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217화 (1,184/2,000)

1200. 2학년2학기-15-

* * *

도훈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혼자 차를 타고 가는 데도 누가 밖에서 보면 보조석에 앉은 사람과 얘기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혼자서 떠드는 중이었다.

실은 인공지능 로시와 계속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차에 혼자 있다보니 평소와 달리 밖으로 말을 내뱉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뭐지? 뭐길래 갑자기 대흉이 뜬 걸까?"

[글쎄요. 연유를 모를 땐 일단 피하시는 게 상책이 아닐까요?]

"상책까진 아니지. 상책은 저번처럼 화를 복으로 만들어야 상책인거고."

도훈은 일전에 싸이판에서 대흉이 떴을 때도 위기를 기회삼아 전화 위복시킨 전례가 있었다.

[그땐 적이 명백했잖습니까? 이번엔 누군지도 감을 못잡는 상황이고요.]

"그래서 일단 집으로 돌아가려는 거야. 작전을 다시 세운 뒤 덤벼드는 게 좋겠어. 상책은 아닐지라도 최악은 면할 수 있으니까."

도훈은 돌아가는 내내 대흉 점괘가 뜬 이유를 추측했다.

"역시 김양인 걸까?"

[그녀가 스파이 짓 한 것을 들켰다고요?]

"현재로선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지. 놈들 중에 조금이라도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 있었다면, 오늘 갑자기 점심을 굶고 사무실에 혼자 남은 김양을 의심했을 테니까. 아니면 비밀번호를 일부로 허술하게 관리해놓고 보안 프로그램으로 파일을 빼돌린 정황을 포착했을지도 모르고."

[모든건 가능성일 뿐입니다.]

"맞아. 고민하지 말고 그냥 대놓고 물어 보는 게 좋겠어."

도훈은 망설이지 않고 김양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이 길게 이어지다 자동응답으로 넘어가기 직접 김양이 전화를 받았다.

-깜짝이야! 전화를 하시면 어떻게 해요? 저 아직 회사라고요.

숨죽인 김양의 목소리에 살짝 에코가 섞였다. 화장실과 같은 습도가 높고 막힌 공간에서 전화를 받은 모양이었다.

"너 어디야, 지금?"

-어디긴요. 화장실이지. 통화하는 거 걸릴까봐 일단 화장실로 피신했어요.

"사무실 화장실이라고? 누가 듣는 건 아니지?"

-그건 걱정 마요. 여럿이 같이 쓰는 공용인 데다가, 우리 사무실에 근무하는 여직원은 저뿐이니까.

적어도 다른 직원이 엿들을 리는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신중해진 도훈은 만에 하나 통화내용이 새어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거기 분위기는 어때?"

-네? 무슨 소리예요?

"아니, 지금 사무실 어떤 상태냐고."

-오전엔 아저씨 찾는다고 사람들 몰려와서 분주했어요.

지금은 다들 밖으로 나가서 조용하고요. 설마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했어요?

"잠깐. 너 영상통화 되지."

-영상요? 네. 그건 왜요?

"기다려."

도훈은 음성통화를 영상통화로 전환했다. 갑자기 화면이 바뀌자 김양이 당황했다.

-가, 갑자기 영상을 켜시면 어떻게 해요?

그러면서도 영상에 떠오른 자신의 모습을 거울삼아 바쁘게 머리를 가다 듬었다.

"옆에 비춰봐."

-네?

"주변으로 카메라 돌려보라고."

-여기 여자 화장! ···실이라니까요?

황당한 나머지 언성을 높이던 김양이 자신이 흥분했음을 깨닫고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설마 저 지금 못 믿으시는 거예요?

"뭐해? 얼른 비추지 않고."

-하, 진짜···. 사람을 뭘로 보고!

김양은 억울한 마음에 여자 화장실 전체를 서라운드로 비춰주었다.

-맞죠? 여자 화장실.

"음···. 혹시 다른 직원들이 눈치 챈 낌새는 없었어?"

-낌새는 무슨 낌새요? 아저씨가 먼저 그랬잖아요. 누가 의심하겠냐고. 하루 만에 제가 아저씨한테 붙었을 거라고 아무도 생각 못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래. 알았어."

-잠깐만요. 설마 전화 끊으시려고요?

"왜? 할 말 있어?"

-아니 다짜고짜 전화해놓고 겨우 받으니까 할말만 하고 끊으신다고요? 이건 아니죠.

도훈은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겨우 김양을 설득했다.

"미안. 내가 좀 신경쓰이는 일이 있어서 그래."

-됐고요. 우리 언제 또 봐요? 전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다 했어요. 알죠?

김양은 위험한 행동을 시킨 도훈에게 대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뻔했으므로 도훈이 적당히 말을 돌렸다.

"일단 네가 준 파일 좀 분석부터 해봐야 할 것 같아. 다음에 시간날 때 내가 연락할게.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화장실에서 나가기 전에 나랑 통화했던 기록이랑 문자 싹 다 지워."

-뭐라고요?

"번호도 저장하지 말고. 일단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와, 진짜 사람을 뭘로 보고. 제가 아저씨 배신이라도 한다는 거에요?

"그런 뜻은 아냐. 다만 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혹시라도 의심할 수 있으니까 신중을 기하자는 거지.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아니요, 몰라요. 아저씨랑 직접 만나봐야 알 것 같아요.

만나서 알려주세요.

김양이 애처럼 떼를 썼다.

하지만 도훈은 지금 김양의 투정을 받아 줄 처지가 아니었다.

"오늘은 정말로 안 돼. 다음엔 꼭 만날 게. 알았지?"

-아, 진짜···.

뚝-.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기자 변기 커버 위에 앉아있던 김양이 발을 마구 차며 화를 냈다.

"아씨, 진짜! 누군 짤릴 각오로 자료 빼돌려 준건데!"

김양은 배신감을 느꼈지만, 방금 본 도훈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 보였기에 더 따지진 않기로 했다.

"씨. 두고 봐. 오늘 것까지 이자 쳐서 받아낼 테니까."

김양과 통화를 마친 도훈은 여전히 의문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깨끗해."

[제가 봐도 김양하곤 관계가 없는 내용 같은데요.]

"김양이 들킨게 아니라면 최번개 밖에 없다는 소린데."

최번개는 도훈이 박차돈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기억을 날려버리기 전 석산파와 민수 얘기를 꺼낸 것으로 봐선 USB 분실 건으로 빚을 지게 만든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혹시 최번개가 다 불어 버린 거 아니야?"

[최번개가요? 주인님이 일부러 USB 찾아내라고 노발대 발 하셨잖습니까? 그것 때문에 정신도 없을 텐데 그 사이에 불었다고요?]

"오히려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지."

[그것 때문이라뇨?]

"최번개는 나를 굉장히 무시무시한 사람으로 알고 있어.

근데 내가 맡긴 USB를 자기가 실수로 흘렸다고 알고 있잖아. 절대 찾지도 못할 걸 말이야."

[그렇죠. USB는 주인님 손에 이미 들어와 있으니까요.]

"그래서 자포자기한 나머지 내 계획을 민수나 석산파 쪽에 다 불어 버린 거지. 그럼 내가 자길 문책하지 못할지 알고 말이야."

[그건 너무 억측같은데요. 설사 최번개가 그걸 정말로 실토했다면 석산파에서 가만 있겠습니까? 민수라는 분은 주인님 연락처도 알고 있는데요.]

그때였다.

공교롭게도 도훈의 폰으로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도훈은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미, 민수다."

[설마?]

"맞지? 뜬금없이 민수가 왜 나한테 전화를 하겠어?"

[우연이라기엔 공교롭긴 하네요.]

전화가 계속 울리는데도 도훈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당장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안 받으실 겁니까?]

"계획 좀 세우고."

[흐음. 그래도 일단 받으시는 게 오해를 피할 방법 같은데요.]

"만약 최번개가 벌써 다 불었다면 오해고 자시고 없어.

녀석 말마따나 조폭도 체면을 차리기 위해선 나를 그냥 둘순 없을테니까."

[흐음···. 박차돈 일당에 석산파까지 가세한다면 피곤하긴 하겠군요.]

"젠장···. 일이 너무 꼬여버린 것 같은데."

울리던 전화가 끊기자 도훈은 잠시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는 최번개가 석산파에게 자신의 계획을 실토했다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뭘 어떻게 해? 석산파고 민수고 나를 방해하면 죄다 엎어 버리는 거지."

[현직 조폭까지 적으로 돌리면 아무리 주인님이라도 쉽진 않을 겁니다. 주인님이 무슨 용가리 통뼈도 아닌데, 무슨 수로 그 많은 적들을 상대하시려고요?]

도훈도 그 부분을 가장 우려했다.

PK단이 아닌 민간인은 상대가 안 된다는 발언의 전제는 1:1 혹은 1:다수의 싸움을 가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 무기를 든 조폭들이 무더기로 덤벼들 경우는 제 아무리 도훈이라도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그건 설사 UFC 세계 챔피언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연장에 쪽수까지 월등한 조직을 상대로 싸워서 혼자 이긴다는 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어쩌지?"

[그러게 말입니다. 일이 너무 커져버린 것 같은데요.]

그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

도훈은 망설이다 더 이상 회피해봐야 답이 없다는 생각에 전화를 받았다.

-여어, 바쁘신가 봅니다?

"······."

도훈이 쉬이 대답을 못하자 민수가 당황하며 물었다.

-이도훈씨 핸드폰 아닌가요?

"전데요."

-아, 맞네. 깜짝이야 전화 잘 못 건줄 알고. 왜 대답이 없으세요?

"운전 중이라 블루투스로 바뀌는 바람에요. 근데 무슨 일이시죠?"

도훈은 민수에게 존댓말을 썼다.

나이가 더 많은 민수가 자신에게 먼저 말을 높이는 것을 의식한 탓이었다.

-아, 다름이 아니고 엊그제 제 동생이 실수를 했다고 해서요.

‘엊그제? 아, 그 덩치랑 민수랑 아는 사이랬지?’

[네. 자기 형님이라고 했었습니다.]

‘설마 그일 때문에 전화한건가?’

"혹시 그 일 때문에 전화하신 건가요?"

-아이고, 진즉 연락 드렸어야 했는데 어젠 시간이 안 나서요. 너무 기분 상해 마십시오. 제 동생이 워낙에 다혈질이라 그렇지 경우는 있는 놈입니다.

"···네."

-혹시 기분 상하신건 아니죠?

"아닙니다. 서로 모르고 그런 건데요."

-하하. 다행입니다. 역시 화끈하시군요. 겸사겸사 안부도 물을 겸 전화했습니다.

"네."

도훈은 계속 말을 아꼈다.

아직 민수가 자신을 떠보기 위해 전화를 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순수하게 안부를 목적으로 전화를 한 것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학교 다니시죠?

"네."

-그때 저희 형님이 제안한 건 한 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무슨 제안이었지?’

[조직에 들어오라는 건 아니었습니까? 한 자리 주겠다고요.]

‘미친. 뭔 놈의 조폭이야. 장차 교사 될 사람이.’

"예 뭐···. 일단 공부만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하긴 대졸도 나쁠 건 없죠. 요샌 저희 쪽 사람들도 평균 학력이 많이 올라갔거든요. 저희 큰 형님 말씀이 사람은 늘 공부해야 한다면서···.

이후로 민수는 계속 시덥잖은 얘기만 했고, 도훈은 적당히 추임새만 넣어줬다. 민수는 도훈이 통화를 불편한다고 생각했는지 눈치를 보더니 이내 작별인사를 했다.

-바쁘신가 보네요. 다음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언제든 일있으면 부담없이 연락 주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도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 이상한데?"

[전혀 눈치 챈 느낌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치? 민수가 이렇게 연기력이 좋은 타입은 아닌 것 같은데."

단순히 도훈을 떠보려고 했다면 굉장힌 수준의 연기였다.

하지만 그가 기억하는 민수는 배우 뺨치게 잘생겼지만, 굉장히 솔직 털털하며 남자다운 성격이었다.

[이번에도 주인님이 헛다리 짚으신 것 같습니다만···.

최소한 번개가 석산파나 민수에게 밀고를 한 건 아닌 것 같네요.]

"근데 왜 뜬금 없이 전화를 해?"

[말한 대로 어제 일 때문에 사과하려고 그렇겠죠. 어쨌든 자신의 친한 동생이 주인님께 결례를 범한 셈이니까요.]

"흐음. 그럼 대체 뭐지?"

확인을 통해 김양이나 번개가 배제되었다.

적어도 대흉과는 둘다 무관하다는 결론이었다.

[혹시 조소연과 관련된 일은 아닐까요?]

"조소연?"

[박차돈 건이 아니면 남은 가능성은 그것 뿐이니까요.]

"내가 조소연을 만난다고 악운이 최악으로 뜬다고? 그럴 일이 있나?"

도훈은 계속 고민해 봤지만, 조소연을 만나는 것과 자신의 불행 사이에 어떤 연관 관계도 찾을 수 없었다.

그녀와 관계되었던 김변은, 당시 현장에서 체포되어 여러 죄목으로 기소가 된 상태. 특히 조소연은 그 뒤로 집까지 옮기고 대포폰마저 없애버렸기 때문에 김변과 더는 엮일이 없었다.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구만."

[어쨌든 박차돈 건은 아니라 다행입니다. 결론은 앞으로 조소연양만 조심하면 액운을 피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건 그런데, 대체 소연이 나에게 무슨짓을 하면 내가 횡액을 맞는다는 걸까?"

[그건 저도 모릅니다. 점괘는 길흉화복을 점칠 뿐 구체적인 내용까진 알려주지 않으니까요.]

"이러니까 너무 궁금해지는데? 그냥 저번 싸이판에서처럼 한 번 맞부딪혀봐?"

[네? 조소연 양을 다시 만나러 가시겠다고요?]

"그때도 결국 화를 복으로 바꾸었잖아. 위기를 맞딱뜨려서 기회로 삼는 게 상책이기도 하고."

[신중하셔야 합니다. 그때 위기를 잘 넘겼다고 해서, 이번에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으니까요.]

"이지 선다 스킬을 써볼 수도 있잖아? 내가 무슨 짓을 했을 때 대흉이 뜨는지 직접 확인해 보면 될 거 아냐?"

[이지선다는 무적의 스킬이 아닙니다.]

"무슨 뜻이지?"

[양 패가 모두 최악이라면 결국 위기를 피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어떤 선택을 해도 결론이 바뀌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음···. 이해가 잘 안 되는데?"

[가령 주인님이 이미 카드패 두 장을 받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중 높은 패를 꺼내면 상대를 이길 수 있는 게임이라고 가정하고요.]

"어."

[주인님은 둘 두 확인해서 더 높은 것을 꺼낼 수 있습니다. 그게 이지선다 스킬이고요.]

"그렇지."

[문제는 이미 주어진 패는 아무리 이지선다 스킬이라도 바꿀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하필 주어진 패 두 개가 가장 낮은 패 두장일 확률도 존재하니까요.]

"으흠. 무슨 말인지 알겠어."

[제가 볼 땐 위기가 어떤 내용인지 확실치 않을 땐 일단 피하고 보는 게 가장 좋습니다. 36계도 어쨌든 전략 중 하나죠.]

"그래. 일단 오늘은 그럼 집으로 가야겠다."

도훈이 갓길에 정차된 차를 출발시켜려고 할 때였다. 한 여자가 차로 다가오더니 반대편 보조석 창문에 얼굴을 대고 한참 쳐다보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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