뒤로도 한참 혼잣말로 떠들었으나, 도훈이 일부러 말 상대를 안 해주는 통에 갑자기 노래를 틀기 시작했다.
"나가 심심해서 그란디, 노래 좀 들음서 갈라요."
"네."
차량 시디플레이어에서 뽕끼 충만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흔히 관광버스 음악이라고 불리는 뽕짝 메들리였다.
"아싸, 노래 좋고!"
기사는 혼자 흥을 내며 어깨를 들썩였다.
도훈은 좋아하는 취향도 아니고, 귀가 따가울 지경이라 음악을 줄여달라 말하고 싶었지만 노래를 틀고부터는 속도가 더 올라가는 느낌이라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주인님, 기사분이 너무 밟는 거 아닙니까? 좀 위험할 것 같은데요.]
‘어쩔 수 없잖아. 안 그러면 절대 시간 못 맞출 거야. 서 윤이가 나때문에 집에 안 들어가고 기다리고 있다고.’
[허어···. 참, 주인님도 가끔 보면 너무 충동적인 것 같습니다.]
‘사랑은 본래 충동적인거야.’
[아랫도리가 충동적인건 아니고요?]
‘쓸데없는 소리말고 복귀 전략이나 세워놓자.’
[복귀 전략이요?]
‘마법의 문고리말이야. 처음 들어왔던 곳으로 나가야 하는 거 맞지?’
[네, 그렇습니다.]
‘그럼 서윤이 만나고 다시 여기로 돌아와야 한다는 소린데.’
[마법의 문고리를 다시 사용하려면 그렇겠죠?]
‘어차피 서울로 돌아갈 방법은 그게 제일 빠르잖아?’
[네. 이번에 광주에 들르시게 되면 다음번엔 직항로가 뚫리겠지만요.]
"저, 기사님."
"아싸라비아! 싸루비아!"
기사는 핸들을 손바닥으로 두들기며 음악에 심취해있느라 도훈의 말을 듣지 못했다. 이에 도훈이 다시 큰 소리로 기사를 불렀다.
"기사님!"
"어, 엉?"
"음악 좀 꺼주세요."
"왜요? 난 음악 들어야 속도가 나는디···."
기사는 한창 신났던 기분이 가라앉는지 불만 어린 표정으로 음악을 껐다.
"잠깐 말씀드릴게 있어서요."
"뭐요?"
"혹시 광주 갔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실 수 있나요?"
"편도가 아니라 왕복이란 말이제?"
"네. 아까 출발했던 곳으로요."
"흐음···. 나야 빈차 끌고 가는것보다야 낫긴 한디···. 얼마나 있을라고?"
"3시간? 넉넉잡아 3시간요."
"3시간이면···."
기사가 시계를 힐끔거렸다.
광주까지 한 시간 안에 끊어도 다시 돌아가는 시간은 새벽 4시가 훌쩍 넘는다는 소리였다.
"아따···. 그라믄 많이 늦는디."
"어디 찜질방에도 가서 쉬고 계세요. 대시 제가 기다리는 시간은 채워 드릴게요. 시간당 10만원 드리면 될까요?"
도훈의 통 큰 제안에 기사가 솔깃했다.
그러다 문득 도훈의 얼굴을 쓸쩍 쳐다보더니 말했다.
"나이도 어린 총각이 뭔 돈을 그라고 흥청망청 쓴다요.
뭔 사정인지 모르는디 그냥 기다려 줄텐께, 돌아가는 택시비만 잘 챙겨주쇼."
"네?"
"영업도 안하고 기다리는디 어찌케 돈을 받는 다요? 그라고 왕복 택시비만 해도 솔찬히 나올 것잉게 그걸로 일당채울랍니다."
"아니 아저씨···."
공돈을 마다하는 기사의 태도에 도훈이 살짝 감동했다.
그는 참으로 훌륭한 택시 드라이버였다.
"그라믄 나 다시 음악 틀어도 되제?"
"네. 얼마든지요."
기사는 다시 뽕짝 매들리를 틀더니 힘차게 엑셀을 밟기 시작했다.
* * *
"진짜 오겠데? 이 시간에? 서울에서?"
"으, 응···."
"미쳤네.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어. 아! 그거네 그거."
"뭐?"
"너한테 완전히 정 떼려는 거야."
"저, 정을 떼다니?"
서윤의 고향 친구 지우가 술잔을 입에 털어내며 말했다.
"생각해봐. 서울에서 여기까지 어떻게 한 시간만에 오니? 차로 세게 밟아도 3시간은 족히 넘을 텐데."
"그, 그건 그렇지?"
"게다가 걔 대학생이라며? 차도 없을 거 아냐. 있어?"
"내가 옆 집 살 땐 없긴 했는데···."
"거봐. 그럼 무슨 수로 오겠다는 건데? 설마 날아 오기라도 할 거야?"
"······."
"보라고. 아까 연락오고 나서 이미 한 시간 지났잖아."
"아직 50분이야."
"그거나그거나. 아무튼 걔가 너 물 먹이려는 거라니까? 일부러 너 기다리게 해놓고 실망시키려고."
"도, 도훈이가 왜?"
"정 뗄라고 일부러 수작부리는 거지. 설마 너 진짜로 믿고 있었니?"
"아니···. 그, 그건···."
서윤이 흔들리는 걸 포착한 지우가 눈을 반짝였다.
"서윤아. 우리 그러지 말고 그냥 쟤들은 어때?"
"누구?"
"저기 반대편 테이블 말이야. 아까부터 우리 쪽을 계속 힐끔거리는 거 보니까 합석하려고 눈치보는 것 같더라고."
친구의 말에 서윤이 뒤를 돌아보았다.
반대편 테이블에 앉아있던 젊은 남자 둘이 서윤과 눈치 마주치가 슬며시 눈 웃음을 지었다. 서윤은 깜짝 놀라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뭐, 뭐야 쟤들은?"
"뭐긴? 헌팅 포차에 헌팅하러 온 애들이겠지."
"잠깐. 여기 헌팅 포차였어?"
"어. 오늘 술 진탕 마시고 싶다며? 여기가 술 제일 싸거든. 12시 전에 입장하는 여자 손님들한테는 소주 한 병에 천원씩이라니까?"
"아, 아니 그래도···."
헌팅 포차는 젊은 남녀가 자연스럽게 합석할 수 있는 술집. 통상의 술집과는 다르게 헌팅이 빈번하게 일어나며, 따라서 남자끼리 혹은 여자끼리 오는 손님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이곳도 나이트처럼 남자 손님들이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에, 여자 손님들을 끌어들이는 유인책으로 술값을 할인해 주는 정책을 운용했던 것.
아무 생각 없이 친구를 따라 온 서윤이 당황하는데, 지우가 말했다.
"야. 너도 그냥 이 기회에 짝사랑 같은 거 때려치우고 다른 남자 만나봐. 공무원 돼봐야 뭐하니? 남자 하나 제대로 못 만나고 맨날 빌빌거리기나 하고."
"내가 언제 또 빌빌거려··."
"아니야? 너 광주 내려온지 벌써 반년째 잖아. 그 동안 남자 만나 본 적은 있니?"
"······."
"어유, 답답아! 뭘 그렇게 집착해? 걔도 이제 다른 여자사귄 대잖아. 미련 버려. 남녀 사이 만나고 헤어지는 게 얼마나 흔한 일인데···."
"그치만···."
"서윤아. 서울에 있을 때 그 남자랑 얼마나 살갑게 지냈는지 몰라도, 멀어지고 나면 헤어지는 게 어쩜 당연한 거야. 너 혼자 만나지도 못할 남자 그리워하다 좋은 시절 다 보낼 거야? 너 언제까지 지금처럼 예쁠 것 같은데?"
"······."
"어, 저기 남자들 온다. 알아서 잘해라?"
친구 지우가 갑자기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그 사이 두 사람을 눈여겨보고 있던 젊은 남자 둘이 테이블로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저···, 실례가 안된다면 잠시 합석해도 될까요?"
서윤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지우가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두분이서 오셨어요?"
"네. 계속 지켜봤는데 그쪽도 두 분이서 오셨더라고요."
"어머, 우연히 짝이 딱 맞네요."
"지, 지우야!"
친구의 적극적인 환대에 남자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합석했다.
서윤은 낯선 사내들이 불편했지만, 절친이 너무 반가워하는 통에 아무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거릴 수 밖에 없었다.
‘…도훈이가 정말 나한테 정 때려고 거짓말 한 걸까?’
어느덧 새벽 1시를 넘어선 시간.
여전히 도훈이 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서윤도 점점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지우 말이 맞았다.
서울에 있을게 분명한 도훈이 무슨 재주로 1시간만에 광주로 온단 말인가? 그것은 의미만 가지곤 불가능한 일이었다.
"두 분 다 되게 미인이시네요."
"호호, 별 말씀을. 저희가 쫌 하죠?"
"근데 이쪽분은 원래 말 수가 없으신가 봐요? 아까부터 한 마디도 안 하시고."
"이 친구가 오늘 실연당해서 그래요."
"아, 정말요? 아니 누가 이런 미인을···."
"나다, 새끼야."
그때였다.
극적으로 등장한 도훈이 갑자기 테이블로 다가와 서윤의 팔을 낚아챘다.
"도, 도훈아!"
놀란 서윤과, 더 놀란 친구 지우가 눈을 껌뻑였다. 합석한 남자들은 도훈의 기세에 눌려 아무말도 못하고 쭈뼛거렸다.
"미안, 좀 늦었지? 오는 길에 차가 막혀서."
"어, 어떻게 된 거야?"
"나가서 설명해 줄게."
도훈은 좌우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서윤이는 제가 데려갑니다."
"아, 아 넵."
남자들은 도훈의 덩치에 바짝 쫄아 아무 말도 못 했고, 지우는 정말로 서윤을 찾아온 도훈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와…. 서윤이가 집착할 만 했네···.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었다니. 서윤이가 잘생겼다고 했을 땐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완전 미남이었잖아?’
도훈이 서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자 바짝 쫄아 있던 남자들이 지우를 향해 물었다.
"저 사람이 혹시 남자친구?"
지우는 갑자기 오징어로 변한 두 사내를 보며 혀를 끌끌찼다. 도훈의 실물을 보고 나니, 아까는 괜찮아 보이던 남자들이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몰라요 저도. 근데 이제 쪽수가 다시 안 맞게 됐네요?"
* * *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진짜로 서울에서 내려온 거야?"
도훈이 씩 웃었다. 플레이어의 능력을 일반인에게 드러내는 것은 금기 중에 하나였다. 어차피 말해도 믿지도 못하겠지만.
"실은 다른 일이 있어서 하동에 내려와 있었어."
"하동? 경상남도 하동?"
"응. 곧 집안 제사라 시골에 벌초하러 왔었거든. 아직 방학이라 여유가 있어서."
"아···."
"친척집에서 자고 있는데 네 전화 받고 정신이 확 깨더라. 그래서 바로 택시 타고 달려온 거야."
"도, 도훈아···."
아무리 서부 경남에 있는 하동이라도 광주까지는 꽤 먼 거리. 자신의 연락에 한 달음에 달려와 준 도훈을 보자 서 윤은 울컥 감동하고 말았다.
"나, 난 네가 올 줄도 모르고···."
"아하, 그래서 다른 남자랑 있었구나?"
"아, 아니야! 그건 오해야. 너 오기 전에 갑자기 합석한 거야."
"아까 들어갈 때 간판 보니까 헌팅 포차던데?"
"아니, 그건···."
서윤은 뭐라 변명할 말이 없었다. 절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을 할수록 왠지 구차해 질 것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지 표정을 바꾸며 도훈에게 따졌다.
"맞다. 넌 여자친구도 사겼잖아?"
"어."
"근데, 나는 그러면 안 돼?"
"아까는 여자 친구 있든 없든 나 좋아할 거라더니, 순전뻥이었구나?"
"그건···. 그건 그냥 취해서 그냥 헛 나온 거야."
서윤이 새침하게 말했다.
이 새벽에 도훈이 광주까지 와준 것이 고마웠지만, 어차피 임자가 있는 남자라고 생각하자 갑자기 우울감이 밀려 왔다.
"···예뻐?"
"엉?"
"새로 사겼다는 여자친구. 나보다 예뻐?"
"글쎄다."
밤거리를 나란히 거닐던 도훈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서 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눈을 성형 했다더니 어딘지 모르게 예전과 인상이 달라진 느낌이었다.
물론 본판이 워낙에 훌륭했기 때문에 예쁜건 매한가지였지만.
마스크를 쓰고 눈만 드러내고 방송을 했던 서윤이었기에, 일부러 눈을 고친 것 같았다.
"그럭저럭?"
"치."
"왜? 삐졌냐? 너도 썸타는 남자 있다며? 곧 사귈거라고."
"사귈 거야. 썸 안타는 남자라도 사귈 거야."
"삐졌냐?"
"누가 삐졌다고 그래."
"삐졌네."
"아니거든?"
"흠. 암튼 걱정돼서 얼굴 보러 왔는데, 지금 보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나 걱정했다고?"
"술 먹고 울고불고 하는데 어느 남자가 그럼 걱정 안하겠어?"
"그, 그건 취해서 그랬다니까."
"시간도 늦었는데 취해서 집에 돌아가다 흉한 꼴 볼지도 모르고."
"……."
"암튼 집으로 바래다줄게. 보아하니까 친구는 바래다줄 남자 곧 생길꺼 같더라."
"집에…?"
"어. 너 취해서 걱정돼서 온 거야. 집까지 바래다줄라고.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 벌써 새벽 1시 넘었다고."
"……."
서윤은 뭔가 말할 것이 있는 것처럼 자꾸 머뭇거렸다.
도훈이 정말 택시를 잡아주려고 하자, 서윤이 그의 팔을 끌며 말렸다.
"도훈아 잠깐만."
"왜?"
"나…. 이대로 집에 가긴 싫어."
"뭐?"
"…같이 있어줘. 오늘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