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9. 2학년2학기-24-
서윤은 당연히 내가 여자친구가 생겼을 거라 믿는 듯했다. 하긴 가까이서 나를 겪었으니만큼, 내가 여자 없이는 못 살(?)거라고 의심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없기를 바라는 눈치랄까?
한마디 질문 속에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성욕이 충만할 때의 나라면 늘 그렇듯, 없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어장관리의 기본은 여지를 주는 것. 궤도에 붙들린 인공위성처럼. 더 가까이 오지도,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못하게 끔 붙잡고만 있는 것이다. 이따금 희망을 주며. 소위 희망 고문이다.
불현듯 그것이 무척이나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한 번 섹스로 달래며 떨어지지 못하게끔 붙잡아 놓는 것은, 결과적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쓸데없이 허비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 결국엔 거두지도 않은 거면서 말이다.
"…어."
거두절미하고 딱 잘라 말했다.
[주인님? 어째서···.]
-여, 역시 그렇구나! 그럴 것 같았어.
"너는? 너는 남자친구는 생겼어?"
-음···, 그게···.
몹시 당황한 목소리였다.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초라한 모습 보이지 않고 싶은 마음인걸까?
-나도 뭐… 썸타는 남자는… 아니 아직 사귀는 건 아니지만….
약간은 횡설수설하는 느낌. 애매하게 하지 말고 확실하게 못 박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렇구나. 축하해. 너도 곧 사귀겠네."
-그, 그렇겠지?
한동안 서윤이 말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의 사이에 로시가 끼어들었다.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십니까?]
‘그냥. 이게 맞는 것 같아서.’
[이따금 서윤양을 그리워했던 것 같은데요···. 아니셨습니까?]
‘그랬을 거야. 지금도 보고 싶고. 섹스 때문이 아니라 그냥 잘 살고 있는지, 행복하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근데 이젠 더 궁금해 하면 안 될 것 같아.’
[왜요?]
‘그건 서윤이한테 너무 잔인한 짓이 될 테니까.’
[흠···.]
‘다른 여자들과 달리 서윤이는 멀리 지방에 있잖아. 물론 마음만 먹으면 한달음에 달려갈 수도 있겠지. 그래도 결코 가깝다곤 할 수 없는 거리야. 언젠간 소홀해 질 테고, 서윤이는 나만 바라보다 젊고 예쁜 시절을 다 흘려보낼 거야.
이렇게 시간이 흘러도 나를 못 잊는걸 보면.’
[주인님이 언제부터 그런 걸 따지셨다고요?]
‘말했지만, 다른 여자들과 서윤이는 다르잖아.’
[어떤 점에서 말이죠?]
‘힘들게 공부했고, 이제 겨우 자릴 잡았잖아. 아픈 아버지도 모시고 있고. 그녀는 좀 더 행복해질 권리가 있어. 나 같은 불한당에게 시간 낭비 말고 진짜로 괜찮은 남자랑 말이야. 다행히 직업도 괜찮고 얼굴도 예쁘니 좋은 사람 만나겠지.’
[쯧쯧. 주인님, 지금 현자타임 부작용 때문에 성욕이 사라져서 그러시나 본데 오늘의 결정 나중에 분명 후회하실 겁니다.]
‘후회는 늘 하고 있어.’ 침묵이 부담스러웠을까?
서윤이 갑자기 허둥지둥 전화를 끊었다.
-어, 도훈아 나 깜빡하고 계장님한테 보고해야 되는 게 생각났거든? 다음에 또 연락하자.
"그래. 잘 살고.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하고."
-어, 어. 그러자···.
뚝-.
전화가 끊기고 한동안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한여름의 무더위도 한풀 꺾이고, 슬슬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기나긴 여름의 끝이 보인다.
이 집에서의 추억과, 과거의 인연을 하나둘씩 흘려보내고 새로운 학기를 새로운 사람을 맞이할 시간이 된 것 같다.
서윤이가 정말로 행복해 졌으면 좋겠다.
* * *
"씨발! 내가 미쳤지."
도훈이 자다가 이불을 뻥 걷어찼다.
여름이라 한없이 가벼운 이불이 펄럭펄럭 원 룸을 날았다.
"아오, 부작용 씨발. 나를 왜 더 말리지 못했어?"
[예?]
‘아니, 내가 그런 개소리를 하고 있으면 당연히 말렸어야지.’
[주인님. 이마를 한 번 짚어보십시오.]
‘뭐?’
[어서요.]
도훈은 로시가 시키는 데로 이마를 짚었던 손을 떼며 말했다.
‘했어. 왜?’
[열 안나십니까?]
‘뭔 소리야 갑자기.’
[머리가 이상해진 것도 아닌데, 불과 반나절만에 이렇게 태도를 바뀌신다고요?]
‘아니. 아까 그건 내가 아니잖아. 현타 온 도훈이었다고!’
[거참, 주인님도 서윤양을 닮아가시는 군요.]
‘내가?’
[다중인격 말입니다. 성난 도훈, 허세 도훈, 현타온 도훈.
참 가지가지네요.]
‘비꼬지 말라고.’
[아까 제가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분명 후회하실 거라 고요.]
‘아니, 나도 이럴 줄 몰랐지.’
저녁이 되자 도훈은 다시 잃었던 성욕을 회복했다.
성욕이 회복되자마자 불쑥 든 생각은, 현타 당시에 서윤에게 완전한 이별을 통보했다는 사실이었다.
여자 친구까지 있다고 했으니 서윤은 분명 도훈에 대한 마지막 기대를 저버렸을 것이다.
‘아오 내가 돌았지. 그냥 지금처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얼마든지 잘 지낼 수 있는데 말이야.’
[와…. 아깐 잠시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주인님은 개새….]
‘뭐 인마?’
[아닙니다.]
‘안 되겠어. 지금이라도 다시 전화해서….’
그때였다.
텔레파시라도 통한 것인지 서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잉? 서윤인데?’
도훈이 놀란 표정으로 전화를 다시 받았다.
-야! 이 나쁜 새끼야!
서윤이 다짜고짜 욕을 퍼부었다. 울먹이는 목소리였는데, 술에 취한 사람처럼 혀가 꼬여있었다.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어? 내가 진짜 얼마나…
도훈이 다짜고짜 쌍욕을 먹고 있는데, 서윤의 옆에서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 그 남자한테 전화했어? 하지 말라니까!
-놔!
-아이씨, 술처먹고 전화하는게 얼마나 흉한지 알아? 그리고 지금 몇시야! 12시가 넘었다고! 죄송해요. 서윤이가 많이 취해가지고. 끊을게요.
뚝-.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 졌다.
도훈은 잠깐의 통화로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도훈이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에 상처를 받은 서윤이 친구를 불러 술을 마셨고, 만취한 상태로 도훈에게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괜한 소리를 했다는 생각에 이불킥을 하고 있던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입가가 찢어지게 웃었다.
"으흐흐, 봤냐?"
[좋으십니까?]
‘나쁠건 없지. 서윤이가 여전히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데 말이야.’
[휴-. 주인님. 어차피 서윤양은 너무 장거립니다. 게다가 관련된 업적도 모두 끝난 상대기 때문에 더 공략할 필요도 없는 상대기도 하구요.]
‘달삼쓰뱉이야?’
[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거냐고. 내가 무슨 먹튀야?’
[먹튀 아니셨습니까?]
‘먹긴 했지만 튀진 않았어.’
[아니 아깐….]
‘그러고 보니 그렇네. 이건 완전 먹튀하는 거잖아? 실컷 따먹고 업적 달성해 놓고 나몰라라 하는 거잖아?’
[지금 굉장히 자기 합리화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아냐. 그렇잖아. 서윤이가 먼저 미련을 접었다면 당연히 물러나 주는 게 맞지. 근데 지금 상황은 서윤이는 여전히 나를 못 잊고 있고, 나역시 서윤이를 보고 싶어 한단 말이지. 그러면 그냥 애매하게 라도 계속 만나는 게 맞지 않아?
’[사람이 어떻게 아침 다르고 저녁 다릅니까? 완전히 모순된 주장을 하고 계시다는 것은 알고 계시죠?]
‘원래 사람은 모순적인 거야.’
[그냥 뇌가 좆의 지배를 받는 게 아니고요?]
‘아씨, 어쩌라고 그럼.’ 그때 서윤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얼른, 다시 말해.
서윤의 옆에선 아까 껴들었던 친구가 부추기고 있었다.
-…….
-얼른 말 하라니까? 취해서 실수한 거라고. 다신 연락할 일 없을 거라고.
-저, 도훈아.
대화를 모두 엿들은 도훈이 서윤에게 말했다.
"옆에 친구 좀 잠깐 다른 데 가있으라고 해."
-으, 응?
"너랑 단 둘이 통화하고 싶다고."
-어, 어 알았어. 지우야. 너 잠깐만…. 어, 내가 얘기할게. 보냈어.
"술 많이 마셨어?"
-미안.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아직 12시밖에 안됐는데 뭘."
-그냥… 우울해서 친구 만나서 술마시러 왔는데 나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져서 실수한 것 같아…. 미안해 도훈아, 아까 얘기한 건 없던 일로 해줘.
"없던 일로 한다고 있었던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
-으, 응?
"너 아직도 나 좋아해?"
-…….
"아니 그냥 물어보는 거야. 진심을 듣고 싶어서."
-…응.
"서윤아. 아까도 말했지만 난 이제 여자친구도 있고…. 현실적으로 서로 너무 떨어져…."
-그래도 좋아.
"응?"
-그래도 좋아한다고. 난 너 아니면 안될 것 같단 말이야.
"서윤아."
-진심이야. 나도 내가 왜 그런지 모르겠어. 내 가장 부끄러운 비밀도 알고 있는 사람인데…. 처음엔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잊혀질 거라고 생각했어. 원래 그렇잖아. 사람이라는 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그렇게 잊고 새 출발을 하고 싶었어. 근데….
도훈은 서윤의 말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근데 널 잊을 수가 없더라.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
너 솔직히 그렇게 좋은 남자는 아니잖아.
"응."
-근데도 좋아. 여자친구가 있다고 했을 때 솔직히 너무 화났는데…. 그래서 그냥 다 포기하고 싶었는데, 그래도 좋더라. 어쩌면 네가 다른 여자랑 결혼하고 유부남이 되더라도 좋아할지도 몰라….
"서윤아, 그건…."
-그냥 그렇다고. 좋아하는 걸 아니라고 할 순 없잖아. 나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하나쯤 있어도 되는 거잖아.
나도….
"서윤아."
갑자기 서윤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 지 핸드폰을 든 도훈은 한동안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이것참….’
[신기한 일이군요.]
‘뭐가 또?’
[서윤양 말입니다. 다른 여자분들은 주인님이 가진 플레이어의 능력에 붙잡혀 있잖습니까. 마법의 정액 중독효과 라던지, 매력 버프라던지…. 현재의 주인님은 쉽게 말해 여자를 홀리는 마성의 남자죠.]
‘근데?’
[하지만 서윤양을 만날 때는 그 정도는 아니셨거든요.]
‘그땐 하수였으니까.’
[그래서 놀랍다는 겁니다. 무엇이 서윤양을 저토록 강렬하게 매달리게 만드는 걸까요?]
‘음…. 글쎄다. 그냥 좋았나 보지.’
[추억은 언젠가 희미해집니다. 아무리 강력한 사랑도 세월을 이기진 못하죠.]
‘나도 모르겠어. 유난히 궁합이 좋았던 건지. 아니면 가장 힘들었던 시절을 함께 보내서 그런 건지. 근데 진짜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미안, 또 울어 버렸네. 도훈아 나 취한 것 같아. 그냥 오늘 일은….
"오늘 볼래?"
-어?
"내가 그쪽으로 갈게. 만나서 얘기하자."
-무, 무슨 소리야. 서울에서 여길 이시간에 어떻게 오려고. 됐어, 괜찮아.
"너 취했잖아. 집에 어떻게 혼자 보내."
-아, 아니야. 도훈아. 내가 미안해. 괜한 말로 신경쓰이게 해서.
"말하라고. 지금 어디냐니까?"
-아니…. 그게….
"장소 문자로 보내놔. 1시간 안에 갈 테니까."
-하, 한시간? 도, 도훈아. 도훈아?
이번엔 도훈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미쳤습니까 휴먼?!]
‘왜? 안 돼?’ 도훈은 재빨리 속옷을 갈아입고 청바지에 면티를 걸쳤다.
[차로 밟아도 3시간입니다. 서울에서 광주까지는요.]
‘차로 가면 늦지.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아니…. 그렇다고 스킬을 사용할 순 없지 않습니까? 초능력자라는 걸 들키실 셈입니까? 민간인에게 플레이어의 능력을 들키선 안됩니다.]
‘누가 들키겠데. 광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고 하면 되지.
’[미리요?]
‘그래. 그런건 얼마든지 무마할 수 있어. 대신 어떻게 해야 광주까지 1시간 안에 갈 수 있을지 생각하자고.’
[흐음…. 이건 정말이지.]
‘역시 마법의 문고리 뿐이지?’
[하지만 마법의 문고리는 한 번 가본 곳으로만 작동합니다. 광주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고요.]
‘거기라면 어떨까?’
[어디요?]
‘지리산. 거기도 전라도잖아. 내가 직접 가보기도 했고.’
[이 밤중에 산중에 도착해서 어떻게 차를 구하시려고요?]
‘하긴 그렇네. 아니지. 꼭 산장으로 올라가란 법은 없잖아?’
[네?]
‘생각해봐. 내가 기억하는 장소라면 어디든 상관없다며? 산에 오르지 전에 도착했던 마을이 있잖아.’
[아…!]
‘마을이 있으면 택시도 다닐거고, 택시가 다니면 광주까지 꽂을 수 있겠지.’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만…. 근데 꼭 오늘밤 서윤양을 보셔야 겠습니까?]
‘나 때문에 울고 있잖아. 여자의 눈물은, 남자가 흘려서는 안되는 거라고.’
[왠지 뇌가 좆으로 지배되는 것 같습니다만.]
‘전혀. 계획 세웠으니 움직이자.’
도훈이 마법의 문고리 아이템을 꺼냈다.
SP에 따라 채워지는 마법의 문고리는 한동안 쓰는 일 없어서 완충된 상태였다.
도훈은 장군과 함께 지리산으로 향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산에 오르기 전 마을을 상상했다. 차츰 동네의 모습이 생각 나고, 그때 봤던 집들을 떠올렸다.
‘푸른 대문…. 그래. 거기.’
[결정하셨습니까?]
‘바로 출발한다.’
도훈이 자신의 원룸 문에 문고리를 붙인 뒤 열어젖히자 놀랍게도 반대편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몇 번을 겪어도 놀라운 광경이었다.
"택시가 바로 잡혀야 할텐데."
도훈이 문을 통과하자 전라도의 한 시골 마을로 워프됐다.
마치 남의 집 대문을 열고 나온 것처럼 멍하니 골목길에 서있던 도훈은 급히 주변을 뒤졌다.
‘콜택시. 콜택시를 잡아야 해.’
도훈은 큰 길 가로 달려갔으나, 시골 마을의 특성상 거리엔 사람이 없었다. 24시간 편의점 몇 개와, 드문드문 지나가는 차들이 전부였다.
‘아씨, 택시 못 잡으면 말짱 꽝인데.’
도훈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때 마침 택시 한 대가 반대편을 지나갔다. 도훈이 손을 크게 흔들었다.
"여기요!"
택시는 급격히 유턴을 펼치더니 도훈 앞에 섰다.
"손님, 어디 가실라고?"
껌을 짝짝 씹는 택시 기사는 양아치 같은 복색을 하고 있었다. led등이 번쩍이는 실내 인테리어 취향을 봐선, 결코 정상은 아니었다.
"광주요."
"이 시간에?"
"네, 최대한 빨리요."
택시 기사는 도훈이 미심쩍은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한 마디 했다.
"노 머니? 노 광주."
장거리 운행이니 돈부터 내라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