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6. 2학년2학기-21-
도훈은 산산 조각난 책상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고 보니 새로운 몸에 빙의한 뒤 아무 생각없이 기존주인이 쓰던 물건을 써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주인이 워낙 단출한 살림을 꾸렸기 때문에 집에 제대로 된 가구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환생 이후로 모든 것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원주인과 똑같은 집에서 변함 없는 형태로 살고 있던 것이다.
‘음, 이 기회에 하나 사버리는 게 나으려나? 아니다. 차라리 이사를 가버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도훈은 책상을 새로 사느니 아예 이사를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뜬금없이 이사라뇨?]
‘생각해보니 수중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처음에야 돈도 없었고, 월세마저 미국에 계신 도훈이 아버님이 매달부쳐주셔서 그냥 살았는데 이젠 내 돈으로 집을 구해도 되는 상황이니까.’
[너무 갑작스러운 결정 아닙니까?]
‘그렇기도 한데 불쑥 그런 걱정이 들어서 말이야.’
[무슨 걱정요?]
‘이런 다세대 원룸에 살다가 PK단 기습이라도 받게 되면 꼼짝없이 당하겠구나 하는.’
[근데 이사라는 게 그렇게 쉽게 갈수 있는 건가요?]
‘안 될 건 또 뭔데?’
[아직 계약 기간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어차피 이런 원룸의 경우 새로 세입자를 들이게 되면 남은 기간하고 상관없이 보증금을 바로 빼주는 편이거든. 나도 복비만 계산해 주면 되고. 솔직히 보증금을 못 받더라도 당장 집을 구하는데 돈이 부족하지 않는 상태잖아. 지금 통장에 억 단위로 있으니까.’
[그래도 불쑥 이사라니···.]
‘사실 집이 좀 안 좋기도 했어. 방도 엄청 좁고, 학교도 걸어 다니긴 애매한 위치고. 주차장은 맨날 만차라 늦게 오면 골목에 대야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 집에 계속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 도훈도 말하고 보니 진작 이사를 가지 않은 게 후회될 정도였다.
처음엔 수입이 없는 대학생이니 당연히 원룸 같은 곳에 살아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같은 대학생이라도 형편이 좋은 경우 훨씬 좋은 집에 사는 학생들도 있는 것이다.
도훈이 그들에 비해 부족한 것은 없었다.
[그럼 어디로 옮기시려고요?]
‘일단 대학 근처로. 기왕이면 단독주택이면 더 좋고. PK 단 기습도 대비해야 하니까.’
[근데 단독주택은 비싸지 않습니까?]
‘어차피 매매만 아니면 상관 없어. 전세로 들어가도 충분하니까. 그리고 주택이라도 2층만 세들어 사는 경우도 흔히 있거든. 돈이 모자라서 집을 못 구할 일은 없을 거야.’
[흐음, 주인님이 정 원하시면 그리하십시오. 집이 더 넓어지면 하렘을 관리하기엔 더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비좁은 원룸보다는요.]
‘그치? 말 나온 김에 한 번 알아봐야겠다.’ 도훈은 곧바로 전화번호부를 뒤져 집주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집주인과는 이제껏 따로 연락한 적이 없었는데, 어차피 월세는 아버지가 알아서 입금해주고 공과금 고지서는 도훈이 직접 처리했기 때문이었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저 202호 사는 학생인데요."
-아, 혹시 뭐 고장 났나요?
평소 연락이 없던 도훈의 전화를 받은 집주인은 불편 사항을 알리려고 전화한 것으로 착각했다.
"그게 아니고 이사를 갈까 해서요."
-이사요?
도훈이 대강 사정을 설명했다. 대학 가까이 옮기고 싶은데, 최대한 빨리 보증금을 돌려줄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다.
-음, 근데 계약기간이 아직 많이 남았을 텐데···.
"새로 세입자만 구하면 되죠? 복비는 제가 내드릴게요.
복덕방에 연락 좀 해주세요."
-지금 시기가 이사 철이 아니라서 좀 걸릴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요? 대신 세입자 구하는 대로 보증금은 돌려드릴 게요.
"네, 감사합니다."
의외로 쿨한 집주인의 반응에 도훈이 만족하며 전화를 끊었다.
"됐다. 말이 좀 통하는데."
[그럼 이제 이사 갈 집을 알아보시러 가는 겁니까?]
‘그건 아직 급한 건 아니니 차차 알아보기로 하고 일단 커피숍이나 가려고.’
[커피숍요?]
‘원래 집에서 하려고 했는데, 책상이 저 모양이 돼서 말이지.’
도훈이 주머니에서 번개에게 받은 USB를 만지작거렸다. 김양이 몰래 빼돌린 햇빛론 사무실의 금융 장부 파일이었다.
도훈은 일전에 산 노트북을 챙겨 동네 근처의 커피숍으로 향했다.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USB를 열어본 도훈은 생각보다 많은 용량에 당황했다. 32Gb USB가 가득 차 있던 것이다.
"아니, 뭔 놈의 폴더가 이렇게···."
도훈은 하나씩 열어보다가 그것이 바탕화면에 보이는 모든 파일과 폴더를 싹 다 집어넣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김양이 내용이 구분이 안 된 나머지 눈에 보이는 모든 파일을 드래그해 USB에 때려 박은 것.
"나 참···. 하여간."
도훈은 하나하나 폴더를 확인하다 ‘직박구리’라는 폴더에 담긴 영상 파일을 보았다. 날짜로만 표기된 그것은 CC TV의 녹화 파일처럼 보였다.
‘엇? 이게 뭐지?’
[중요한 거래 장면을 녹화해놓은 거 같은 게 아닐까요?]
‘그거라면 대박인데. 얼굴 나오면 빼박 물증 되는 거잖아.’
도훈이 기대감에 부풀어 영상을 클릭했다.
그 순간 노트북 스피커로 격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ah! Yeah!"
옆에서 커피를 마시던 손님이 놀라 도훈을 쳐다보자, 도훈이 황망한 표정으로 잽싸게 노트북을 덮었다.
쾅-!
도훈은 주변의 눈총을 못 견디고 그대로 커피숍을 뛰쳐 나왔다. 담배를 꼬나문 도훈이 푸념했다.
"아으! 최실장 이 변태 새끼! 사무실 컴퓨터에 야동만 잔뜩 받아놨네!"
날짜로 변경된 파일의 실체는 바로 야동이었던 것.
최실장이 다른 사람 모르게 파일 이름을 바꾸어 숨겨 놓았던 것을 김양이 통째로 복사해 놓은 모양이었다.
[세상에···, 그럼 그 파일들 전부가 다 야동이라는 뜻입니까? 서른 개는 족히 넘어 보이던데요?]
‘그러니까 말이야. 어쩐지 USB 용량이 가득 차 있더라니 죄다 야동이었어.’ 도훈이 어처구니없어하는데, 막 커피숍에서 여자 손님들이 나오며 담배 피우고 있는 도훈을 보고 대놓고 비아냥댔다.
"참나, 하여간 한남 클라스 어쩔?"
"얼굴도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공공장소에서··· 쯧쯧."
도훈이 억울함에 얼굴이 벌개졌다.
‘으이씨, 저 멧돼지 같은 것들이 감히 누굴 보고!’
[참으십시오 주인님. 지탄받아 마땅한 상황이니까요.]
체면을 구긴 도훈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는 직박구리에 든 영상들을 싸그리 날려버렸다.
‘변태 최실장 새끼야. 야동은 제발 집에 가서 봐라.’
도훈은 다시 USB 폴더를 뒤지기 시작했다.
본래부터 바탕화면에 잡다한 것들이 많았는지 웹하드로 몰래 받은 게임에서부터, 각종 유틸리티 설치 파일, 그리고 어디서 다운 받은지도 모를 정체불명의 여자 사진들이 자꾸 튀어나왔다.
‘아니, 김양 얘는 대체 뭘 복사해 온 거야? 하여간 머리 나쁜 애한테 시키는 게 아니었는데.’
[너무 비난 마십시오. 그렇게 똑똑했으면 거기서 일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네 말이 맞네.’
도훈은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파일을 검색했다.
곧 뒤지고 뒤져 ‘출납’이라고 써진 폴더를 찾을 수 있었다.
‘이거 같은데?’
엑셀 파일을 클릭하자 수치가 가득한 내용이 한 눈에 들어왔다.
[맞는 것 같습니다.]
‘오호라, 그렇다면···.’ 도훈은 집중하여 엑셀표에 담긴 내용을 정독했다. 대충 분석해보니 영업소에서 나간 돈과 들어온 돈이 빼곡하게 기록된 장부였다.
‘김양은 진짜로 커피만 탔나 보구나. 대출해주고 이자 받는 내용은 실장이란 놈이 싹 다 정리했었네.’
[그렇군요.]
‘금전 거래의 규모가 생각 이상으로 커. 사람들이 사채를 이렇게 많이 썼다니.’
[어디나 사정이 급한 사람은 있는 법이니까요.]
‘이건 뭐지?’
도훈은 엑셀 시트에 별도로 구분된 탭을 클릭했다.
사람 이름과 함께 대출금과 이자가 정리되어 있었다.
[왠지 수상한데요?]
‘그치? 죄다 여자 이름뿐이고, 옆에 나이랑 별은 또 뭐야?’ 도훈은 나이 옆에 별도로 표시된 별표시가 뭔지 궁금했다.
"정하나라는 사람은 별이 2개, 김수희는 별이 3개. 이 둘만 봐도 대출금액 크기로 구분한 건 아닌 거 같고···."
도훈은 행을 옆으로 넘기다 비고란에 적힌 내용을 보고 별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가슴이 상당히 큼>
<성형한 티가 나지만, 얼굴이 그럭저럭 봐줄만함>
[이건!]
‘맞지? 여전히 사창가랑 줄이 대져 있었군. 별 표시가 여자애들 등급이었던 모양이야.’
[와, 정말 나쁜 놈들이군요. 돈을 그만큼 벌어 놓고도.]
‘내 이럴 줄 알았지.’ 도훈은 범죄를 수사하는 형사라도 되는 것처럼 출납대장의 내용들을 모조리 분석했다. 하지만 그의 부족한 지능으로는 방대한 분량의 파일을 해석해 내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아오, 머리 터질 것 같은데. 숫자를 너무 본 것 같아.’
[주인님. 이럴 때 필요한 스킬이 있지 않습니까?]
‘현자 타임? 음···. 설마 내일까진 여자 만날 일은 없겠지?’
도훈은 하루 이상 가는 현자 타임의 부작용을 우려했다.
하지만 당장은 만나야 할 약속이 없었기 때문에 과감하게 현자타임 스킬을 시도했다.
스킬을 발휘한 도훈은 각성제를 맞은 사람처럼 머리가 핑핑 돌았다.
‘오오오! 좋아! 빠르게 해치운다!’
도훈은 프로게이머처럼 빠르게 키보드와 마우스를 움직여 엑셀을 훑었다. 겉으로만 봐선 탭을 넘기기만 있는 것이지, 진짜로 읽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가는 모습이었지만, 현자타임으로 빨라진 두뇌는 짧은 순간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분석하는 중이었다.
잠시 후 5분도 지나지 않아 도훈이 노트북을 탁- 덮었다.
"다 이해했어."
[네? 벌써요?]
‘별것도 아니네. 자금의 흐름이 한눈에 보일 지경이야.’
도훈은 방금 전 쩔쩔 매던 것도 잊고,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도훈이 여유를 부리자 로시가 조언했다.
[주인님. 현자 타임이 풀리기 전에 어서 내용을 정리해 놓으십시오. 나중에 스킬이 풀리고 나면 잊어버릴지도 모르니까요.]
‘그런가? 그렇다면 빠가 도훈을 위해 똑똑한 내가 손수 수고를 해줘야겠군.’ 도훈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시건방을 떨며 거들 먹거리더니 메모장을 켜고 빠르게 타자를 두들겼다. 손이 어찌나 빠른지 키보드를 멋대로 치는 것처럼 보였으나, 문장은 완전무결하게 완성되는 중이었다.
[오오, 경이롭습니다. 아마 당장은 대한민국에서 타자를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치시는 분일지도···.]
‘무슨 이딴 걸 가지고.’
[근데 현자타임 스킬을 쓰신 후 성격이 약간 변한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죠?]
‘누가? 내가? 하긴 그 좆에 머리가 달린 머저리에 비하면야, 같은 사람이란 게 낯뜨거울 정도지.’
[흐음···. 성난 도훈에 이은 ‘허세 도훈’ 버전인건가요?]
‘성난 도훈 그 새끼는 두뇌까지 근육으로 찬 병신이고.
하여간 죄다 짐승 같은 놈들.’
[제 얼굴에 침 뱉기 같은데요?]
‘끝.’
[네?]
‘정리 다 했다고. 이 정도면 스킬이 풀리더라도 멍청한 도훈이 놈이 충분히 이해할 거야.’
[아···. 넵.]
잠시 후 짧았던 현자타임이 끝나자 도훈이 갑자기 머리를 감싸며 괴로워했다.
"으으! 대가리 깨질 것 같아."
[주인님. 공공장소입니다. 혼잣말 하시면 사람들이 쳐다 봅니다.]
‘아, 그렇지? 순간 너무 머리가 아파서 말이지.’
[지나치게 머리를 과부하 시킨 것 같습니다. 잠깐 바람이라도 쐬고 오시죠.]
‘그래야 겠어.’
도훈은 다시 노트북을 덮어두고 밖으로 나갔다.
담배를 피우고 나자 과열되었던 두뇌가 조금씩 식어지는 것 같았다.
[주인님은 가끔 다중인격자 같습니다.]
‘왜? 뭔 일 있었어?’
[혹시 현자 타임 때 했던 말이나 행동이 기억이 안 나십니까?]
‘아···. 안 나는 건 아닌데, 그건 내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주인님이 아니라고요?]
‘아니. 그 스킬 쓰면 무슨 뽕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이상해지더라니까? 성욕이 죄다 지능으로 옮겨간 것처럼.’
[주인님의 성욕이 죄다 지능으로 옮겨갔으면 사상최강의 천재 탄생이겠는데요?]
‘이게 지금 누굴 비꽈?’
[아 맞다. 주인님. 현자타임때 분석내용 요약해 놓았습니다.]
‘나도 알아. 이제 차분히 봐야지. 와, 근데 부작용 심각하네 이거.’
[왜 그러십니까?]
‘성욕이 전혀 없는데? 완전 스님된 느낌이야. 잦이 없어도 상관없을 것 같아.’
[쯧쯧 역시 부작용이 무섭긴 하군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머리 다 식히셨으면 요약본이나 정리하러 가십시오.]
‘알았어.’ 도훈은 ‘현자 도훈’이 분석한 내용을 꼼꼼히 훑었다.
그 짧은 순간 영업소 하나의 출납대장만 가지고 박회장의 사업규모 전체를 추산해낸 부분은 놀라울 정도였다.
‘와···. 현자 타임이 진짜 사기구나. 어떻게 엑셀표 하나만 보고 이렇게까지 분석했지?’
[천재가 되는 스킬이니까요.]
‘박회장의 약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뭔데요?]
‘현자 도훈이 미리 다 써놨어. 이대로만 하면 놈에게 한방 먹일 수 있을지도.’
도훈이 요약본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당분간은 성욕이 거세된 스님처럼 살아가야겠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번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