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219화 (1,186/2,000)

1202. 2학년2학기-17-

* * *

"젠장, 이게 무슨 꼴이람."

동네 옷 가게에 들러 새롭게 옷을 샀다. 별로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급한 대로 갈아입을 옷이 필요했다. 입던 옷은 어차피 허름했기 때문에 쓰레기통에 버리고, 위아래로 새롭게 맞춘 상태로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옷보다 더 눈에 띄는 건 점점 변해가는 얼굴이었다. 역용 술은 시간이 갈수록 서서히 풀리는데, 점점 ‘성난 도훈’의 모습이 희미해지고 본판의 얼굴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때가 오히려 살짝 애매한 편인데, 잘생긴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부족한 인상이었다.

‘이거 언제쯤 돌아오려나?’

[역용술이요? 아마 장군 양을 다시 만날 때쯤 그럭저럭 괜찮아질 겁니다.]

‘내 집에서 제 발로 나왔다가 다시 돌아가야 하다니. 설마 성난 도훈 상태로 아는 사람을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길거리에서 마주쳤으면 절대 못 알아챘을 겁니다. 하필 차에 타고 있던 게 문제였죠.]

‘그러니까 말이야.’

나는 역용술이 완전히 풀리기까지 혼자 카페에서 무료한 시간을 때워야 했다. 그리고 두 시간쯤 지나자 이제는 누가 봐도 본판이라고 인식될 만큼 제 얼굴로 돌아왔다.

"이제 집에 가야겠다."

원룸에 도착해 비번을 누르고 들어가자 장군이 나를 반겼다.

"도훈아!"

내 집에서 엄한 여자가 마중 나오는 기분은 좀 이상했다.

"미안. 최대한 빨리 온다고 했는데, 좀 늦었지?"

"아니야.

나야말로 허락도 없이 찾아와 미안해. 길에서 우연히 네 사촌 형을 만났지 뭐야?"

"아, 도현이형?"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자 뭔가 달라진 것이 있었다.

평소에 비해 어딘가 방바닥이 윤이 나는 느낌이었다. 열린 문 틈 사이로 보이는 화장실도 번쩍거렸고, 무엇보다 싱크대에 쌓여있던 자질구레한 설거짓거리도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어라? 너 혹시 청소했어?"

"응. 기다리는데 심심해서."

"아이고, 뭣하러 그런 것까지."

"아니야. 난 청소 좋아해. 재밌었어."

장군이 수줍게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 완 사뭇 다른 느낌이었는데, 과거에 비하면 훨씬 밝은 분위기였다.

"어···. 근데 오늘은 한복을 안 입었네?"

"한복? 아, 이제 외출할 때는 안 입기로 했어."

"그렇구나. 훨씬 보기 좋다."

나는 미사일처럼 튀어나온 장군의 가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장군도 내 시선을 의식한 듯 민망해하며 말을 돌렸다.

"맞다. 네 사촌오빠가 이거 전해달랬는데."

장군이 손에 쥐고 있던 차 키를 내밀었다.

실은 내가 나가기 전에 준 것이다.

"안 그래도 들어오면서 주차장에서 봤어. 사촌 형이 급하게 차를 쓸 일이 있다고 해서 내가 한동안 빌려줬었거든."

"아···. 근데 진짜 너랑 하나도 안 닮았더라 그 오빠는."

"그래? 키는 비슷하지 않았어?"

"응. 체격은 비슷했는데 인상은 전혀 다르더라고."

장군은 내가 일인이역을 수행한 사실을 여전히 모르는 눈치였다. 하긴 아무리 눈썰미가 좋아도 변신한 모습을 알아채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라? 그건 뭐야?"

"응?"

"아니 목 뒤에."

"뭐 말하는 거야?"

장군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목 뒤로 손을 뻗어 뭔가를 잡아당겼다.

"이거 상표 아니야?"

"아!"

깜빡하고 새로 산 옷의 택을 떼지 않은 것이다.

"내가 떼줄게. 집에 가위 같은 거 있어?"

"가위? 가위는 없고 부엌에 칼은 있는데."

"칼은 위험해. 잠깐만. 내가 이빨로 끊어 볼게."

장군이 등 뒤로 돌아가더니 목덜미에 붙은 끈을 이빨로 깨물기 시작했다. 그러자 목 뒤에서 그녀의 숨결이 느껴졌다.

"으, 생각보다 질긴데 잠시만."

"천천히 해. 괜히 서두르다 이빨 다치지 말고."

"네가 키가 너무 커서 힘들어."

"그렇겠네. 내가 자세를 낮춰줄게."

발돋움하고 겨우 상표를 떼고 있는 장군을 배려해 엉덩이를 뒤로 빼고 자세를 낮췄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그녀와 몸이 바짝 밀착되며 등 뒤에서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느껴졌다.

뭉클한 촉감에 놀랐지만, 장군은 신경 쓰지 않고 상표를 떼는 데만 집중했다.

‘흐흐, 간만이라 좋구만.’

[역시 그 목적이셨군요.]

‘아니라니까.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런 거라고.’

"됐다!"

상표를 끊어 낸 장군이 신이 나서 소리쳤다. 내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 바지에도 아직 있는 것 같아."

"바지도?"

"내가 급한 마음에 새로 산 옷을 그대로 입고 나와버렸지 뭐야."

"아이참, 그것도 끊어줄게."

장군의 앞에서 벨트를 풀자 장군이 두 볼이 빨개져서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꺄아, 뭐하는 거야? 바지는 왜 내려?"

"아니 상표가 안쪽에 있으니까."

"아···."

말도 안 되는 핑계였지만, 장군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벨트를 푼 나는 그대로 지퍼까지 내리며 바지를 반쯤 까뒤집었다. 끈에 달린 상표가 안쪽에서 덜렁거렸다.

"이것도 좀."

"으음."

장군은 살짝 망설이다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벌어진 티 사이로 장군의 봉긋한 가슴골이 훤히 보였다. 하얀색의 브래지어는 가슴 전체를 가리지 못해 밖으로 살이 삐져나올 정도였다. 정말 웅장한 골짜기군.

"으으, 이게 더 질기네."

장군이 힘들게 상표를 뜯고 있는데 가슴을 본 내 대물이 천천히 일어서기 시작했다. 점점 부풀어 오른 그것이 팬티를 들추자 그제야 발기를 눈치챈 장군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엇! 뭐, 뭐야 이거 왜 이래 갑자기?"

"미안. 나도 모르게···."

물론 조금도 미안한 마음은 없었다. 주인도 없는 자취방에 먼저 들어와 2시간 동안 집 청소를 하며 기다리던 장군의 의도가 뻔했기 때문이었다.

장군은 민망해하면서도 계속 바지에 달라붙어 택을 뜯었다.

"도훈이 너도 참···. 하나도 안 변했구나, 그때랑."

"사람이 쉽게 변하면 쓰나. 근데 우리 얼마 만이지?"

"두 달 정도? 혹시 까먹은 거야?"

생각해보니 장군과 함께 지리산 여행을 떠났던 시기가 여름 방학 초입이었다. 그리고 이번 주가 개학이니 대략 두달 정도가 맞는 것 같다.

"아니야. 당연히 기억하지."

"흥. 기억한다는 사람이 연락도 잘 안 하던데?"

장군은 그동안 연락이 없던 나의 태도가 섭섭했는지 눈을 흘겼다.

"공사가 다망하신 우리 처녀 보살님 배려하느라 그랬지.

가만, 근데 처녀 보살은 이제 아닌 건가?"

"앗! 뭐래 진짜? 그리고 처녀 보살이 아니라 선녀 보살이라고."

"아, 그렇지?"

택을 모두 제거한 장군이 벌떡 일어나더니 이마의 땀을 닦았다.

"더워?"

"아니, 일을 안 쉬면서 했더니."

"에어컨이라도 틀어놓지 그랬어?"

"주인도 없는 집에 어떻게 그래."

"나 참. 그냥 틀지."

나는 재빨리 에어컨 리모컨을 찾아 냉방을 켰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바지를 추슬러 입지 않자 장군이 물었다.

"이제 옷 똑바로 입어도 돼."

"아니야. 나도 좀 더워서 그래. 원래 집에 있을 땐 팬티만 입고 있거든."

"앗!"

말을 실천하듯 나는 걸리적거리는 바지를 벗어버렸다.

장군은 팬티만 입고 있는 나를 쳐다보며 부끄러워했다.

"그래도 손님 와있는데···."

"뭐 어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앞인데."

"흠···."

"아 참. 간만에 잘 만났다. 나 혹시 점괘 좀 봐줄 수 있어?"

"갑자기 점괘를?"

"다름이 아니라 어쩌다가이번 학기 학과 회장을 맡게 됐거든. 1년간 별일 없을지 궁금해서."

"진짜? 지금 봐 달라고?"

"힘들까?"

"아니 여긴 도구도 없고···. 그리고 저번에 말했지만, 도훈이 너는 신령님의 영험한 기운을 받아서 그런지 점괘가 잘 안 나와."

"그러지 말고. 살짝이라도 볼 순 있잖아. 맨입으로 하는거 아냐. 복채는 두둑이 챙겨 줄게."

"아니, 복채가 문제가 아니라 갑자기 이러면···."

장군은 갑작스러운 부탁에 난처해했지만 쉽게 거절을 못하는 성격상 계속 고심하는 눈치였다.

"역시 도구가 없이는 힘들려나?"

"원래 사주보려면 명리학 서적도 있어야 하고, 손금은··

·. 근데 손금은 1년 운세 보는덴 적합하지 않거든. 아, 혹시 집에 쌀 같은 거 있니?"

"쌀? 먹는 쌀?"

"응. 쌀 점은 봐줄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잘하진 못해도 어지간한 사이비보단 낫지. 정말 궁금하면 그거라도 봐줄게."

"알았어, 잠시만."

나는 부엌으로 가 빈 생수통에 넣어 둔 쌀을 밥그릇에 담았다. 그리고 가끔 식사할 때 사용하는 소반 위에 생쌀을 담은 그릇과 함께 내왔다.

"이거면 되겠어?"

"응. 아···. 근데 여기 와서 갑자기 점을 칠 줄은 몰랐는데."

"미안.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너 보니까 갑자기 궁금해 져서 말이야."

"치-. 연락 한 번 안 하구선."

"미안해."

"잠깐만. 준비가 좀 필요해."

장군은 방 한가운데 자릴 잡고 앉더니 눈을 감고 집중했다. 일전에 본 귀신을 불러내는 행위 같았는데, 눈을 감은 채 뭐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은 어딘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팬티만 입은 채 그녀의 앞에 앉아 조용히 그녀를 기다렸다.

그때 눈을 부릅뜬 장군이 갑자기 그릇에 담긴 쌀을 한 움큼 집어 들더니 상위에 뿌렸다. 촤아아- 생쌀이 소반 위에 흩뿌려졌다.

"어엇!"

"쉿-. 부정타니까 아무 말 하지 마."

"장군이 너 맞지?"

"그럼. 쌀 점은 내 힘으로 보는 거야."

장군은 집중하는 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더니 상위에 뿌려진 쌀알을 천천히 헤아리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쌀알의 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답답해 나도 모르게 물었다.

"뭐하는 건데?"

"쌀 점은 쌀알을 숫자를 통해 앞날을 파악하는 거야."

"숫자?"

"생기법(生氣法)이라는 건데 팔괘의 순서에 맞춰서 총 8단계로 해석해. 일상생기(一上生氣)·이중천의(二中天宜)·삼하절체(三下絶體)·사중유혼(四中遊魂)·오상화해(五上禍害)·

육중복덕(六中福德)·칠하절명(七下絶命)·팔중귀혼(八中歸魂). 그리고 나머지 두 개를 더해 끝자리 수로 해석하는 거야."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 듣겠어."

"몰라도 돼. 거의 다 셌으니까."

쌀알을 헤아리던 장군은 마지막 남은 쌀알을 카운트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그런데 점점 안색이 파리하게 변하는 것이 숫자를 세는 음성이 떨리기 시작했다.

"다섯··· 이러면 안 되는데··· 여섯···. 이, 일곱? 일곱이라고?"

장군이 커다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 대체 무슨 점괜데?"

"도훈아!"

"왜?"

"혹시 내가 빠뜨린 거 있는지 찾아 봐봐."

장군이 허둥지둥 놀라서 소반 위에 흘린 쌀이 있는지 찾았다. 그러나 남은 쌀은 한 톨도 없었다. 장군은 에어컨을 틀었는데도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아··· 이게 아닌데 어떻게 이런···."

"왜 그러냐니까? 점괘가 나온 거야?"

"도훈아."

장군이 너무 진지한 목소리로 물어봤기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왜? 많이 안 좋아?"

"···쌀 점이 맞는다면···."

"맞는다면?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해도 돼."

"일곱이 가리키는 운세는 칠하절명이라고 죽음에 이르는 위험한 괘야."

"주, 죽음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너 당장 그만둬."

"뭐, 뭘?"

"그 대학에서 한다는 거 말이야. 뭔지 몰라도 지금 되게 위험해. 쌀 점 대로면 앞으로 횡액을 맞을 운명이라고!"

장군이 너무나 무섭게 말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리고 말았다.

"아니 내가 왜···."

"나도 모르지. 점괘는 그렇게 나왔어. 이건 거의 안 나오는 거야.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섬뜩함에 나도 모르게 닭살이 돋았다. 장군의 신기는 내가 직접 봤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맞다면, 이번에 뜬 대흉은 정말 위험한 운세라는 뜻이었다.

[주인님···.]

‘이거 뭔데? 설마 학과 회장 맡았다고 죽는다는 소린 아닐 거 아니야?’

[그렇죠.]

‘설마 박회장 건인가? 근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데?’

[뭐가 말입니까?]

‘플레이어가 민간인에게 살해 위협을 당해? 그게 말이 돼?’

[어쩌면 박회장이 아닐지도 모르죠.]

‘그럼?’

[플레이어가 횡액을 맞는 경우는 하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PK단?’

[맞습니다. 주인님 주변으로 PK단의 마수가 뻗어 온다는 뜻입니다.]

‘말도 안 돼. 난 경보장치까지 들고 있다고. 이제껏 한 번도 울린 적도 없었고.’

[경보장치는 적들이 근접했을 때만 발동합니다. 귀기묘묘의 대흉 점괘와 장군 양이 봐준 쌀 점은 앞으로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이고요.]

‘아니 어떻게···.’ 시쳇말로 나는 멘붕 상태였다.

플레이어는 의지만 있다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존재다.

단, 그런 플레이어를 잡아 죽이는 PK단만 피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알았지? 도훈아. 내 말 꼭 새겨 들어야 해. 너 지금 굉장히 위험한 상태야."

"아니···. 도저히 납득이···."

"이해하려고 하면 안 돼. 세상에 이해가 되는 일보다 이해가 안 되는 일이 훨씬 많으니까. 아! 그래서였구나!"

"뭐가?"

"길거리에서 네 사촌 오빠를 우연히 만난 거 말이야. 난 참으로 공교롭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너에게 이걸 경고하기 위해서였나 봐. 오늘 널 보러 오길 정말 잘한 거 같아.

아니, 신령님께서 널 보우하신 거야."

"가만, 근데 이 점괘를 피할 방법이 있다는 거야?"

"당연하지. 미래는 정해진 게 아니야. 사주도 바뀌는데 한낱 쌀 점 가지고. 다만 이대로 똑같이 행동하면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니까, 지금 하던 걸 뭐가 됐든 그만둬야 해."

뭔가 위기가 닥칠 것 같긴 한데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오히려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