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1. 2학년2학기-16-
도훈은 차창 너머로 비친 얼굴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쟤가 여기서 왜 나와?’
썬팅 진한 차창 너머로 도훈을 응시하고 있는 이는 바로 무녀 장군이었던 것.
"도훈아? 도훈이 너 맞지? 분명 도훈이 차 맞는 것 같은데?"
장군은 일전에 도훈과 함께 차를 타고 지리산까지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도훈의 차종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갓 길에 세워진 차를 한 눈에 알아본 것이었다.
[주, 주인님. 창문 내리시면 안 됩니다. 아직 역용술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아차! 그렇지?’ 도훈은 오늘 최번개와 접선해 USB를 받고, 조소연을 만나기로 했었다. 둘 다 ‘성난 도훈’ 상태로 변신한 뒤 만났던 상대였기 때문에 집에서 출발하기 전 얼굴에 역용 마스크를 쓴 상태였다.
평상시의 도훈과 달리 소위 ‘성난 도훈’은 보통 때 보다 10살 가까이 늙어 보이는 얼굴이었고 심지어 인상도 전혀 달랐다. 체격조건이 비슷한 것을 빼면 절대 같은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똑똑!
"도훈아! 안에 있는 거 다 보이는데 왜 창문 안 내려? 설마 나 피하는 건 아니지?"
밖에서 차장을 두드리던 장군이 급기야 손잡이를 당기기 시작했다. 분명 도훈의 실루엣이 보이는데 도훈이 전혀 반응을 하지 않자 화가 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이서 지리산에서 함께 쌓은 추억(?)이 있는데, 볼 장 다 봤다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옳지 않은 행동이었다. 바빠서 연락을 자주 못 한 건 이해 할 수 있어도, 우연히 길에서 마주쳤는데 아는 체도 안 하는 건 너무하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얼굴이 변해버린 도훈으로선, 장군에게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핑계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갑자기 10년 팍싹 늙었다고 말하면 제아무리 무녀인 장군이라도 믿지 않을 테니까.
‘아니 왜 장군이 가까이 근접하는 데 경보조차 안 해준 거야?’
[무슨 경보요?]
‘어장 관리 어플!’
[어장 관리의 충돌경보는 아는 여자가 접근한다고 울리진 않습니다. 주인님이 바람을 피우다 걸리거나 여자 문제로 얽혔을 때만 발동하는 것이니까요.]
애꿎은 로시에게 짜증을 내던 도훈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젠장, 이젠 어떻게 하지?’
[딱 잡아 떼십시오.]
‘어떻게?’
[차종은 같아도 차 번호가 다르지 않습니까? 번호판 작업을 해놓았으니까요. 다른 사람이라고 우기면 그만입니다.]
‘근데 장군이 내 차량 번호까지 외우고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도훈은 장군이 단순히 차종만 보고 접근했다고 여겼다.
보통 남의 차량 번호까지 외우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에 같은 차종을 보고 우연히 창문으로 들여다보다가 도훈의 실루엣을 보고 말을 건 것이라고.
"와, 너무한다. 너. 진짜로 문 안 열거야?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그럼 그냥 쌩까고 출발하시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그러기엔 너무 위험하잖아.’
보조석 차 문을 당기던 장군은 급기야 차량 앞으로 빙 돌아 운전석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차량에 너무 가까이 붙은 상태였기에 급출발을 했다간 장군이 다칠지도 몰랐다.
"야! 이도훈!"
‘안 되겠다. 목소리 변조 아이템 있지?’
[네.]
‘바로 준비해.’ 결국 도훈은 운전석까지 빙 돌아온 장군을 향해 창문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너 진짜···."
화가 난 장군이 소리치는데, 운전석에 전혀 다른 사람이 앉아 있는게 아닌가?
"뭐요, 아가씨? 나한테 볼일 있소?"
걸걸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는 평소의 도훈과 전혀 달랐다. 도훈이 성대모사 아이템으로 순식간에 바꾼 탓이었다.
"누, 누구세요?"
"아니,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왜 남의 차 문을 열라고 하냐고?"
장군은 너무 황망하고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이고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 찬 줄 알았어요···."
"잉? 누구?"
"아, 아니에요. 체격이 비슷하셔서 제가 착각했나 봐요.
정말 죄송합니다."
장군이 가슴팍을 손으로 가린 채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가슴이 워낙 큰 장군이 다른 사람처럼 허리를 숙였다간 가슴 골짜기가 비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이었다.
그 모습을 본 도훈이 뭔가가 다른 생각이 떠올랐는지 장군에게 물었다.
"가만있자, 혹시 아까 이름 부른 사람이 도훈이라고 했어?"
"네. 그건 왜···."
"맞네. 아이고 난 또 뭐라고? 우리 사촌동생이랑 아는 분이셨구만?"
"사, 사촌 동생요?"
장군이 커다란 눈을 껌뻑거렸다. 외출을 나온 그녀는 점집에 있을 때처럼 한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있었는데, 예전처럼 가슴을 꽁꽁 싸매지 않은 상태라 풍만한 가슴이 티셔츠 위로 미사일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도훈은 장군의 가슴을 보고 속으로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이도훈이 맞지?"
"네, 그런데···."
"갸가 내 사촌 동생이여. 나가 살짝 차 쓸 일이 있어서 보름간 빌렸다가 다시 갔다 주러 가는 길이거든. 그래서 아가씨가 착각했구만?"
"아!"
전후 사정을 파악한 장군이 얼굴이 빨개져서 다시 사과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여. 멀리서 보면 나랑 비슷하게 생기긴 했지 도훈이가."
도훈은 일부러 사투리까지 섞어 써가며 다른 사람인 것처럼 연기했다. 목소리도 무척 다른데 특이한 억양까지 넣자 장군은 도무지 그의 실체가 진짜 도훈일 거라곤 상상하지 못 했다.
"아···. 그, 그러니까요. 저는 선팅 때문에 진짜로 도훈인 줄 알았거든요."
"물론 도훈이가 훨 잘생기긴 했지. 나는 좀 못 되게 생겼고. 그자?"
도훈은 일부러 얼굴을 정면으로 보여주었다. 장군이 유심히 살펴보니 분명 닮은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굉장히 인상이 사나웠기 때문에 그녀가 기억하던 도훈과는 전혀 이미지가 달랐다. 비슷한 것은 갸름한 얼굴형과 근육질의 체구뿐이었다.
도훈은 장군이 껌뻑 속아 넘어가는 것을 보고는 재미가 붙었는지 그녀에게 계속 말했다.
"맞다. 나 지금 도훈이 집에 가는 길인디 나랑 같이 갈랑가?"
"도훈이 집으로요?"
"엉. 방금 말했잖여. 빌린 차 돌려주러 가는 길이라고.
도훈이 여자친구 아니여?"
장군은 도훈의 사촌 형이란 사람이 뭔가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친구라고 오해를 받으니 왠지 기분이 좋아 자기도 모르게 얼버무리고 말았다.
"으음···. 근데 제가 가면 괜히 불편하시지 않을까요?"
"아니여. 나야 차만 가따 주고 후딱 집에 갈 거니께."
"아···."
장군은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했지만, 간만에 도훈을 다시 본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지리산 동행 이후로 거의 두 달 만이었다. 게다가 미신을 믿는 장군의 입장에서는 우연히 길거리에서 도훈의 차를 마주친 게 어떤 계시처럼 느껴졌다.
‘그래, 이 기회에 도훈이 집도 어딨는지 알게 되면 도훈이랑 더 가까워 질지도 모르잖아? 지금은 여자친구가 아니지만, 사람 일이란 모르는 거니까.’
"후딱 타브러."
"아, 네 그, 그럼···."
장군이 양해를 구하더니 보조석에 올랐다. 차량에 타고 나니 이 차가 도훈의 차라는 것이 더욱 확실해졌다. 지리산을 왕복하느라 몇 시간이나 차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때 봤던 차량 내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차를 타고 도훈의 집으로 가는 중 장군이 핸드폰을 꺼냈다. 도훈이 곁눈질로 힐끔 보더니 물었다.
"뭐덜라고? 도훈이한테 연락 할라고?"
"네. 집에 방문한다고 미리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됐어. 놔둬브러."
"네?"
"원래 깜짝 이벤트가 더 재밌는 법잉께. 도훈이 고놈 당황하는 모습 좀 보게."
"아···."
장군은 자기주장이 강한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에 연락을 하지 말라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집어 넣었다.
‘어쩌지? 무턱대고 집까지 찾아가면 도훈이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은데···.’
장군은 여전히 자신의 행동을 도훈이 싫어하면 어쩌나 걱정했다. 그 이후로 딱히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도훈이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것일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따, 근디 아가씨 겁나게 이쁘구만."
"예? 가, 감사합니다."
장군이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도훈과 만나기 전 장군은 늘 큰 가슴을 압박 붕대로 꽁꽁싸매고 다녔었다. 하지만, 도훈에게 여자로서 기쁨을 알게 된 이후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좀 더 과감해져 더는 붕대를 감지 않았다. 또한 점집에 있을 때를 제외하곤, 외출을 할 땐 평범한 20대 아가씨처럼 일상복을 입었기 때문에 과거보다 훨씬 여성스럽게 예뻐진 상태였다.
"우리 도훈이는 참 복도 많지. 어디서 이런 참한 아가씨를···."
"아, 아니에요. 아직 그런 사이는."
장군은 사실 여자친구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도훈의 사촌 형이란 사람이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가만있자, 아가씨도 그러믄 같은 대학다니는 겨?"
"아뇨. 저는 일해요."
"일혀?"
"네."
"아따, 일을 일찍 시작 해브렀구만. 일찍 돈 벌믄 좋제."
"그, 그런가요?"
"도훈이 고놈은 나중에 뭐시냐 임용인가 뭐신가 통과해야지 선생질한다 는디, 언제 돈 벌란가 모르겄어."
"아···."
"우리 도훈이가 쪼까 모자란 부분도 많은디 그래도 잘좀 봐주쇼잉. 근본은 착한 놈인께."
"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왜? 연기 죽이냐?’
[아니 되지도 않는 사투리는 뭐며···. 장군을 왜 집으로 데려가시냔 말입니다. 처음에는 아는 체도 안하려고 하셨던 분이.]
‘장군이 무당이잖아.’
[네, 그렇죠. 신내림 받은 영험한 무녀죠.]
‘내 운세가 지금 대흉이 떴는데, 장군이라면 왠지 뭔가 알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녀에게 미래를 물어보시려고요?]
‘그렇지. 겸사겸사 얼굴도 보고.’
[혹시 아까 가슴보고 혹 하신 건 아니고요?]
‘에이. 무슨 가슴을 보고 혹해.’
그러면서 슬쩍 장군의 봉긋한 가슴을 곁눈질하는 도훈이었다. 벨트가 골짜기를 가로지르는 바람에 평소보다 더욱 튀어나온 모습에 도훈이 침을 꿀꺽 삼켰다.
[주인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죠. 미션이나 업적이 걸리지 않더라도 자주 하고 다니시니까요.]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사이 어느새 차는 도훈의 원룸에 도착했다. 주차를 마친 도훈이 장군을 데리고 집으로 올랐다.
"여기가 도훈이 집이에요?"
"몰라?"
"아···. 집은 처음 와봐서요."
"글쿠만. 차는 주차해 놨으니 열쇠만 주고 가면 되겠네.
안에 있겄지?"
도훈이 자기 집 벨을 누르는데 당연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뭐시여? 안에 없나?"
연거푸 벨을 누르던 도훈이 갑자기 비번을 누르기 시작하자 장군이 당황해 물었다.
"어? 비번도 아세요?"
"서울 올라올 때 잘 데 없으면 몇일 묵기도 했거든. 가만 있자."
도훈이 비번을 맞게 누르자 원룸 문이 열렸다.
"도훈아, 형 왔다. 자고 있냐?"
당연히 도훈은 본인이었으므로 대답이 있을 리가 없었다. 밖으로 나온 도훈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따···. 잠깐 외출했는 갑네. 나 후딱 일보러 가봐야된 디."
"아···. 도훈이 안에 없어요?"
간만에 도훈을 만나러 온 장군도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때 도훈이 차키를 건네며 말했다.
"아가씨, 많이 안 바쁘면 집에서 기다리다 이것도 전해줄랑가?"
"네? 제가요?"
"응. 나 지금 약속 있어서 후딱 가봐야 되거든."
"그, 그럼 저 혼자 도훈이 집에 있으라고요? 도훈이도 없는데요?"
"멀리 안 나갔을 것이여. 그라믄 부탁좀 하네잉."
도훈이 후다닥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리자 혼자 남게 된장군이 당황하며 소리쳤다.
"아, 아니 아저씨. 사촌 오빠분!"
"미안혀잉!"
혼자 남게 된 장군은 어쩔 줄을 몰랐다.
‘어, 어쩌지? 남의 집에서 무작정 기다리라니.’
장군은 처음엔 어색함에 현관 앞에 뻘쭘하게 서있다가 결국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갔다. 가구가 거의 없는 썰렁한 원룸에는 책상이 하나 보였다.
장군이 다가가 책상 위 책꽂이에 꽂힌 전공서적을 펼치 는데 체육교육과 이도훈이라고 적힌 이름이 보였다.
‘아···. 이게 도훈이 책이구나.’
장군은 두꺼운 전공서적을 펼치다 열심히 밑줄 친 흔적과 빼곡한 요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와···. 도훈이가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의외의 모습에 놀란 장군은 다른 책도 살폈다.
해당 서적은 도훈이 단대 수석을 할 때 공부했던 책들이었기 때문에 빼곡히 필기가 되어 있었다.
‘와···. 장난 아니네?’
장군이 도훈의 책을 펼치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번호를 보니 도훈이었다.
"어? 도훈아!"
-사촌형 한테 방금 전화 받았어. 우리 집에 와있다고?
"어··· 아,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장군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혹시나 도훈이 오해하거나 싫어할까봐 우연히 된 일임을 거듭 강조했다. 내용을 다 들은 도훈이 말했다.
"그렇구나. 깜짝 놀랐어, 도현이 형이 너랑 같이 집에 왔다길래. 근데 어쩌지? 나 지금 2학기 개강총회 준비 때문에 학교에 와있거든."
"앗···."
"제법 걸릴 거야. 개강하고 처음 하는 행사라서 준비할게 많아서."
"그랬구나. 연락을 미리 하고 올 걸 그랬네. 그럼 다음에 봐."
"아니야."
"응?"
"그래도 간만에 보는 건데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 볼게.
혹시 두 시간 정도만 기다릴 수 있어?"
"두시간?"
장군은 난처했지만, 도훈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자기도 모르게 대답했다.
"으, 응. 두 시간 정도는···."
"그래. 미안해. 아이참, 도현이 형은 차 갖다 주러 올거면 미리 연락이나 하고 오지. 이해해줘. 그 형이 좀 즉흥적인 성격이라."
"아니야. 나도 말없이 찾아왔는데 뭘."
"냉장고에 마실 거 있으니까 잠깐 마시면서 쉬고 있어.
피곤하면 잠깐 눈 좀 붙여도 좋고."
"그래, 알았어. 이따 봐."
통화를 마친 장군은 2시간 후면 도훈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그의 자취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