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9. 2학년2학기-14-
"아이고, 됐다. 무슨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여자애한테서·
··."
"머리에 피가 왜 나요? 생리를 머리로 하는 것도 아니고."
"···뭐?"
창범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예상보다 소연의 입담이 걸걸했던 것. 물론 외모만 봐도 순진하리라는 생각은 ‘1’도안 들었지만 다 큰 여대생이 생리니 어쩌니 하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은 생각도 못해본 그였다.
"흠흠, 나는 흡연실 청소 좀 하러."
옆에서 흐뭇하게 지켜보던 대근이 자리를 피해 주었다.
둘만 남게 된 창범이 머쓱해 하며 말했다.
"암튼, 난 그런 조언 필요 없다고."
"에헤, 모쏠 탈출 할 수 있게 해드린다니까요?"
"얻다 대고 자꾸 모쏠이래?"
"아니예요? 난 맞는 것 같은데?"
자꾸 도발해 오는 소연에 창범은 어쩔 줄 몰라했다.
‘아씨, 어떻게 알았지? 내가 아직까지 모쏠이라는 걸···.
’남자가 스물다섯까지 동정이면 마법사가 될 수 있다는 말처럼 진짜 창범은 스물 다섯 이후로 신비한 능력을 얻게 됐다.
그가 최면능력을 각성한 것이 바로 스물 다섯의 생일이었던 것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지만, 각성 이후 PK단에 소속된 그는 몇 년째 고된 일을 하며 여자를 사귀지 못했다. 물론 그가 가진 최면 능력을 발휘했다면 여자를 꼬시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처음 그가 각성을 인지했을 때 시험 삼아 사람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해 본 일이 있었는데,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시킬 수 있을 정도로 파괴적인 능력이었다.
하지만 본성이 착했던 창범은 능력의 사용을 극도로 자제했고, PK단 입단 이후로는 플레이어를 색출하거나 처단할 때를 제하면 능력 사용을 통제 받았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 여자를 꼬시진 않았던 것이다.
"뻘소리 말고 라면이나 드셔. 뭐 먹을래? 내가 쏠게."
창범은 소연과 단둘이 마주보기 부담스러웠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카운터로 들어가 컵라면을 골랐다.
"국물 없는 걸로 아무 거나요."
"오케이."
창범이 비빔면 컵을 고르는데 소연이 등뒤에 대고 덧붙였다.
"물은 저도 많거든요."
"커컥!!"
놀란 창범이 사레가 들린 것처럼 헛기침을 내뱉었다.
‘뭐, 뭐야?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창범은 여태껏 모쏠이긴 했지만, 소연이 방금 색드립을 쳤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원래 저렇게 발랑 까진 애였나? 알바할 땐 전혀 티를 안내더니···.’
창범은 소연이 보여주는 색다른 모습에 당황했으나, 괜히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웠다. 컵라면에 끓은 물을 붓고 다시 테이블로 가져오는데 소연이 턱을 괴고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내 옷에 뭐 묻었냐?"
"아니, 아저씨도 이렇게 보면 기럭지는 괜찮은데 말이죠."
"기럭지?"
"키가 몇이에요?"
"179 ."
"몸매가 늘씬해서 그런지 훨씬 커보이네. 어디가선 180넘는다고 해요."
"뭔 소리야? 179라니까. 신검에서도 179였는데. 정확해."
"에이 진짜 말귀를 못 알아 듣긴. 179나 180이나 한 끝차이니까 좀 올려서 말하라고요. 그래야 나중에 오빠가 여자 사귀게 되면 여친이 오빠 180넘는다고 자랑할 거 아니에요."
"무슨···. 그런걸 굳이 거짓말까지?"
"쯧쯧. 이러니까 여자친구가 없지. 내가 볼 땐 오빠는 그 꾸질꾸질한 유니폼만 안 입고 다녀도 훨 나을걸요?"
창범이 안전 제일마크가 붙은 유니폼을 가리켰다.
"이거?"
"네. 그게 뭐에요? 노가다 뛰는 거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노가다라니! 유압식 프레스 작업이라고."
"유압 뭐요?"
"공장이란 말이야. 공사장이 아니고."
"그게 그거죠. 막노동이나 공돌이나."
"참나."
창범은 나이도 어린 소연이 자신의 직업을 비하하는 태도를 보이자 열이 받쳤다.
‘들어보니 지는 구린 대학 다니면서 PC방 알바나 하는 주제에 나를 까네. 어이가 없어가지고.’
창범은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하려다가 꾹 참았다.
그때 소연이 말했다.
"아저씨. 전 아저씨 직업이 별로라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면 그걸로 충분하죠."
"근데?"
"제 말은 사람은 이미지라는 게 있잖아요."
"이미지?"
"첫눈에 딱 봤을 때 여자들이 마음에 들어하는 거죠. 기름 때 묻은 공장 유니폼 입고 돌아다니면 어느 여자가 첫인 상을 좋게 보겠냐는 거죠."
"그게 바로 나잖아? 설마 거짓으로 포장하란 말이야?"
"아휴, 답답이. 진짜 말귀를 못 알아 듣네."
소연은 라면이 불기 전 스프를 넣고 젓가락으로 저으면서 말했다.
"오늘은 아저씨가 컵라면 쐈으니까 내가 공짜로 어드바이스 해줄게요. 잘 들어요."
"웃기고 있네."
"진지한 얘기니까 잘 들어보라고요. 솔직히 속물같은 여자들은 남자 외모나 직업 많이 따지긴 해요. ‘사’짜 붙은 직업 좋아하고 기왕이면 번듯한 대기업이었으면 좋겠고. 차도 외제차면 더 좋고."
"그게 니 조언이야? 나보고 좋은 회사 취직해서 뚜벅이 대신 외제차 끌고 다니면 여자들한테 인기 많을 거라고?"
"아니요!"
"그럼?"
"제 말은 아저씨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라는 거 죠. 제가 말했잖아요. 그런걸 따지는 여자애들도 있는데, 그런 애들은 어차피 속물같은 애들이니까 어차피 논외라고요. 아저씨가 공장 다니는 사람이건, 집에 재산이 얼마 없건 그런거 신경 안쓰는 여자들도 훨씬 많아요."
"······."
"근데, 그래도 옷은 평소에 단정하게 입고 머리 스타일도 적당히 정리 좀 하면서 최대한 깔끔하게 다니라는 거죠.
누가 직업 속이래요? 아저씨 직업에 당당하면 충분해요."
"흠···."
창범은 의외로 진지한 조언에 소연을 조금 달리보았다.
‘발랑 까진 앤줄 알았더니 또 그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창범은 순간 소연의 머릿속을 들여다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꾹 참았다. 사실 그가 여자를 진지하게 안 만나는 이유도 그런 점을 우려한 것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알고 싶어지고, 알고 싶어지면 머릿속을 들여다 보고 싶어진다.
문제는 창범이 바로 그런 것이 가능한 능력자였던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꿰뚫어 버릴 수 있는 능력. 그것은 어찌보면 일종의 저주에 가까웠다.
좋든 싫든 그 사람의 바닥까지 볼 수밖에 없게 되므로.
"아셨죠? 다음엔 옷부터 바꿔요? 정 뭐하면 제가 직접 코디라도 해줄테니까."
"참나. 내가 너한테 별 소릴 다듣네."
"왜요. 얼른 모쏠 탈출해야죠. 나혼자 산다 출연하려고 그래요?"
"남이사 혼자 살든 둘이 살든 신경 끄시고."
"기왕이면 둘이 좋죠. 셋도 뭐, 나쁘진 않고."
"야!"
점점 선을 넘는 발언에 창범이 확 일갈했다.
"진짜 어린놈의 자식이 못하는 말이 없어. 혼난다, 너?"
창범은 버럭 화를 냈다가 민망했는지 담배를 챙겨 들고 흡연실에 들어갔다. 청소를 하고 있던 대근이 그를 보더니 말했다.
"좀 친해졌나? 요새 어린애들은 라면 먹으면서 친해지는 거라며?"
"누가 그딴 소릴해요?"
"그렇다던데? 막 집에 라면 먹고 가라고 한다면서."
"대장까지 왜 그래요?"
"내가 뭐 인마?"
"하여간···. 아오, 빡치네."
창범이 담배를 꺼내 물더니 뻐끔뻐끔 연기를 내뿜었다.
그때 카운터에 손님이 오자 대근이 헐레벌떡 나왔다. 자기가 없으면 소연이 손님을 봐야 하는데, 퇴근한 알바생에게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갑니다!"
대근이 나가고 창범이 혼자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라면을 다 먹은 소연이 흡연실로 들어왔다.
"뭐냐?"
창범이 급히 담배를 재떨이에 비비고 연기를 손으로 휘저었다. 괜히 간접흡연을 하게 될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창범에게 말했다.
"나도 한 대 줘봐요."
"뭐?"
"안 가지고 왔으니 줘보라고요."
"너···. 담배 피웠냐?"
"일할 땐 안 피웠는데 지금은 어차피 퇴근했잖아요? 왜요, 여자는 담배 피우면 안 돼요?"
"아, 아니···. 그건 아닌데."
창범이 떨떠름해 하면서 담배를 건넸다.
"불도요."
"그, 그래."
난데없이 흡연실에서 같이 맞담배를 피우게 된 창범이 뻘쭘하게 물었다.
"난 너 비흡연잔줄 알았는데."
"원래부터 폈어요. 일하니까 참은 거지. 손님한테 냄새나잖아요."
"아···."
창범은 소연이 담배를 손가락에 끼우는 자세만 보고도 그녀가 골초라는 걸 깨달았다.
‘와, 진짜 의외네. 내 생각보다 훨씬 까졌을지도.’
창범은 아까 소연이 농담처럼 내뱉은 드립이 정말로 드립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면 좀 이상한게 저렇게 예쁜애가 동네 피씨방에서 말없이 알바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근의 말에 따르면 소연이 온 뒤로 예쁜 알바생 얼굴 보려고 남자 손님들이 부쩍 늘었다는데, 그렇다고 소연이 얼굴값을 하면서 일을 태만히 하거나 알바비를 더 받는 것도 아니었다.
‘거참, 알 수 없는 여자애네.’
창범은 거듭 소연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민간인에게는 절대 스킬을 쓰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하긴. 제가 좀 주제 넘었네요."
"뭐가?"
"아까요. 아저씨 패션 지적한거며···. 죄송해요."
"아니야."
"저도 바람 맞은 처지에 누가 누굴···."
소연이 씁쓸한 표정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남자친구 말이야?"
"남자친구는 아니에요."
"아니라고?"
아니라는 말에 창범은 살짝 설렜다. 그러다 문득 스스로의 감정에 다소 놀랐다.
‘남자친구 아니라는데 내가 왜 좋아하지?’
"네. 근데 아저씨 올해 몇 살에요?"
"나? 스물 아홉."
"비슷하겠는데."
"엥? 나랑?"
창범은 남자친구가 아니라는 말보다 그 말이 더 놀라웠다. 자기랑 비슷하면 이십대 후반이나 삼십대 초반이라는 소린데 이제 막 스물인 소연과 만난다는 얘기였다.
‘와, 씨. 뭐냐. 존나 부럽네. 나이도 나랑 비슷하면서 이런 어린애랑···.’
"아마 그럴거예요. 서른쯤 됐나 안 됐나?"
"잘생겼나 보네? 그 정도 나이차에도 좋아하는 걸 보면."
창범이 넌지시 찔렀다.
"아니요."
"아니야?"
"별로예요. 솔직히 말하면 얼굴은 못 생겼다고 봐야죠.
아니 못생겼어요. 처음 봤을 땐 진짜 무서웠거든요."
"무서워? 무섭게 생겼다는 거야?"
"네."
"으음···."
창범은 들으면 들을수록 의아했다.
나이차도 많아, 남자친구도 아니야, 심지어 무섭게 생겼기까지.
대체 무슨 연유로 소연이 그 남자를 좋아하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바람맞았다고 저렇게 아쉬워 하는 걸 보면 거의 일방적인 짝사랑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아하! 혹시 남자분 직업이 대기업? 아니면 의사?"
창범이 아까 소연이 운운한 남자의 조건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모든게 단박에 이해가 됐다.
"아뇨. 사채업 하는거 같던데."
"에엥?"
창범의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했다.
듣고보니 멀쩡한 직업도 아니었다. 멀쩡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3류 건달에게나 어울리는 직업이었다. 흔히 사채업자라면 일수 가방에 화려한 옷을 입은 양아치가 연상되는 것처럼.
‘억, 어쩌면 소연이 쟤···.’
창범은 순간 나쁜남자 콤플렉스라는 말을 상기했다.
여자 중에는 유독 나쁜 남자만 만나면 맥을 못 추는 사람이 있는데 소연이 혹시 그런 과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 것이다.
‘맞네. 아니면 저렇게 예쁘고 나이도 어린애가 뭣하러 3류 건달 같은 애한테 매달리겠어? 와, 씹 취향은 각양각색이라지만 별일이 다 있네.’
"몰라요. 직업도 잘 모르겠고. 사실 이름도 정확하지 않아요. 그냥 모든 게 다 거짓말 같아요."
"아니, 잠깐. 그런 남자를 왜 만나는데 그럼?"
"왜요?"
"니 말대로면 위험한 사람 아니야? 혹시 돈 빌렸니?"
"네? 푸흡-. 뭐래. 그런 거 아니에요."
소연은 괜히 더 깊이 말했다간 자신의 과거까지 들추게 될까봐 말을 아꼈다. 게다가 모쏠이 분명해 보이는 창범에게 속궁합 얘기를 꺼내봐야 이해도 못 할것이라고 생각했다.
"암튼 그런게 있어요."
"뭔데? 너 혹시 약점 잡혔어?"
창범은 두 번째 가능성을 떠올렸다. 사채업자인 놈에게 빚을 지면서 뭔가 말 못할 약점을 잡힌 것이다. 그래서 예쁜 소연이 질질 끌려다니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창범이 너무 진지하게 물어오는 통에 소연이 웃으며 되물었다.
"왜요? 진짜면 아저씨가 해결이라도 해주게요?"
"말 만해. 내가 처리해 줄테니까."
"네?"
소연은 창범의 눈빛이 매섭게 바뀌자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가 평소에 보던 창범은 나잇 값도 못 하고 자주 피씨방에 놀러와서 사장인 대근과 투닥거리는 백수같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은 정말로 뭔가 힘을 숨긴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뭐, 뭐지? 왜 저렇게 사람이 진지해? 장난치면 안 되겠네.’
소연은 괜히 순진한 창범이 오해하지 않도록 태도를 바꿨다.
"아니에요. 농담한 거예요. 괜히 말했네."
"···농담 맞지?"
"그, 그렇다니까요. 왜 그래요 무섭게? 진짜 시키면 사람이라도 죽일 것처럼."
"······."
창범도 자신이 오버했다는 걸 깨닫고 투기를 거두었다.
일반인에게 능력자의 포스를 함부로 보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하하, 내가 사실 법사 만렙이거든."
"네?"
"우리 서버 PK에선 알아준다고."
"뭐래 진짜. 이러니까 아저씨가 여자친구가 없는 거라니까?"
소연이 어이없어하며 흡연실을 나갔다.
창범은 씁쓸한 표정으로 혼자 남아 중얼거렸다.
"진짜 알아주는데···. PK 하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