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214화 (1,181/2,000)

1197. 2학년2학기-12-

* *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지하실.

공간의 한 가운데서 끙끙거리는 사내의 신음이 들려온다.

"흐읏···. 크흣···."

사내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거렸다. 지금 토해내는 비명이 죽기 직전 쏟아내는 마지막 숨결처럼 보였다.

"흐, 흐으, 끄으읏!"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선 사내의 신음과 다른 소리가 섞여 나왔다. 찰싹거리는 그것은 살과 살이 부딪힐 때 나는 음탕한 소리였다.

"하아! 하아! 좋아, 조금만 더! 하아!"

찰싹찰싹!

지하실 입구 밖에서 담배를 피우던 두 남자 중, 나이가 많은 대머리 쪽이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난 저럴 때마다 미호한테 정떨어지더라. 애는 참 착한데···."

사내의 말을 받은 이는 날카롭게 생긴 젊은이.

잘생긴 것은 아니지만, 어딘가 모르게 눈빛이 매서운 인상이었다.

"착해요? 몇 백년 묵었는지도 모를 구미호가? 아이고, 세상에 착한 사람 다 뒤졌나 보네."

"창범아, 말 조심 해. 안에 다 들리겠다."

"미호가 기 빨아 먹을 때 남의 말 신경 쓰는 거 봤어요?

젠장, 빨리나 좀 끝내지 더럽게 오래도 끌긴."

창범이라 불린 사내는 몹시 불만어린 표정이었다.

그것이 연타로 피운 담배가 바닥에 수북이 쌓일 만큼 긴 시간을 기다려서인지, 아니면 평소엔 자기랑 티격태격하던 미호가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는 상황이 못 마땅해서인지는 본인도 알 수 없었다.

나이든 사내, 대근은 지친 기색으로 바닥에 그냥 주저 앉아 버렸다.

"에라, 모르겠다. 끝나면 어련히 나오겠지."

"앉지 마요. 바닥 더러워요."

"됐어 인마. 그냥 엉덩이 툭 털고 일어나면 되지."

"누가 아저씨 아니랠까봐."

"너도 곧 아재야 인마. 낼 모레 서른인 새끼가 무슨."

대근의 말에 창범도 벽에 등을 기대고 따라 앉았다.

"아씨, 나이는 쓸데없이 처먹어 가는데 맨날 이 고생이라니. 지부장님은 후회 안 해요?"

뜬금없이 물어오는 창범의 질문에 대근이 대답을 망설였다.

"···뭐?"

"아니, 이 일요. 또 야간 알바한테 부탁하고 나온 거죠?

걔도 처음 볼 땐 싸가지 밥 말아 먹은 줄 알았더니 은근 착하네. 갑자기 시간 바꿔주기 짜증 날 텐데."

"소연이 걔 착하더라. 일도 빨리 배우고, 얘가 싹싹한 맛이 있어."

"근데 말 돌리지 말고요. 솔직히 후회하시죠?"

"자꾸 무슨 후회 말이야?"

"이게 뭐냐고요. 일은 일대로 고되지, 생활은 생활대로 엉망이지. 우리가 뭔 부귀영화를 바란 것도 아닌데 맨날 플레이어 잡으려고 개고생만 하잖아요."

"창범아···."

"아니, 막말로 까놓고 얘기해 보자고요. 저번 달에 그 누구냐, 어디 IT기업 사장이라는 사람. 그 사람 재산이 얼마였는지는 알아요? 주식 지분 팔아서 가지고 있던 현금만 2000억이었어요. 씨팔, 우린 만원 한 장 못 받았는데."

창범의 말이 선을 넘는 다는 생각에 대근이 말렸다.

"인마. 우리가 강도냐? 남의 재산을 왜 탐내?"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고요. 플레이어들은 받은 능력 가지고 떵떵거리고 사는데 왜 우리만 이렇게 거지같이 살아야 하냐고요."

그때 지하실 안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들려왔다.

고통에 허우적대던 사내가 쏟아낸 단말마의 비명이었다.

창범은 그 소리를 들으며 소름끼친다는 듯 몸을 떨었다.

"봐요. 우리가 하는 일이 저런 거라고요. 멀쩡히 잘 살고 있는 플레이어 색출해 처리하고, 미호 늙을까봐 기빨아 먹으라고 던져주는 그런."

"이 새끼가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참 다 못한 대근이 성을 내자 창범도 움찔 놀랐다. 평범한 PC방 사장인 대근은 맨손으로 콘크리트 벽도 부술 수 있는 괴물이었다. 최면 능력자인 창범과 물리적인 능력면에서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아씨, 뭐요?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살짝 쫀 창범이 다시 들이대자 대근이 한숨을 푹 쉬더니 차분하게 설득했다.

"PK단 선서 읊어봐."

"갑자기 그건 왜요?"

"읊어 새끼야. 지부장 명령이니까."

창범은 불만어린 표정으로 개겨보았지만, 주먹을 쥐고 있는 대근이 무서워 겨우 입을 열었다.

"하나, 우린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거 봐. 첨에 입단할 때 분명히 선서 했지? 근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아니, 그냥 제 말은···."

"그러니까 인마. 우리가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 짓 하냐고. 너도 알고 있잖아. 우리가 왜 플레이어를 처단해야 하는지."

"······."

창범은 할말이 많은 듯 했지만 꾹 참았다.

대근이 꼰대처럼 계속 설명했다.

"플레이어란 신의 이름을 빙자해 세상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존재야. 그들이 발휘하는 놀라운 이능에는 결국 그에 상응하는 반대급부가 따르는 거라고. 누군가 강한 행운을 끌어다 써버리면, 지구 반대편에서 다른 누군가는 최악의 불행을 맞이 한다는 소리야."

"그거야 알죠···."

"놈들은 쉽게 말해 엔트로피를 급격히 증가시켜. 너도 학창시절 잠만 쳐 자지 않았으면 들어라도 봤겠지? 열역학제2 법칙말이야."

"알죠. 놈들이 세상의 무질서도를 가속시키는 존재라는거.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니 만큼 없애야 한다는 거."

"그걸 아는 놈이 왜 그래?"

"억울해서요."

"뭐가?"

"최소한 놈들은 우리한테 잡히기 전까지는 부귀영화를 누리잖아요. 신의 대리자라는 미명으로 자신들이 무슨 짓을 벌이는 지도 모르면서 떵떵거리며 살잖아요."

"왜? 우리도 똑같이 할까? 힘도 자제하지 않고 맘대로 폭주해 버려? 우리가 플레이어 새끼들이랑 다를 게 뭐야 그럼? 우리가 힘을 쓰도록 허락 받은 이유는, 결과적으로 우리의 행위가 엔트로피의 증가를 낮추는 방향이기 때문인 거야."

창범이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의문을 말했다.

"그럼 우리 PK단의 존재 목표는 플레이어 때문이라는 거에요?"

"뭔 소리야 갑자기?"

"아니. 세상에 플레이어가 모두 사라지면, 그들을 처단하는 PK단도 쓸모 없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완전 악어와 악어새같은 공생관계도 아니고."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어차피 신이라고 불리는 작자들은 플레이어가 사라지면 또 다른 플레이어를 만들어 낼 테니까. 올해 우리가 처단한 플레이어만 몇이냐?"

"올해요? 봄에 둘, 여름에 둘 4명?"

"그치? 매년 숫자가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 좁은 서울 바닥에서 우리 관할에 있는 플레이어를 계속 잡아 죽이고 있는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그렇다니까. 아마도 놈들이 신이라 부르는 작자들은 분명 개체수 조절하듯 플레이어의 숫자를 통제하고 있는 거라고. 마치 정해진 시간축에 따라 무질서도를 증가시키려는 듯이 말이야."

두 사람이 한창 바닥에 앉아 떠들고 있는데 지하실 철문이 끼익하고 열렸다.

"두 사람은 무슨 할얘기가 그렇게 많은거야?"

은발의 머리 색을 가진 젊은 여자는 사람을 홀릴 듯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창범은 은발로 변한 그녀의 머리색을 보고 물었다.

"대체 얼마나 빨아 드셨길래 머리털까지 바뀌었을까나?"

"원래 순수한 정기를 받으면 이렇게 돼. 아마 백발로 변하면 조심해야 할걸?"

"왜? 그땐 구미호가 사람이라도 되는 거야?"

미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비밀!"

잠시 후 다시 평범한 머리색으로 돌아온 미호가 긴 머리를 고무줄로 묶으며 말했다.

"이번엔 사체처리 좀 수월할 거야. 내가 거죽만 남기고 쏙 빨아 먹었거든."

대근이 지하실의 조명을 켜더니 의자에 묶인 채 말라 비틀어진 미라를 들여다 보며 말했다.

"어우야, 진짜 무슨 껍데기만 남겼네."

"저게 훨 낫죠?"

"그렇긴 하지. 근데 어떻게 저렇게 만든거야? 설마 뼈까지 씹어 먹은 거야?"

"일반인은 안 되지만 플레이어는 가능해요."

"오호. 신기하구만, 암튼 수고했어. 덕분에 일손 덜었네."

"뭘요. 저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으으, 괴물."

"너 그러나 누나한테 혼난다?"

"누나는 무슨, 몇백살 묵은 할망구 주제에."

"확 이게 씨."

"야야! 나 얼른 피씨방 가서 교대해 줘야 한다고. 그만 좀 투닥거리고 마무리 부터하자."

라텍스 장갑을 손에 끼우던 대근이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 * *

"여깄습니다, 행님."

도훈이 차에 타 기다리고 있는데 번개가 직접 마중을 나왔다.

"찾으셨던 물건 맞죠? 손 안 대고 그대로 챙겨 왔습니다요."

"뭐하러 직접 나왔어? 밑에 애들 시키지."

번개가 파리처럼 손을 비비며 말했다.

"에이, 행님이 신신당부하신 일인데 얼라들 시킬수야 있나요."

도훈은 번개가 건네준 USB를 받아 들더니 차량 콘솔박스에 챙겼다.

"그래. 아무튼 수고했어."

도훈이 다시 차를 출발시키려는데 번개가 차창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왜? 뭐 할 말있어?"

번개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행님. 한가지 여쭙고 싶은게 있어서요."

"뭔데?"

"불편하시면 대답 안하셔도 됩니다."

"말을 해 이 사람아. 감질나게 하지 말고."

"저···. 박회장은 왜 담그시려는 겁니까?"

"담그다니? 박차돈이 무슨 젓갈이냐? 담그게?"

"아니 그게 아니고···. 박차돈이 석산파에도 줄을 대신건 아시죠?"

"줄을 대?"

번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속사포처럼 입을 열었다.

"행님. 제가 행님 시키신 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 해드린건 아시죠?"

"알지."

"저도 말단이긴 했지만, 한 때 석산파 출신이었고 제가 믿고 따르던 민수 행님과 친분이 있으셔서 도와드렸던 것 도요."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똑바로 말해봐."

"행님. 저는 행님이 박차돈을 젓갈로 담그든 시멘트에 넣어서 바다에 던져버리든 하등 상관없습니다요. 한데, 민수 행님이 이 사실을 아시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곤란해?"

"박회장도 이 바닥에선 잔뼈가 굵은 놈이거든요. 아마 석산파 보스랑도 친분이 있을 겁니다. 쉽게 말하면 보호비를 내는 암묵적인 동맹관계란 말입니다. 근데 행님이 박회장을 작업했다? 그러면 민수행님의 입장이 굉장히 난처해 진다는 거죠."

"흐음."

도훈은 번개로부터 들은 이야기로 골치가 아파졌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박회장을 건드리면 민수가 속한 석산파도 따라 움직일 거다?"

"조폭들은 의리로 삽니다 행님. 다른 말로 하면 체면을 구기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약속한 게 있으니 분명 지키려고 할 겁니다요."

"음···. 너 이야기 누구한테 했어?"

"네?"

"방금 나한테 했던 말. 석산파 식구나 혹은 민수한테 한 적있어?"

"아, 아뇨."

번개는 뭔가 낌새를 챈 듯 말을 아꼈다. 만에 하나 도훈이 자신을 입막음 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든 것이었다.

도훈이 말없이 주머니를 뒤적이자 최번개가 움찔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칼이라도 꺼낸다면 차창 가까이 붙어있다가 일격에 당할수도 있었다.

"뭘 쫄아 새끼야. 라이터야 인마."

도훈이 꺼낸 것은 금장 라이터였다. 도훈이 이어 담배를 물려는데 손에서 라이터가 떨어졌다. 차 밖으로 떨어진 라이터를 최번개가 잽싸게 주웠다.

"여깄습니다 행님."

"마, 니 불 한번 붙여봐라."

도훈이 갑자기 사투리를 쓰자 최번개가 당황했다.

‘원래 경상도 출신이었나?’

최번개가 별 생각없이 라이터 뚜껑을 젖히더니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 순간.

번개의 눈빛이 몽롱하게 변하더니 손에 든 라이터를 그대로 떨어뜨렸다. 도훈이 빠르게 라이터를 낚아챘다. 잠시 후 번개가 정신을 차리자 도훈이 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 해, 행님?"

"너 뭐하냐?"

"아, 그렇지. USB."

번개 재빨리 품을 뒤졌다. 하지만 USB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당황하며 말했다.

"어? 분명 여기에 넣어놨는데?"

"뭐야? 흘렸어?"

도훈이 다그치자 최번개가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 아니 분명 여기에···."

번개는 옷에 달린 주머니란 주머니는 모두 까서 뒤져봤지만, 도무지 USB를 찾을 수가 없었다. 망각의 라이터로 도훈에게 USB를 건넨 기억이 새까맣게 삭제된 탓이었다.

도훈이 흥분하면서 차밖으로 내렸다.

"뭐야? 장난 하는 거지? 진짜로 없어졌다고?"

"아···. 아니 그게···."

"설마 너."

도훈이 자신을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이자 번개가 넙죽엎드렸다.

"아닙니다, 행님. 진짜로 빼돌린 거 아닙니다요. 그게 뭔지도 모르는데 제가 어떻게 그렇겠습니까?"

"이 새끼 진짜 그게 어떤 건 줄 알고!"

도훈이 길길이 날뛰자 번개는 더더욱 면목이 없어졌다.

다른 것도 아니고 도훈이 신신당부하는 바람에 혹시나 몰라 스스로 건네주기 위해 나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만나기 직전에 잊어버리다니!

"죄, 죄송합니다 행님. 너무 작아서 어디 흘린 것 같습니 다요. 분명 어딘가 떨어졌을 겁니다. 어쩌면 그 락커에 빠뜨렸을지도···."

"아, 새끼 진짜! 어떻게 그런 실수를!"

"행님. 제가 이건 목숨걸고 다시 찾아 놓겠습니다요."

"빨리 찾아와 인마! 중요한 자료니까."

"죄송합니다 행님. 애들 풀어서 당장 찾아보겠습니다요."

번개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곧바로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했다. 도훈은 멀리 사라지는 번개를 보더니 여유롭게 담배를 피웠다.

[아니, 왜 최번개에게 망각의 라이터를 쓰신 겁니까?]

‘빚을 지우려는 거야. 입 다물게 있으니까.’

[박회장과 석산파의 관계 말이죠?]

‘그렇지. 번개가 뭘 걱정하는 줄은 알겠는데. 어차피 조용히 처리하면 없는 일이 되는 거거든. 녀석만 입다물고 있으면 돼. 민수에게 괜히 폐끼치면 곤란하니까.’

[주인님이 남자도 신경쓰십니까?]

‘왜? 곁에 두면 손해볼 사람은 아닌데 뭘.’ 담배를 다 피운 도훈은 소연을 만나기 위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소연의 퇴근까지는 1시간여가 남아있었다.

‘시간도 애매한데 그냥 피씨방 가서 데리고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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