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225화 (1,192/2,000)

1208. 2학년2학기-23-

* * *

-??? : 저, 그때 207호.

207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바닥에 누워있다가 복부를 세게 밟힌 것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207호면···. 가영이?"

가영은, 옆방에 BJ 닉네임이다.

본명은 하서윤.

한때 내가 사는 원룸 옆방에 살던 공시생이었고, 지금은 지방직 시험에 합격해 고향인 광주로 내려가 9급 공무원으로 지내고 있다.

반가움에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으나 여전히 서윤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어 문자가 왔다.

-하서윤 : 죄송해요. 아직 근무중이라.

아, 그러고 보니 퇴근시간이 아니다. 방학 중인 나와 달리, 평일 오후는 직장들에겐 일과 시간이었다.

-이도훈 : 아직 퇴근 안 했겠구나. 이게 얼마만이야? 잘지냈어? 번호는 또 언제 바꿨데?

반가운 마음에 문자를 보내고 나니 한꺼번에 너무 많은 질문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맹세컨대 성욕 때문이 아니었다. 현자타임의 부작용으로 성욕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것만은 장담할 수 있다. 내가 이토록 흥분한 것은, 진심으로 그녀의 소식이 반가웠기 때문이었다.

서윤은 가난한 공시생이었다.

아버지가 병환으로 몸져누웠기 때문에 스스로 생활비를 벌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야 했다. 결국 시간 대비 가장 효율이 좋았던 ‘성방 BJ’를 택했고 낮에는 순진한 공시생, 밤에는 홀딱쇼를 펼치는 성방 BJ라는 이중생활을 했었다.

우연히 나와 엮이며 나중에는 내가 그녀의 방송에 출연해서 함께 합방을 한 적도 있었다. 대물 배트맨이란 이름으로.

그게 벌써 반년 전의 일이다.

‘이야, 서윤이라니 진짜로 오랜만이네.’

[주인님이 누군가를 그렇게 반가워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반가울 수밖에! 안 그래도 잘살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서윤은 환생 후 초반에 인연인 것도 있지만, 딱한 사정 때문에 더더욱 기억에 남았던 인물이다. 집은 가난하고, 돈은 스스로 벌어야겠고, 그래도 몸은 팔수 없다며 얼굴을 가리고 성방을 진행했었다.

나중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과거를 지우고 멀쩡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기왕이면 서울에 남았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병원에 계신 아버지를 보살펴야 한다는 이유로 끝내 고향으로 돌아간 것 때문에 더더욱 아쉬움이 남았다.

-하서윤 : 이렇게 빨리 답장을 주실 지 몰랐어요. 20분 뒤에 퇴근하니까 그때 전화드릴게요.

-이도훈 : 근데 웬 존댓말? 우리 말 놓기로 하지 않았나?

-하서윤 : ㅎㅎ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해서요. 암튼 좀 있다 연락할게요.

그 뒤로 서윤의 문자가 끊겼다. 다시 어플로 집을 알아보려 했지만, 가슴이 두근거려 매물로 나온 집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에이, 올라가서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와야겠다."

옥상으로 향하는 길에 한 때 서윤이 살았던 207호 앞을 지나갔다. 그녀가 급작스럽게 떠난 이후 지금은 누군지도 모를 사람이 방을 차지하고 있다.

옥상은 평소 잠겨 있지만, 만능 열쇠를 소유한 나에겐 혼자 들락거릴 수 있는 장소였다.

벽에 등을 기대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는데 서윤과 함께 했던 지난날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 원룸에서 추억이 많긴 했구나."

[왜요? 막상 떠나려니 아쉬우십니까?]

‘아니 뭐. 어차피 내 집도 아닌 걸···.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간 떠나야 했을 테고.’

[근데 서윤 양은 어째서 갑자기 연락을 했을까요?]

‘그러게. 지금쯤 호감도도 많이 떨어지지 않았으려나?’

서윤을 만났던 당시엔 나도 쪼랩이었기 때문에 호감도를 유지할 수 있는 스킬이 거의 없었다.

지금이야, 여러 가지 버프와 패시브 스킬로 한 번 관계한 여자를 원하는 데로 붙들어 둘 수 있지만, 초창기 때 만난 여자들은 일반적인 남녀 관계가 그렇듯 "out of sight, out of mind"였다.

가령 편의점 알바 할 때 만났던 알바생이라던지?지금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혹은 기춘의 여자친구였던 수아도 점점 안 보게 되면서 연락이 끊겼다. 멀리 광주로 떠난 서윤도 이와 마찬가지일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중간 쯤 한 번 보지 않았습니까? 서윤양이 이사간지 한 달 정도 지나서요.]

‘어. 그렇네. KTX타고 올라온 적 있었지? 남겨놓은 짐 때문에 왔었나? 그래봐야 5개월 전이지. 지금은 기억도 흐릿해졌을 것 같은데···.’

[정 궁금하면 확인을 해보시죠?]

‘어떻게? 당장 옆에 없는데 정보창을 띄울 수 있나? 한번 스캔한 목록은 볼 수 있어도, 실시간 조회는 안 되는 것으로 아는데?’

[맞습니다. 실시간은 안 되죠. 하지만 어장관리의 어플로 간접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 그렇군?’ 어장 관리 어플.

일정 기준 이상의 호감도를 충족하는 여성들을 관리해주는 어플로, 호감도가 떨어지면 자연스럽게 목록에서 빠지는 특성이 있다.

로시의 말은, 당장 정보창으로 호감도 체크가 안 되더라도 어장관리 어플을 목록을 보면 현재 하서윤이 어장에서 이탈했는지 그대로인지 확인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어플 켜봐.’

[넵.]

어장관리 어플이 실행되자 익숙한 화면이 보였다.

실시간으로 나의 어장 안에 갇힌 여자들의 이름과 현재의 장소가 들어왔다. 맨 밑으로 스크롤을 내리는데 서윤의 이름이 보였다.

‘어라? 아직도 있다고?’

[놀랍군요. 하서윤 양은 여전히 주인님을 잊지 못했나 봅니다.]

‘그래서 연락했나···.’

서윤의 호감도가 여전하다는 것을 확인하자 불쑥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기억에서 잊어버리고 생각도 못했던 여자가, 수개월이 흐른 뒤에도 멀리서나마 나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사실이 어딘가 뭉클하면서도 미안했다.

[은근히 지조가 있는 여성이었군요, 서윤양은.]

‘하긴, 그때도 특이하긴 했지. BJ할 때랑 평소 수험생 모습이랑 너무 성격이 워낙에 딴판이라.’

[주인님이 이중인격이라고 했었죠.]

‘심적으로 복잡한 캐릭터였어. 집안 사정 때문인지 평소엔 어두워 보였는데, 막상 가면을 쓰고 방송을 할 땐 전혀 다른 사람처럼 바뀌는.’

[둘 중 어느 모습이 진짜였을까요?]

‘반년이 지나도 스쳐간 남자를 잊지 못하는 걸 보면 순진한 모습이 본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보기엔 BJ로 변한 가영의 존재감도 만만치 않죠. 카메라 앞에서 분수쇼 펼친 것 하며···.]

‘그러니까 복잡한 사람이라니까. 어떻게 사는지 진짜 궁금하긴 하네.’ 바깥바람을 쐬며 옥상에 쪼그려 앉아있는데, 서윤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어. 일은 끝났어?"

-···네. 목소리 그대로네요.

"너도. 근데 왜 자꾸 존댓말이야? 말 편하게 하라니까."

-간만이라 조금 어색해서요. 잠깐만요, 차타고 있어서···.

목소리가 끊기더니 이내 쿵- 하고 차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차도 샀어?"

-네, 잠시만요···. 손에 짐이 좀 있어서. 이제 됐어요.

"이야, 공무원 되더니 잘 나가는 구만. 차도 사고, 폰도 바꾸고."

-아니에요. 출퇴근 때문에 할부로 구한 거예요. 경차에요.

"존댓말 그만 하라니까. 괜히 거리 두는 것 같잖아."

-아···. 그, 그럴까.

서윤이 겨우 말을 놓았다. 나는 궁금함에 물었다.

"폰은 또 언제 바꾼 거야?"

-좀 됐어. 두 달 전?

"근데 왜 바꿨다는 연락 안 했어? 잠수타려고 한 거야?"

-잠수는 아니고···. 사정이 좀 있었어.

"무슨?"

-그러니까···.

서윤은 어딘가로 운전하고 가는 중인지 잠깐씩 목소리가 끊겼다. 아마도 이번에 차를 사면서 면허를 새로 딴것인지 운전과 통화를 동시에 하는 게 다소 어색한 모습이었다.

아무튼 서윤이 말해준 사정은 다음과 같았다.

-실은 두 달 전에 잠시 병가 냈었.

"병가라니? 아팠어?"

-아니···.

"아님 아버님이 위독해지신 거?"

-그것도 아니야. 다행히 아버진 병에 차도가 있으셔서 이젠 많이 괜찮아.

"그건 다행이네."

-사실 귀찮은 민원인이 있어가지고.

"민원인이라고?"

서윤이 광주로 내려가 동사무소에서 일한 지 두어 달이 지날 무렵. 과거 BJ 활동 이력을 들킬까 늘 조심하던 그녀에게 유독 관심을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고 한다.

"남자라고?"

-응. 한 번은 우리 주민 센터에 등본을 떼러 왔는데 나를 보더니 갑자기 남자친구가 있느냐 묻더라고.

"아···."

-그래서 나도 모르게 없다고 했더니 그날부터는 매일같이 찾아오는 거야. 별 이유도 없이. 필요도 없는 서류를 굳이 기다렸다가 나한테서 떼가더라고.

"귀찮은 똥파리 새끼가 붙었구만?"

-내가 반응을 잘 안보이니까, 어느 날인가 그러더라. 내가 인터넷에서 본 누군가랑 너무 닮아서 신기하다면서. 같은 사람 아니냐고.

"뭐? 설마 알아 본 거야?"

-그건 잘 모르겠어. 그 말 듣고 너무 소름이 돋아서 일이 손에 잘 안 잡히더라고. 혹시 자기 마음 안 받아 준다고 나중에 나한테 해코지할까도 싶고···. 내가 과거에 했던 일들을 소문내 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들고.

"이런···. 그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 하지 그랬어?"

[어떻게 그러니.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너한테 내가 무슨 염치로.]

‘아니 그래도 곤란한 사정이 있으면 머리를 맞대고 상의라도 했었어야지.’

만약 정말 서윤이 부탁했다면 그 스토커 새끼를 반쯤 죽여 놨을 것이다.

[말만이라도 고마워. 암튼 내가 과거에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니 다 내 업보라고 생각했어. 알아볼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 못했거든.]

‘근데 정말 네가 BJ라는 걸 알았다고? 그 스토커가?’

[정확히는 모르겠어. 암튼 당시 아버지도 살짝 안 좋으셔서 겸사겸사 병가 냈었는데, 그때 다른 직원한테 연락이 오더라고.]

‘뭐라고?’ 서윤이 병가를 낸지 3일째 되던 날.

친하게 지내던 다른 여직원이 그녀에게 연락했다고 한다.

웬 젊은 남자가 자신을 찾아왔더라는.

"젊은 남자라고?"

-응.

"그 놈은 또 다른 사람이야?"

-응. 서울에서 공시할 때 나랑 알고 지낸 사이라고 했다더라.

"누군데?"

-그런 남자는 없어.

"없다고?"

-난 도훈이 너 말고 다른 남자들이랑 한 번도 말도 섞은 적 없었거든.

"아니 그럼···."

-처음엔 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인상착의를 물어보니까 전혀 다른 사람인거야.

"대체 누구지?"

-모르겠어. 그때부터 겁이 덜컥 나더라고. 그 스토커가 내가 BJ 출신이었다는 걸 다른 데 소문냈나 싶기도 하고, 어디 인터넷 게시판 같은데다 익명으로 제보를 했나 싶기도 하고···. 내가 갑자기 은퇴하고 난 후 나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었거든.

"저런···. 엄청 스트레스 심했겠다."

-응. 그때부턴 출근하기도 싫어지는 거야. 주민 센터에서 민원보고 있으면 갑자기 날 아는 사람이 찾아올 것 같고 ···. 게시판에 성방 BJ 하던 여자가 우리 동사무소에서 일한다고 민원 넣을 것 같고···. 그땐 정말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어.

"음···."

-그래서 도저히 안 되겠어서 병가 낸 김에 그냥 두 달 간몸져누워 버렸어.

"잘했어.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건 아니니까."

-그 김에 성형도···.

"성형이라고?"

서윤이 놀라운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이 날 알아볼까 봐 두려웠거든. 한 번도 얼굴 전체를 드러낸 적은 없지만, 영상을 보던 사람들이 눈매라던가 다른 걸 보고 알아챌까 너무 무서웠어.

"······."

-그래서 쉬는 김에 살짝 손댔어. 눈썹 모양도 싹 고치고, 눈매도 다른 사람인 것처럼···.

"그랬구나."

-스토커 때문에 아팠다고 생각했는지 다행히 위에서 배려를 해줘서 상급 구청으로 파견을 내주셨어. 이젠 주민 센터로 출근안하고 이쪽으로 다녀.

"다행이네. 그럼 번호도 그것 때문에?"

-응···. 혹시나 번호나 다른 것도 유출됐을지도 모르니까···. 그냥 다 바꿨어.

"지금은 괜찮아?"

-응, 다행히. 내가 센터로 다시 출근 안하니까 스토킹하던 사람도 관심이 식었는지 안 찾아 온다더라고.

"서울에서 왔다는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정체를 모르겠어. 그때 이후론 다시 안 왔다고 했거든. 정말로 아는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지레 겁을 먹은 건지…. 아니면 그 뒤로 병원에 잠깐 다녀갔었는지도.

"흠…. 진짜 별일 다 겪었구나. 고생 많았다."

-이젠 괜찮아.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하는 업무도 대면 업무가 아니라서 내 일만 열심히 하면 돼서. 그러고 보니 내 얘기만 잔뜩했네. 너는 어때? 대학은 열심히 다니지?

서윤이 뒤늦게 내 소식을 물었다.

서윤도 제법 큰일을 겪긴 했지만, 지난 6개월간 내가 겪을 일을 말해주면 놀라 까무러칠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이름만 말하면 알 수 있는 재벌집 딸을 건드리고, 막장 집안의 세 자매와 엮이기도 하고… 말하면 누구도 믿지 못할 이야기였기 때문에 적당히 뭉뚱그렸다.

"뭐…. 바빴지. 공부하느라."

-그래…. 그냥 오늘 혼자서 사무실에 일하는데 갑자기 너 생각나더라. 번호 바꿀 때 말을 안 해서 연락을 안 하나 싶기도 하고. 아니면 나를 까맣게 잊었는데, 나 혼자 생각하나 싶기도 하고….

"아니야. 널 어떻게 잊겠어."

-나한테 연락했었어?

"음… 그건 아니지만."

-거봐. 벌써 잊었네.

"아니라니까 진짜."

그때 서윤이 망설이더니 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자 친구는? 당연히 생겼겠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